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검색
TOTAL. 4004건
-
오라니장터 3.1운동 안내판
오라니장터 3.1운동 만세시위지는 1919년 3월 23일 김포 양촌면, 대곶면민이 만세시위를 벌인 곳이다. 김포지역에서는 1919년 3월 23일 양촌면 오라니장터의 만세시위를 시작으로 5월까지 총 7회의 시위에 5,000여 명이 참여하는 등 만세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김포 만세운동은 서울에서 3·1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귀향한 청년·학생들이 시위를 주도하였다. 양촌면 출신 박충서는 서울에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가 귀향하여 태극기를 들고 오라니장(양곡시장)의 군중 수백명과 함께 만세운동을 벌였다. 박충서의 만세 선창에 박승각, 박승만, 정억만, 안성환, 전태순, 오인환 등이 적극 참여하였다. 한편 대곶면 초원지리의 서당교사 정인섭은 ‘독립만세’를 쓴 태극기를 만들어 임철모와 함께 3월 23일 오라니장(양곡시장) 서쪽에서 군중 300여 명을 이끌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임철모는 거사 후 출동한 용산 헌병대에 체포되었고, 서대문 감옥에 수감되어 많은 고문을 받아 그해 6월에 순사하였다. 이와 함께 거사를 주모하였던 정인섭은 징역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이외에도 박승각과 박승만은 각각 1년의 징역형을 받았으며, 박충서는 2년형을 받았다.
-
3.1 독립만세 궐기장 비
3.1 독립만세 궐기장 비는 1919년 3월 23일 임철모, 박충서, 정인섭 등의 주도하에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김포 오라니 장터를 영원히 기리기 위해 지역민의 뜻을 모아 1998년 3월 23일에 설립한 표지석이다. 김포 양곡 지역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
오라니장터 3.1운동 만세 시위지
김포의 오라니장터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김포군 양촌면, 대곶면 주민들이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한 곳이다. 1919년 3월 23일 오후 2시에 박충서는 박승각, 박승만 등과 함께 장터에 모인 주민 수백 명을 이끌고 시위를 벌였다. 오후 4시에 대곶면 초원지리의 서당 교사였던 정인섭도 임철모와 함께 오라니장터 서쪽에서 시위대 300여 명과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후 임철모는 체포되어, 감옥에서 고문으로 순국하였다. 박승각, 박승만, 정인섭은 각각 징역 1년, 박충서는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
윤영규 집
윤영규(1882 - 1926)는 경기도 김포(金浦) 사람으로, 1919년 3월 29일 김포군 월곶면(月串面)에서 인근 마을인 갈산리(葛山里), 조강리(祖江里) 등의 주민 수백 명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하여, 군하리(郡下里)에 있는 공자묘(孔子廟)와 공립보통학교, 면사무소 앞에서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벌이다가 일경에게 붙잡혔으며, 그해 5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개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92년에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
-
임용우 집
임용우(1884 - 1919)는 경기도 김포(金浦) 사람으로, 1919년 3월 29일 월곶면 갈산리(月串面葛山里), 조강리(祖江里)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덕적면(德積面)에 있는 명덕학교(明德學校) 교사로서 이날 정오경 갈산리에서 만세시행 행진을 벌이고, 오후 2시경 군하리(郡下里) 향교와 공립보통학교와 면사무소를 차례로 행진하였다. 4월 9일에는 재직 중인 명덕학교 운동회를 덕적도(德積島) 해안가에서 개최하여, 여기 모인 많은 학생과 참관자의 앞으로 나아가 독립만세를 선창하는 등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으며, 그해 5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일제의 잔인한 고문으로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된 임용우의 생가이다.
-
윤영규 구 묘
윤영규(1882 - 1926)는 경기도 김포(金浦) 사람으로, 1919년 3월 29일 김포군 월곶면(月串面)에서 인근 마을인 갈산리(葛山里), 조강리(祖江里) 등의 주민 수백 명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하여, 군하리(郡下里)에 있는 공자묘(孔子廟)와 공립보통학교, 면사무소 앞에서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벌이다가 일경에게 붙잡혔으며, 그해 5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개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92년에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
-
임용우 구 묘
임용우는 경기도 김포(金浦) 사람으로, 1919년 3월 29일 월곶면 갈산리(月串面葛山里)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고 1919년 4월 9일에는 덕적도(德積島) 해변에서 명덕학교(明德學校) 운동회를 개최하여 만세를 부르며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등 애국활동을 하다가 징역 1년 6개월 형을 받아 옥고를 치르던 중, 잔인한 고문의 여독으로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
임용우 묘
임용우(1884 - 1919)는 1884년 9월 월곶면 개곡리에서 태어나 창신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로 3년간 봉직한 후, 옹진군 덕적도에 명덕학교를 설립하여 8년간 봉직하였다. 동시에 일제에 항거하며 민족 해방을 계획하였으며 1919년 3월 1일 서울 파고다 공원 독립선언식에 참가한 후, 김포시 월곶면 등지에서 독립만세를 선창하고 시위행진을 주도하며 일본에 저항하였다. 그해 5월 일본군에 검거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 모진 고문 끝에 35세를 일기로 옥사하였다. 서대문 형무소 순국선열 현충사 내에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1991년 8월 15일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
이살눔의 묘
김포시 월곶면 고막리 푸른언덕교회 입구에 있는, 이살눔(이경덕)을 추모하는 기념비이다. 이살눔(이명 이경덕, 1886 - 1948)은 경기도 김포(金浦) 사람이다. 1919년 당시 성서학교(聖書學校) 학생으로 김포군 월곶면(月串面) 고양리(高陽里)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3월 22일 군하리 장터에서 수백 명의 군중들에게 태극기를 배부하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시위행진을 하다 피체되어 징역 6개월 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이살눔은 1948년 8월 13일에 62살을 일기로 숨을 거두었으나 친혈육은 없이 슬하에 양아들 유씨와 며느리가 있었으며 미처 묘소를 챙기지 못하였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김포시 누산교회의 박흥규 목사가 주도하여 기념비를 세운 것이 본 사적이다. 한편 누산교회는 언더우드 선교사가 1904년 세운 교회로 오라리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독립운동가들을 여럿 배출한 김포시의 교회이며 푸른언덕교회는 이살눔 지사의 며느리가 다니던 교회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월곶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
월곶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김포군 월곶면 주민 수백 명이 모여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한 곳이다. 1919년 3월 22일에 임용우, 윤영규, 조남윤 등은 통진 장날 장터에 있던 200여 명의 주민을 모아 시위를 벌였다. 또한 3월 29일에는 조남윤과 당인표 등이 주민 400여 명을 이끌고 향교와 면사무소 앞에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임용우는 4월 9일에 시위를 전개하다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였고 고문으로 옥사하였다. 조남윤도 체포된 뒤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다.
-
백일환 구 묘
백일환(1884 - 1969)은 경기도 김포(金浦) 사람으로, 1919년 3월 22일 김포군 월곶면 군하리(月串面 郡下里)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그 진행을 주도하였다. 군하리 장터에 나아가 3백여 명의 시위군중을 인솔하여 월곶면 사무소로 행진하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으며, 그해 10월 9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소요 혐의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백일환의 묘는 2013년 5월 29일에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1묘역 474로 이장되었으며, 이곳에는 구 묘비가 남아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월곶면민 만세운동 유적비
1919년 3월 22일은 오후 2시경 임용우, 윤영규, 조남윤, 최우석, 이병린 등의 주도로 장터에 있던 약 200여 명의 군중들이 만세시위를 벌였다. 시위군중은 옛 통진읍인 군하리로 행진하여 향교, 보통학교, 면사무소 앞을 차례로 돌며 만세시위를 했다. 이날 군하리 출신 박용희의 주도로 성태영, 백일환, 이살눔은 400여 명의 군중을 이끌고 통진향교, 면사무소, 주재소 등지로 시위행렬을 이끌었다. 성태영은 단 위에 올라가 독립연설을 하고 백일환은 이를 저지하던 일본 순사를 폭행하였다. 또한 이들은 한국인 순사보들에게 만세를 부르라며 민족의식을 고양하였다. 일주일 후인 29일에 다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29일 오전 11시경 마을주민 400여 명이 읍내에 모이자, 조남윤은 당인표 등과 함께 이들을 지휘하여 향교와 면사무소 앞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한편 월곶면의 임용우·최복석은 29일 정오경 갈산리에 모였다가 군하리 공자묘와 공립보통학교, 면사무소에서 만세운동을 벌였다. 이에 앞서 28일 밤 정인교·윤종근·민창식은 마을 주민 수십 명과 함께 마을 인근 함반산 꼭대기에 모여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후 덕적도의 명덕학교 교사였던 임용우는 4월 9일 학교 운동회에서 이재관·차경창 등과 만세운동을 벌이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 받고 옥고를 시르던 중 일제의 가혹한 고문으로 인해 같은 해 5월 10일 옥사하였다. 조남윤, 최우석, 정인교, 윤종근, 최복석, 이병린은 각각 징역 1년, 윤영규는 징역 8월, 이살눔, 정인교, 민창식은 징역 6월을 선고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