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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의병발원 표지석
정미의병은 1907년∼1910년 간에 일어난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칠조약 체결, 군대해산 등을 계기로 전개된 일련의 구국항일무력전의 총칭이다. 해산 군인이 의병에 합류하면서 의병은 규모와 전력 면에서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했다. 유생 이외에 평민·천민 출신 의병장이 대거 등장하는 등 상인·공인·노동자·농민 등 전 계층이 의병항쟁에 동참하였다. 1908년 초에는 전국의병진의 연합에 의한 서울진공작전이 추진되어 동대문 밖 30리까지 이르렀으나 패퇴하고 말았다. 특히 호남에서의 의병항쟁이 치열했다. 대규모 의병항쟁으로서는 마지막 항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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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구 집
신석구(1875-1950)의 호는 은재이며, 일제강점기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항일운동에 앞장선 감리교 목사이자 독립운동가이다.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33세 때 개성 남부감리교회에서 미국선교사 왕영덕(王永德)의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었다. 서울 서대문 밖의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에서 3년간 수학하고 감리교목사가 되었다. 그 뒤 서울·개성·춘천·원산·남포 등지에서 목회하였다. 3·1운동 때에는 오화영(吳華英)·이필주(李弼柱)·박희도(朴熙道)·최성모(崔聖模)·이승훈(李昇薰)·박동완(朴東完)·김창준(金昌俊)·이갑성(李甲成)·함태영(咸台永) 등과 회합,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붙잡혀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신석구는 재판 도중 조선인의 행복과 자유가 점점 증가하고 있지 않느냐는 재판장의 질문에, “조선사람으로서는(일본인과) 동등한 대우를 한다 해도 그러한 것을 희망하지 않는다. 그것은 조선사람으로 하여금 조선정신을 잃어버리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피고는 조선의 국민성을 잃지 않고 있다가 기회만 있으면 조선독립을 계획하려고 생각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도, “항상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다.”고 담대하게 대답하였다. 출옥 후에도 감리교 목사로서 항일운동을 계속하였다. 1930년대에 이르러 감리교단 지도부의 결정에 따라 신사참배를 행하던 분위기 속에서도 천안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검거, 투옥되었다. 석방된 뒤에는 신사가 없는 지역인 평안남도 용강군 신유리 교회에 가서 시무하다가, 1945년 2월 이른바 전승기원예배(戰勝祈願禮拜)를 거부해 용강경찰서에 3개월간 구금되었다. 광복 후에는 북한에서 공산당과 대결, 3·1절기념방송사건과 기독교민주당(基督敎民主黨) 비밀결사사건 등으로 다시 투옥되었다. 1949년에는 진남포에서 반동비밀결사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는 죄목으로 피검,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공산군에게 총살당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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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 동상
유관순(1902 - 1920)은 1916년 지령리 교회에 자주 들르던 샤프(Alice Hammond Sharp, 한국명 史愛理施) 선교사의 추천을 받아 교비 유학생으로 이화학당 보통과에 편입하였다. 이후 서명학(徐明學), 이정수(李禎洙), 사촌 언니 유예도(柳禮道) 등과 함께 기숙사에서 생활하였다. 유관순은 1918년 3월 18일 이화학당 보통과를 졸업하고, 같은 해 4월 1일 고등과 1학년에 진학하였다. 이화학당에서는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이문회(以文會)를 중심으로 오후 3시만 되면 모두 수업을 중단하고, 조국 독립을 기원하는 기도회와 시국토론회 및 외부인사 초청 시국강연회 등을 개최하고 있었는데, 유관순도 회원으로 활발히 활동하였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서거하자 학생들은 자진해서 상복을 입고, 휴교에 들어갔으며, 2월 28일에는 정기모임을 통해 전교생이 적극적으로 만세를 부르기로 결의하였다. 이 결의에 따라 이화학당 학생인 신특실(申特實), 노예달(盧禮達) 등은 파고다공원에서 벌어진 3 · 1 운동에 직접 참여하였고, 당시 고등과 1학년인 유관순은 서명학 · 김복순 · 김희자 · 국현숙 등과 함께 ‘5인의 결사대’를 결성하여, 소복을 하고 기숙사를 빠져나와 대한문 앞에서 망곡(望哭)주1을 한 뒤, 남대문으로 향하는 시위 행렬에 합류하였다. 이후 3월 5일, 학생 연합 시위가 벌어졌는데, 이화학당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정보를 미리 알아낸 학교 측은 교문을 잠그고, 교사들로 하여금 교정 곳곳을 지키게 하였으나, 많은 학생들이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 중 신특실 · 유점선 · 노예달 등은 검거되었고, 교사 김독실(金篤實) 등은 투옥되었다. 이날 유관순도 만세를 부르다가 일경에 붙잡혔으나 곧 석방되었다. 학생들의 시위가 극심해지자 일제는 3월 10일 전국적으로 휴교령을 내렸고, 학교로 갈 수 없게 된 유관순은 13일 기차를 통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 때 고향으로 돌아오는 기차에서 친구들이 기차소리를 듣고, ‘동전 한 푼, 동전 한 푼’ 하는 소리로 들린다고 하자, 유관순은 ‘대한 독립, 대한 독립’ 하는 소리로 들린다고 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한다. 고향에 돌아온 유관순은 부친 유중권과 조인원 등 마을 어른들에게 서울에서의 만세운동 소식을 전하고, 숨겨온 독립선언서를 내놓으며, 병천 시장에서의 독립만세운동 계획을 상의하였다. 유관순과 사촌 언니 유예도는 만세운동에 주민들이 사용할 태극기를 만드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하였고, 1919년 4월 1일, 조인원 · 유중권 · 유중무 등과 함께 병천 시장에서 수천 명이 참여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 사건이 바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이었다. 이날 유관순의 부모를 포함하여 19명이 시위 현장에서 순국하였으며, 30여 명이 큰 부상을 당하였다. 유관순은 주도자로 체포되어 공주교도소에 수감되었고, 이곳에서 공주영명학교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구속된 친오빠 유우석을 만나기도 하였다. 5월 9일, 유관순은 공주지방법원에서 5년형을 언도받았고, 중형을 받은 사람들과 경성복심법원으로 넘겨져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3년형을 언도받았다. 함께 재판 받은 사람들은 모두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일제의 재판권을 인정하지 않은 유관순은 상고하지 않았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유관순은 이신애, 어윤희 등과 함께 1920년 3월 1일 오후 2시를 기해 3 · 1운동 1주년 기념식을 갖고,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3천여 명의 수감자들이 크게 호응하여 만세 소리가 밖으로까지 퍼져나갔고, 만세를 외치는 함성에 형무소 주위로 인파가 몰려들어 전차 통행이 마비되고, 경찰 기마대가 출동하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유관순은 물론, 많은 애국지사가 심한 고문을 당하였다. 1920년 4월 28일 영친왕(英親王)의 결혼 기념 특사령으로 유관순의 형기도 1년 6개월로 단축되었으나, 오랫동안 계속된 고문과 영양실조로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유관순은 18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이화학당은 형무소 당국에 유관순 시신의 인도를 요구하였으나 일제는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이화학당 교장 월터(Miss Jeanette Walter)는 이 사실을 미국 신문에 알려 세계 여론에 호소하겠다고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결국 일제는 해외 언론에 알리지 않고, 장례는 극히 조용히 치러야 한다는 조건을 붙여 시신을 인도하였다. 정부는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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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서울연통부지 표지석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서울연통부(聯通府)는 1919년 중국 상해에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국내와 연락을 취하고, 국내행정을 담당하기 위해 비밀리에 만든 조직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서울연통부 터는 현재 서울특별시 중구 순화동 동화약품의 옛 사옥 자리에 해당한다. 1919년 3·1운동 직후인 4월 13일 중국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이하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이후 임시정부는 임시정부활동의 선전, 독립운동지도, 군자금모집 등의 목적으로 국내에서의 조직기반을 확대하고자 했다. 이에 만들어진 것이 임시정부 직할의 연통부·교통국(交通局) 등이다. 서울연통부는 국내행정을 담당하는 조직으로, 연통제에 따라 국내의 각 도(道)·군(郡)·면(面)에 비밀행정기관을 두어 명령전달·군자금 모집 등을 담당했다. 그리고 교통국은 통신담당기구로 국내외 정보수집과 분석 등을 담당했다. 임시정부는 군자금 마련을 위해 독립공채를 발행하거나 의연금을 거뒀다. 이 자금은 연통부나 교통국 조직망을 통해 임시정부에 전달됐다. 서울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연통부를 설치하려는 시도는 상해에서 파견된 이종욱(李鍾郁)이 1919년 10월에 연건동에서 청년외교단(靑年外交團)의 송세호(宋世浩), 대동단(大同團)의 나창헌(羅昌憲) 등과 수차 회합을 가지면서 태동했다. 이때 화천정 5번지 동화약방 주인이자 독립운동가인 민강(閔橿)이 임시정부와의 통신 및 문서 수발을 담당할 연락장소로 자신의 집을 내놓아 이곳이 서울연통부의 연락거점으로 사용된 것이다. 이후 연통제는 각 도에 확대 설치됐으나, 조선총독부의 감시를 피하여 비밀리에 조직해야 하는 관계로 순조롭지는 못했다. 그리하여 황해도·평안도·함경도는 잘 진행되는 편이었으나, 강원도·경상도·전라도 등지에서는 불가능했다. 연통제는 비밀조직이기 때문에 일제의 감시가 심했고, 활동하다가 비밀이 누설되어 탄압과 수난을 당하는 사례가 많았다. 그 결과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구금된 사람도 많았다. 연통제 활동에 참여한 사람은 교사·학생·전도사·승려 등 직업 및 신분에 관계없이 다양했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심해 연통제는 오래가지 못하고 1921년 후반에 이르러 소멸되고 말았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서울연통부 터는 원래 조선 숙종(肅宗)의 왕비인 인현왕후(仁顯王后)가 태어난 곳이다. 이후 1898년에 동화약방이 들어섰다가 1930년부터 2014년까지는 동화약품의 사옥이 있었다. 현재 해당 자리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서울연통부 터’를 가리키는 표지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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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순 자결터 표지석
이충순(1877 - 1907)은 대한제국기 육군 보병 참위 출신의 의병이다. 수원의 진위대에 배속된 이충순은 1906년 서울에 주둔하였다. 이어 그는 서울시위대 제2연대 제1대대의 견습 참위로 전임되어 군무에 봉직하였다. 한일 강제 병합을 위해 일제가 군대 해산을 감행하였을 때, 그는 서울시위대에 근무하고 있었다. 1907년 8월 1일 서울 시위대의 해산에 항거하여 군인들은 일본군을 상대로 남대문 부근에서 치열한 시가전을 벌였다. 이날 시위대군 전사자는 모두 79명으로, 이충순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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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감관저 표지석
통감관저는 이토 히로부미 등 한국 침략을 진두지휘했던 일본인 통감이 거처하고 집무를 하던 곳으로, 강제병합 이후에는 1939년 경무대(현재 청와대)로 이전할 때까지 총독관저로 쓰이기도 했다. 식민통치의 정점에 있던 사람의 집무 및 주거공간으로 쓰였다는 점만으로도 역사적 의미가 있는 장소이지만 통감관저가 기억돼야 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바로 총리대신 이완용이 1910년 8월22일 데라우치 마사타케 통감을 만나 강제병합을 인정하는 조약에 도장을 찍은 치욕스러운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곳이기 때문이다. 통감관저는 이처럼 나라의 주권을 타국에 넘긴 부끄러운 역사를 되새기게 하는 곳이지만 최근까지 정확한 위치가 어디인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덕수궁 중명전이 지금까지도 외형을 유지한 채 부끄러운 역사의 교훈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과 대비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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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상 의거 터 표지석
김익상(1895 - 1943)는 일제강점기 총독부폭파, 다나카암살사건 등과 관련된 독립운동가이다. 경기도 고양 출신. 평양 숭실학교를 졸업한 뒤 기독교학교의 교사로 근무하다가 서울로 올라와 광성연초공사(廣城煙草公司)의 기계 감독으로 근무하였다. 1920년 만주 봉천(奉天)으로 전근된 것을 기회로 비행사가 되기 위해 비행 학교가 있는 중국 광둥[廣東]으로 갔다. 그러나 중국 내전으로 인해 학교가 폐교되었으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상해로 돌아왔다. 상해에서 전차 회사의 전차 감독이 되어 잠시 일을 보다가 항일 운동에 몸바칠 것을 결심하고 북경으로 가서 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義烈團)에 입단하였다. 1921년 단장 김원봉(金元鳳)으로부터 총독 암살 밀령을 받고 국내로 들어와 전기 수리공으로 변장하고 9월 12일 총독부에 잠입하여 2층 비서과(총독실로 오인)와 회계과장실에 폭탄을 던졌다. 비서과에 던진 폭탄은 불발이었으나 회계과장실에 던진 폭탄은 폭발하였다. 총독부가 폭발로 인해 혼란 상태에 빠진 틈을 이용하여 현장을 빠져 나와 평양을 거쳐 중국으로 무사히 탈출하였다. 1922년 일본의 전 육군대신이며 육군 대장인 다나카[田中義一]가 필리핀을 거쳐 상해에 도착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의열단으로부터 다나카 암살이라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이를 위해 동지 오성륜(吳成崙, 본명 李正龍)과 같이 치밀한 계획을 세워 1차 저격은 오성륜이 담당하고, 만약 실패할 경우를 대비하여 2차 저격을 담당하기로 하였다. 거사 당일인 3월 28일 선편으로 황푸탄[黃浦灘]에 도착한 다나카가 배에서 내려오자, 준비하고 있던 오성륜이 다나카를 향하여 권총을 발사하였으나, 발사 순간 신혼여행차 상해에 오던 영국 여인이 다나카의 앞을 막아섬으로써, 총탄은 영국 여인에게 명중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이 때 계획에 따라 달아나는 다나카를 향하여 폭탄을 투척하였으나, 폭탄마저 불발하여 거사가 실패로 돌아갔다. 그리고 재빨리 현장을 탈출하려고 할 때 중국 경찰이 추격해 오자 공포를 쏘며 주장로[九江路]를 지나 쓰촨로[四川路]로 달아났으나, 즉사한 영국 여인의 남편이 쏜 권총에 맞고 쓰러져 붙잡히고 말았다. 4월 1일 상해 일본 총영사관에서 예심을 마치고 5월 3일 일본 나가사키[長崎]로 압송되어 9월 25일 나가사키지방재판소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았으나, 검사의 공소로 공소원(控訴院)에서 사형이 언도되었다. 그 뒤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누차 감형되어 21년의 옥고를 치루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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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영기념관
이회영(1867 - 1932)는 일제강점기 신민회 중앙위원, 항일구국연맹 의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우당(友堂). 서울 출신. 아버지는 판서를 지낸 이유승(李裕承)이다.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1907년 2월 귀국한 안창호(安昌浩)를 중심으로 4월경 이갑(李甲)·전덕기(全德基)·양기탁(梁起鐸)·이동녕(李東寧)·신채호(申采浩) 등과 같이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고 중앙위원으로 정치·경제·교육·문화 등 각 방면에 걸쳐 활약하였다. 한편, 만주에 독립운동 근거지를 마련할 것을 협의하여 간도 용정촌(龍井村)에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고 이상설(李相卨)을 책임자로 하여금 교포 교육에 주력하도록 하였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릴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이 특사로 파견되자 서전서숙의 경영을 위해 여준(呂準)을 만주로 파견하였다. 그 뒤 1908년 헤이그에서 돌아 온 이상설을 만나기 위해 만주로 찾아가서 앞으로의 진로를 협의한 끝에 국외활동은 이상설이, 국내활동은 자신이 담당하기로 협의하고 귀국하였다. 우선 교육진흥운동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판단, 동지들을 각 학교에 파견하여 교육에 진력하도록 하고, 자신도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의 학감으로 취임, 교육사업에 진력하였다. 1909년 봄 양기탁의 집에서 김구(金九)·이동녕·주진수(朱鎭洙)·안태국(安泰國)·이승훈(李昇薰) 등과 비밀리에 신민회간부회의를 소집하고 만주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할 것을 결의, 유하현 삼원보(柳河縣三源堡)를 후보지로 결정하였다. 1910년 국권이 일제에 의해 강탈당하자 전가족이 만주로 건너가 황무지를 개간하며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매진하였다. 1911년 교민자치기관으로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1912년 독립군지도자 양성을 목적으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 뒤의 新興武官學校)를 설립하였다. 1918년 미국대통령 윌슨(Wilson, W.)의 민족자결주의 제창에 자극되어 국내외에서 독립기운이 활발해지자 오세창(吳世昌)·한용운(韓龍雲)·이상재(李商在) 등과 밀의한 뒤, 고종의 국외망명을 계획하고, 시종 이교영(李喬永)을 통해 고종에게 상주하여 쾌락을 얻었으나, 고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해(上海)에 수립되었으나 의견 차이로 분란이 끊이지 않자 상해보다는 북경(北京)에 체류하며 활동을 계속하였다. 1924년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在中國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중국에 있던 동지들이 상해로 집결하여 조직한 항일구국연맹의 의장에 추대되었다. 1932년 상해사변이 일어나자 행동강령으로 일본군기관 및 수송기관 파괴, 일본요인 및 친일파 숙청, 일본외교기관 폭파 등을 결정하고, 중국국민당과 교섭하여 자금과 무기지원을 확약받았다. 그 해 11월 만주에 연락근거지를 확보하고 지하공작망을 조직하여, 주만일본군사령관 암살을 목적으로 상해에서 대련(大連)으로 향하던 도중, 대련의 일본수상경찰에 잡혀 악독한 고문 끝에 옥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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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석주 의거 터 동상
나석주(1892 - 1926)는 황해도 재령(載寧) 사람이다. 그는 재령 명신학교(明新學校) 2학년을 수료하고 농사일을 하다가 23세때 만주로 건너가서 4년간 군사훈련을 받고 27세때에 귀국하여 황해도 겸이포(兼二浦)에서 표면상 점포를 경영하면서 이면으로는 독립운동에 심혈을 기울였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동지를 규합하여 상해의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조달하는 한편 결사대를 조직하여 한대홍(韓大弘)과 같이 평산군(平山郡) 상월면(上月面) 주재소 일경과 상월면장을 사살하였고 다시 안악군(安岳郡) 친일파(親日派) 부호를 사살한 후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1920년 9월 22일 상해로 망명하였다. 그는 임시정부 경무국 경호원으로 활약하다가 하남성(河南省) 한단군관학교(邯鄲軍官學校)를 졸업하고 중국군 장교로 있으면서 보안육군강무당(保安陸軍講武堂)에 적을 두었으나 이때 봉직전(奉直戰)관계로 퇴학하였다.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한 그는 1926년 4월 천진(天津)으로 가서 김창숙(金昌淑)과 상면하여 김창숙으로부터 조국의 강토와 경제를 착취하는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와 조선은행(朝鮮銀行)·식산은행(殖産銀行) 등을 폭파하여 학정에 시달리는 동포를 구해 달라는 권고를 받고 이를 실행하기로 결심하였다. 동년 12월 26일 그는 중국인 노동자로 가장하고 폭탄과 권총을 휴대하여 지부이통환공사(芝 利通丸公司)의 역부로 가칭하고 천진(天津)에서 상선 융극호(戎克號)에 편승하여 위해위(威海衛)를 거쳐 이튿날 27일 인천에 도착하였다. 그는 28일 오후 중국청년으로 변장하고 동척(東拓)으로 가서 회사의 상황을 정찰한 다음 그 길로 남대문통에 있는 식산은행(殖産銀行) 일반 통용문으로 들어가 대부계 철책 앞에서 폭탄 한 개를 던졌다. 다시 오후 2시 동척(東拓)으로 가서 수위실 책상에서 무언가 쓰고 있던 조선부업협회(朝鮮副業協會) 잡지기자 고목길강(高木吉江)을 사살하고 2층으로 올라가다가 총소리를 듣고 놀라 따라 올라오던 사원 무지광(武智光)을 쏘아 쓰러 뜨리고 토지개량부(土地改良部) 기술과장실로 들어가서 차석 대삼태사랑(大森太四郞)과 과장 능유풍(綾由豊) 등을 저격한 후 폭탄 한 개를 던졌으나 불발되었다. 그는 다시 층계를 내려와 문밖으로 나가 조선철도회사(朝鮮鐵道會社)로 들어갔다. 정문에 들어서자 회사 수위 송본필일(松本筆一)과 마침 이곳에 왔던 천진당(天眞堂) 점원 김정열(金井悅)을 쏜 후 황금정(黃金町) 길거리로 발길을 옮길 때 경기도 경찰부(京畿道警察部) 경부 전전유차(田畑唯次)를 만나 그를 사살하였다. 황급히 출동한 경찰대와 기마대의 추격을 받은 그는 최후를 각오하고 권총 세발을 자신의 가슴에 쏘고 쓰러졌다. 일경은 그를 총독부 병원에 입원시켜 응급치료를 받게 하였는데 약간 정신이 되살아 나는 듯 하였다. 이때 일경이 그의 이름을 묻자 "나석주(羅錫疇)"라 대답하고, "김창숙(金昌淑)과 밀의하였다"는 말을 남기고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일경은 폭탄 두 개, 스페인제 10연발 권총 1정, 탄환 66발을 그 자리에서 압수하였다. 1927년 5월에 동지 이화익(李化翼)이 북경에서 붙잡혀 신의주(新義州)로 압송되자 비로소 그의 의거가 자세히 밝혀지게 되었다. 동월 31일에 그의 장남 응섭(應燮)이 상경하여 사진으로 아버지임을 확인하고 유해를 인도받아 안장하였다. 응섭(應燮)이 백운학(白雲鶴)으로 변성명한 후 감시망을 뚫고 상해로 가서 이 사실을 알리자 상해의 동지들이 이 소식을 듣고 슬퍼하며 그의 추도식을 거행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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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응 기념비
이한응(1874 - 1905)는 대한제국기 한성부주사, 영국, 벨기에 주차공사관 3등참사관 등을 역임한 관료이다. 본관은 전의(全義). 일명 한응(漢膺). 자는 경천(敬天), 호는 국은(菊隱). 경기도 용인 출신. 이경호(李璟鎬)의 아들이다. 1892년 관립영어학교(官立英語學校)를 졸업하였다. 1894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1897년 한성부주사가 되고, 1899년 관립영어학교 교관으로 전출하였다. 1901년 영국·벨기에 주차공사관 3등참사관(駐箚公使館三等參事官)에 임명되어 영국 런던으로 부임하였다. 1903년에는 통훈대부에서 통정대부로 가자(加資)되었고, 1904년 주영공사 민영돈(閔泳敦)의 귀국으로 서리공사에 임명되어 대영 외교의 모든 책임을 지고 활약하였다. 1904년 2월 한일의정서가 강제 체결되어 한국의 독립이 흔들리자, 영국 및 여러 외국과 유리한 입장에서 외교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해 8월 제1차한일협약이 강제로 성립되어 일제가 한국의 주권을 잠식하자, 각국에 주재하는 우리 공사들에게 전신으로 연락, 한국 외교를 위하여 재외사절단이 공동 항쟁을 하도록 토의하였다. 또한 영일동맹의 부당함을 들어 영국 정부에 항의하였다. 그러나 영국 정부가 주영 한국공사관을 폐쇄하는 등 영일동맹을 강화하고 일본이 한국 정부의 주권을 강탈할 음모를 획책하자 이를 개탄하여 1905년 5월 12일 음독자살하였다. 이러한 소식이 후에 국내에 알려져 을사조약 때는 민영환(閔泳煥)·조병세(趙秉世) 등이 순국하는 등 전국 각지에서 원통함을 참지 못해 자살하는 이가 속출하였다. 주영한국공사관 명예총영사 마틴턴의 주선으로 유해는 고국으로 돌아와 경기도 용인에 안장될 수 있었다. 가선대부 내부협판에 추증되었으며, 장충단(奬忠壇)에 배향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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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 동상
이준(1859 - 1907)은 대한제국기 대한협동회 부회장, 국민교육회 회장, 헤이그 특사단 부사 등을 역임한 항일운동가. 애국계몽운동가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성재(性在)·여천(汝天)·선재(璿在). 자는 순칠(舜七), 호는 일성(一醒)·해사(海史)·청하(靑霞)·해옥(海玉). 함경남도 북청 출신. 아버지는 이병관(李秉瓘)이다. 1887년(고종 24) 북청에서 초시에 합격해 1894년 함흥의 순릉참봉(純陵參奉)이 되었다. 1895년 법관양성소를 졸업하고, 1896년 한성재판소 검사보가 되었다. 같은 해 2월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사임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법과를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1898년 독립협회에 가입해 11월의 만민공동회에서 가두연설을 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1902년 이상재(李商在)·민영환(閔泳煥)·이상설(李相卨)·이동휘(李東輝)·양기탁(梁起鐸) 등과 비밀결사인 개혁당(改革黨) 운동을 추진하였다. 1904년 일제가 제1차 한일의정서를 강제체결하고 내정간섭을 자행하면서 침략정책을 강화하자, 이에 대한 반대시위운동을 일으키는 데 주동적 구실을 하였다. 같은 해 일본이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자, 송수만(宋秀晩)·원세성(元世性) 등 다수의 동지들과 함께 대한보안회(大韓輔安會)를 조직해 총무를 맡고 반대투쟁을 전개하였다. 보안회가 일제의 강압에 의해 해산되자 후속단체로 이상설과 함께 대한협동회(大韓協同會)를 조직해 부회장을 맡고, 다시 일본의 황무지개척권 요구를 강력히 반대해 결국 이를 저지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1904년 12월 일제가 친일분자들로 일진회(一進會)를 조직해 매국활동을 시작하게 되자, 이에 대항해 윤하영(尹夏榮)·양한묵(梁漢默) 등과 공진회(共進會)를 조직하였다. 회장이 되어, 반일진회 투쟁을 전개하다가 일제의 강압으로 황해도 철도(鐵島)에 6개월간 유배당하였다. 민영환의 주선으로 석방된 뒤 1905년 5월 윤효정(尹孝定)·양한묵 등과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를 조직해 다시 항일국민운동을 벌였다. 같은 해 평리원 검사를 거쳐 특별법원 검사로 임명되었다.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상동교회(尙洞敎會)에 모인 전덕기(全德基)·최재학(崔在學)·정순만(鄭淳萬)·이동녕(李東寧) 등 다수의 동지들과 함께 을사조약폐기 상소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준이 상소문을 짓고 대한문(大漢門) 앞과 서울 시내에서 일본경찰과 투석전을 벌이며 격렬한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1906년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양성을 목적으로 전덕기·유성준(兪星濬)과 함께 국민교육회(國民敎育會)를 조직해, 회장으로 있으면서 교육구국운동을 시작하고 보광학교(普光學校)를 설립하였다. 또한, 설태희(薛泰熙) 등 동지들과 고향인 함경도의 애국계몽운동단체로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를 조직, 지도해 함경도지방의 교육구국운동의 발흥에 큰 발판을 마련하였다. 1907년 1월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전국운동으로 확대하기 위해 서울에 국채보상연합회의소(國債報償聯合會議所)를 설립하고 소장이 되어 모금운동을 벌였다. 같은 해 4월 양기탁·안창호(安昌浩)·전덕기 등이 중심이 되어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로 신민회(新民會)가 창립되자, 이에 가입해 활동하였다. 같은 해 6, 7월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세계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이 있었다. 이준은 전덕기·이회영(李會榮)·박상궁(朴尙宮) 등의 도움을 받아 고종을 만나 이 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해, 을사조약이 고종의 의사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일본의 강압으로 체결된 조약이므로 무효라는 것을 세계 만방에 선언하고, 한국독립에 관한 열국의 지원을 요청할 것을 제의해 고종의 동의를 받았다. 그리하여 이준은 헤이그특사단의 부사가 되어 1907년 4월 22일 서울을 출발해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정사 이상설과 합류하고, 다시 러시아의 수도 페테르스부르크로 가서 이위종(李瑋鍾)과 합류, 6월 25일 헤이그에 도착하였다. 세계평화회의 의장에게 고종의 친서와 신임장을 전하고 평화회의장에 한국대표로서 공식적으로 참석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했으나, 일본대표와 영국대표의 방해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에 세 특사는 일제의 한국침략을 폭로, 규탄하고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하는 공고사(控告詞)를 작성해 평화회의 의장과 각국 대표에게 보냈다. 또 신문에 이를 공표해 국제여론을 환기시켰다. 신문기자들과 언론들은 세 특사의 활동에 호의적이었으나, 열강의 대표들은 냉담하였다. 이에 격분한 이준은 통분을 누르지 못해 헤이그에서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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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장서비(장충단공원)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한국 유림은 파리에서 열린 세계평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서한을 제출해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떨친 공헌을 한 바, 이를 기념하기 위해 대통령희사금과 국민의 성금 등으로 1972년 10월 서울 중구 장충단공원에 비를 건립하였다. 파리 장서(長書)는 일제의 한국 주권 찬탈 과정을 폭로하고 식민 지배의 불법성과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하여 한국의 모든 계층과 사회 집단이 독립을 열망하고 있음을 국내외에 널리 알렸던 서한이다. 곽종석, 김복한을 비롯하여 유림 대표 137명이 연서한 이 장서를 김창숙으로 하여금 상해로 가져가도록 하였고 이를 다시 김규식을 통하여 파리 강화회의에 제출되었으며 또한, 각국 대표와 외국 공관과 국내 각지의 향교에도 배포되었다. 일본은 파리장서 운동에 참가한 유림들은 체포 투옥하는 등 가혹하게 탄압하였으며(제1차 유림단 사건), 이 사건을 계기로 유림계는 한말 구국운동의 전통을 계승하여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