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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에 위치한 국가보훈부 소속 박물관이다. 기념관은 이전에 서대문구의회 건물이 있었던 부지에 건설됐고, 본래 2021년 11월 23일[2]에 개관할 예정이었으나 추가 공사로 연기되어 2022년 3월 1일에 정식 개관했다. 지상 4층, 지하 3층 건물로 상설전시실 3개와 특별전시실 1개로 구성되어 있다. 2019년 3.1 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계획이 추진됐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관련 기념 시설들이 상하이, 충칭 등 중국에 소재하고 있기 때문에 접근성이 떨어졌다. 이에 국내에도 기념관을 건립해 자주독립과 민주공화제의 정신을 후대에 전승하는 것이 기념관 건립의 목적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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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세복 추모비
윤세복(1881-1960)의 자는 상원이며, 해방 이후 초대 총전교를 역임한 대종교인이다. 1910년 12월 서울에 올라와 대종교에 입교하였다. 다음 해 정월 시교사(施敎師)로 선임되자, 가산 수천 석을 정리하여 남만주로 옮긴 뒤 사재를 들여 환인현(桓仁縣)에 교당을 설립하여 시교에 힘쓰는 한편, 환인현에 동창학교(東昌學校), 무송현(撫松縣)에 백산학교(白山學校), 북만주 밀산당벽진(密山當壁鎭)에 대흥학교(大興學校), 영안현(寧安縣)동경성(東京城)에 대종학원(大倧學園)을 설립 또는 경영하며 5년 동안 교육에 진력하였다. 1916년 무송현 등 여러 곳에 교당을 설립하여 7,000여 명의 교인을 새로이 모으는 한편, 흥업단(興業團)·광정단(光正團)·독립단 등의 단체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1924년 선종사(先宗師)인 무원종사(茂園宗師:金敎獻)의 유명을 받고 영안현 남관(南關)에서 교통(敎統)을 이어 제3대 도사교[敎主]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취임 후 4년 만인 1928년에 일본군부의 압력에 눌려 장쭤린(張作霖)이 체결한 이른바 삼시조약(三矢條約)의 부대조항에 의하여 대종교 금지령이 내려지자, 부득이 총본사를 밀산 당벽진으로 옮기는 수난을 겪었다. 이 금지령은 상해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요인 박찬익(朴贊翊)의 외교활동으로 1930년 난징(南京)의 국민정부가 봉천·길림·흑룡강·열하 등의 동북4성에 대한 대종교 해금령을 내림으로써 한번 해제되었다. 그러나 다음 해인 1931년부터 일본군의 만주침략이 격심해지면서 교단활동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동·서·북 3개의 도본사(道本司)가 해체되었고, 1930년에는 서울에 있는 남도본사(南道本司)마저 폐쇄되는 등 극히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그는 일제의 가혹한 탄압을 무릅쓰고 교세확장을 위하여 분기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1934년 영안현 동경성으로 총본사를 옮겨 단군영정을 모신 천진전(天眞殿)을 세웠다. 또한 대종학원을 설립하고 하얼빈에 선도회(宣道會)를 설치하여 대대적인 교적간행사업(敎籍刊行事業)을 추진하면서 단군천진궁의 건축을 서둘렀다. 이런 활동을 벌이던 중 1942년 교단간부들과 함께 일본경찰에 붙잡혀 무기형을 선고받았는데, 이 사건을 교단내에서는 임오교변이라고 부른다. 광복과 더불어 출옥하여 이듬해인 1946년 귀국, 서울에 총본사를 설치하였다. 그뒤 교세확장을 위한 교당의 설치, 교단조직의 정비강화, 단군전의 봉안, 교적간행, 인재양성을 위한 홍익대학의 설립 등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특히, 교단체제를 민주화하여 전통적인 교통전수제(敎統傳授制)를 선거에 의한 총전교선임제(總典敎選任制)로 바꾸고, 현대사회에 맞는 조직체제로 정비, 강화하여 초대 총전교에 취임하였다. 1962년에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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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헌 추모비
김교헌(1868-1923)의 자는 백유, 호는 무원, 보화, 이칭은 김헌이며, 일제강점기 대종교 제2대 교주이다. 1885년 정시문과에 급제, 한림옥당·병조참의·예조참의·성균관대사성 등을 역임했다. 1898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대중계몽운동을 하였고, 개혁내각 수립과 의회개설운동이 좌절되어 17명의 독립협회 지도자가 구속되자 대표위원으로 선정, 만민공동회운동을 전개하였다. 1903년『문헌비고(文獻備考)』 편집위원이 되었다. 1906년 동래감리 겸 부산항재판소판사(東萊監理兼釜山港裁判所判事)와 동래부사로 재직하였다. 그 뒤 비밀단체인 신민회(新民會) 회원과 교우 관계를 맺었으며,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에 들어가 현채(玄采)·박은식(朴殷植)·장지연(張志淵) 등과 함께 고전간행사업에 참가하였다. 1909년에는 규장각부제학으로서 『국조보감(國朝寶鑑)』 감인위원(監印委員)을 겸직하였고, 1910년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었다. 일찍이 민족의 기원과 민족사의 연구에 뜻이 깊어, 대종교가 중광(重光)된 해부터 교인이 되어 각종 문헌을 섭렵, 교(敎)의 역사를 정립하였다. 한편, 영계(靈戒)를 받고 총본사(總本司)의 부전무(副典務)·경리부장을 지내고, 도사교위리(都司敎委理)·남도본사전리(南道本司典理)·총본사전강(總本司典講)을 역임하였다. 1914년 단군 관련 문헌자료를 모아 『신단실기(神檀實記)』를 편찬하였다. 1916년 9월 나철(羅喆)의 뒤를 이어 대종교의 제2대 도사교[都司敎: 교주(敎主)]에 취임하였다. 1917년 일본의 탄압을 피해 총본사를 동만주 화룡현(和龍縣)으로 옮기고 교세 확장을 통한 독립운동 강화와 동포들에 대한 독립정신 교육에 전념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3월 11일 경 길림에서 발표한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같은해 12월 대종교 교인만으로 구성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조직, 총재에 교단(敎團)의 지도자인 서일(徐一)을 임명하는 등 적극적인 무력투쟁을 전개, 1920년 9월 청산리에서 김좌진(金佐鎭)이 대승리를 거두게 하였다. 그 뒤 일본군의 탄압을 피해 총본사를 영안현(寧安縣)으로 옮겨 선도포교사업(宣道布敎事業)을 통한 구국투쟁에 진력하였다. 1923년 『신단민사(神檀民史)』를 출간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그러나 만주 전역에 걸친 일본군의 토벌작전으로 독립운동 및 교단의 기반이 크게 붕괴되자 병을 얻어 죽었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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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일 추모비
서일(1881-1921)의 호는 백포, 본명은 서기학이며, 일제강점기 북로군정서 총재로 김좌진과 청산리전투에 참전한 독립운동가이자 종교인이다. 1898년까지 고향에서 한학(漢學)을 배우다가 경성함일사범학교(鏡城咸一師範學校)에 입학하여 1902년에 졸업하고 교육구국사업에 종사하였다. 경술국치 이후 탄압이 심화되자 국내에서 항일투쟁의 어려움을 느끼고 만주로 건너갔다. 1911년 두만강을 넘어오는 의병의 잔류병력을 규합하여 중광단(重匡團)을 조직하고 단장에 취임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무력에 의한 투쟁보다는 청년동지들에 대한 민족정신과 한학을 가르쳐 정신교육에 치중하는 한편, 교육에도 뜻을 두어 간도지방에 명동중학교(明東中學校)를 설립하고 교육사업에 종사하였다. 1918년 여준(呂準)·유동열(柳東說)·김동삼(金東三)·김좌진(金佐鎭) 등과 무오독립선언(戊午獨立宣言)을 발표함으로써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에 활기를 불어넣었고, 이듬해 중광단을 토대로 군사적 행동을 위해 계화(桂和) 등과 정의단(正義團)을 조직하였다. 1919년 대종교 2세교주인 무원종사(茂園宗師) 김헌(金獻)이 그에게 교통을 전수하려고 하였으나 독립군 양성과 일제에 대한 무력항쟁에 힘을 기울이기 위해 교통의 인수를 5년 뒤로 미루었다. 같은 해 8월현천묵(玄天默)·김좌진·계화 등과 함께 정의단을 개편하여 군정부(軍政府)로 만들고, 12월에는 다시 한 민족에게 두 개의 정부가 있을 수 없다 하여, 이것을 토대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편하면서 총재에 취임하였다. 또한 틈틈이 대종교의 교리를 연구하며 수도에 힘써 교리를 현대적으로 해석하여 저술에도 힘을 기울이며 포교활동도 하였다. 군정서는 각처에 정보연락망을 구축하고 대종교 신도들의 헌금과 함경도민이 마련해준 군자금을 바탕으로 하여 정규병력 1,500명으로 지방치안을 유지하고 신병모집과 무기수입을 담당하였다. 또한 왕청현 십리평(十里坪)에 사관양성소(士官養成所)를 세워 중견사관을 길러내고, 각지에 야간강습소와 소학교를 설립하여 육영사업에도 힘을 기울였다. 1920년 김좌진과 함께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에서 일본 정규군을 크게 무찔렀고 병력을 북만(北滿) 밀산현(密山縣)으로 이동시켰다. 이듬해 일본군의 만주 출병으로 인해 밀산현으로 들어온 안무(安武)의 국민회군(國民會軍), 최진동(崔振東)의 도독부군(都督府軍) 및 의군부(義軍府), 광복단(光復團) 등 여러 독립군단을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하고 총재가 되었다. 1921년 6월 27일 자유시 수비대 29연대, 2군단 기병대대, 라키친 저격연대가 동원되어 사할린 부대에 대한 무장해제에 들어갔다. 그러나 러시아 군인과 항일무장독립군 부대원 사이 의사소통을 할 수 없었고 러시아 군인은 사할린 부대를 구분할 수 없었다. 동원된 러시아 부대는 무장을 한 항일무장독립군에 대하여 무차별적 공격을 감행하였다. 청년장병 다수가 희생당하는 흑하사변(黑河事變)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같은해 8월 27일 “나라 땅은 유리쪽으로 부서지고 티끌모래는 바람비에 날렸도다. 날이 저물고 길이 궁한데 인간이 어디메뇨.”라는 글귀를 남기고 대종교 수양법의 하나인 조식법(調息法)으로 자결하였다. 저서에 『오대종지강연(五大宗旨講演)』·『삼일신고강의(三一神誥講義)』, 그리고 계시를 받고 지었다는 『회삼경(會三經)』 등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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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철 추모비
나철(1863-1916)의 호는 홍암, 이칭은 나두영, 나인영이며, 일제강점기 대종교의 초대 교조. 독립운동가이다. 일본의 침략이 심해지자 관직을 사임하고 호남 출신의 지사(志士)들을 모아 1904년 유신회(維新會)라는 비밀단체를 조직하여 구국운동을 하였다. 을사조약 체결 직전인 1905년 6월오기호(吳基鎬), 이기(李沂), 홍필주(洪弼周) 등과 함께 일본에 건너가 “동양의 평화를 위하여 한·일·청 삼국은 상호 친선동맹을 맺고 한국에 대해서는 선린의 교의로써 부조(扶助)하라.”는 의견서를 일본의 정객(政客)들에게 제시하였으나 응답이 없자 일본의 궁성 앞에서 3일간 단식투쟁을 하였다. 그러던 중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조선과 새로운 협약을 체결한다는 소식이 각 신문에 발표되자, 나라 안에 있는 매국노들을 모두 제거해야 국정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단도(短刀) 두 자루를 사서 품에 넣고 귀국하였다. 교단에 전하는 말로는 서울에 도착하여 숙소로 걸어가는 도중에 한 백전 도인에게서 두 권의 책을 받았는데, 그 책이 바로 『삼일신고(三一神誥)』와 『신사기(神事記)』라고 한다. 1906년, 다시 한 번 일본의 반성을 촉구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당시 이토 히로부미와 대립관계에 있던 오카모토[岡本柳三助]·도야마(頭山滿) 등을 만나 협조를 구했으나 별 효과를 얻지 못하였다. 또한 귀국길에 폭탄이 장치된 선물상자를 구입하여 을사오적을 살해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07년 1월부터 암살 계획을 구체적으로 추진하여 3월 25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오적의 주살(誅殺)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서창보(徐彰輔) 등이 붙잡히고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자, 동지들의 고문을 덜어 주기 위해 오기호, 최인식(崔寅植) 등과 함께 평리원(平理院)에 자수하여 10년의 유배형을 받았다. 고종의 특사로 그 해에 풀려나서 1908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외교적인 통로에 의한 구국운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소득 없이 귀국하였다. 교단에 전하는 말로는 일본에 체류할 때 두일백(杜一白)이라는 도인이 찾아와서 단군교를 포교하는 일을 사명으로 여기라는 가르침을 주었다고 한다. 이후 귀국하자마자 오기호, 강우(姜虞), 유근(柳瑾), 정훈모(鄭薰模), 이기, 김인식, 김춘식(金春植) 등의 동지들과 함께 서울 재동에서 ‘단군대황조신위(檀君大皇祖神位)’를 모시고 제천의식을 거행한 뒤 단군교를 공표하였다. 이 날이 바로 중광절(重光節)이다. 곧 교직을 설치하고, 초대 교주인 도사교(都司敎)에 취임하여 5대 종지를 공포하였다. 또한 단군의 개국과 입도(立道)를 구분하여 서기전 2333년에 124년을 더하여 ‘천신강세기원(天神降世紀元)’이라고 하였다. 1910년 8월에는 대종교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1911년에는 대종교의 신관(神觀)을 삼신일체의 원리로 설명한 『신리대전(神理大全)』을 발간하는 한편, 강화도 마니산 제천단(祭天壇)과 평양의 숭령전(崇靈殿)을 순방하고 만주 화룡현 청파호(靑波湖)에 교당과 지사(支司)를 설치하였다. 이와 같은 교세의 급속한 확장에 당황한 일제는 1915년 종교통제안(宗敎統制案)을 공포하고 대종교를 불법화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교단이 존폐의 위기에 봉착하자 1916년 음력 8월 4일, 상교(尙敎) 김두봉(金枓奉)을 비롯한 시봉자(侍奉者) 6명을 대동하고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三聖祠)에 들어가 수행을 시작하였다. 그리고는 사당 앞 언덕에 올라 북으로는 백두산, 남으로는 선조의 묘소를 향해 참배한 뒤 “오늘 3시부터 3일 동안 단식 수도하니 누구라도 문을 열지 말라.”고 문 앞에 써붙인 뒤 수도에 들어갔다. 그러나 16일 새벽 이상스럽게 인기척이 없어 제자들이 문을 뜯고 들어가니, 8월 15일 그는 자신이 죽음을 택한 이유를 밝힌 유서를 남기고 폐기법(閉氣法)으로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그의 유언에 의하여 청파호 언덕에 유해를 안장하였으며, 그 후 대종교에서는 그가 운명한 날을 가경절(嘉慶節)이라 하여 4대경절(四大慶節)의 하나로 기념하고 있다. 1962년에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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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기념관
김창숙(1879-1962)의 자는 문좌, 호는 심산, 벽옹이며, 조선후기 『심산만초』, 『벽옹만초』, 『벽옹칠십삼년회상기』 등을 저술한 유학자,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1905년(고종 42)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승희와 함께 상경하여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를 올리고 이완용(李完用)을 비롯한 매국오적을 성토하였다. 1908년(순종 2) 대한협회 성주지부를 조직하여 계급타파를 부르짖었다. 1909년 일진회(一進會)가 한일합병론을 제창하자 동지들을 규합하여 중추원에 그들의 반역을 성토하는 글을 보냈으며, 단연회(斷煙會)의 기금으로 사립 성명학교(星明學校)를 설립하여 신교육을 시도하였다.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음주로 세월을 보내다가 어머니의 교훈에 따라 유학에 정진하였다. 유학적 소양과 한학의 조예는 주로 이 시기에 기반이 닦여졌다. 3 · 1운동이 일어나자 전국의 유림을 규합해서 130여 명의 연명으로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유림단의 진정서를 작성하여 중국 상해로 망명한 뒤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우편으로 제출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제1차 유림단사건’이다.1924년 만주와 몽고 접경지대의 황무지를 빌려서 개간하여 새로운 독립운동기지 건설계획을 추진하였다. 그 곳에 군정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자금조달문제로 국내에 잠입하여 모금운동을 전개하다가 탄로 나자, 거듭 출국하는 이른바 ‘제2차 유림단사건’을 일으켰다. 독립운동을 고양시키기 위해 신채호(申采浩) 등과 함께 독립운동지인 『천고(天鼓)』를 발행했고, 이어 박은식(朴殷植) 등과 협력하여 『사민일보(四民日報)』도 발간하였다. 또,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조직해 군사선전위원장으로 활약하였으며, 1925년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1945년 일제 말기의 비밀결사인 조선건국동맹의 남한 책임자로 추대되었다가 광복 직전에 발각되어 구속되었으며, 왜관경찰서에서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이후 곧 상경하여 민주의원(民主議院)의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 정당의 난립과 신탁통치의 찬반, 미소공동위원회 참가여부의 문제 등으로 일반 정치인들과 의견이 맞지 않아 정치에 깊이 관여하지 않고 육영사업에 힘썼다.1946년 봄 전국유림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자 유도회총본부(儒道會總本部) 위원장으로 선출되고, 성균관장을 겸임하였다. 이어 유교이념에 입각한 교육을 실시하고자 성균관대학기성회를 결성하였다. 이석구(李錫九)로부터 재단법인 학린회(學鄰會)의 토지재산을 기부 받고 명륜전문학교(明倫專門學校)를 병합하여 1946년 9월 25일 성균관대학의 설립을 인가받고 초대학장에 취임하였다.1953년 2월 6일 전국에 흩어져 있는 향교재단을 규합하여 성균관대학의 종합대학 승격을 인가받고, 초대총장에 취임하였으며, 1955년 재단 내 분규로 사임하였다. 1962년 세상을 떠나자 사회장으로 장례가 치러졌으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수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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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탑
삼일탑은 이 탑은 3.1절 41주년(1960.3.1)을 맞이하여 당시 학생들이 모은 성금 2백만환으로 옛 경성중학교의 산사를 헐고 그 자리에 세워졌다. 숭고한 3.1정신을 기리고 학생들에게 민족의 얼인 독립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건립된 이 탑은 당시 미술교사였던 윤성호 선생이 설계하였고, 탐 중앙의 '大韓獨立萬歲'는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이신 이갑성옹의 휘호이다. 이 탑의 상부에는 3.1운동의 상징인 태극기가 그려져 있으며, 하부에 있는 3개의 계단은 삼천리 강토를, 단 위에 높이 솟아 있는 4각혀의 기둥은 삼천만의 민족 정기를, 기둥 4면에 새겨져 있는 3조의 긴 선은 삼천만 우리 겨레를 상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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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헌기념관
윤봉길(1908 - 1932)의 일제강점기 훙커우공원 투탄의거와 관련된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본명은 윤우의(尹禹儀)이고 충청남도 예산 출신이다. 아버지는 윤황(尹璜)이며, 어머니는 경주김씨로 김원상(金元祥)이다. 1918년 덕산보통학교(德山普通學校)에 입학했으나 다음 해에 3 · 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자극받아 식민지 노예교육을 배격하면서 학교를 자퇴하였다. 이어 최병대(崔秉大) 문하에서 동생 윤성의(尹聖儀)와 한학을 공부했으며, 1921년 성주록(成周錄)의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사서삼경 등 중국 고전을 익혔다. 1926년 서숙생활을 마치고 농민계몽 · 농촌부흥운동 · 독서회운동 등으로 농촌 부흥에 전력하였다. 다음 해 이를 더욱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농민독본(農民讀本)』을 저술하고, 야학회를 조직해 향리의 불우한 청소년을 가르쳤다. 1929년 부흥원(復興院)을 설립해 농촌부흥운동을 본격화했으며, 그 해 1월 초부터 1년간 기사일기(己巳日記)를 쓰기 시작하였다. 그 해 2월 18일 부흥원에서 학예회를 열어 촌극 「토끼와 여우」를 공연해 성황리에 마치게 되자 일제 당국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이에 구애받지 않고 지방 농민들을 규합해 자활적 농촌진흥을 위해 월진회(月進會)를 조직, 회장에 추대되었다. 또, 수암체육회(修巖體育會)를 설치, 운영하면서 건실한 신체 바탕으로 독립정신을 고취하고자 하였다. 1930년 “장부(丈夫)가 집을 나가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라는 신념이 가득찬 편지를 남기고 채 3월 6일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도중에 선천(宣川)에서 미행하던 일본경찰에 발각되어 45일간 옥고를 치렀다. 그 뒤 만주로 탈출, 그 곳에서 김태식(金泰植) · 한일진(韓一眞) 등의 동지와 함께 독립운동을 준비하였다. 그 해 12월에 단신으로 다롄[大連]을 거쳐 중국 칭다오[靑島]로 건너가 1931년 여름까지 현지를 살펴보면서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모색하였다. 이곳에서 세탁소의 직원으로 일하면서 모은 돈을 고향에 송금하기도 하였다. 1931년 8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활동무대를 옮겨야 보다 큰일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상해로 갔다. 상해 프랑스조계 샤비루화합방[霞飛路和合坊] 동포석로(東蒲石路) 19호 안공근(安恭根)의 집 3층에 숙소를 정하였다. 우선 생계를 위해 동포 실업가 박진(朴震)이 경영하는 공장의 직공으로 일하면서 상해영어학교에서 공부하였다. 그러면서 노동조합을 조직해 새로운 활동을 모색하였다. 그 해 겨울에 임시정부의 김구(金九)를 찾아가 독립운동에 신명을 바칠 각오임을 호소하였다. 1932년 한인애국단의 이봉창(李奉昌)이 1월 8일 동경에서 일본왕을 폭살하려다가 실패하자 상해 일대는 복잡한 상황에 빠졌다. 더욱이 일제는 1월 28일 고의로 죽인 일본승려사건을 계기로 상해사변을 도발하였다. 이때 일본은 시라카와[白川義則]대장을 사령관으로 삼아 중국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윤봉길은 이 해 봄 야채상으로 가장해서 일본군의 정보를 탐지하였다. 4월 26일 한인애국단에 입단해 김구의 주관 하에 이동녕(李東寧) · 이시영(李始榮) · 조소앙(趙素昻) 등의 협의와 동의 아래 4월 29일 이른바 천장절(天長節) 겸 전승축하기념식에 폭탄을 투척하기로 하였다. 식장에 참석해 왕웅(王雄, 본명은 金弘一, 중국군 현역 군인 신분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를 도와 윤봉길, 이봉창의 거사를 지원)이 만들어 폭발시험까지 했던 수류탄을 투척하였다. 이때 상해 파견군사령관 시라카와, 상해의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다[河端貞次] 등은 즉사하고, 제3함대사령관 노무라[野村吉三郎] 중장, 제9사단장 우에다[植田謙吉]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쓰[重光葵] 등이 중상을 입었다. 거사 직후 현장에서 잡혀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 해 11월 18일 일본으로 호송되어 20일 오사카[大阪]위수형무소에 수감, 가나자와[金澤]에서 12월 19일 총살형으로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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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학원, 김구주택 기념비
김구(1876~1949)는 황해도 해주목 출신이다. 독립운동가이자 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보수정당의 1세대 정치인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안창호, 이승만 등과 함께 지도자 출신 중 최순위권에 손꼽히는 인지도와 영향력을 가진 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동학 농민 혁명과 교육계몽운동에 참여했고, 1919년에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직접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내무총장 겸 노동국 총판, 국무령, 의정원 의원, 국무위원 겸 내무장, 재무장, 군무장을 거쳐 1940년 임시정부 주석에 선출되었고, 1945년까지 주석을 역임하며 임시정부의 지도자 역할을 수행했다. 광복 이후에는 본인은 반공주의자였지만 남북 분단과 남한 단독 정부 수립에는 반대하면서 통일론을 포기하지 않다가 1949년에 서울 경교장에서 반대 세력에 의해 암살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최고 명예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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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섬만세운동기념비
1919년 3월 1일 기미 독립선언서가 인사동 태화관에서 낭독된 것을 기점으로 전국으로 만세운동이 퍼져나갔다. 이때, 성동(뚝섬지역)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은 당시 서울을 둘러싼 지역 (당시 고양군) 전체에서 가장 크고 격렬한 만세운동이었다. 성동구는 성동역사문화연구회와 함께 성동문화역사 사업을 추진하던 중 한 주민으로부터 뚝섬에서 일어난 3·1만세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점검하게 됐는데, 당시 뚝섬의 우체국 관사, 지주집 등 많은 역사적 사료를 토대로 위의 역사적 사건을 확인하였고 이를 기념하고자 2021년 3월 1일에 본 비를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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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 집(심우장)
만해 한용운(1879-1944)은 충청남도 홍성 출신의 불교인이자 저항 시인이다. 1894년의 동학혁명에 가담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만주 간도성 등을 다니며 광복 운동을 하다가, 1905년에 인제의 백담사(百潭寺)에서 승려가 되었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인사동의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 33인을 대표하여 그가 인사말을 함으로써 독립선언식을 끝내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6년에는 시집 「님의 침묵」을 발간하여 저항문학에 힘썼고, 1927년에는 신간회에 가입하여, 중앙집행위원으로 경성지회장을 겸임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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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삼 공적 안내판(심우장)
심우장은 서울특별시 성북구에 있는 일제강점기의 승려이자 시인, 독립운동가인 한용운과 관련된 한옥으로 시도기념물이다. 2019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1933년, 김벽산(金碧山)이 초당을 지으려고 사둔 땅을 기증받아 조선일보사 사장 방응모 사장 등 몇몇 유지들의 도움을 받아 지었다. 이 곳에서 1934년 첫 장편소설인 『흑풍(黑風)』을 집필하여 『조선일보』에 연재하기도 하였다. 조선총독부가 위치하던 남쪽을 등진 곳을 택하여 북향의 집을 짓고 심우장(尋牛莊)이라고 하였다. 만해 한용운 선생이 김동삼의 주검을 수습하여 심우장에서 5일장을 치러주었다. 김동삼(1878 - 1937)은 1910년대에 만주에 망명하여 1920년대까지 서간도 독립운동 단체의 지도자로 활약하였던 독립운동가이다. 본명은 김긍식(金肯植)으로, 김동삼은 만주 망명 후 사용한 이름이다. 또다른 이름으로는 김종식(金宗植)이 있다. 본관은 의성(義城)이며, 자는 한경(漢卿), 호는 일송(一松)이다. 1910년 대한제국이 망하자 서간도로 망명하여 이회영 등과 함께 신흥학교를 설립하고 경학사를 결성하며 병영인 백서농장을 운영하는 활동을 펼쳤다. 한족회와 서로군정서, 통의부, 국민대표회의, 정의부 등 서간도의 대표적인 단체와 독립군 단체에서 활동하다가 민족유일당운동에 뛰어들었으며, 항일 공작을 도모하다 발각되어 국내로 압송되고 옥고를 치르다 옥사하였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