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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 중앙총부
옛 천도교 중앙총부 터는 천도교를 비롯한 종교계 지도자들이 모여 3.1운동 계획을 논의한 곳으로 천도교 측의 유력한 거사추진 거점 가운데 하나였던 곳이다. 최린 자서전에 따르면 민족대표의 선정을 비롯한 천도교 측의 독립운동 거사준비는 손병희의 지도 아래 권동진, 오세창, 최린 3인이 수시로 회합하여 추진했다고 하는데, 그 주요 거점 가운데 하나가 경성부 송현동 천도교 중앙총부였다. 천도교에서는 손병희의 지도 아래 독립을 선언하고 독립선언서 인쇄 배포와 만세 시위를 통해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기독교,불교계와 제휴를 추진하였다. 즉 천도교 중앙총부는 각계의 3.1운동 통합논의에서 중심 장소였던 것이다. 손병희(1861~1922)는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충청북도 청원 출신이며, 천도교인이다. 1882년에 동학에 입교하여, 1884년 교주 최시형을 만나 지도를 받았다. 1905년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최시형의 뒤를 이어 3세 교주로 취임하여 교세확장 운동을 벌이는 한편, 출판사 보성사를 창설하고 보성학교와 동덕학교 인수하여 교육사업에도 공헌하였다. 1918년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리려던 때에, 미국 윌슨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어, 평소에 뜻을 같이하고 있던 최린, 권동진, 오세창 등과 함께 독립을 위한 제반사항에 대하여 협의하였다. 그리하여 1919년 1월 그들과 함께 먼저 동지를 모아서 민족의 대표자로서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고, 그 선언서를 각지에 배포하여 국민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켜 독립만세 운동을 일으키기로 한다. 이에 천도교, 기독교, 불교에 대한 동지규합이 진행되었다. 3월 1일 오후 2시경, 태화관에서는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가운데, 손병희는 민족대표 중의 대표자로서 엄숙한 독립선언식의 진행을 주도하였고, 이종일이 인쇄한 독립선언서 100매를 탁상위에 놓고 회람케 한 후, 한용운의 인사말에 이어 만세삼창을 외쳤다. 출동한 일본경찰에 의하여 경시청총감부에 구금되었다가,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석방되어, 서울 상춘원에서 요양 중 병사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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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학원
선학원은 불교단체인데, 불법(佛法)의 정통인 선리(禪理)를 탐구하고, 선풍(禪風)을 선양함으로써 불교중흥을 이룩하고자 만공(滿空)·용성(龍城)·혜월(慧月)·도봉(道峰)·석두(石頭)·남천(南泉)·상월(霜月) 등 여러 고승대덕(高僧大德)들이 중심이 되어 1920년 서울특별시에서 설립하였다.일제강점기에는 서정희(徐正熙)·여운형(呂運亨)·신명균(申明均)·김법린(金法麟) 등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독립운동의 요람이 되었고, 광복 후 불교정화의 산실이 되었다. 이처럼 호국(護國)과 호민(護民)의 뚜렷한 법통을 굳혀온 선학원은 1934년 12월 5일 재단법인 허가를 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73년 지하 1층, 지상 4층의 현대적 대가람으로 중창되었고, 선의 실수(實修)나 보급을 위하여 상설 선원(禪院)을 운영하고 있다. 현재 전국에 531개의 사암을 가지고 있으며, 산하에 선우회(禪友會) 등의 신행단체를 두고 있다. 월간지 『선원(禪院)』을 간행하고 있으며, 종로어린이집·반포어린이집 등의 시설도 운행하고 있다. 전국에 걸쳐 600개소의 분원을 보유하고 있으며, 2013년 현재 정산 법진(靜山 法眞)스님이 이사장으로 있다. 최근 조계종과 소속여부를 놓고 논란이 진행되고 있으나 아직 뚜렷한 결론은 도출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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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 집
이준(1859 - 1907)은 함경남도 북청(北靑)군 속후(俗厚)면 중산(中山)리에서 태어났다. 1895년에 법관양성소를 졸업하고 한성재판소의 검사보를 거쳐 검사로서 관계에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1898년에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11월의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에서는 가두연설을 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1902년에는 이상재(李商在) 민영환(閔泳煥) 이상설(李相卨) 이동휘(李東輝) 양기탁(梁起鐸)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비밀결사인 개혁당(改革黨)에 가담하였다. 1904년 일제가 러 일전쟁을 일으키고 일본군을 한국에 불법 상륙시켜 한국정부와 「제1차 한일의정서」를 강제 체결하자, 이에 대한 반대시위운동을 일으키는데 주동적 역할을 하였다. 또한 일제가 전국의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자, 이를 반대하는 대한보안회(大韓輔安會)에 가입하여 그 총무의 직책을 맡고 격렬한 반대상소와 시위운동을 전개하는데 주동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때 보안회의 회장은 송수만(宋秀晩), 부회장은 원세성(元世性)이었다. 보안회가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해산 당하자, 그 후속단체로서 이상설과 함께 대한협동회(大韓協同會)를 조직하였다. 대한협동회의 회장은 이상설, 부회장은 이준, 총무는 정운복(鄭雲復), 평의장은 이상재, 서무부장은 이동휘, 지방부장은 양기탁, 재무부장은 허 위(許蔿) 등이었다. 대한협동회는 일본인의 황무지개척권 요구를 완강히 반대하여 결국 이를 저지시키는데 성공하였다. 1904년 12월에 일제가 친일분자들로 일진회를 조직하여 활동을 시작하자, 이에 대항하기 위한 단체로 공진회(共進會)를 조직하여 그 회장의 책임을 맡고 반(反)일진회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한국정부에 압력을 가하여 이준을 6개월의 유배형(流配刑)으로 황해도 철도(鐵島)에 귀양보내었다. 1905년 11월 일제가 소위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국권을 침탈하자, 이준은 상동교회(尙洞敎會)에 모인 동지들인 전덕기(全德基) 정순만(鄭淳萬) 이동녕(李東寧) 최재학(崔在學) 계명륙(桂明陸) 김인즙(金仁 ) 옥관빈(玉觀彬) 이승길(李承吉) 차병수(車炳修) 신상민(申尙敏) 김태연(金泰淵) 표영각(表永珏) 조성환(曺成煥) 서상팔(徐相八) 이항직(李恒稙) 이희간(李喜侃) 기산도(奇山濤) 김병헌(金炳憲) 유두환(柳斗煥) 김기홍(金基弘) 김 구(金九) 등과 함께 이에 대한 반대운동을 조직하였다. 그들은 먼저 「을사조약」폐기를 요구하는 상소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1회 2회로 도끼를 메고 연명으로 상소하여 죽든지 체포당하든지 몇 번이고 반복하기로 하였다. 제1회의 상소문을 이준이 짓고 최재학이 소두가 되고 다섯 명이 연명으로 서명하여 대한문 앞에 몰려가서 상소운동을 시작하였다. 일제경찰이 출동하여 상소운동을 탄압하려 하자 이준 등은 가두연설을 하여 시민들과 함께 투석전을 하면서 격렬한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제는 일본군을 동원하여 시위운동을 탄압하고 이준 등 지도자 수십 명을 체포하였다. 국권회복운동이 장기전으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음을 알게 된 이준은 1906년에 국민의 애국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국민교육회(國民敎育會)를 조직하여 그 회장에 취임하였다. 또 이 목적을 전국 각 지방에서 실현해야 한다고 하여 그의 고향인 함경도 지방의 애국계몽운동 단체로서 설태희(薛泰熙) 등 동지들과 함께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를 조직하여 지도하였다. 또한 이 해에 일제의 완전식민지화를 저지하려면 국왕이 조약체결의 전제권을 갖지 않고 의회가 이를 심의하고 동의케하는 제도로 개혁해야 함을 주장하여 입헌제도의 연구와 개혁을 추진하는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를 조직하여 그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헌정연구회가 확대개편되어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가 창립되자 여기에 가입하여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6~7월에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세계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전덕기 이회영(李會榮) 박(朴)상궁 등의 도움을 받아 황제 고종에게 이 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해서 「을사조약」이 황제의 의사에 반하여 일제가 군사적 강압을 가하여 체결된 것으로 고종은 찬동한 바 없는 조약이므로 무효임을 선언하고 한국독립에 대한 열국의 지원을 요청할 것을 제의하였다. 고종이 이에 동의했으므로 극비리에 밀사(密使)로서 정사(正使)에 이상설, 부사(副使)에 이 준과 이위종(李瑋鍾)이 임명되고 만국평화회의 의장과 각국 대표들에게 보내는 고종의 친서가 준비되었다. 이상설은 이때 이미 망명하여 노령 블라디보스톡에 있고, 이위종은 주 러시아공사 이범진(李範晋)의 아들로서 공사관의 2등참사관이 되어 페테르부르그에 있었다. 이준은 헤이그 세계평화회의의 밀사로 1907년 4월 21일 서울을 출발하였다. 그가 출발하기 직전인 4월초에 양기탁과 안창호(安昌浩)가 중심이 되어 국권회복운동의 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가 창립되었으므로 신민회에 가입했으나 곧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했으므로 활동은 할 수 없었다. 블라디보스톡에서 이상설을 만나 밀사임명의 칙서를 전하고 함께 러시아 수도인 페테르부르그로 가서 이위종을 만나 세 특사의 진용을 갖추었다. 세 밀사는 러시아황제에게 고종의 친서를 전하고 협조를 약속 받았다. 이준 등 세 밀사는 1907년 6월 25일경 헤이그에 도착하여 평화회의에 한국대표로서 공식으로 참석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본대표와 영국대표가 방해하여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이에 세 밀사는 일제의 한국침략을 폭로 규탄하고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하는 공고사(控告詞)를 작성하여 평화회의 의장과 각국대표에게 보내는 한편, 신문을 통하여 이를 공표하여 국제 여론을 환기시켰다. 또한 이위종은 프랑스어로 「한국을 위한 호소」라는 강연을 7월 9일 각국 신문 기자단의 국제 협회에서 행하여 국제여론을 환기시켰다. 신문기자들과 언론들은 세 밀사의 활동에 협조적이었던데 비하여, 열강의 대표들은 냉담하였다. 이준은 이에 분개하여 통탄하다가 헤이그에서 순국하였다. 한편 일제 통감부는 궐석재판에서 이준에게 종신징역을 선고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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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마리아 흉상, 회화나무
김마리아(1892-1944)는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회장, 상해애국부인회 의정원 의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이다. 1895년 아버지가 세운 소래초등학교에 입학하여 4년 만에 졸업하고, 집에서 여공(女功: 길쌈 등 여자들의 일)을 수업하며 한문공부에 열중하였다. 1895년에 아버지를, 1904년에 어머니를 여의었다. 대학공부까지 하라는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1905년 서울로 올라와 노백린(盧伯麟)·김규식(金奎植)·유동열(柳東悅)·이동휘(李東輝)·이갑(李甲) 등 애국지사들의 출입이 잦은 삼촌 김필순(金弼淳)의 집에서 공부를 계속하였다. 1906년 이화학당(梨花學堂)에 입학했다가 교파 관계(敎派關係)로 곧 연동여학교(延東女學校: 지금의 정신여자중학교)로 전학, 1910년에 졸업하였다. 그 뒤 3년 동안 광주 수피아여학교에서 교사를 지냈고, 1913년 모교인 정신여학교로 전근한 뒤 이듬해 일본으로 유학하였다. 일본 히로시마[廣島]의 긴조여학교[錦城女學校]와 히로시마여학교에서 1년간 일어와 영어를 수학한 뒤, 1915년 동경여자학원 대학예비과에 입학하였다. 1918년 말경 동경유학생 독립단에 가담, 황에스터[黃愛施德] 등과 구국동지가 되었다. 1919년 2·8독립운동에 가담, 활약하다 일본 경찰에 붙잡혀 조사를 받은 뒤 풀려났다. 조국광복을 위해 일신을 바치겠다는 굳은 의지를 세운 뒤 스스로 졸업을 포기하고, 「독립선언서」 10여 장을 베껴 변장한 일본 옷띠인 오비 속에 숨기고 차경신(車敬信) 등과 2월 15일 부산으로 들어왔다. 귀국 후 대구·광주·서울·황해도 일대에서 독립의 때를 놓치지 않도록 여성계에서도 조직적 궐기를 서둘러야 한다며 3·1운동 사전준비운동에 진력하였다. 황해도 봉산에서의 활약을 마치고 3월 5일 서울 모교를 찾아갔다가 일본 형사에게 붙잡혔다. 이 때 모진 고문으로 상악골축농증에 걸려 평생을 고생하였다. 「보안법」 위반 죄목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5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고 그 해 8월 5일 석방되었다. 석방 후 모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여성항일운동을 북돋우고자 기존의 애국부인회를 바탕으로 하여, 그 해 9월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다시 조직하고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절대 독립을 위한 독립투쟁에 있어 중요한 임무를 맡기 위한 준비와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지원하는 일에 힘을 쏟던 중 그 해 11월 말 애국부인회 관계자들과 다시 붙잡혔다. 김마리아는 심문을 받으면서 “한국인이 한국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일본 연호는 모른다.”는 등 확고한 자주독립정신을 보였다. 3년형의 판결을 받고 복역 중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이후 서울 성북동 보문암(普門庵)에서 요양하다 변장으로 인천을 탈출, 상해로 망명하였다. 상해에서도 상해애국부인회(上海愛國婦人會) 간부와 의정원 의원 등으로 활약하였으며, 수학을 계속하기 위해 중국 난징[南京]의 금릉대학(金陵大學)에 입학하였다. 1923년 6월 미국으로 가 1924년 9월 파크대학 문학부에서 2년간 수학하였다. 1928년에는 시카고대학 사회학과에서 수학, 석사학위를 받고, 1930년 뉴욕 비블리컬 세미너리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한편, 이곳에서 황에스터·박인덕(朴仁德) 등 8명의 옛 동지들을 만나 근화회(槿花會: 재미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 회장으로 추대된 뒤 재미 한국인의 애국정신을 북돋우고 일제의 악랄한 식민정책을 서방 국가에 널리 알렸다. 그 뒤 원산에 있는 마르타 윌슨신학교에서 신학강의만을 한다는 조건으로 1935년 귀국, 이후 여생을 기독교전도사업과 신학 발전에 기여하였다. 고문의 후유증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순국하였는데, 김마리아의 유언에 따라 시체는 화장하여 대동강에 뿌렸다. 1962년에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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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학선 의거터 표지석
송학선(1893-1929)의 이칭은 송인수, 송학선이며, 일제강점기 금호문의거와 관련된 독립운동가이다. 집안이 가난하여 보통학교를 중퇴하였다. 13세 때 가족이 흩어져 거리를 헤매는 방랑자가 되기도 하였다. 1909년 남대문로에 있는 일본인 경영의 오쿠다농구회사[奧田農具會社]의 고용인으로 일하게 되고, 아버지 역시 인쇄공으로 일하게 되어 한가족이 모이게 되었다. 그러나 7년 뒤 각기병으로 실직하였다. 일본인 밑에서 고용살이를 하며 일제에 대한 원한이 쌓였고, 사회적·민족적으로 항일의식에 눈뜨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이토[伊藤博文]를 사살한 안중근(安重根)을 숭배하고, 자기도 총독 사이토[齋藤實]를 사살하기로 결심하였다. 1926년 3월 잠시 사진관에서 일하면서 양식도(洋食刀)를 손에 넣게 되었는데, 그 칼을 품고 과자행상을 가장해 사이토를 노렸다. 그 해 4월 26일 순종이 죽자, 사이토가 조문하기 위해 창덕궁으로 올 것을 기대하고 4월 28일 금호문(金虎門) 앞에 나아가 대기하였다. 오후 1시 30분경 일본인 3명이 탄 자동차가 금호문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비호같이 자동차에 뛰어올라 이들을 찔렀다. 그러나 이들은 총독 일행이 아니라 경성부회 평의원인 다카야마[高山孝行]·사토[佐藤虎次郞]·이케다[池田長次郞] 등이었다. 현장에서 붙잡혀 1926년 11월 10일 사형이 확정, 순국하였다. 1962년에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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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진우 집
송진우(1887-1945)의 호는 고하이며, 일제강점기 동아일보사 사장, 한국민주당 수석총무 등을 역임한 언론인이자 정치인이자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이다. 1906년 창평(昌平)의 영학숙(英學塾)에서 김성수(金性洙)와 함께 수학하고, 1908년 김성수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1915년에 명치(明治)대학 법과를 졸업하였다. 유학기간중에 유학생친목회(留學生親睦會)를 조직하고 총무로 활동했으며 「학지광(學之光)」을 편집하였다. 1915년에 김성수를 도와 당시 경영난에 빠져 있던 중앙학교(中央학교)를 인수하여 학감(學監)이 되었다가 김성수의 뒤를 이어 1918년 3월에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송진우의 관리 아래 중앙학교의 교육은 민족교육을 관철했으며 수많은 애국적 청소년들을 배출하였다. 1919년 1월 동경 유학생 송계백(宋繼白)이 2·8독립선언 준비차 귀국하여 송진우를 만난 것을 계기로 하여 송진우·현상윤(玄相允)·최린(崔麟)·최남선(崔南善) 등이 빈번히 회합을 열고 초기의 3·1운동을 기획하기 시작했으며 송진우는 천도교측과 기독교측의 연합을 주선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난 후 이 운동을 초기에 기획한 48인의 하나로 지목되어 일제 경찰에 붙잡혀 서대문감옥에 구금되었다.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무죄선고를 받았으나 실질적으로 1년 6개월간의 옥고를 겪었다. 1921년 9월 14일 동아일보(東亞日報)가 「주식회사 동아일보」로 개편되자 제3대 사장에 취임하였다. 1922년 11월 이상재(李相在)를 대표로 하고 지도급 인사 47명이 조선민립대학 기성회(朝鮮民立大學期成會)를 발기할 때 발기인으로 참가하여 이 사업을 적극 추진했으며, 동아일보를 통하여 민립대학설립 운동을 적극적으로 선전하였다. 1923년 3월 29일 각계 대표 400명이 서울 종로 중앙청년회관에 모여 조선민립대학기성회 발기총회를 개최하여 전국적으로 1천만원의 기금을 모집하여 재단을 구성하고 민립종합대학을 설립하기로 결의한 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24년 4월 친일파 박춘금(朴春琴)의 권총협박사건으로 동아일보 사장을 사임하고, 1924년 동아일보사 고문, 1925년에는 동아일보 주필(主筆)로 취임하여 언론활동을 하였다. 1925년 7월 미국 하와이에서 태평양연안 기독교청년회 주최로 범태평양회의(汎太平洋會議)가 개최되자 미국으로부터 참석한 서재필(徐載弼)과 함께 국내대표로 암석하여 활동하였다. 1925년 9월 일제 총독부가 「개벽(開闢)」잡지를 발행정지 시키자 한기악(韓基岳)·민태원(閔泰瑗) 등과 함께 일제의 언론탄압을 비판하고 교섭하여 발행정지의 해제를 얻는데 성공하였다. 또한 「신천지(新天地)」와 「신생활(新生活)」의 필화사건이 일어나자 박승빈(朴勝彬) 등과 함께 언론자유의 옹호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1925년 11월에 함경남도 함흥경찰서가 시대일보(時代日報) 지방부장 홍남표를 불법 체포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안재홍(安在鴻)·이종린(李鍾麟) 등과 함께 무명회(無名會)의 교섭위원으로서 그의 석방을 위하여 투쟁하였다. 1926년 3월에 국제농민회 본부로부터 조선농민에게 전하는 글을 동아일보 3월 5일자에 게재했다가 동아일보가 제2차 무기정간을 당함과 동시에 동아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이던 그와 편집 겸 발행인 김철중(金鐵中)이 일제 검찰에 구속 기소되어 1926년 3월 2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그는 징역 6월형, 김철중은 징역 4월형의 선고를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7년 10월 제6대 동아일보사장에 취임했으나, 1936년 8월 베를린 올림픽대회의 마라톤에서 손기정(孫基禎) 선수가 우승하자 동아일보가 손기정선수의 우승사진을 게재하면서 손선수의 앞가슴에 붙인 일장기(日章旗)를 지우고 실은 「일장기 말소사건」이 문제가 되자 동아일보는 제4차 무기정간을 당하고 그도 사장을 사임하였다. 1945년 8·15광복 후에는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을 조직하여 수석총무로서 활동하다가 한현우(韓賢宇)에게 암살당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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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기념관
이승만(1875-1965)의 호는 우남, 초명은 이승룡이며,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제1, 2, 3대 대통령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1898년에는 러시아의 이권침탈을 규탄하기 위해 열린 만민공동회에 참여하면서 독립협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같은 해 4월 일간지인 『매일신문』을 창간해 기재원(기자)과 주필을 지냈으며, 8월에는 『제국신문』을 창간해 편집과 논설을 담당하였다. 11월 투서사건으로 독립협회 간부들이 체포되자 이에 대한 항의 시위를 주도하였고, 이들이 석방된 뒤 중추원(中樞院) 의관(議官)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1899년 1월 박영효(朴泳孝)와 관련된 고종 황제 폐위 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1904년 8월까지 5년 7개월 간 한성감옥에 투옥되었다. 그가 구금된 직후 주한미국공사였던 알렌이 이승만의 석방을 요구하였지만 거부당하였고, 1899년 1월 말 탈옥을 시도하다 실패해 종신형을 언도받았다. 이후 감옥에서 『청일전기(淸日戰紀)』를 편역하고, 『독립정신』을 저술하였다. 또한 『신영한사전』을 편찬하였으며, 『제국신문』에 논설을 투고하였다. 『독립정신』은 그가 출옥한 이후인 1910년 LA에서 처음으로 출판되었다. 『청일전기(淸日戰紀)』는 1917년 하와이에서 출간되었다. 1904년 8월 9일 특별 사면령을 받고 감옥에서 석방되었다. 같은 해 11월 민영환(閔泳煥)과 한규설(韓圭卨)의 주선으로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기 위해 미국으로 갔다. 1905년 2월 워싱턴 DC의 조지워싱턴 대학(George Washington University)에 2학년 장학생으로 입학한 직후 한국에 왔던 선교사의 주선으로 미국 상원의원 휴 딘스모어(Hugh A. Dinsmore), 국무장관 존 헤이(John Hay)와 면담하였다. 1905년 4월 세례를 받았고, 8월에는 태프트(William H. Taft) 국무장관의 주선으로 시어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과 만났다. 이승만은 이 자리에서 한국의 독립 보존을 청원하였지만 러일전쟁을 계기로 미국은 일본을 지지하는 정책을 취하게 되어 성과를 거두지 못 하였다. 대학 재학 시 미국의 대외정책이 일본에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도록 활동하였던 스티븐슨(Stevens, D.W.)을 암살한 전명운(田明雲)과 장인환(張仁煥)의 재판에 통역요청을 받았으나, 미국 사회 내의 부정적 여론을 이유로 거부하였다. 1910년 3월 재미동포 조직이었던 국민회에 가입하였으며, 같은 해 8월 귀국하였다. 귀국 직후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청년부 간사이자 감리교 선교사로 활동하던 중 1912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일제의 압박을 받자, 같은 해 4월 감리교 선교부의 도움으로 미국 미네소타에서 열린 국제감리교대회 참석을 빌미로 도미하였다. 이후 1945년 10월 귀국 때까지 계속 미국에서 활동하였다. 국제감리교대회 참석 후 네브라스카(Nebraska)에 갔다가 1900년대 초 옥중에서 만났던 박용만(朴容萬)의 도움으로 1913년 2월 하와이 호놀룰루(Honolulu)로 활동 근거지를 옮겼다. 같은 해 8월부터 호놀룰루에서 한인감리교회의 한인기독학원을 운영하였으며, 『태평양잡지』를 발간하였다. 이승만은 이 시기 ‘105인 사건’의 실상을 다룬 『한국교회핍박』을 저술하였고, 옥중 저서인 『독립정신』과 『청일전기』를 출판하였다. 또한 ‘한인기독학원’을 ‘한인중앙학원’으로 개명하고 민족교육과 선교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하와이에서 활동한 지 1년이 지날 무렵 박용만이 무력투쟁을 위해 국민군단을 창설하자, 이에 이승만은 교육을 통한 실력양성을 주장하면서 서로 대립하였다. 이승만은 재미동포의 가장 큰 조직이었던 국민회 회장 선출과 자금 사용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였고, 국민군단의 일본군 선박 폭파미수사건을 계기로 박용만이 하와이를 떠난 후 국민회를 주도적으로 운영하였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의 윌슨(Thomas Woodrow Wilson) 대통령은 민족자결주의 주창하면서 국제연맹(The League of Nations)을 구상하였고, 이승만은 한국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하에 둘 것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1919년 2월 25일 윌슨 대통령에게 제출하여 장차 완전한 독립을 준다는 보장 하에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받는 것이 일본의 식민지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고 주장하였다.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은 1919년 9월 6일 이승만을 임시 대통령으로 추대하여 1920년 12월부터 약 6개월 동안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수행하였다. 그는 1921년 5월 워싱턴에서 개최될 군축회의(The Washington Disarmament Conference)에 참석을 목적으로 상해에서 미국으로 갔다. 1925년 3월 11일 임시정부 의정원은 이승만을 탄핵해 대통령직을 박탈하였다. 임시정부 인사들은 이승만이 주장한 국제연맹 위임통치안을 미국에 의한 위임통치로 오해하고 강하게 비판하였다. 그가 상해 임시정부에서 직접 직책을 수행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함께 임시정부 의정원의 결의를 무시하였다는 것도 주요한 이유였다. 조소앙은 이 탄핵안을 반대하였지만, 대다수 임시정부 요인들이 주도한 탄핵안은 통과되었다. 의정원의 폐지령에도 불구하고 구미위원부의 활동은 1929년까지 계속되었고, 이승만은 여기에서 외교활동을 계속하였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조병옥, 허정, 장택상 등이 당시 구미위원부의 활동을 도왔던 유학생들이었다. 구미위원부에서 활동하면서 임시정부의 재정을 도맡았던 이승만은 1932년 11월 국제연맹에 한국의 독립을 탄원할 임무를 받고 전권대사에 임명되었다. 1933년 1월과 2월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 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국제연맹에서의 활동이 인정받으면서 1933년 11월 이승만은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선출되었고, 1934년에는 외무위원회 외교위원, 1940년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1942년 8월 29일부터 미국의 소리 방송에서 일본의 패망과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방송을 시작하였고, 같은 해 9월에는 미국 전략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s)과 연락해 임시정부의 광복군이 미군과 함께 작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연결하는 활동을 하였다. 또한 태평양 전쟁 시기 미국과 소련이 얄타회담에서 한반도 문제에 대해 합의한 후에는 소련을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후 10월 16일 귀국하였다. 귀국 직전 일본 토쿄에서 맥아더 장군, 하지 미군정 사령관과 회합을 한 후 귀국한 이승만은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과 한국민주당의 영수직을 거절하였다. 그 대신 1945년 10월 23일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조직해 회장에 추대되었다. 1948년에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하고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65년 7월 19일 하와이 호놀룰루 요양원에서 사망하였다. 같은 해 7월 27일 가족장으로 영결식이 있었고,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1949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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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자혜 산파 터 표석
박자혜(1895-1943)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신채호와 결혼하여 항일투쟁활동을 지원한 독립운동가이자 간호사이다. 1895년 12월 11일 경기도 양주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중인 출신의 박원순이다. 어린 나이에 궁궐의 견습 나인으로 입궁하였으나 일제 강점으로 조선왕조가 망하면서 궁에서 나오게 되었다. 1911년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기예과에 입학하여 1914년 졸업하였다. 1915년에 조선총독부의원 부속 의학강습소 간호부과에 입학하여 1916년 졸업하였다. 1917년부터 조선총독부의원 간호부로 근무하였다. 1919년 3 · 1만세운동 당시 많은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박자혜는 일제의 기관에서 일하고 있는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이에 간우회(看友會)를 조직, 동료 간호부들과 만세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 더 이상 국내에서 활동하기 어렵게 되자 중국으로 떠났다. 베이징에서 박자혜는 연경대학 의예과에 입학하였다. 1920년에 15세 연상인 독립운동가 신채호와 결혼하였다. 이듬해 아들을 낳고, 다시 1922년 임신을 하였으나 경제적 궁핍으로 아들과 함께 귀국하였다. 이후 박자혜는 서울 인사동에 ‘박자혜 산파’를 개원하여 생계를 유지하려 하였다. 그러나 당시 대부분의 여성들이 출산을 산파에게 의존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활이 매우 궁핍하였다. 이에 풀장사, 참외장사 등 노점상도 하였다. 그러면서 자녀를 기르고, 중국에 있는 신채호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국내 지사들과의 연락이나, 해외에서 밀입국하여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을 도왔다. 1926년에는 나석주(羅錫疇)의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 투척을 지원하였다. 1927년 신채호와 베이징에서 재회하여 둘째 아들을 임신, 출산하였다. 1928년 신채호가 일경에게 체포되니 책, 옷 등을 구입해 보내주며 옥바라지를 하였다. 1936년 신채호가 옥사한 뒤 첫째 아들 신수범은 한성상업학교〔현 한성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해외로 떠났으며, 둘째 아들 신두범은 1942년 영양실조로 사망하였다. 박자혜는 홀로 셋방에 살다가 1943년 10월 16일 병고로 세상을 떠났다. 1990년에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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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운동 표지석(승동교회)
승동교회는 1919년 3·1운동 준비과정에서 제1회 및 제4회 학생단 간부회가 열린 장소로, 학생단 독립운동의 거점이다. 연희전문학교 출신의 학생단 대표이자 승동교회 면려청년회장이었던 김원벽(1894~1928)은 1919년 2월 20일 승동교회 1층 밀실에서 학생단 제1회 간부회를 열어 조직체계를 정비하고 3.1운동을 준비했다. 그러나 독립만세운동이 범국민적으로 이루어지게 됨에 따라 이곳에서 23일 학생측이 작성한 독립선언서를 소각하고 2월 28일에 제4회 학생단 간부회가 열어 학생조직 동원을 최종 점검하고 독립선언서 배포 등과 관련한 역할을 분담함으로써 이튿날 탑골공원에서의 독립선언식을 시발점으로 하는 거족적 독립만세운동의 발판을 놓았다. 그 후로 승동교회는 일본 경찰로부터 심한 수색을 당하는 등 많은 수난을 당해야 했다. 김원벽(1894~1928)은 3·1운동 때 중앙지도체 인사 중의 한 사람으로, 황해도 은율 사람이다. 기독교 청년회의 간부로서 그의 탁월한 지도력은 학생들 사이에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조국 광복의 기운이 고조되고 있던 1919년 2월 22일, 기독교측의 대표로서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있던 박희도와 이갑성은 이 운동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학생들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김원벽과 강기덕, 한위건을 초청하였다. 이 자리에 박희도가 학생들에 의한 독자적인 독립운동을 일시 중지하고 거족적인 민족독립운동 대열에 동참하도록 권유하자, 그는 흔쾌히 승낙하였다. 3월 1일 오전부터 탑동공원으로 모여든 학생의 수는 5천을 넘었고 상당수의 시민들도 합세하였다. 그는 강기덕 등의 동지와 함께 군중을 지휘하여 두 갈래로 나누어 일대는 동쪽으로, 일대는 서쪽으로 독립만세운동 시위를 주도하였는데, 급보를 받고 출동한 일본 경찰과 헌병의 제지를 받았으나, 오후 늦게까지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3월 5일에는 수만명의 독립만세 시위군중이 모인 서울역 광장에서 그는 강기덕 등의 동지와 함께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큰 깃발을 들고 인력거를 타고서 시위군중 사이를 누비며 남대문쪽으로 향하여 시위군중을 지휘하였다. 그러나 이 때 급히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한때 모교인 연희전문학교에 재직하기도 하였고, 신생활사(新生活社)·시대일보사(時代日報社) 등에서 일하다가 35세의 젊은 나이로 사리원(沙里院)에서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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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독립선언 유적지(태화관 터)
삼일독립선언 유적지 표지석은 옛 태화관 터에 세워진 표지석인데, 태화관은 종로구 인사동에 있던 요릿집으로 명월관(明月館)의 분점격이었다.명월관은 한말에 궁내부 주임관(奏任官) 및 전선사장(典膳司長)으로 있으면서 어선(御膳)과 향연을 맡아 궁중요리를 하던 안순환(安淳煥)이 1909년에 지은 요릿집이다. 명월관은 개점 초기부터 대한제국의 고관과 친일파 인물들이 출입하였으며, 후기에는 문인·언론인들과 국외에서 잠입한 애국지사들의 밀담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18년 명월관이 소실되자 안순환은 순화궁(順和宮: 지금의 종로구 인사동 194)에 명월관의 분점격인 태화관(太華館)을 차렸다가 뒤에 태화관(泰和館)으로 개명하였다. 이곳은 3·1독립운동 때 민족대표들이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축하연을 베푼 곳으로 유명하다. 민족의 독립만세운동계획에 따른 준비를 1919년 2월 28일까지 완료한 민족대표 33인 중 29인(길선주·김병조·유여대·정춘수 등 4인은 지방에 있었으므로 불참)은 태화관에 모였는데, 독립선언 시각인 오후 2시가 가까워지자 손병희(孫秉熙)는 최린(崔麟)으로 하여금 태화관 주인 안순환이 조선총독부에 전화를 걸게 하여 “민족대표 일동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지금 축배를 들고 있다”고 통고하였다. 이에 일본경찰대 80여명이 곧 달려와 태화관을 포위하였다. 이때 민족대표들은 독립을 선언하는 한용운(韓龍雲)의 식사를 듣고 그의 선창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제창한 뒤 일본경찰에 의연하게 연행되었다. 이와 함께 파고다공원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독립의 함성은 전국방방곡곡으로 퍼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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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독립선언서비
서울 종로구 인사동 194-27 태화빌딩 앞 삼일독립선언유적지비와 100주년 기념비 기념비를 배경처럼 둘러싼 벽에 기미독립선언서가 각인되어 있다. 기미독립선언서는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이 한국의 독립을 선포한 선언서이다. 1918년말부터 독립운동의 3대 원칙인 대중화·일원화·비폭력 등을 주장해 온 천도교 측 중진들은 독립운동의 실천 방법으로 독립선언서와 독립청원서·국권반환 요구서 등을 작성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거족적인 운동으로 확대하기 위해 기독교·불교 등 각 종교 단체 및 유림을 망라하는 동시에 저명 인사들을 민족 대표로 내세우기로 합의하였다. 고종이 승하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배일 감정이 절정에 다다르게 되면서 독립운동은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이들은 종교 단체와 교섭을 벌였는데, 먼저 기독교 측의 이승훈을 만나 천도교와 함께 독립운동에 합류할 것이라는 승낙을 얻어내는데 성공하였다. 한편, 불교 측과의 교섭은 최린이 담당하여 한용운에게 승낙을 얻어냄으로써 불교 측과의 제휴도 이루어졌다. 독립선언서의 작성자는 최남선이 낙착되었다. 이렇게 하여 작성된 독립선언서는 천도교측 15인, 기독교측 16인, 불교측 2인 등 33인이 민족 대표로 서명하였다. 선언서는 28일부터 전국 각지로 전달·배포되면서 거족적인 3·1운동의 전개에 있어 결정적인 구실을 담당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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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재 집
이상재(1851-1927)의 자는 계호, 호는 월남이며, 일제강점기 YMCA 전국연합회회장, 신간회 창립회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정치인, 민권운동가, 청년운동가이다. 1867년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부패한 관리들의 매관매직 때문에 낙방거자(落榜擧子)가 되었다. 이를 개탄하고 낙향하여 세상을 등지고 살고자 하였으나, 친족 장직(長稙)의 권유로 당시 승지였던 박정양(朴定陽)의 집에서 1880년까지 개인 비서일을 보았다. 1881년 박정양의 추천으로 박정양·어윤중(魚允中)·홍영식(洪英植)·조준영(趙濬永)·김옥균(金玉均) 등 10여 명으로 구성된 신사유람단의 수행원으로 유길준(兪吉濬)·윤치호(尹致昊)·안종수(安宗洙)·고영희(高永喜) 등 26명과 함께 일본에 갔다. 이때 일본의 신흥문물과 사회의 발전상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으며, 홍영식과 두터운 교분을 쌓고 귀국한 뒤 개화운동에 참가할 수 있는 소지를 마련하였다. 그래서 1884년 신관제에 의해 개설된 우정총국(郵政總局)의 총판(總辦) 홍영식의 추천으로 주사로 임명되었으나, 그 해 12월 갑신정변의 실패로 낙향하였다. 1887년 박정양에 의해 친군영(親軍營)의 문안(文案)으로 임명되었고, 그 해 6월 박정양이 초대주미공사로 갈 때 2등서기관으로 채용되었다. 이 때 청나라가 우리나라와 미국이 직접 외교관계를 맺지 못하도록 국서(國書)의 수교를 방해하였으나, 이상재는 청국공사와 단판을 벌여 박정양으로 하여금 단독으로 국서를 전달하게 하였다. 귀국한 뒤 낙향하였으나, 1892년에 전환국위원, 1894년에 승정원우부승지 겸 경연각 참찬, 학무아문참의(學務衙門參議) 겸 학무국장이 되었다. 이 때 신교육제도를 창안하여 사범학교·중학교·소학교·외국어학교를 설립, 한때는 외국어학교교장을 겸하기도 하였다. 1896년 내각총서(內閣總書)와 중추원1등의관이 되고, 다시 관제 개편에 따라 내각총무국장에 올라 탐관오리의 구축 등 국운을 바로잡는데 힘썼다. 이 해 7월 서재필(徐載弼)·윤치호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하였으며, 독립협회가 주최한 만민공동회 의장 또는 사회를 맡아보았다. 만민공동회가 종로에서 개최되었을 때, 척외(斥外)·황권(皇權) 확립 등의 6개 조항을 의결하고 두 차례 상소문을 올렸다. 이 때문에 16명과 함께 경무청에 구금되었으나 참정 심상훈(沈相薰)의 간곡한 상소로 10일 만에 석방되었다. 그러나 1898년 12월 25일 독립협회가 정부의 탄압과 황국협회의 방해로 해산되자, 모든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묻혀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며, 탐관오리의 부패상과 비정을 탄핵하였다. 때문에 정부대신들의 미움을 받아, 1902년 6월 국체개혁(國體改革)을 음모하였다는 이른바 개혁당사건에 연루되어 둘째 아들 이승인(李承仁)과 함께 다시 구금되었다가 1904년 2월 석방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뒤 고종의 애절한 하명을 거절할 수 없어 잠시 의정부참찬에 머물렀고, 1907년 법부대신의 교섭을 받았으나 사양하였으며, 군대해산이 있은 뒤 관계를 떠났다. 한편, 1902년 이른바 개혁당사건으로 구금되어 있을 때, 기독교신자가 되었으며 석방된 뒤 함께 감옥에 있었던 김정식(金貞植)·유성준(兪星濬) 등과 함께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에 가입하여, 초대 교육부장이 되어 민중계몽에 투신하였다. 1910년 국권을 강탈한 일제는 무단정치를 강행하며, 1913년에는 어용단체인 유신회(維新會)를 동원하여 청년회를 파괴하였고, 이 때문에 간부들은 축출·구금·국외추방 당하거나 해외망명을 하였다. 그러나 이상재는 1913년 총무에 취임, 사멸직전의 청년회를 사수하였으며, 1914년에는 재일본조선YMCA를 비롯한 세브란스·배재·경신과 개성의 한영서원, 광주의 숭일, 군산의 연맹, 전주의 신흥, 공주의 연맹 등 학생YMCA를 망라한 조선기독교청년회 전국연합회를 조직하였다. 이 때 모든 민간단체는 해산되는 동시에 집회·출판·언론의 자유를 완전히 박탈당하였으나, 오직 YMCA만은 해산당하지 않고 튼튼히 서 있음으로써 국내의 유일한 민간단체로 남게 되었다. 그래서 1919년 3·1운동의 발판이 되게 하였다. 또한, 3·1운동에 연루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렀고, 특히 3·1운동의 무저항·비폭력의 혁명운동정신을 이루어 놓았다. 1920년부터는 YMCA의 명예총무 또는 전국연합회회장으로, 1920년 미국 국회의원으로 구성된 시찰단이 내한하였을 때, 이른바 제2독립운동·물산장려운동·소년척후대(보이스카웃)운동·학생청년회운동 등 YMCA운동을 주관하였다. 그리고 각종 강연회·토론회·일요강좌·농촌운동·지방순회강연 등 폭넓은 민족운동을 주도하였다. 1922년에는 신흥우(申興雨)·이대위(李大偉)·김활란(金活蘭)·김필례(金弼禮) 등 YMCA대표단을 인솔하여, 북경에서 열린 세계학생기독교청년연맹대회(WSCF)에 참석하여 한국YMCA가 단독으로 세계YMCA연맹에 가입할 수 있는 길을 터놓았으며, 한국YMCA 창설에도 기여하였다. 한편, 1922년 조선교육협회를 창설하여 회장에 취임하였고, 조선민립대학기성회를 조직하여 회장이 되었다. 1924년 조선일보사 사장, 1925년 제1회 전국기자대회 의장으로 한국 언론의 진작 및 단합에 크게 기여하였다. 한편, 공산주의사상에 물들어가는 지식인과 언론인들을 민족주의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다. 1927년 2월 15일 민족주의진영과 사회주의진영에서 이른바 민족의 단일전선을 결성하고, 공동의 적인 일본과 투쟁할 것을 목표로 신간회(新幹會)를 조직할 때, 창립회장으로 추대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였다. 1962년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