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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성 묘
이정성(1878-1948)은 경기도 양주(楊州) 사람으로, 1919년 3월 14일과 15일에 걸쳐 와부면(瓦阜面) 일대의 독립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그 진행을 주도하였다. 3월 14일 시위 군중을 동원하여 송촌리(松村里)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벌이고 와부면 일대를 행진하였으며, 이튿날 이른 아침에도 송촌리와 부근 동리 주민 1백여 명을 송촌리에 모이게 하여 태극기를 선두에 세우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덕소리(德沼里)로 행진하는 등 독립만세 시위를 주동하다가 체포되었다.그해 7월 5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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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선사, 부평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봉선사·부평리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봉선사 승려들이 독립 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선언문을 제작한 곳이다. 1919년 3월 29일에 봉선사 승려 태허(김성숙), 지월(이순재), 완수(강완주) 스님과 약종상(약재를 파는 장수)였던 김석로가 봉선사에서 조선 독립단 임시사무소를 설치하여 시위의 전개와 방침을 논의하고 선언문 200여 장을 제작하였다. 이들은 선언문을 진접면 일대에 배포하고 30~31일에 걸쳐 부평리 광릉천에서 독립 만세 시위를 벌였다. 이 사건으로 태허 스님을 비롯한 4명은 전원 체포되었으며, 9월 11일에 고등법원으로부터 각각 1년~1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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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릉천 3.1운동 만세 시위지
광릉천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부평리 주민 100여 명이 만세 시위를 벌인 곳이다. 1919년 3월 29일에 부평리에 사는 이재일(1875-1965)은 '주민 일동이 광릉천에 모여서 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촉구하는 내용의 격문을 받았다. 그는 즉시 주민들과 격문을 돌려 읽고 대책을 논의하여 3월 31일에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하였다. 당일 시위에는 100여 명이 광릉천에 집결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으나, 일제 헌병에 가로막혀 해산하였다. 시위를 주도한 이재일은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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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접 3.1운동기념비
1919년 3월 30일 남양주 진접 주재소 앞 광릉 천변에 1,000여 명이 모여 만세를 부르던 중 이순재, 김석로, 김성암, 강완수 등 무수한 인원이 일경에게 체포된 1차 만세운동에 이어, 3월 31일 역시 광릉천 자갈밭에서 100여 명이 모여 만세를 부르다가 이재일, 최대봉, 박석몽, 최대복, 유희상, 이흥록, 최영갑, 양삼돌 등 주민이 다수 체포된 2차 만세운동이 있었다. 그 외에 금록리에서도 13명의 청년이 주동이 되어 400여 명이 모여 만세운동을 벌이다 체포되었다. 진접 3.1운동 기념비는 1919년 3월 13일부터 31일까지 진접읍(당시 진접면 부평리)를 비롯해 평내동(당시 미금면 평내리)와 와부읍·조안면(당시 와부면) 등에서 총 22회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한 남양주 주민들의 애국충정을 되새기고 후손들에게 거룩한 귀감으로 남겨주기 위해 남양주시에서 시민의 이름으로 1999년 5월 20일에 세웠다. 그러나 진접중학교 외곽에 방치되고 말았고, 잊힌 진접 3.1운동을 알리는 기회를 마련하기 위해 2019년 12월 11일 진접중학교 정문 안으로 본 비를 이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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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현공립보통학교 동맹 휴학지
장현공립보통학교 동맹 휴학지는 일본인 교사의 민족 차별 행위에 대항하여 학생들이 동맹 휴학을 단행한 곳이다. 당시 장현공립보통학교 6학년 담임 교사였던 우에무라 사다요시(上村定吉)는 1종 교사인 자신과 달리 조선인 교사들은 2종 교사이기 때문에 자격이 없다는 차별적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나아가 여기에 대해 질문한 학생에게 욕설을 퍼부었으며, 평소 지도 방식 또한 성실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결국 불만이 폭발하여, 1926년 5월에 장현공립보통학교 6학년 전원은 민족 차별에 항거하고자 동맹 휴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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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내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평내리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평내리 주민 150여 명이 만세 시위를 벌인 곳이다. 1919년 3월 13일에 평내리 이장인 이승익은 조선 총독이 배부한 만세운동 확산 방지 안내문을 주민에게 읽어준다는 구실로 100여 명을 소집하여 이들과 함께 만세 시위를 벌였다. 다음 날에도 주민 150여 명이 만세를 부르며 면사무소를 향해 행진하였으나 일본 헌병의 제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옛 양주 지역에서 첫 만세 시위를 주도한 이승익은 징역 10개월, 우보현, 이석준, 김영하, 정기섭, 이보영은 각각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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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기념비
1993년 3월 1일 남양주시 화도읍 답내리 555(월산교회 내)에 화도 3·1운동을 주도한 김필규 목사 외 7명의 독립운동가의 공적과 그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화도면의 독립만세운동은 이달용 등에 의해 추진되었으나, 3월 16일 사전에 발각되어 다수의 주도 인사들이 일경에 피체되었다. 월산교회 목사 김필규(1874~1919) 등은 3월 18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만세 시위를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그날 밤 답내리와 월산리의 주민들이 총궐기하여 마석우리 병참 앞으로 몰려가 피체된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그러자 일본 헌병들은 그들을 향해 무자비하게 총격을 가함으로써 5명이 즉사하고 5명이 중상을 입은 채 시위 군중은 해산되고 말았다. 3월 19일 이른 아침에 일헌병들이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한 많은 사람을 연행해 갔다. 이 일로 김필규도 피체되어, 1919년 4월 25일 보안법으로 징역 6개월 형을 받았고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옥중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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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병분견소 만세시위지
마석우리 현병분견소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화도면 주민 1,000여 명이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한 곳이다. 1919년 3월 18일 밤 10시 무렵에 이달용, 김원석, 이승면, 구영식, 김필규 등은 화도면 월산리와 답내리 주민 200여 명과 이곳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시작하였다. 이후 시위대는 1,000여 명으로 늘어나 헌병 주재소로 향하였다. 이들은 체포된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는데, 일본 헌병대는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발포하였다. 이달용, 손복산, 신영희 등 4명은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김필규는 1919년 4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수정하기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심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옥중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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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선열추념비
국권을 왜적에게 빼앗기고 고종의 승하를 계기로, 기미년 3월 16일 화도면 유지 이달용 외 9인이 모의하여 봉기할 시기와 방법을 결정하던 중 왜경에게 발각되어 3월 18일 아침 이재하, 이승보, 이택하 제위가 피검되었다. 이에 군민들이 마석우리 왜경 병참 앞에 모여 피검된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와 같은 순국선열들의 뜻과 얼을 길이 기리고자 화도읍이 1965년 11월에 이 추념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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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일 묘
김봉일(1905-1983)은 경남 고성(固城) 사람으로, 1920년 수원고등농림학교 재학 중 농촌사회 계발이 독립운동의 기초가 된다고 생각하여 같은 학교 학생 10여 명과 항일결사단체 건아단(健兒團)을 조직하였다. 수원군 부근에 여러 개의 농민야학을 설립하여 농민들을 교육하고,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1920년에는 '조선인에 대한 조선 농촌 개발'이라는 주장에 동조하여 일본 동경에 있던 조선농우연맹(朝鮮農友聯盟)에 가입하여, 민족농장 건설의 꿈을 키웠다. 일제의 단속을 피하고자 계림농흥사(鷄林農興社), 조선개척사(朝鮮開拓社) 등으로 이름을 바꾸어 민족 농민운동을 이어가던 중, 1928년 9월에 일본 경찰에 체포 및 투옥되어 18개월간 모진 고문을 당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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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수 묘
이아수(1898~1968)는 평안북도 강계 사람으로, 이명은 이아주이다. 정신여학교 3년생으로 1919년 3월 5일 서울 남대문 일대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에 참가, 남대문역에서 학생 및 시민으로 구성된 대규모 시위대에 합류하여 독립기를 내세우고 적포를 흔들면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는 시위 군중과 함께 만세를 연호하며 시가행진을 벌였으며, 이로 인해 일경에 체포되어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과 1920년 2월 2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2005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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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수 묘
이혜수(1891~1961)는 애국부인회(愛國婦人會)를 조직하고 상해(上海)의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와 연락하며 국내에서 군자금을 모집하고 애국지사들의 비밀 연락을 맡아 활동하였다. 1921년에는 혁신단(革新團) 조직,〈혁신공보(革新公報)〉발행, 친일 매국노 처단을 위한 암살단의 주요 회의 장소 제공, 숙소 및 의류, 자금 공급 등 적극 협조하였다. 또한, 1922년 12월 김상옥을 자신의 집에 피신시키고, 비밀 연락과 제반 편의 제공 및 독립운동자금 전달을 도우며, 김상옥의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거사 시 나흘 동안 은닉시켰다. 이로 인해 일경에게 끌려가 체포되었으며, 1923년 12월 징역 1년 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