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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원 독립운동기념비
조광원(1897 - 1971)은 서울 사람이다. 성공회 신부로 독립자금모집 활동을 벌였으며, 하와이 지부 한국독립당 당원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3년 하와이로 건너간 조광원은 성공회(聖公會) 신부로 선교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한국인 2세들에게 국어를 가르치면서 하와이 한인사회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데 앞장섰다. 또한 성공회 교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를 지원하기도 하였다. 미주지역의 독립운동은 지역 특성상 교민사회의 자치 및 단합을 도모하는 한편 독립운동 자금을 수합하여 중국에서 활동하던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 단체를 지원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또한 미국 정부와 국제기구에 대한 독립외교활동도 활발하게 추진되었다. 이후 그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하와이 총지부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한국독립당 하와이 지부는 애국단의 후신이다. 애국단이 중국지역의 광복전선통일운동에 참가하여 한국독립당을 결성한 데에 따라 하와이에 지부가 만들어졌다. 그는 하와이 한국독립당지부를 이끌어 가며, 중국지역의 특무공작과 한국광복군 편성 등에 경제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다다른 1944년 9월 경, 그는 미해병대 종군 신부로 지원하여 사이판 전투에 참전하였다. 사이판에서 대일 선전공작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일본군에 강제 징용된 한국인들을 구출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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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의병전투지(전등사)
전등사는 이동휘와 이능권의 국권회복 운동을 전개했던 장소이다. 구한국 지방 주둔 군대의 하나인 강화진위대 대장 출신 이동휘는 1907년 7월 김동수·허성경 등의 기독교인을 비롯하여 해산군인 400여 명을 모아 합성친목회라는 이름으로 대규모 반일집회를 열어 일반 군중을 고무시켰다. 또 8월 2일에는 진위대원인 정기우, 지홍윤, 유명규, 김동수 등이 이곳에서 비밀리에 국권회복을 협의를 했다. 이능권은 국정리 출신으로 서울 시위대 장교였으며 군대 해산 후 강화도에 낙향한 후 주민들을 모아 대동창의단을 조직하였다. 친일파 밀정 처단, 강화 전역에서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던 중 1908년 10월 하순 용산 지역에서 출병한 일본군과 정족산 전등사에서 일주일에 걸쳐 전투를 벌였다. 1908년 의병의 항전이 이어지자 일본군은 같은 해 10월 용산 주둔 일본군 6사단 예하의 13연대 70여 명의 정규 병력을 강화로 투입하였다. 10월 30일부터 31일 양일 간 일본군의 공세가 거셌지만 전등사의 이능권(李能權)부대는 화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을 격퇴하여 승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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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순 묘
장명순(1899 - 1950)은 경기도 강화(江華) 사람이다. 1919년 3월 18일 강화군 강화읍(江華邑) 장날에 유봉진(劉鳳鎭)·최창인(崔昌仁)·이봉석(李奉石) 등이 주도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장터에 모인 1만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군청으로 가서 군수에게 독립만세를 함께 부르자고 요구하고 일경에 연행되어 있던 유희철(劉熙哲)·조기신(趙基信) 등의 석방을 위하여 시위 활동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같은 해 12월 1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 90도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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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수, 김남수, 김영구 순국터 비
1907년 8월, 일제에 의한 한국군대(강화진위대) 강제해산으로 강화의병이 일어나자 일본군은 주모자로 장두교회(현 강화중앙교회) 교인 김동수(金東秀) 권사, 동생 영구(永九) 외 그의 4촌 김남수(金南秀) 권사를 추모자로 몰아 체포하였다. 그 이유는 김동수 권사가 기독교 독립운동가인 이동휘(李東輝) 등과 항일민족운동에 앞장섰다는 것과 교회에서 강론할때 민족의 독립의식을 고취시키는 연설을 하였으며, 태서신사(太西新史)라는 서양 역사책을 읽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일본군이 김동수 권사 3형제를 재판을 위해 포승줄로 꽁꽁 묶은 채 서울로 압송하던 도중 더리미 해변에서 일본칼로 즉결처형하는 어이없는 일이 일어났다. 뚜렷한 죄도 없이 재판을 받을 경우 일본군의 무고가 밝혀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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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주 애국지사비
김형주(1898 - 1962)는 경기도 강화(江華) 사람이다. 1919년 3월 18일 강화군 강화읍(江華邑)에서 장날을 이용하여 유봉진(劉鳳鎭)·최창인(崔昌仁)·이봉석(李奉石) 등이 주도한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 그는 장터에 모인 1만여명의 군중과 함께 시위행진을 하며 군청으로 가서 군수에게 독립만세를 함께 부르자고 요구하는 한편 일경에 연행되어 있던 유희철(劉熙哲)·조기신(趙基信) 등의 석방을 요구하면서 일제히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하다가 붙잡혔다. 같은 해 12월 1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5월형과 벌금 20원(圓)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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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어장터 3.1만세운동 기념탑
황어장터 3·1운동 만세시위지는 1919년 3월 24일 부평군 황어장에서 대규모 만세운동이 전개된 곳이다. 황어장은 부평군의 대표적인 장(3, 8일장)으로 1910년대에는 하루 1,000여 명이 운집하는 장이었다. 원래는 잉어를 매매하는 장이 섰던 곳이었으나 일제시기에는 주로 소가 평균 200여 마리씩 거래되었다. 1919년 3월 24일 오후 2시쯤 심혁성이 주도하는 가운데 300여 명이 만세운동을 시작하였다. 만세시위 중 심혁성이 주재소 경찰 4명에 의해 면사무소로 끌려가자 군중은 심혁성의 석방을 요구하며 심혁성을 풀어주었고, 그 와중에 이은선이 일경이 휘두른 칼에 찔려 사망하였다. 이에 분노한 이담을 비롯한 전원순·최성옥·이금산 등 시위대는 면사무소를 에워싸고 밤새 시위를 하였다. 다음날 인천경찰서에서 무장 경찰이 출동하여 총검으로 압박하자 시위대는 해산하였다. 이 사건으로 체포된 심혁성은 징역 8월, 이담 징역 2년, 임성춘 1년, 최성옥과 전원순 징역 10월, 이공우 벌금 20원의 형벌을 받았다. 황어장터 만세운동은 이후 인천지역 만세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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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선 순국지 표지석
이은선(1876 - 1919)은 경기도 김포(金浦) 사람이다. 1919년 3월 24일 부천군 계양면 장기리(富川郡桂陽面場基里) 장날을 이용하여 심혁성(沈爀誠)·이 담(李담)·최성옥(崔成玉) 등이 주동하여 일으킨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이날 오후 2시 장기리 장터에서 3백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는데, 부내(富內) 경찰 주재소에서 이궁희삼차(二宮喜三次) 등 4명의 일본인 순사가 주동자 심혁성을 체포하였다. 이에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순사를 포위하고 심혁성을 풀어 줄 것을 요구하며, 일경을 구타하여 심혁성을 도망치게 하였다. 이 때 일본인 순사는 신변의 위협을 느껴 차고 있던 칼로 선두에 있던 그를 찔러 현장에서 죽게하였다. 그러나 그의 순국은 장기리 일대의 독립만세시위를 더욱 격렬하게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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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광장
김구(1876~1949)는 황해도 해주목 출신이다. 독립운동가이자 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보수정당의 1세대 정치인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안창호, 이승만 등과 함께 지도자 출신 중 최순위권에 손꼽히는 인지도와 영향력을 가진 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동학 농민 혁명과 교육계몽운동에 참여했고, 1919년에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직접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내무총장 겸 노동국 총판, 국무령, 의정원 의원, 국무위원 겸 내무장, 재무장, 군무장을 거쳐 1940년 임시정부 주석에 선출되었고, 1945년까지 주석을 역임하며 임시정부의 지도자 역할을 수행했다. 광복 이후에는 본인은 반공주의자였지만 남북 분단과 남한 단독 정부 수립에는 반대하면서 통일론을 포기하지 않다가 1949년에 서울 경교장에서 반대 세력에 의해 암살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최고 명예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곽낙원(1859 - 1939)은 김구의 어머니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후원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중심적 역할을 한 독립운동가이다. 곽낙원은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나 살면서 지역과 신분에 대한 차별의식을 갖게 되었다. 김구를 낳기 전까지 남편에 대한 애정도 삶의 희망도 별로 없이 김구를 공부시켜 출세시키는 것만이 유일한 꿈이었다. 그러나 김구가 동학에 입도하면서 곽낙원도 반일감정이 싹텄으며, 치하포사건으로 반일의식이 성장하였다. 치하포사건이란 김구가 명성황후의 시해를 복수하고자 1896년 3월 황해도 안악의 치하포에서 일본인 중위 쓰치다[土田壤亮]를 죽인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김구가 감옥에 있을 때 곽낙원은 남편 김순영(金淳永)과 함께 옥바라지를 하였다. 그 뒤 1911년에 김구가 신민회(新民會)에 연루되어 다시 15년형을 받자 구명운동을 했으나 여의치 않자 항일의식도 더욱 커졌다. 한편 곽낙원은 며느리 최준례의 영향으로 독실한 기독교인이 된 김구를 따라 기독교에 귀의하였다. 이에 평안도, 황해도 지역 기독교인들의 반일민족 사상에도 적잖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곽낙원은 1922년 김구가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경무국장으로 활동하고 있을 때 함께 지냈다. 그러나 며느리가 일찍 병사하자 곽낙원은 1925년 12월에 다시 안악으로 돌아와 손자들을 돌보며, 생활비를 절약하여 김구에게 송금하는 등 독립운동을 후원하였다. 일경의 감시를 피해 1934년 3월 다시 손자 둘을 데리고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상하이에 도착한 후 장손 김인을 군관학교에 입교시키는 한편, 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洛陽分校)에서 군사훈련중인 청년 20여명을 돌보는 등 고락을 함께하였다. 제때 식사를 잇지 못할 정도의 곤핍한 생활 속에서도 생활비를 아끼고 생신축하금으로 단총 2정을 구입, 독립운동에 쓰도록 하는 등 별세하기까지 김구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또한 청년들에게 “오늘 신문 읽었나? 왜놈이 또 어데까지 밀고 들어 왔나? 비행기 공습이 심하다지” 등 전황에 깊은 관심을 표했다. 때문에 청년들은 중일전쟁의 전세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팔순 잔치 대신 총보다는 붓으로 일본과 싸우라는 의미에서 50자루의 만년필을 사서 청년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언제나 독립 의지가 꺾이지 않도록 사기를 북돋아 주었던 것이다. 곽낙원은 언제나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사고를 가지고, 임시정부내에서 어른으로서,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해냈다. 손자를 고아원에 맡겨야 할 정도로 생활이 어려울 때는 변절한 독립운동가의 가정을 부러워한 적도 있었으나, 독립에 대한 희망은 버리지 않았으며, 김구와 임정의 독립운동을 한결 같이 지지, 격려하였다. 노년에는 항상 구국기도와 찬송가를 부르면서 어려운 일상을 이겨나갔다. 1939년 4월 26일 평생소원이던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중국 쓰촨성[四川省] 충칭[重慶]에서 병사하였다. 1992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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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만세운동 인천지역발상지비
인천공립보통학교 동맹휴학지는 1919년 인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벌이고, 일본의 연락 보고용 전화선을 절단했던 곳이다. 인천공립보통학교 동맹휴학은 1919년 3월 1일의 독립선언에 힘입은 인천지역의 자발적인 학생운동이다. 인천공립보통학교는 1907년 5월 6일 개교한 인천 지역의 유일한 공립보통학교로, 1919년 3월 6일부터 9일까지 동맹휴학을 벌이고, 일부 학생은 거리로 나와 독립만세를 외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하여 교직원들은 각각 자기 학교의 상황을 경찰에 보고해야 했다. 이에 반발하여 인천공립보통학교 3학년 학생 김명진·이만용·박철준 등은 3월 8일 오후 9시경 학교에 들어가 미리 준비한 전선 절단용 가위로 2층에 가설해 놓은 실내도입 전선을 절단하고 수화기를 박살냈다. 이 일로 인하여 김명진은 수화기 횡령사건이란 죄목으로 1년 6월의 징역형에 처해지며, 이만용과 박철진은 태형 90대의 판결을 받았다. 이러한 인천보통학교 만세운동은 인천 전역에 번지며 7일의 만세운동과 8일의 독립선언서 배포로 이어지게 되었다. 3월 9일 오후에는 기독교도와 청년학생들이 만국공원에 모여 만세를 외치다 일제 경찰에 의하여 강제로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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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운동 100주년 기념비
1919년 3월 1일 서울 종로 파고다공원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한 인천공립보통학교 학생 수십 명은 3월 6일 거리로 나가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3월 8일 오후 인천공립보통학교 3학년생 김명진 이만용 박철준 손창신 등은 우각동(현 동구 금창동)에 있는 학교 건물 2층에 몰래 들어가 전화선을 끊어 경찰서와의 통신을 차단했다. 그전에 일본경찰이 학교 측에 “학생들을 감시하라”고 지시하자 이를 알아챈 학생들이 전화기를 부수고 전화선을 자른 것이다. 가택 침입 및 전신법 위반 혐의 등으로 징역형을 받은 김명진은 일본 경찰 조사에서 “내 나라 독립을 위해 한 점도 부끄럽지 않다”고 단호하게 밝혔다. 휴업에 들어간 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은 인천공립상업학교(현 인천고교) 학생들과 합세해 만세운동을 벌였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동참하는 행렬은 늘어 3월 9일에는 약 300명으로 불어났다. 이날 오후 기독교 신자 등 30여 명이 만국공원(현 인천 자유공원)에 모여 시위를 벌이다 강제 해산됐다. 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동맹휴업은 열흘 가까이 지속됐다. 일경은 학부형 회의를 소집해 주동자 25명을 처벌하겠다고 강경하게 나왔다. 그러나 공립보통학교 전교생 405명 가운데 85명이 다음 날 결석하는 등 항일의지를 드러냈다. 이후 인천 외곽에서도 만세운동은 타올랐다. 3월 13일 인천 남쪽 소래면과 북쪽 계양면에서 주민 수백 명이 각각 소래산과 계양산에 올라 봉화를 올린 뒤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일제는 시위가 번지자 순사대를 증원했다. 강화도 강화보통학교(현 강화초교) 3, 4학년생 100여 명도 3월 12, 13일 이틀 동안 칠판에 태극기를 그렸고 운동장에서 만세운동을 벌였다. 같은 달 24일에는 청년들이 부평장에서 만세를 부르며 면사무소로 달려갔다. 일경이 발포해 사상자가 대여섯 명이 나왔다. 이날 시위에 참가했다가 경찰에 붙잡힌 청년을 데려오기 위해 몸싸움을 하던 이은선 열사는 일경의 칼에 찔려 순국했다. 이들의 숭고한 뜻을 후학들이 기리고 있다. 인천 만세운동이 발원한 창영초교에 만세운동 100주년 기념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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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공립보통학교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3월 인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킨 곳이다. 서울의 3.1운동 소식을 전해들은 인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은 3월 6일 동맹휴학을 단행하고 거리로 나와 만세운동을 펼쳤다. 이튿날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학생들은 하급생들에게 동참할 것을 촉구하였다. 3월 8일 학생들은 시민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며 만세운동을 이어갔다. 이러한 상황이 일제 경찰에 보고되자, 주도 학생들은 학교 전화선을 절단하고 전화기를 부수며 격렬하게 항거하였다. 2002년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인천창영초등학교] 내에 3.1독립만세운동 인천지역 발상지 기념비를 세워 학생들의 자주독립 정신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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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집(운석의 터)
장면(1899 - 1966)은 일제강점기에 교육과 문화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며, 광복 후에는 건국에 기여했고 해방 이후 국무총리, 부통령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본관은 옥산(玉山). 호는 운석(雲石). 출생지는 서울, 출신지는 인천. 해방 이후에 부산세관장으로 재직한 장기빈(張箕彬)의 아들이다. 1925년 맨해튼 가톨릭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가톨릭교 평양교구(平壤敎區)와 서울동성상업학교(東星商業學校) 교장으로 활동하다가 해방 후 정계에 입문했다. 초대 주미대사를 거쳐, 1951년 국무총리가 되었으나 이후 자유당에 맞서 야당 정치인으로 부통령에 당선되기도 했다. 4·19 이후 의원내각제인 2공화국의 총리를 역임했다. 1956년에는 대통령후보였던 신익희가 사망한 민주당의 부통령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 해 9월 민주당전당대회에서 저격당하였으나 경상에 그쳤다. 1957년 미국 시튼 홀대학에서 다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59년민주당의 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 1960년 정·부통령선거에서 대통령후보 조병옥이 선거 1개월을 앞두고 사망함으로써 다시 한번 부통령후보로 선거에 임했다. 3·15부정선거로 인하여 이기붕(李起鵬)자유당후보에게 833만 표 대 180만 표의 차이로 낙선하였다.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의원내각제 하에서 1960년 제5대 민의원 의원에 당선되고, 국회에서 제2공화국의 국무총리가 되었다. 집권 후 민주당의 구파가 신민당(新民黨)을 창당, 이탈해나가는 어려움을 겪었다. 국민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려던 정책이 혼란과 무질서를 초래하여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집권 9개월 만에 실각하였다. 그 뒤 군사정권의 정치정화법에 묶여 연금생활을 강요당하고, 세칭 이주당(二主黨)사건인 반혁명음모사건에 연루,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형집행 면제로 풀려났다. 석방된 뒤 5년간 신앙생활을 하다가, 1966년 6월 4일 지병인 간염으로 사망하였다. 1951년로마 교황청비오12세로부터 성신베스터 훈장을 수여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