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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청천 집
지청천(1888-1957)의 이칭은 이청천, 호는 백산이며, 일제강점기 한국독립당 군사위원장, 한국독립군 총사령관, 광복군 총사령부 사령관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자 군인이다. 한말 무관학교(武官學校)에 입교, 2학년 때 1, 2년생 40여 명과 함께 정부유학생으로 일본 육군중앙유년학교(陸軍中央幼年學校)에 들어갔다. 이 때는 본명인 지대형을 사용하였다. 유년학교는 뒤에 일본사관학교 예과가 된 3년제이며, 다시 본과 2년이 있는데, 유학 도중 한일합병이 되어 본과에 편입되었다. 제26기생으로 1913년 졸업, 중위가 되면서 1919년 만주로 망명하여 대일무력항쟁을 지도하기 위해 일본의 병서와 군용지도를 가지고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찾았다. 독립군 간부양성에 진력하고 1920년 상해임시정부 산하의 만주군정부(滿洲軍政府) ·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간부가 되었다. 같은 해 10월 일본이 혼춘사건(琿春事件)을 조작하고 청산리싸움에서 대패하자, 일본군은 무차별 살육을 감행하였다. 이에 서로군정서를 이끌고 간도성(間島省) 안도현(安圖縣) 밀림으로 이동, 서일(徐一) · 김좌진(金佐鎭) 등과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하고 군단의 군사고문이 되었는데, 이때 이청천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1921년 6월 소련혁명군과의 마찰로 흑하사변[黑河事變, 자유시사변]이 발발하자 이르쿠츠크로 이동하여 고려혁명군을 1개 여단으로 재편하는 데 참여하였다. 같은 해 10월 여단 내에 설치한 고려혁명군관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 1922년 4월경 군관학교 교육방침과 소련 당국의 규정이 대립되어 체포되었으나 7월 임시정부의 노력으로 석방되었다. 1923년 1월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자 고려혁명군 대표로 참가했고, 1924년 국민위원회를 구성하고 군사위원에 선임되어 활동했다. 항일 독립군의 재건과 통합 운동이 계기가 되어 북만주에는 신민부(新民府) · 대한의용군사회(大韓義勇軍事會)가 생기게 되고, 남만주에는 대한국민단(大韓國民團)이 조직되었고 서로군정서가 모태가 되어 대한통군부(大韓統軍部)가 조직되었다. 그 뒤 양기탁(梁起鐸) · 오동진(吳東振) 등과 함께 대한통군부를 대한통의부로 개편하였고 다시 정의부로 확대 조직, 군사위원장 겸 사령장이 되었다. 김좌진이 저격당한 뒤, 1930년 7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창당에 참여, 군사위원장이 되었으며, 별도로 한국독립군을 만들어 총사령관이 되었다. 1932년에는 동아혈성동맹(東亞血成同盟)의 간부로서 각지의 항일단체를 규합하는 데 힘썼다. 1933년 치치하얼[齊齊哈爾]에 잠입하여 항일지하운동을 지휘하면서 한중연합군의 총참모장이 되었으나, 중국 공산당의 압력으로 무장해제 당한 뒤, 같은 해 뤄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에 한국인 특별반을 만들어 책임자로 활약하였다. 1940년 9월 17일 임시정부가 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하자 사령관이 되어 1945년 환국할 때까지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환국 후 26개 청년단체를 통합한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을 창설하여 단장이 되었다. 제헌국회의원과 초대 무임소 장관을 역임하고 제2대 국회의원, 민주국민당의 최고위원을 지냈다. 1962년에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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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교장
경교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인들뿐만 아니라 민족진영 인사들의 집결처로 김구가 주도하는 반탁 · 건국 · 통일운동의 민주적 총본산격이어서, 이승만(李承晩)의 돈암장 혹은 이화장, 김규식(金奎植)의 삼청장(三淸莊)과 함께 정부수립 이전 건국활동의 3대 요람으로 각광을 받았다. 특히 임시정부의 공관으로 상당기간 활동본부 구실을 하여, 통일정부 수립을 내세운 민족주의 추구의 우국 정객들이 모여든 경교장은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활동이나 건국실천원 양성에 주안점을 둔 보루로서도 주목을 받았다. 이곳 경교장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던 김구 휘하의 엄항섭(嚴恒燮) · 조완구(趙琬九) · 조소앙(趙素昻) · 조성환(曺成煥) 등이 정사를 주재하였다. 그리고 자주적 통일운동이 본격화되기까지 광복 후 이곳에 많은 인사들이 집결하였다. 1949년 6월 26일 김구가 집무실에서 안두희(安斗熙)의 흉탄에 시해된 뒤 국민장을 거행할 때, 당시 거족적인 애도 인파가 몰린 명소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완전독립과 통일지향의 역사적인 영광과 시련이 교차된 경교장은 주인 최창학에게 반환되었고 1968년 삼성재단이 매입하여 고려병원(1995년 강북삼성병원으로 개칭)의 본관으로 사용되었다. 경교장은 복원공사 후 2013년 3월부터 시민에게 개방되었다. 2005년에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경교장은 최창학(崔昌學) 소유의 별장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던 김구(金九)가 1945년 11월 중국에서 귀국한 이후부터 1949년 생애를 마칠 때까지 생활하던 사저 겸 집무실이었다. 당시 그 일대의 명칭이 다케조에마치[죽첨정(竹添町)]여서 건물 이름을 ‘죽첨장(竹添莊)’이라 하였으나 김구가 경교장이라 개명하였으며, 정치 활동이 본격화되자 ‘서대문 경교장’이라 불렀다. 경교장은 광화문에서 서대문 사이에 있던 동양극장 건너편, 즉 지금의 종로구 새문안로에 있는 강북삼성병원(구 고려병원) 자리에 위치해 있다. 연면적 945.45㎡의 지상 2층, 지하 1층의 단아한 양관으로,근대 건축가인 김세연(金世演)이 설계하여 1938년에 완공하였다. 전면 분할의 비례가 아름답고 1층의 출창과 2층의 들임 아치창을 이용한 외관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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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신문사 표지석
1898년 9월 5일 사장 남궁 억(南宮檍), 총무원 나수연(羅壽淵) 등이 국민지식의 계발과 외세침입에 대한 항쟁의 기치 아래 지금의 서울 광화문에서 창간하였다. 남궁 억은 ≪대한황성신문≫의 판권을 물려받아 오늘날의 합자회사와 같은 고금제(股金制)를 신문사상 최초로 채택해서 운영하였다. 500고(股:공동으로 하는 사업에 각각 내는 밑천)의 고표를 발행하여 자본금 5,000원을 목표로 하였으나 반수의 모금으로 발족되었다. 체재는 소형판(23×31㎝) 3단제로 본문은 4호 활자를 사용하였다. 문자는 국한문 혼용이라고 하나 거의 한자에 한글로 토를 단 정도의 한문위주의 문장으로 제작되어 ≪독립신문≫ 이후 여러 신문들이 순한글로 제작되던 전통을 깨뜨려 한학 식자층 독자들의 환영을 받았다. 지면의 기사배치는 대한제국시대의 다른 신문들과 거의 마찬가지로 논설·별보(別報)·관보·잡보(雜報)·외보·광고 등으로 구성하였으며, 1899년 11월 13일자부터는 지면 크기를 확대하여 34.5×25.2㎝의 4면 4단제를 채용하고 기서(寄書)·고사사조(故事詞藻)·습유란(拾遺欄:빠진 글을 뒤에 보충함) 등을 신설하였다. 1900년 1월 5일자 신문부터는 외신을 게재하는 ‘전보’기사란에 “한성 루터 전특체(電特遞)”라고 부기하고 외국 뉴스를 게재하기 시작하였다. 같은 날짜 사고(社告)의 “외국 사항에 전보를 직접(直接)치 못하여 보도에 만시(晩時)됨을 한하옵더니 현(現)에 영경(英京) 루터 전보를 정약통접(訂約通接)하였다.”는 내용으로 보아 영국 로이터통신사와 정식으로 계약을 체결하고 외신을 공급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신문의 초기 주필로는 유근(柳瑾)·박은식(朴殷植) 등이 활약하였으며 얼마 뒤 장지연(張志淵)도 합류하였다. 창간 때부터 1902년 8월까지 만 4년간 사장직을 맡은 남궁 억은 재임중 두번이나 구속되었다. 1902년 8월 31일에는 2대 사장으로 장지연이 선출되었다. 1904년 6월 17일 일본인이 한국에서의 황무지개척권을 주한 일본공사를 통하여 한국정부에 요구해오자, 이 신문은 그 부당성을 여러 차례 사설로써 보도하여 그에 대한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이러한 구국민중대회의 모임인 ‘보안회(保安會)’의 활동을 지지하면서 상세히 보도하여 배일(排日) 애국사상을 고취하였고, 대한제국정부가 일본측 요구를 철회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1904년 2월 24일 이 신문은 한일의정서의 조인 내용을 게재했다가 외부의 게재금지 명령으로 기사를 삭제당하여 문제된 기사의 활자를 뒤집어 인쇄함으로써 이른바 ‘벽돌신문’이 처음 나오게 되었다. 1905년 11월 20일자 <시일야방성대곡 是日也放聲大哭> 기사로 정간을 당하고, 사장 장지연을 비롯하여 10여 명의 직원이 체포되었다. 이듬해 1월 24일 장지연이 석방되고 발행정지도 동시에 해제되었으나 장기정간으로 재정난이 악화되어 2월 12일에야 겨우 속간할 수가 있었다. 2월 17일자에는 사장 장지연, 부사장 김상연(金祥演), 회계 김시영(金始榮) 등이 사임하고 새로운 운영진이 사원총회에서 선임되었는데, 이 때 남궁 훈(南宮薰)이 3대 사장으로 취임하였고 총무에 성낙영(成樂英), 회계에 김재완(金在完)을 선임하였다. 그 뒤 1907년 5월 18일 총회에서 사장에 김상천(金相天), 총무에 김재완이 선출되었고, 그해 9월 17일 총회에서 사장에 유근이 선출되었다. 1910년 6월 12일부터는 편집 겸 발행인이 성선경(成善慶)으로 바뀌었다. 이 신문은 합자회사 형식으로 경영되었으나 충분한 자본을 확보하지 못하고 독자들이 구독료를 잘 내지 않아 ‘사고(社告)’를 통하여 수차에 걸쳐 재정의 궁핍함을 밝혔다. 특히 1903년 2월 5일자 신문에 논설로써 신문발간을 중단하지 않을 수 없음을 선언하였다. 이 날짜 ‘사고(社告)’에 발행부수 3,000여 장에 구독료 및 광고료 수입이 매월 1,500여 원이고, 지출은 용지대·잉크값 등이 830여 원으로 흑자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구독료 미수금이 7,000여 원에 이르고 있고 용지 및 잉크값 등이 2,000여 원이나 밀려 폐간지경에 있음을 밝히자, 각계의 뜻있는 사람들이 10원 이상 200원까지 성금을 보내 곧 속간이 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신문값은 제대로 걷히지 않아 경영은 매우 어려웠다. 이러한 경영난을 광고를 통해 많이 해소시키기도 했는데 1900년 이후부터는 전체 지면의 절반을 차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상품광고로는 약품과 서적이 가장 많았으며, 비상품광고로는 사회의 어지러움을 반영하는 분실·개명·사기·경고 등의 광고건수가 많았다. 이렇듯 심한 경영난을 겪다가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이 강행되자 신문제호가 강제로 ≪한성신문 漢城新聞≫으로 바뀌어 8월 30일자부터 9월 14일(제3470호)까지 발행되다가 결국 문을 닫았다. 이 신문은 경술국치 전까지 ≪뎨국신문≫과 함께 민족의식의 고취와 문명개화의 선구자로서 지대한 공헌을 한 민족지로서 평가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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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옥서 표지석
전옥서는 서울 중부 서린방(瑞麟坊 : 현재 종로구 세종로 1가 부근) 의금부 옆에 있었다. 태조가 조선을 건국하고 관제를 정할 때 고려의 전옥서를 답습하여 관원을 정하였다. 관원으로 영(令) 2인, 승(丞) 2인, 사리(司吏) 2인을 두었다. 그 뒤 1466년(세조 12) 『경국대전』 체제가 정비되면서 종6품아문으로 정착되어 조선 말기까지 계승되었다. 관원으로 제조 1인은 형방승지가 겸임하였으며, 실무관리로 주부(主簿, 종6품) 1인, 봉사(奉事, 종8품) 1인, 참봉(參奉, 종9품) 1인과 서리(書吏) 4인 및 나장(羅將) 30인을 두었다가 뒤에 서리는 6인으로 증원되었고, 나장은 5인으로 줄었다. 왕은 자주 사람을 보내어 전옥서와 의금부의 죄수를 살폈는데, 예종 때 전옥서 죄수의 가쇄(枷鎖)가 풀려 있어 매일 죄수를 검찰할 책임이 있는 형조월령낭관(刑曹月令郎官)과 전옥서의 주부 및 참봉이 직무태만으로 의금부에 수금되어 국문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전옥서는 형조의 지휘를 받아 죄수를 관장하는 곳으로 오늘의 교도소와 같으며, 그 상부기관인 형조는 매월 월령낭관을 교대로 파견하여 날마다 전옥서에 수감되어 있는 죄수를 검찰하였다. 조선시대에 죄인을 수감했던 감옥인 전옥서는 한말 한일 의병들이 옥고를 치루기도 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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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평사 동판
형평사는 1923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백정(白丁)들의 신분 해방을 위해 설립된 사회운동단체이며, 1930년대까지 활동하였고, 이들 중 일부는 사회주의사상을 수용하기도 했다. 형평사의 설립목적은 계급을 타파하고 백정에 대한 모욕적인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장려하여 백정도 참다운 인간으로 인정받도록 하고자 함이었다. 개항 이후 자유평등사상이 유입되고, 부분적이나마 경제적으로 부를 축적한 백정들이 발생하고 있는 상황에서, 백정들은 여전히 사회적으로 신분 차별의 대상이었는데, 1922년 일본의 특수부락민인 에다[穢多: 屠者]가 신분해방단체인 수평사(水平社)를 조직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백정들은 자녀들의 입학거부문제를 계기로 1923년 4월 25일 경남 진주에서 신분 해방을 목표로 한 형평사를 창립했다. 창립총회에서 형평사취지서 · 사칙 · 세칙을 채택하고 위원을 선출하였다. 사칙(社則)에 따르면, 진주에 본사(本社)를, 각 도에 지사(支社)를, 군에 분사(分社)를 두며, 형평사의 창립을 주도한 진주 백정 이학찬(李學贊)과 신현수(申鉉壽) · 강상호(姜相鎬) · 천석구(千錫九) · 장지필(張志弼)이 위원에 선임되었다. 이후 전국 각지에서 여기에 호응해 지사와 분사가 활발히 설치되었다. 창립 1년 만에 전국적으로 지사 12개, 분사 64개가 조직되었다. 1924년 2월 부산에서 전국의 지사 · 분사 대표 330여 명이 참가한 형평사 전조선임시총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서 본사의 서울 이전 문제가 제기되었지만 결론을 짓지 못하고 다음 총회로 넘겨졌다. 그런데 이전을 주장한 장지필 · 오성환(吳成煥) 등이 중심이 되어 같은 해 4월 대전에서 형평사 혁신동맹을 결성하고 본부를 서울에 설치하였다. 같은 날 진주에서도 진주 본사가 주최하는 전국형평사대회가 개최되었다. 이렇게 분열되는 과정에서 본사 이전 문제를 두고 갈등이 표면화되었지만, 실제 원인은 운동방법을 둘러싼 노선상의 대립이었다. 혁신동맹측이 사회주의적 노선을 지향하려 한 반면, 진주 본사측은 이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양파는 통합을 위한 교섭을 시작해 같은 해 8월 대전에서 형평사통일대회를 개최했다. 여기서 양파는 각자의 조직을 해체하는 동시에 조선형평사중앙총본부를 결성하고 서울에 본부를 두기로 하였다. 이 무렵부터 지방에서 형평청년회 · 형평학우동맹 등이 조직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 대회 후 진주 본사측은 대전대회의 불승인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양파간에 다시 교섭이 진행되어 다음 해인 1925년 4월 양파가 합동으로 서울에서 전조선형평대회를 개최하여 통합이 이루어졌다. 그 뒤 조직은 더욱 확대되어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한편, 이 대회에서 다른 사회운동과의 연계 문제가 제기되었으나, 당분간은 내부 결속에만 주력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지방의 형평 청년들은 개인자격으로 또는 형평청년회 단위로 청년운동단체에 가입해 다른 사회운동에 접근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1926년에 접어들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1927년 4월 서울에서 개최된 제5차 형평사대회에서는 단체의 명칭을 조선형평사총본부로 바꾸었다. 1928년 4월 제6차 정기총회에서는 각지의 청년회를 해체하고 사내에 청년부를 두기로 결의하였다. 이 때 일반 사회단체와 제휴하여 합리적 사회건설을 기한다는 등의 청년부 강령을 채택하였다. 이 무렵부터 다른 사회운동과의 제휴문제를 둘러싸고 제휴를 주장하는 임평산(林平山) · 심상욱(沈相昱) · 이종률(李鍾律)을 중심으로 한 신파와 전통적인 균등운동을 계속하자는 장지필 · 김종택(金鍾澤) · 길순오(吉淳吾) 등을 중심으로 한 구파간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이는 1929년 제7차 정기대회에서 표면화되었다. 1929년 말부터 1932년에 이르기까지 세계대공황의 여파로 학생·노동자·농민들이 식민통치에 반대하는 대중투쟁에 진출하면서 형평사 내에서도 기존의 조직을 해소하고 혁명을 준비하기 위한 조직을 재결성해야 한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형평사는 1931년의 해소 논쟁과 1933년의 일명 ‘형평청년전위동맹사건’을 겪으면서 그 세력이 급격히 퇴조하였다. 이후 형평사는 경제적인 친목이익단체로서 명맥을 유지하다가 1935년 4월에 일제의 식민통치에 영합하는 단체인 대동사(大同社)로 전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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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3.1독립운동기념터 표지석(보성사 터)
보성사는 1910년 서울에 설립되었던 인쇄소이다. 설립 당시 천도교에서는 중앙교당에 창신사(彰新社)를 설립하고 천도교관계 서적 및 교회기관지인 ≪천도교월보 天道敎月報≫를 간행하였다. 1910년 말 천도교에서 보성학원(普成學院)의 경영권을 일체 인수하면서 따라 동교(同校)에 속해 있던 보성사인쇄소를 창신사와 병합하고 그 명칭을 그대로 보성사라 하였다. 이 보성사는 최남선(崔南善)이 설립한 광문회(光文會)의 신문관(新文館)과 더불어 당시 인쇄계를 주도하였다. 보성사는 비단 ≪천도교월보≫나 교회서적 및 학교교과서의 인쇄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한국출판문화 향상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그러나 한때 보성사의 적자가 누적되자 교회간부는 손병희(孫秉熙)에게 보성사의 폐쇄를 건의한 적도 있었다. 보성사의 업적 중 가장 큰 것은 1919년 3·1운동 때 발포된 독립선언서의 인쇄였다. 1919년 2월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가 신문관에서 조판된 뒤 보성사로 넘겨졌다. 그달 27일 사장 이종일(李鍾一)은 공장감독 김홍규(金弘奎), 총무 장효근(張孝根)과 같이 오후 6시부터 10시까지 극비리에 인쇄를 완료하였다. 총 2만 1000매의 선언서를 성공적으로 인쇄한 후 이종일의 집에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 이 선언서를 28일 각지에 보냄으로써 3월 1일 독립선언식을 거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던 도중 인쇄소의 작업소리를 듣고 형사 신승희(申勝熙)가 현장을 목격하였다. 이에 놀란 이종일이 형사의 옷자락을 잡고 밖으로 끌고 나와 뒤에 손병희로부터 받은 5,000원을 주며 눈감아주기를 간청해서 위기를 넘겼다. 또 10시가 넘어 인쇄 완료된 선언서를 손수레에 싣고 교당으로 가는 도중 일본경찰의 검문을 받았으나, 손수레의 짐은 인쇄된 족보라고 속여 무사히 옮길 수가 있었다. 이와 같이, 보성사에서 인쇄된 독립선언서가 무사히 은닉됨으로써 3·1운동이 예정대로 진행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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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대학 표지석
1909년 신민회(新民會)는 만주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기로 하고 이동녕(李東寧)·이회영(李會榮)·장유순(張裕淳) 등을 기지 건설지 답사를 위해 만주에 파견하였다. 1910년 7월 이들은 남만주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柳河縣三源堡鄒家街)에 우선 정착하였다. 그 뒤 토착민의 배척이 심해 일상생활에 지장을 많이 받았으나, 1911년 봄 한인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국내에서 모여드는 청년들에게 구국이념과 항일정신을 고취시켜 조국광복의 중견간부로 양성시킬 목적으로 신흥강습소를 설치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이었다. 소장 이동녕, 교관 김창환(金昌煥)·남상복(南相復)·이장녕(李章寧)·이세영(李世永) 등에 의해 운영되어, 1911년 4월 제1기 졸업생 변영태(卞榮泰)·성준용(成駿用)·김련(金鍊) 등 유수한 애국 청년 40여 명을 배출하였다.삼원보는 교통이 번잡하고 국제적 이목을 받기 쉬운 곳이라 판단하고, 인적이 드문 벽지로 옮기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모아짐에 따라 통화현(通化縣) 제6구 합니하(哈泥河)로 옮기게 되었다.강습소의 본관 건물을 세우기 위해서는 광활한 토지를 매수해야 하는 등 막대한 경비와 인력이 필요했다. 이에 이석영(李石榮) 소유의 전답(6,000석)을 매각한 돈으로 경비를 충당했고, 아울러 선생과 학생들의 노동력이 합쳐져 마침내 신흥강습소를 준공할 수 있었다. 본관이 낙성된 뒤, 1913년 신흥중학교로 개칭하고 중학반과 군사반을 두었다가 중학반은 폐지하여 지방중학에 인계하고 군사반만 전력하였다. 그런데 각지 애국 청장년들이 모여들면서 전부 수용할 수 없게 되자, 1919년 유하현 제3구 고산자가(孤山子街)로 이전함과 동시에 신흥중학교를 점진적으로 폐교하고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신흥무관학교의 설립 이후의 행보가 순탄치만은 않았다. 학교가 설립된 다음해부터 2년간 지속된 대흉작, 지방색에 의한 윤치국(尹致國) 학생 피살 사건, 마적에 의한 중견간부 윤기섭 등 납치 사건 등이 연이어 발생하였다. 이에 실망한 이시영은 봉천으로, 이동녕은 러시아령으로 가는 바람에 권위 있는 독립투사 양성기관이자 명실상부한 독립운동의 요람이었던 신흥무관학교는 막대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그러나 절망 속에서도 윤기섭·김창환·여준(呂準) 등의 굴하지 않는 기백과 인종(忍從)으로 각 촌락을 전전하면서 구걸을 하여 학생들의 굶주림을 달래며 학교의 명맥을 유지해 나갔다. 3·1운동 이후 수많은 우국지사들이 해외로 망명하였는데, 이들은 특히 만주에서 무력항일투쟁을 벌려나갔다. 이때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 육군 중위 지청천(池靑天), 윈난(雲南)사관학교 출신 이범석(李範奭) 등 유수한 무관들이 들어오면서 입학을 지원하는 학생들이 날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일제의 가중되는 탄압과 잇단 사고 등으로 1920년 가을 폐교되고 말았다. 폐교된 그 날 지청천은 사관생도 300명을 인솔하고 백두산지역 안도현(安圖縣) 삼림지대로 들어가 홍범도(洪範圖)의 부대와 연합하였다. 김좌진부대의 뒤를 따라 밀산(密山)에 도착하여 대한독립군단 결성에 참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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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매일신보 창간사옥 표지석
대한매일신보 창간사옥은 대한제국 말기 대표적인 항일민족언론이었던 『대한매일신보』가 창간될 당시의 사옥이 있던 곳이다. 『대한매일신보』는 1904년 7월 18일 박동(현 수송동)에서 영국인 신문기자 베델(1872∼1909)을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양기탁(1871∼1938)을 총무로 하여 창간되었다. 처음에 국문 2면, 영문 4면으로 발행하던 것을 1905년 8월부터 국한문혼용판과 영문판으로 나누어 발행했는데, 이때 박은식·신채호 등이 논설위원으로 참여하였다. 이후 사업이 확장되면서 1907년 1월 원구단 신작로 입구 북편의 석정동(현재 프레지던트호텔 부근)으로 사옥을 이전하였다. 그리고 1907년 5월 30일부터 국한문판·영문판·순한글판 세 종류의 신문을 발행했는데, 발행부수가 1만 부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무렵 『대한매일신보』는 비밀결사 신민회의 기관지 역할까지 담당하면서, 의병을 비롯한 항일투쟁에 대한 사실 보도와 일제 침략을 비판하고 국민들의 애국심을 고취하는 논설을 통해 민족언론으로서 확고히 자리매김을 하였다. 베델(1872~1909) 1904년부터 1909년까지 대한제국에서 활동한 영국 언론인이다. 코리아 데일리 뉴스와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일제의 부당한 행위를 비판하는 글과 사진을 보도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언론을 통한 그의 반일적 행동은 일제의 미움을 샀고 통감부는 주한 영국영사관에 강력한 항의를 하게 된다. 그 결과 베델은 두 차례에 걸쳐 영사관 재판을 받고 상하이에 있던 영국영사관 형무소에 이송되어 옥고를 치렀다. 서울에 돌아온 이후에도 일제는 베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견제했다. 이를 견디다 못한 그의 건강은 악화되고 말았고 결국 1909년 5월 1일 37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지게 되었다. 그의 시신은 양화진외국인묘지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1950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양기탁(1871~1938)은 1904년 7월에 영국인 베델과 합작하여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였다. 당시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하여 사장은 영국인 베델이 맡고, 총무를 양기탁이 맡았으나 실제로는 양기탁이 신문사를 총지휘하였다. 특히 양기탁은 의병운동을 상세히 보도하여 애국운동으로 높이 평가하고 의병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이 때문에 양기탁이 제작하는 『대한매일신보』는 애국계몽운동 뿐만 아니라 의병운동의 대변지까지 되어 이 시기의 모든 국권회복운동의 중심적 언론기관으로 활동하였다. 1907년 4월에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로서 신민회를 창립하여 총감독을 맡았다. 신민회는 전국의 주도적 애국계몽운동가 800여명을 입회시키어 한말 애국계몽운동을 실질적으로 배후에서 모두 지도하고 발전시켰다. 1909년 봄에는 국권회복을 위해 만주에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기지를 창건하고 독립군을 양성할 계획을 세웠다. 1910년 12월에는 이동녕 이회영 등을 출발시키어 결국 독립군 기지를 개척하고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는데 성공하였다. 양기탁은 임시정부의 국무령 또는 주석으로 몇 차례 추대되었으나 거절해 오다가 1933년 10월에 국무령(국무위원)에 취임하여 1935년 10월까지 2년간 임시정부의 대표로 있었다. 이와 동시에 그는 조선혁명당의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1937년에는 조선혁명당의 대표로서 한국국민당 및 한국독립당과 연합하여 한국광복진선을 결성하였다. 이렇게 조국광복을 위하여 동분서주하던 중 1938년 중국 강소성에서 병으로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독립운동에 끼친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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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유적지 표지석(상춘원)
낙산 남동쪽 자락에 위치한 상춘원(常春園)은 1912년 천도교에서 매입해 천도교회의 3대 기념일 행사를 비롯한 각종 모임을 열던 곳으로, 교주 손병희가 별장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1919년 1월경 권동진·오세창·최린 등 천도교 지도부는 손병희가 머물던 상춘원에서 수차례 모임을 갖고, 파리강화회의 개최에 즈음한 국내·외 정세와 민족자결 원칙에 입각하여 대대적인 독립운동 계획을 논의하였다. 이 자리에서 손병희는 독립운동의 3대 원칙으로 대중화·일원화·비폭력의 방침을 제시했다고 한다. 상춘원은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출옥한 손병희가 1922년 5월 19일 62세를 일기로 숨을 거둔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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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무관학교 표지석
사관 양성소는 일제의 주도 아래 설치된 근대적인 무관 양성의 최초의 교육 기관이었다. 하지만, 같은 해 8월명성황후(明成皇后)시해사건에 개입함으로써 9월에 폐지되었다. 그 후 사관 양성의 필요성이 재기되면서 1896년 1월 무관학교 관제 공포와 함께 무관학교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무관학교는 설립된 지 한 달 만에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또다시 무용화되고 말았다. 1897년 2월 고종이 환궁한 뒤 대한제국이 선포되고 나서 1898년 7월 1일 무관학교가 군부 소속으로 설립되었다. 학교 직원은 참령(參領)인 교장 1인(군사 과장 겸임), 부관·의관·교두(敎頭) 각 1인, 교관 3인, 조교 8인, 이밖에 번역관·번역보·주사·전어생(傳語生) 등으로 구성되었다. 군부 대신이 정한 학도의 입학 요건은 연령 20∼30세의 신체 건장하고 총명한 자 중에 군부의 장·영·위관이나 칙임관의 추천이 있어야 하였다. 그리고 추천인은 학도가 학교를 그만두게 될 때도 책임을 지도록 하였다. 3과로 나누어 제1·2과는 속성과로 군부 대신이 정하는 기간 동안 수업, 훈련하게 하고, 제3과는 졸업과로 5년의 교육을 받도록 하였다. 관비로 충당되는 학비 외 학도들에게 일정한 수당금을 지급하였다. 교수 과목은 무술학·군제학·병기학·축성학(築城學)·지형학·외국어학·군인 위생학 및 마학(馬學) 등이고, 훈육 과목으로 교련·마술·체조·검술·군용문장 및 제근무의 훈회(訓誨) 등이었다. 1899년 무관학교는 원수부(元帥府) 검사국 소관으로 옮겨지고 학도 추천의 범위도 넓어졌다. 즉, 입학 연령은 23세 이하로 축소된 반면, 50인 이내의 사비 학생의 입학이 허가된 것이다. 당시 관비 학생 수는 대개 200인이었는데, 1900년 1월 장연창(張然昌)을 비롯한 128인의 첫 졸업생이 배출되었다. 그해 9월 개정된 관제에 따라 학술에 관한 교육은 교관단이 맡고, 훈련교육은 학도대가 맡으면서 이원화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원수부를 폐지하고 무관학교를 9월에 신설된 교육부에 이관, 소속시켜 일본식으로 개편하였다. 이듬해 2월 교육부가 폐지되면서 다시 군부의 지휘, 감독을 받게 되었다. 당시 무관 학도는 유년학교 졸업생으로 수학 연한 3년을 원칙으로 하였다. 1904년 9월 무관학교를 장교 양성 기관으로 만들어 종래의 천거 제도는 폐지하고 3년간의 육군유년학교 졸업생을 입학시킴으로써 졸업 기한은 총 6년으로 연장되었다. 그러나 1907년 8월 일제에 의해 군대가 강제 해산되면서 무관학교의 모집 정원이 15인으로 축소되었다. 그 후 1909년 9월 무관학교가 폐지되면서 사관양성은 일본국 정부에 위탁한다는 조칙이 발표되었다. 근대적인 군사 제도의 개편과 함께 설치된 무관학교가 그 기능을 그나마 발휘하였던 것은 1898년에서 1904년까지 6년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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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시경 흉상
주시경(1876-1914)의 이칭은 백천, 호는 한흰샘이며, 일제강점기 『국어문법』, 『말의 소리』 등을 저술한 국어학자이다. 서당에서 한문을 계속 배우면서 신학문에 눈뜨자 1894년 9월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하였다. 도중에 인천부 관립이운학교(官立利運學校) 속성과 관비생으로 선발되어 졸업하였으나, 정계의 격변으로 해운계로의 진출이 무산되고, 1896년 4월 다시 배재학당 보통과에 입학하였다. 마침 1896년 4월 『독립신문』을 창간한 서재필(徐載弼)에게 발탁되어 독립신문사 회계사무 겸 교보원(校補員)이 되었다. 순한글 신문제작에 종사하게 되자, 그 표기통일을 해결하기 위한 국문동식회(國文同式會)를 조직하여 그 연구에 진력하였다. 동시에 서재필이 주도하는 배재학당협성회 · 독립협회에 참여하였다가 그의 추방과 함께 물러나서 『제국신문』 기재(記載), 영국 선교사 스크랜턴(Scranton, W. B.)의 한어교사,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 강사를 지내면서 1900년 6월에 배재학당 보통과를 졸업하였다. 그러나 신학문에 대한 지식욕은 대단하여 야간에 흥화학교(興化學校) 양지과(量地科)를 마치고, 정리사(精理舍)에서는 수물학을 3년 간 34세가 되도록 공부하는 열성을 가졌다. 경력으로는 간호원양성학교 · 공옥학교(攻玉學校) · 명신학교(明信學校) · 숙명여자고등학교(淑明女子高等學校) · 서우학교(西友學校) 교원 등을 역임하였고, 협성학교(協成學校) · 오성학교(五星學校) · 이화학당(梨花學堂) · 흥화학교(興化學校) · 기호학교(畿湖學校) · 융희학교(隆熙學校) · 중앙학교(中央學校) · 휘문의숙(徽文義塾) · 보성중학교(普成中學校) · 사범강습소 · 배재학당 등의 강사를 맡아 바쁜 생활을 보냈다. 그 담당과목은 1913년 3월 중앙학교의 예로 보아서 지리 · 주산 · 조선어 등으로 광범하나, 그의 연구업적으로 보아 국어교육이 중심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활동은 계몽운동 · 국어운동 · 국어연구로 나누어지는데, 계몽운동은 배재학당협성회 전적과(典籍課) 찬술원, 독립협회 위원, 『가정잡지』 교보원, 서우학회 협찬원, 대한협회 교육부원, 보중친목회 제술원(製述員) 등을 통한 애국계몽운동이었다. 이에 관한 논저는 『가정잡지』와 『월남망국사』(1907), 『보중친목회보』 등에 나타나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국어국문의 과학적 연구와 교육이 민족의 독립과 발전에 끼친 공훈을 기리어 1980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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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필드 기념관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1889-1970)는 1889년 영국 워릭셔(Warwickshire) 럭비(Rugby)에서 태어났다. 런던 할리(Harley)칼리지와 쿠퍼스(Coopers)스쿨에서 공부하였다. 고등학교 과정까지 영국에서 마치고 농장 노동자로 일하였다. 1907년 홀로 캐나다 토론토로 이주하여 농장에서 일하면서 토론토대학교 온타리오 수의과대학에 들어가 세균학을 전공하였고, 1911년 세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13년 피아노를 전공한 앨리스와 결혼하였다. 1914년부터 모교인 캐나다 토론토대학교 온타리오 수의과대학에서 세균학 강사로 재직하였다.1916년 11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장 올리버 알 애비슨(Oliver R. Avison)의 초청과 권고로 아내와 함께 한국에 오게 되었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서 교수가 되어 세균학, 위생학을 강의하였다. 1917년 선교사 자격 획득을 위한 한국어 시험에 합격하였고, 영어성경반을 조직해 한국인 남녀 학생들에게 영어와 인품 교육을 시작하였다. 1919년 3.1운동 준비 때 민족 대표의 한 사람인 이갑성(李甲成)과 비밀리에 만나 민족 거사를 위한 해외 정세 파악과 홍보 임무를 맡고 3.1운동 발발 때 서울 일대의 만세 시위 현장을 사진 촬영하고 이를 전 세계로 확산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1919년 4월 5일 경기도 수원군 장안면 수천리[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장안면 수촌리], 4월 15일 수원군 향남면[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에서 일본 경찰의 대대적인 탄압으로 한국인들이 학살되고 한국인 마을이 소실되는 참상을 듣고 4월 18일 직접 현장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현장을 답사한 기록을 「제암리 학살 만행 보고서」라는 제목으로 캐나다 선교본부에 보내 일본의 학살 만행을 전 세계에 알렸다. 1919년 5월 서대문형무소의 여자 감방을 심방하고 일본의 비인도적인 만행을 중지할 것을 호소했고 『서울프레스(The Seoul Press)』에 일본의 행위를 비판하는 글을 실었다. 이후 ‘수촌리 학살 만행’, ‘한국에서 일본의 개혁’, ‘한국에서 행해지는 일본의 고문’ 등의 글을 『The Japan Advertiser(재팬 애드버타이저)』, 『The Presbyterian Witness(프레스비테리안 위트니스)』, 『The Globe(글로브)』, 『워싱턴 포스트(The Washington Post)』 등지에 기고하며 일본의 식민 통치를 규탄하였다. 1920년 4월 일본의 추방 압력으로 한국을 떠나 5월 캐나다에 정착한 후 한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선전 홍보를 계속하였다. 1958년 한국 정부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한 뒤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에서 수의병리학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이후 한국과 캐나다를 오가며 후학을 양성하며 한국의 정치 상황에 대한 조언과 비판을 아끼지 않았다. 1970년 4월 12일 81세로 별세하였다. 그의 장례는 4월 16일 광복회 주최의 사회장으로 엄숙히 거행되었다. 유해는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