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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식 묘
김용식(1897~미상)은 평남 성천(成川) 사람이며, 성천 지역의 부호로 1919년 3·1독립운동에 참가하였다. 군자금 모금 및 전달을 지원하고 대한국민회 성천 지회의 재정부장에 취임하여 동지들을 규합시키고, 독립신문과 등사한 배일 격문을 성천 읍내에 배포하는 등 독립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성천 경찰서원에게 체포되어 징역 1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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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욱 묘
이병욱(1897~1978)은 서울 출생으로, 1919년 3·1독립운동 후 만주로 망명하여 봉천(奉天)과 북경(北京), 상해(上海), 남북 만주의 동지들과의 연락 사무에 종사하였으며, 1920년 무기를 국내로 운반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신의주 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다시 만주로 망명하여 1922년에 조직한 통의부(統義府)에 가담하여 활약하였으며, 1924년 국내로 진입하여 통의부(統義府) 지부를 설치하고, 각 지방의 부호에게 협박장을 보내어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그러나 재차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10년 형을 받고 경성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출옥 후에도 뜻을 굽히지 않고 1932년 10월, 재차 만주로 망명하여 지하운동을 전개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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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기념비(화광중학교)
1919년, 남양주시 화도읍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을 기념하여 세운 비이다. 3월 16일 화도면에서 이달용, 이승보, 이재하, 이택하, 이덕재, 이인하, 김우동, 이덕주, 류인명, 홍순철, 윤태익, 윤준, 구영식은 봉기할 것을 결정하고 연락하던 중 일제에게 발각되어 18일 아침 이재하, 이승보, 이택하는 피검되었다. 그날 밤 답내리 월산리의 주민이 총궐기하여 마석우리 병참 앞에 쇄도한 후 피검인사의 석방을 요구하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앞장서 나갔던 이달용, 손복산, 신영희, 유상규, 이교직은 일제의 무자비한 총검에 순국하였고 이재혁, 윤균, 강덕여, 윤정석, 원대현은 중상을 당했다. 3월 19일에 일제는 또다시 김필규, 이승민, 강선원, 윤성준, 남국우용, 김원석, 권은, 이윤원을 연행하였다. 남양주시에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85년에 독립기념비를 세웠으나, 기념비가 있던 장소가 험난하다는 이유로 1998년 11월에 봉기 발원지인 화광중학교 앞에 3.1운동기념비를 새롭게 다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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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교직 묘
이교직(1882~1919)은 경기도 양주(楊州) 사람으로, 1919년 3월 18일 밤 이달용(李達鎔) 등이 주동한 화도면(和道面) 마석모루(磨石隅)의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만세 시위 계획을 세우다가 발각되어 체포된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마석모루에 있는 헌병 주재소 앞에서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만세 시위를 전개하던 중 일본 헌병의 발포로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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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성 의병 전투지
김연성(1870~1909)은 1907년 9월 창의하여 동년 12월까지 경기도 양주·적성 등지에서 부하 30~40명을 이끌고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1908년 1월 13도창의대진소가 결성될 때, 김연성은 진동창의대장(鎭東倡義大將) 권중희(權重熙)의 휘하에서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서울진공작전이 무산된 뒤에는 1908년 1월 이강년 의진에 합류하여 의병 소모관을 역임하였으며, 1909년 1월부터는 관동창의원수부의 중군장이던 이은찬의 휘하에서 활동하였다. 이리하여 김연성은 1909년 1월부터 동년 4월 이은찬이 체포될 때까지 경기·강원도·황해도 일대에서 일본군 헌병분견소 습격 및 군자금 모집 등의 의병 활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1909년 11월 29일 평양공소원에서 교형(絞刑)을 받아 순국(殉國)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8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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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제환 묘
정제환(1878~1956)은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났다. 1908년 일제의 침략이 더욱 심해지자, 정제환은 연기우(延基羽) 의병 부대에 들어가 경기도 연천과 삭녕(현 경기도 연천군 북부 지역) 일대에서 의병 투쟁을 전개하였다. 같은 해 음력 9월 삭녕군 서면에서 동료 의병 수십 명과 함께 포목상으로부터 포목 수십 점을 확보하였으며, 그해 12월에는 1,500냥의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군자금 모집 활동을 계속하던 정제환은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1909년 4월 17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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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두환 묘
정두환(1880~1942)은 1907년 1월 종질(從姪)인 정용대(鄭用大)의진에 들어가 파주(坡州)·양주(楊州) 등지에서 동지를 규합하여 각 의병진과의 연락 임무를 담당하였다. 이어 같은 해 11월에는 13도창의군(十三道倡義軍)에 합세하여 활동하였으며 연기우(延基羽)의진과 연합하여 일군과 교전하였다고 한다. 그 뒤 1910년 7월경에는 정용대 의병진에 속하여 동료 의병 5명과 함께 양주·적성(積城)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금하였고, 9월에는 홍원유(洪元有)의 부하가 되어 동료 8명과 함께 군자금 모금 활동을 벌이다 붙잡히고 말았다. 그리하여 1910년 9월 26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소위 강도죄로 징역 5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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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성 추모비
김연성(1870~1909)은 1907년 9월 창의하여 동년 12월까지 경기도 양주·적성 등지에서 부하 30~40명을 이끌고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1908년 1월 13도창의대진소가 결성될 때, 김연성은 진동창의대장(鎭東倡義大將) 권중희(權重熙)의 휘하에서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서울진공작전이 무산된 뒤에는 1908년 1월 이강년 의진에 합류하여 의병 소모관을 역임하였으며, 1909년 1월부터는 관동창의원수부의 중군장이던 이은찬의 휘하에서 활동하였다. 이리하여 김연성은 1909년 1월부터 동년 4월 이은찬이 체포될 때까지 경기·강원도·황해도 일대에서 일본군 헌병분견소 습격 및 군자금 모집 등의 의병 활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1909년 11월 29일 평양공소원에서 교형(絞刑)을 받아 순국(殉國)하였다. 본 비에는 의병에 투신한 부친 김병기를 비롯하여, 김연성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활동한 김병응, 김병주, 김병시, 김병원의 공적도 언급되어 있다. 강릉김씨 의병 6분을 비롯한 동향 출신 의병의 호국정신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강릉김씨 판윤공파 동두천 종중에서 1995년 8월 27일 건립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8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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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항길 동상
한항길(1900-1979)은 ‘한민족의 복을 일으켜 세우라’는 ‘흥리’(興履)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이후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키운다’는 의미의 몽당(蒙堂)이란 호와 함께 항상 길하라는 의미로 광복 후에 개명하여 '한항길'로 불렸다. 한학에 조예가 깊은 조부 밑에서 국가와 민족을 유교적 가치관과 정의감을 배운 한 선생은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에 참여, 시민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행진을 주도하다 경찰에 체포돼 3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그는 옥중에서도 독립을 향한 의지를 놓지 않았고, 이때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키운다’는 의미의 몽당(蒙堂)이란 호를 얻게 됐다. 선생은 또한 3.1운동에 참여한 공훈으로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 받았으며,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됐다. 1999년 10월 1일엔 부천시를 빛낸 사람으로 선정됐으며, 2002년 6월 10일에는 부천 중앙공원에 선생의 추모공원이 건립 되기도 했다. 감옥에서 나온 한항길 선생은 교육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절실히 느꼈고, 교육자의 길을 선택해 1928년까지 교편을 잡았다. 한 선생은 1945년 독립 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본명을 ‘흥리’ (興履)에서 ‘항길’(恒吉)로 개명했는데, 여기엔 ‘대한민국이 항상 길하라’라는 민족적 염원과 국가의 발전에 헌신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한항길 선생은 6.25전쟁 후 나라의 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해서는 산업체와 숙련된 기술자가 필요하다는 판단아래 1958년 소사공업기술학교(현 부천대학교의 전신)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1978년, 한항길 선생은 그의 교육 철학을 보다 널리 전파하고 많은 학생들에게 양질의 교육을 제공하고 위해 한길학원을 설립해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이듬해 3월, 그 노력의 결과인 부천대학교가 문을 열게 되는데, 안타깝게도 선생은 개교 2개월 만에 병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한항길 선생의 큰 뜻을 담고 태어나 부천을 대표하는 대학으로 자라난 부천대학교에선 현재 4개 계열(공학계열, 인문사회계열, 자연과학계열, 예체능계열) 27개 학과에서 1만여 학생이 수학 중이다. 기술인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한 사립 전문대학인 부천대학교 내에 1993년 8월 10일 체육관 겸 강당인 몽당기념관이 준공되었으며, 설립자인 몽당 한항길의 실천사상인 ‘바른마음’, ‘바른생각’, ‘바른행동’을 의미하는 정심운동(正心運動0에서 유래한 이름의 정심관은 몽당기념관 1층에 위치하고 있다. 정심관에는 몽당 한항길의 독립정신과 실천사상인 정심사상이 온 세상에 퍼지는 모습을 형상화한 추모 조형물과 선생의 사상을 멀티쇼로 상영하는 기념관, 몽당 한향길 선생의 일대기와 부천대학교의 미래 비전을 보여주는 영상을 상영하고 있는 영상실 등이 있다. 그 외 부천대학교 내에는 한항길의 본교 건학정신인 ‘사람다운 사람이 되자’ 유훈비가 있고, 몽당도서관 1층에 있는 정심관에는 부천대학교 설립자이자 독립운동가인 몽당 한항길 선생의 동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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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만세시위지(계남면사무소)
계남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부천군 계남면 주민들이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한 곳이다. 경기도 계남면에서도 1919년 3월 24일에 독립 만세 시위가 벌어졌다. 이날 만세 시위에서 계남면 주민들은 면사무소를 습격하여 면사무소의 집기를 부수고 각종 서류를 불태웠다. 이 서류들은 민적부, 과세 호수대장, 주세 수입 수납부, 연초 판매 수 납부, 묘지 사용료 원부철, 역둔토 신고철 등으로 대부분 주민을 수탈하려는 목적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날 시위로 면사무소는 기능이 마비되었고 한동안 인근 민가를 빌려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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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동상
유일한(1894-1971)은 1926년 ‘건강한 국민만이 주권을 되찾을 수 있다.’는 신념으로 민족 기업 유한양행을 창립하고, 부천시에 근대적 제약공장과 유한대학을 설립하였다. 1971년 76세를 일기로 영면하면서 개인 재산 전부를 사회에 환원하였다. 평생을 참 기업인, 교육가, 독립운동가, 그리고 사회사업가로서 위대한 족적을 남긴 높은 뜻을 기리어, 2000년 3월 1일 부천을 빛낸 인물 유한양행 창업주 유일한 박사상을 부천시에서 건립하였으며 부천중앙공원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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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천규 구 묘
박천규(1902-1967)는 평북 선천(宣川) 사람으로, 1919년 9월 30일 독립청년단(본부 : 안동현(安東縣))의 의주지부 조직에 가담하여 동지 10여 명을 규합하는 한편 독립운동자금을 모연하였는데, 1920년 4월 초 이 사실이 탄로나 일경에게 체포되어, 동년 6월 29일 신의주지청에서 소위 제령(制令) 7호 위반이란 혐의로 징역 5개월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 후 경성제대 의학부를 졸업하고 의사로서 의료활동에 종사하였고 1943년 오산중학교(五山中學校)에서 교의(校醫)로 근무하면서 청소년들에게 애국정신을 앙양하기 위한 계몽 활동을 하다가 동년 8월에 정주(定州)경찰서에 체포되어 다시 옥고를 치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