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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관수 묘
신관수(1884-1922)는 경기도 김포(金浦) 사람으로, 1908년 4월 이후 정용대(鄭容大) 의병장 휘하에서 통진군(通津郡) 교하면(交河面), 풍덕면(豊德面), 강화(江華) 등지에서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벌였다. 그 후 1909년 6월 강화도 고도(高島) 해안에서 선박을 습격하여 군량을 확보하는 등의 활동을 벌이다가 붙잡혔으며, 같은 해 7월 15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소위 강도죄로 징역 7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신관수의 묘는 대곶면에 있었으나 지역개발로 이전하면서 가족 합동 묘의 형태로 조성되었으며, 구 묘비는 오라니 장터 3.1운동 기념공원으로 옮겨졌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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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순 묘
전태순(1896-1963)은 경기도 김포(金浦) 사람으로, 1919년 3월 23일 김포군 양촌면(陽村面)에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하여 격문과 선언문 10여 매를 작성하여 인근 마을 주민들에게 배부한 후, 이날 양곡(陽谷)장터에 모인 수백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전개하다가 피체되었으며, 같은 해 5월 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유죄판결을 받고 공소하여 6월 2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태 90도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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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영 광장, 역사박물관 REMEMBER 1910
이석영 광장과 REMEMBER 1910은 독립운동에 헌신한 이석영 선생 6형제의 애국심과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기억하는 역사 문화공간으로, 특히 전 재산을 바쳐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이석영의 독립정신을 알리기 위해 조성한 복합문화공간이다. 이석영(1855-1934)은 남양주시 화도읍 가곡리 일대 토지 등 전 재산을 처분하여 마련한 40만 원(2021년 현재 가치 2조 원 이상)을 조국 독립을 위해 바쳤는데, 우리나라 무장 항일운동의 산실이자 광복군의 초석이 된 신흥무관학교 조성 및 운영에 사용됐다. 이석영 광장에는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이석영 선생 6형제가 결의를 다지는 모습을 상징하는 표지석과 6개의 돌, 이석영 선생이 만주로 망명할 당시 건넌 압록강을 상징하는 바닥분수가 조성되어 있으며, 역사체험관으로 꾸며진 REMEMBER 1910 역사 전시관은 남양주 출신 독립운동가 102명의 이름이 벽돌에 새겨져 있는 독립의 계단을 비롯하여 역사 법정, 서대문 형무소, 뤼순(旅順) 감옥을 재현한 친일파 수감감옥 체험 공간과 이석영 6형제, 신흥무관학교 등을 다룬 전시시설을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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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영 선산
이석영(1855-1934)은 1855년(철종 6년) 이유승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서른 살이 되던 1885년에 영의정을 지낸 거물급 관료이자 한양 인근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부자였던 친척 이유원의 양자(養子)로 입적되었다. 연로한 양부 이유원은 3년 뒤 세상을 떠났고, 양부의 재산은 대부분 이석영에게 상속되었다. 구한말 10대 부자, 한양 3대 부자로 꼽히던 이유원의 재산을 상속받은 이석영은 자연히 거부가 되었다. 1910년, 완전히 국권을 빼앗긴 뒤인 9월의 어느 날, 회의에서 여섯 형제는 전 재산을 처분해 일가 전체가 만주로 떠나기로 결의한다. 일제의 눈을 피해 헐값에 처분한 재산은 약 40만 원으로, 이 재산의 대부분은 이석영 선생이 소유하던 땅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석영은 많은 재산을 독립군 자금으로 내놨고 그 돈이 씨앗이 되어 서간도 삼원포에 경학사가 창립되고, 신흥무관학교(신흥강습소)가 설립됐으며, 만주로 망명한 독립운동가와 동포들이 안전하게 정착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에게 1991년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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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건 기념비
김중건(金中建, 1889~1933)은 함남 영흥 사람으로 1908년 고향에서 연명(鍊明)학교를 설립하여 교육활동을 하였으며, 1913년 만주로 건너가 건원학교, 도전학교, 덕수학원, 쟈피구학원, 이도구학원, 팔포강학원 등을 설립하여 민족교육에 힘썼다. 1920년 11월에는 만주 안도현에서 대진단(大震團)이라는 독립군 부대를 조직하여 활약하였으며, 1928년 이후에는 만주 지역 동포사회에서 조선민사(朝鮮民社), 농우동맹(農友同盟), 진우회(震友會) 등을 조직하여 농촌운동을 통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33년 3월, 그를 시기하던 공산주의자에 의해 피살되었다. 소래 김중건 기념 사업회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83년 10월 16일 이 비를 세웠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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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상규 묘
나상규(1873-1950)는 1919년 3월 29일 경기도 양주군(楊州郡) 진건면(眞乾面) 오남리(梧南里)에서 주민들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는데, 조선 독립선언의 취지에 찬동하여 동리(同里)에서 주민 수십 명과 함께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어 1919년 5월 9일 경성지방법원과 6월 21일 경성 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 형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상고하였으나 1919년 7월 31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 안정 나씨 대종회에서 종중의 뜻을 모아 묘소에 나상규 선생 독립운동 기념비를 세웠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9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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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부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
와부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와부면 송촌리, 덕소리, 조안리 일대 주민 500여 명이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한 곳이다. 1919년 3월 15일에 이정성, 김춘경, 김현모 등은 송촌리 주민 100여 명과 함께 이곳에서 시위를 벌였다. 덕소리로 행진하던 과정에서 조안리와 그 부근 주민들도 합류하여 시위대는 500여 명까지 늘었다. 덕소리에서 시위를 주도하던 세 사람이 일본 헌병에 체포되자 시위대는 헌병 주재소를 습격하였다. 이에 일본 헌병이 공포탄을 쏘며 시위대를 해산시키고, 시위 군중 40여 명을 체포하였다. 이정성과 김현모는 1919년 7월 5일에 고등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각각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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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기 묘
김선기(1907-1992)는 서울 종로(鐘路) 사람으로, 1931년 1월에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의 사전 편찬사업에 참여 및 1933년에 〈한글 맞춤법 통일안〉의 제정 발표에 큰 역할을 하였으며, 〈표준말 사정〉과 〈외래어 표기법 사정〉의 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31년에는 조선어 강습회의 강사로 전국을 순회하며 국민들에게 국어를 교육하였고, 1935년 영국 런던에서 열린 국제음성학협회 대회에서 한국어의 조직을 과학적으로 소개하였다.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 사건(朝鮮語學會事件)으로 구속되어 옥고를 겪었으며, 1945년 8·15 광복 후에는 서울대학교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국어 연구에 종사하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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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운규 상
춘사 나운규(1902-1937)는 함북 회령(會寧) 사람으로, 1919년 4월 초순 회령에서 3·1독립운동에 참가하였고, 이후 간도로 건너가 독립군에 투신하였다. 1920년에는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에 가입하여 항일전을 전개하였는데 4명의 동지와 함께 회청선(會淸線) 7호 터널 폭파 및 전선 절단 임무 등 항일전선의 대열에 적극 투신하였으나 1921년 1월 일경에게 체포되어 고향으로 압송되었으며, 1921년 3월 5일 소위 보안법 및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징역 2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영화계로 진출하여 한국 영화예술을 개척하였고, 「아리랑」 등 주로 민족적 성향이 강한 영화를 제작하여 일제히 항일 민족의식 고취에 크게 공헌하였다. 문화체육부 영화진흥공사(현 영화진흥위원회)에서 1995년 4월 20일 춘사 나운규 선생 흉상을 세웠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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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의거 애국선열추념탑
본 탑은 1994년 8월 15일에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 715-1 용진교회 뒤편, 남양주송촌초등학교 앞 근린공원 내에 건립된 것으로서,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에 있는 용진교회를 중심으로 전개된 3·1운동 참가자 및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한 애곡선열추념탑이다. 용진교회 이정성 장로, 김현모, 김정하 등은 경진학원 교사, 교회 청년들과 함께 3월 14일 경진학교에서 사용 중인 일장기로 태극기를 제작했다. 3월 15일 이른 아침부터 이들은 교회 신도와 동리 주민들과 함께 태극기를 앞세우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조안리와 능내, 팔당을 지나, 면 소재지인 덕소리에 다다르니 시위 군중이 500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면사무소 주위를 돌며 시위를 강행했다. 서울에서 출동한 일본 헌병들에게 주동자 이정성, 김윤경, 정일성 등이 현장에서 체포됐다. 이어 13명이 추가 연행되어 실형 선고를 받고 각각 서대문, 원산, 함흥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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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한 묘
이내한(이명 이내안, 1883-1954)은 경기도 양주(楊州) 사람으로, 1919년 3월 15일에 양주군 와부면(瓦阜面) 송촌리(松村里)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일본 군경에 붙잡혀 1919년 4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개월을 받아 공소하였으나 5월 31일 경성복심법원과 7월 5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 형이 확정되어 약 11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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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갑동 묘
이갑동(1896-1939)은 경기도 양주(楊州) 사람으로, 1919년 3월 15일 양주군 와부면(瓦阜面) 송촌리(松村里)에서 주민 100여 명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인근 덕소리(德沼里)를 향해 시위행진을 펴다가 일경에게 붙잡혔다. 같은 해 4월 25일 경성 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개월 형을 선고받고 공소하였으나, 5월 31일 경성 복심법원에서 기각되고, 7월 5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당하여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