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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락 묘
이수락(1899 - 1981)은 경남 울산(蔚山) 사람이다. 그는 1919년 4월 8일 경남 울산군 온양면(溫陽面) 남창리(南倉里) 시장에서 동지들과 함께 군중을 주도하며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온양면 남창리의 만세운동은 광무황제(光武皇帝) 인산(因山)에 참가했다가 3·1운동의 현장을 목격하고 돌아온 이재락(李在洛)이 이수락 등 마을 청년에게 만세소식을 알리면서 추진되었다. 평소 항일의식을 길러오던 이수락은 한학자 이용중(李龍中)의 문하에서 동문수학 하던 이쾌덕(李快德)·이희계(李希季)·이용락(李龍洛) 등과 함께 만세시위에 대한 의논을 거듭하였다. 이러한 때 4월 4일과 5일에 걸쳐 일어난 이웃 하상면(下廂面) 병영리(兵營里)의 만세시위는 이들에게 더욱 용기를 복돋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이수락 등은 4월 8일 남창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4월 7일에는 이용락의 집에서 밤을 세워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거사일인 4월 8일 오후 4시경에 장터에 집결하여 태극기를 장꾼들에게 배포한 뒤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그러자 수백 명이 장꾼이 여기에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위행진을 거행하였다. 이수락은 시위대의 선두에 서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현장에서 일경에 붙잡혔다. 그는 이 일로 1919년 4월 24일 부산지방법원 울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으나, 항소하여 1919년 5월 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로 감형되어 공소하였으나 6월 28일 고등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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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창3.1의거기념비
고종황제의 인산에 참례하고 온 이재락을 통해 서울의 만세운동을 전해 들은 이수락, 이중걸 ,이용낙은 태극기를 제작하여 이일락과 함께 1919년 4월 8일 남창 장날을 기해 의거하였다. 온양 면민을 비롯하여 청량, 온산, 서생, 웅촌, 웅상, 장안 등의 인근 고을 장꾼들이 합세하여 만세의 함성은 산천을 진동시켰다. 그러나 무자비한 왜경은 4인을 무력으로 체포하자 이용락은 일시 피신한 후 광목을 구하여 대한독립만세라고 대서특필한 깃발을 들고 행진하니 고기룡이 받아 들고 선두에 지휘하고 이수락 안병철 김우상 우동진 등이 참가하여 그 기세는 창천을 찌를 듯 하였다. 왜경과 헌병이 고기룡을 무차별 난타하고 이수락 안병철 김우상과 함께 체포하였다. 이용낙은 재차 피신하여 목도 장날에 재기할 것을 도모하였으나 자택에서 검거되었다. 이와 같이 의거를 일으킨 의사들은 갖은 고문과 박해를 받으며 투옥되었으나 잠자고 있던 민족혼을 일깨워 만방에 전했던 순국선열들의 뜻을 오늘날의 귀감으로 삼고자 당시 주재소 자리에 본 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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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락 집
이재락(1886 - 1960)은 경상남도 울산(蔚山) 사람이다.1919년 광무황제의 인산(因山)에 참여하기 위하여 서울에 상경하였다가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한 후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고향인 울산으로 돌아와서 울산의 독립운동을 조직화하여 1919년 4월 8일 남창리(南倉里) 장날을 기하여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일으키는데 주동적 활동을 하였다. 1925년 8월 김창숙(金昌淑)이 중국으로부터 비밀리에 입국하여 내몽고(內蒙古)지방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할 자금으로 20만원 모금을 목표로 활동할 때 이에 찬동하여 1차로 2백원을 1926년 1월경에 제공하고 2차로 8백원, 합계 1천원을 자진하여 군자금으로 제공하였다. 그러나 20만원 군자금 모금계획이 목표에 미달하자 1926년 3월 17일 경상남도 범어사(梵魚寺)에서 손후익(孫厚翼)·정수기(鄭守基) 등과 함께 밀의를 거듭하여 제2차 계획으로서 소액 응모한 부호들에게 거액 응모를 요구키로 결정하고 활동하다가 1926년 3월에 일경에 발각되어 붙잡혔다. 1927년 3월 2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制令) 제7호 위반 및 치안유지법 위반 등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형을 선고받았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인정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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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배 집, 외솔기념관
최현배(1894 - 1970)는 경상남도 울산(蔚山) 사람이다. 1910년 5월부터 3년간 매주 일요일에 개최한 주시경(周時經)의 조선어강습원(朝鮮語講習院)에서 한글과 국문법을 배우고 독립사상을 고취받았다. 1925년에 일본 경도(京都)제국대학 문학부 철학과에서 교육학을 전공하여 졸업하고, 1926년 동 대학원에 수학하는 중에 「조선민족갱생(更生)의 도(道)」를 저술하였다. 이 저서에서 한국민족이 다시 독립하는 방도가 다각적으로 연구되었다. 1926년에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초빙되어 1937년까지 재직하다가 1938년 2월에 안재홍(安在鴻) 등 기독교 청년연합회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자들의 단체인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의 독립사상 고취운동으로 일시 구속되어 조사를 받고 연희전문 교수직에서 강제 해직되었다. 그 사이에 한글 연구에 정진하여 조선어연구회(朝鮮語硏究會)에 가입해서 1929년 107명으로 구성된 조선어사전편찬회(朝鮮語辭典編纂會)에 참가했으며, 1934년 4월에 「중등 조선말본」을 간행하였다. 또한 흥업구락부 운동으로 실직된 기간에 한글연구에 더욱 집중하여 1941년에 그의 대표작 「한글갈」을 완성해서 간행하였다. 1942년 10월에 일제가 민족탄압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어 말살정책을 대폭 강화하고 한글 연구자들을 투옥하기 위하여 만들어 낸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운동으로 구속되어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에서 일제의 잔혹한 고문과 악형을 받았다. 1945년 1월 16일 징역 4년의 선고를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8·15광복을 맞아 출옥했으나 실질적으로 3년간의 옥고를 겪었다. 1945년 8·15 광복 이후에는 미군정청 문교부 편수국장, 한글학회 이사장, 문교부 편수국장, 연희대학교 교수와 부총장, 학술원 회원, 학술원 부회장 겸 종신회원, 민족문화추진위원회 부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한글 연구와 한글 전용운동에 전념했으며, 한글 가로글씨의 실험과 한글기계화 운동도 전개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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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충혼비
삼일충혼비는 울산 병영의 만세운동에 참가하여 순국하였거나 형을 받았던 애국지사를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비이다. 기미년 3월 1일 서울에서 봉기한 독립만세운동을 시작으로 병영에서 천추의 한을 품고 순국한 엄준, 문성초, 주사문, 김응룡 네 분의 투사들과 투옥된 애국지사 스물두분의 업적을 기리며, 극악무도한 일본제국주의의 침략 속에서 겨레의 자유정신을 세계에 선포하고자 우리고장의 청년용사들이 죽음을 무릎쓰고 독립운동을 하던 모습을 길이 후세의 거울로 전하고자, 한글학자 최현배가 글을 짓고 조원규가 글을 쓰고 비에 새겨 서기 1967년 4월 5일 병영삼일사 제건 기성회(현 울산병영삼일사봉제회)가 본 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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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의사 추모비
박상진(1884 - 1921)은 울산(蔚山) 사람이다. 전통적 유가(儒家)에서 성장한 그는 일찍이 한학을 수학하고 1902년에는 허위(許蔿)로부터 학문적 수업을 쌓았다. 그후 1907년부터 1910년까지 양정의숙(養正義塾)에서 법률과 경제를 전공했다. 1910년 판사(判事)시험에 합격한 그는 평양법원에 발령을 받았으나 사퇴하고 1911년 만주로 건너가 허겸(許兼)·손일민(孫逸民)·김대락(金大洛)·이상용(李相龍)·김동삼(金東三) 등의 지사들과 교류하며 독립투쟁의 방략을 모색하였다. 1912년 귀국한 그는 대구(大邱)에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를 설립하였는데 이는 독립운동의 정보연락 및 재정적 지원을 목적한 것이었다. 당시 상덕태상회는 국내의 연락뿐 아니라 이관구(李觀求)가 설립한 만주 안동(安東)의 삼달양행(三達洋行)이나 장춘(長春)의 상원양행(尙元洋行)등 곡물상과 연락망을 구축하며 독립운동의 거점이 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는 1915년 음력 1월 15일 대구 안일암(安逸庵)에서 독립군 지원단체인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을 결성하였다. 이때 조선국권회복단에 참여한 인사들은 주로 대구를 중심한 경상우도(慶尙右道) 지방의 중산층 이상의 혁신유림(革新儒林)들로서, 동단은 곡물상의 상업조직을 통하여 독립군을 지원한 구국경제활동단체였다. 그러나 동단의 인사들은 보다 강력한 독립군 단체를 조직할 목적으로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과 제휴하여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를 결성하였고 그는 총사령(總司令)을 맡았다. 채기중(蔡基中)이 주도한 풍기광복단은 1913년에 조직된 독립군 단체로서 의병적 성격이 짙었고, 이때 국권회복단에서는 박상진 외에 김재열(金在烈)·정운일(鄭雲馹) 등 의병적 인물이 참여했다. 대한광복회는 혁명적 독립운동단체로서 비밀·폭동·암살·명령의 4대 실천강령을 정하고, 일본이 국제적으로 고립될 때 일제히 봉기하여 독립을 쟁취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혁명의 거점으로는 국내 각처에 곡물상을 개설하는 한편 만주의 신흥학교(新興學校) 등과 연결하면서 독립군 양성에 힘을 쏟았다. 한편 이에 필요한 자금은 자산가들의 의연금으로써 충당할 계획이었는데 친일부호들의 비협조로 의연금이 제대로 걷히지 않았으므로 강제모금의 방법을 택하였다. 그러던 중 그는 1916년 무기구입을 위해 만주를 다녀오는 길에 서울에서 붙잡혀 1917년 4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군자금 수합에 더욱 힘을 쏟아 당시 식민적 지주체제에 안주하는 반민족적 친일부호를 처단하는 의협투쟁을 전개했다. 그리하여 그는 대한광복회 명의로 포고문을 작성하는 한편 친일부호 처단의 명령을 내려 채기중·유창순(庾昌淳)·강순필(姜順必)·임봉주(林鳳柱) 등으로 하여금 1917년 11월 경북 칠곡군(漆谷郡)의 부호 장승원(張承遠)을 처단케 했으며 1918년 1월에는 김한종(金漢鍾)·장두환(張斗煥) 등이 주관케 하여 충남 아산군(牙山郡) 도고면(道高面) 면장 박용하(朴容夏)를 처단하였다. 이때 동단의 처단 고시문(告示文)을 붙였으므로 만천하에 대한광복회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일로 인하여 대한광복회의 조직이 1918년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그는 일경에 붙잡혔고, 사형을 선고받아 4년 동안 옥고를 치르다가 1921년 8월 11일 대구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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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청년회관, 신간회 울산지회
1920년 2월 창립된 울산청년회는 강연회 등 각종 사업을 위한 공간이 필요하였다. 이에 회원들의 회비와 지역 유지들의 후원을 받아 총 공사비 6,400여 원을 들여 울산청년회관을 건립하였다. 울산청년회 각 부의 선전 유인물과 신문이 발행되어 1921년 11월 27일 거행된 낙성식에서 배포되었으며, 회관 낙성을 축하하는 가장행렬과 제등행렬이 밤까지 이어졌다. 울산청년회관은 건립 당시 울산공립보통학교 뒷편 언덕에 위치하였다. 2중의 녹색 출입문이 있었으며 화려한 장식을 한 서양식 건물이었다. 건물 바깥에는 실외 행사를 위한 정원도 있었다. 1921년 조선청년연합회 순회강연단이 울산을 방문하여 신축한 울산청년회관에서 강연회를 열었는데 800여 명의 청중이 관내와 관외 정원에 들어찼다는 기록을 통해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울산청년회관 터는 기획재정부가 관리하는 국유지로 부지 면적은 1,042㎡이다. 현재 울산청년회관 터에는 1971년 3·1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으로 지은 삼일회관이 있다. 삼일회관에는 울산향토문화연구회와 대한민국건국회가 입주해 있다. 일제강점기에 울산청년회관은 신간회 울산지회, 울산청년동맹 등 여러 단체의 창립대회와 모임 장소로 이용되었다. 각종 강연회, 무도회, 공연 등이 개최되었으며 울산 최초의 중등교육기관이었던 해영학원과 노동야학의 교사(校舍)로도 사용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제대로 된 실내 행사장이 없었던 울산 지역에서 울산청년회관은 각종 사회 운동과 문화 운동의 중심지였다. 1921년 3월에 울산청년회관이, 1928년 3월에는 신간회 울산지회가 설립된 곳이다. 이곳에서 울산청년회는 각종 강연회·강습·토론회를 열며 민족 계몽활동과 회원교육을 시행하였다. 신간회는 국내 민족유일당운동의 구체적인 좌우합작 모임으로 일제강점기 가장 큰 합법적 결사 단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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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영3.1운동기념비
500년 다져온 병영의 상무정신은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해 병영청년들의 가슴에 정의의 피를 끓였고 청년들은 '결사진충보국' 혈서로 목숨을 걸었다. 그리고 1919년 4월 5일 오전 9시 일신학교(현 병영초등학교) 학생들과 더불어 이 곳 병영초등학교 교정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되어 별링, 곽남양으로 퍼졌다. 조국 광복을 위해 일제에 항거하려는 병영 청년들은 5일에 이어 6월 6일에 다시 만세를 외쳤고, 이에 일인들은 총을 마구 쏘아 네 명이 순국하였고 스물 두명이 체포 및 구금되었다. 순국선열들의 뜻을 기리고자 병영 3.1운동이 시작된 이곳에 본 비를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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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병영3.1만세 순국4열사추모비
울산병영3.1만세 순국4열사추모비는 1919년 4월에 일어난 병영 3.1만세운동에서 순국한 4열사(엄준, 문성초, 주사문, 김응룡)를 기리기 위한 사적이다. 1919년 4월 3일과 5일에 일어난 울산 병영 3.1만세운동은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독립만세운동을 서울 유학중이던 한명조와 이영호로부터 전해들은 병영 청년회 간부들이 3월 3일 박영하의 집에서 궐기를 결의하고 거사를 준비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4월 4일 오전 9시 청년회 회원들은 일신학교(현 병영초등학교) 교정에 모여 학생들을 합류하게 한 후 축구공을 높아 차 올리는 신호로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수백 명이 이에 동참하였으며, 14명이 일본경찰에 붙잡혀 울산 본서로 호송되었다. 4월 5일에는 전일의 거사가 널리 알려져 수천 명의 군중들이 아침부터 일신학교 부근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주동자가 체포되어 강력히 저항하는 군중들에게 일본 경찰은 무차별적으로 발포하였다. 이때 엄준, 문성초, 주사문, 김응룡이 현장에서 숨지고 많은 사람들이 중경상을 입었다. 40여 명이 검거되었고, 시신은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동지들의 손으로 이곳 황방산에 가매장 되었다. 형무소에서 돌아온 그들은 기미계(己未契를) 만들어 4열사의 넋을 달래기 위해 매년 비밀리에 제사를 모셔오다가 1955년 삼일사(三一祠)를 세우고 삼일사 봉제회를 만들었으며, 현재까지 그 뜻을 받들어 오고 있다. 또한 삼일사 봉제회는 2000년부터 매년 4월 이 곳 황방산에서 순국 4열사의 혼을 위로하는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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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제우 유허지 표지석
최제우(1824 - 1864)는 조선 후기 시천주(侍天主)의 교리를 중심으로 한 동학을 창도한 종교창시자이다. 1861년 포교를 시작하였다. 곧 놀라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동학의 가르침을 따르게 되었다. 동학이 세력을 얻게 되자 기존 유림층에서는 비난의 소리가 높아져 서학, 즉 천주교를 신봉한다는 지목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톈진조약 후 영불연합군이 물러가서 조선침공의 위험이 없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민심이 가라앉게 되자, 조정에서는 서학을 다시 탄압하게 되었으므로 1861년 11월 호남으로 피신을 가게 되었다. 1862년 3월 경주로 되돌아갈 때까지의 남원의 은적암(隱寂庵) 피신생활 중 동학사상을 체계적으로 이론화하였다. 경주에 돌아와 포교에 전념하여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는데, 1862년 9월 사술(邪術)로 백성들을 현혹시킨다는 이유로 경주진영(慶州鎭營)에 체포되었으나 수백 명의 제자들이 석방을 청원하여 무죄방면되었다. 이 사건은 사람들에게 동학의 정당성을 관이 입증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신도가 더욱 증가하였으며, 포교방법의 신중성을 가져와 마음을 닦는 데 힘쓰지 않고 오직 이적만 추구하는 것을 신도들에게 경계하도록 하였다. 신도가 늘게 되자 그 해 12월 각지에 접(接)을 두고 접주(接主)가 관내의 신도를 다스리는 접주제를 만들어 경상도 · 전라도뿐만 아니라 충청도와 경기도에까지 교세가 확대되어 1863년에는 교인 3,000여 명, 접소 13개 소를 확보하였다. 이 해 7월 제자 최시형(崔時亨)을 북접주인으로 정하고 해월(海月)이라는 도호를 내린 뒤 8월 14일 도통을 전수하여 제2대 교주로 삼았다. 관헌의 지목을 받고 있음을 알고 미리 후계자를 정한 것이다. 이때 조정에서는 이미 동학의 교세확장에 두려움을 느끼고 그의 체포계책을 세우고 있었는데, 11월 20일 선전관(宣傳官) 정운구(鄭雲龜)에 의하여 제자 20여 명과 함께 경주에서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되는 도중 철종이 죽자 1864년 1월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이곳에서 심문받다가 3월 10일 사도난정(邪道亂正)의 죄목으로 대구장대(大邱將臺)에서 41세의 나이로 참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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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 추모비
박상진(1884 - 1921)은 울산(蔚山) 사람이다. 전통적 유가(儒家)에서 성장한 그는 일찍이 한학을 수학하고 1902년에는 허위(許蔿)로부터 학문적 수업을 쌓았다. 그후 1907년부터 1910년까지 양정의숙(養正義塾)에서 법률과 경제를 전공했다. 1910년 판사(判事)시험에 합격한 그는 평양법원에 발령을 받았으나 사퇴하고 1911년 만주로 건너가 허겸(許兼)·손일민(孫逸民)·김대락(金大洛)·이상용(李相龍)·김동삼(金東三) 등의 지사들과 교류하며 독립투쟁의 방략을 모색하였다. 1912년 귀국한 그는 대구(大邱)에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를 설립하였는데 이는 독립운동의 정보연락 및 재정적 지원을 목적한 것이었다. 당시 상덕태상회는 국내의 연락뿐 아니라 이관구(李觀求)가 설립한 만주 안동(安東)의 삼달양행(三達洋行)이나 장춘(長春)의 상원양행(尙元洋行)등 곡물상과 연락망을 구축하며 독립운동의 거점이 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는 1915년 음력 1월 15일 대구 안일암(安逸庵)에서 독립군 지원단체인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을 결성하였다. 이때 조선국권회복단에 참여한 인사들은 주로 대구를 중심한 경상우도(慶尙右道) 지방의 중산층 이상의 혁신유림(革新儒林)들로서, 동단은 곡물상의 상업조직을 통하여 독립군을 지원한 구국경제활동단체였다. 그러나 동단의 인사들은 보다 강력한 독립군 단체를 조직할 목적으로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과 제휴하여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를 결성하였고 그는 총사령(總司令)을 맡았다. 채기중(蔡基中)이 주도한 풍기광복단은 1913년에 조직된 독립군 단체로서 의병적 성격이 짙었고, 이때 국권회복단에서는 박상진 외에 김재열(金在烈)·정운일(鄭雲馹) 등 의병적 인물이 참여했다. 대한광복회는 혁명적 독립운동단체로서 비밀·폭동·암살·명령의 4대 실천강령을 정하고, 일본이 국제적으로 고립될 때 일제히 봉기하여 독립을 쟁취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혁명의 거점으로는 국내 각처에 곡물상을 개설하는 한편 만주의 신흥학교(新興學校) 등과 연결하면서 독립군 양성에 힘을 쏟았다. 한편 이에 필요한 자금은 자산가들의 의연금으로써 충당할 계획이었는데 친일부호들의 비협조로 의연금이 제대로 걷히지 않았으므로 강제모금의 방법을 택하였다. 그러던 중 그는 1916년 무기구입을 위해 만주를 다녀오는 길에 서울에서 붙잡혀 1917년 4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군자금 수합에 더욱 힘을 쏟아 당시 식민적 지주체제에 안주하는 반민족적 친일부호를 처단하는 의협투쟁을 전개했다. 그리하여 그는 대한광복회 명의로 포고문을 작성하는 한편 친일부호 처단의 명령을 내려 채기중·유창순(庾昌淳)·강순필(姜順必)·임봉주(林鳳柱) 등으로 하여금 1917년 11월 경북 칠곡군(漆谷郡)의 부호 장승원(張承遠)을 처단케 했으며 1918년 1월에는 김한종(金漢鍾)·장두환(張斗煥) 등이 주관케 하여 충남 아산군(牙山郡) 도고면(道高面) 면장 박용하(朴容夏)를 처단하였다. 이때 동단의 처단 고시문(告示文)을 붙였으므로 만천하에 대한광복회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일로 인하여 대한광복회의 조직이 1918년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그는 일경에 붙잡혔고, 사형을 선고받아 4년 동안 옥고를 치르다가 1921년 8월 11일 대구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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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우 공적비
연기우(1865 - 1910)은 일제강점기 강화진위대부교, 동한창의대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일명 연봉렬(延奉烈)·연기호(延基浩). 경기도 삭녕 출신이다. 일찍이 군문에 들어가 강화진위대부교(江華鎭衛隊副校)로 있다가 1907년 8월 한국군이 강제해산되자 덕물포(德物浦)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같은 진위대 부교인 지홍윤(池弘允)이 갑곶(甲串)에서 일본군 1개중대를 깨뜨리고 합류하여 덕물포에서 여러 차례 일본군을 격파하였으나, 증원한 일본군의 강화부 공격으로 패하였다. 다시 의병 60여 명을 소모(召募)한 뒤 동한창의대장(東韓倡義大將)이 되어 연천·적성·삭녕·마전(麻田) 등지에 출몰하며 양주·포천 방면의 강기동(姜基東) 의병부대와 연결하여 여러 곳에서 일본군수비대와 경찰을 공격하였다. 1908년말 원수부13도총대장(元帥府十三道總大將)인 이인영(李麟榮)의 휘하에 들어가 서울 공략작전에 참가하였으나, 양주에서 패한 뒤 창의한북대장(倡義韓北大將)이 되어 다시 의병을 이끌고 고양·연천·마전·삭녕·강화·교동 방면에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 2월에 삭녕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전사자 9명과 피금자 43명을 내고 많은 병기를 빼앗기는 패전을 당하였다. 그뒤 나머지 부하 수십명을 거느리고 안협(安峽)으로 들어가 철원·평강·이천 등지를 전전하다가 5월에 일본군에게 사로잡혔다가 탈출하였다. 그뒤에도 활동을 계속하다가 국권상실 후 일본군에게 잡혀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