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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로 집 터
김병로(1887 - 1964)는 일제강점기 항일운동 관련한 각종 사건을 수임하여 독립운동가들을 변호하던 변호사이다. 해방 이후에는 정치인이자 법조인으로서 활동하였다. 전라북도 순창 출신으로, 본관은 울산이고 호는 가인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해에 향리의 용추사를 찾아온 최익현의 열변에 감화, 1906년 20세 때 70여 명의 의병과 함께 순창읍 일인보좌청을 습격하였다. 변호사 시절 많은 독립운동 관련사건을 무료 변론하였으며, 여러 방면에서 사회활동으로 독립운동에 공헌했다. 1923년 허헌 · 김용무 · 김태영 등과 서울 인사동에 형사공동연구회를 창설하였다. 겉으로는 연구단체임을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항일 변호사들이 공동전선을 형성, 법정을 통해 ‘독립운동이 무죄’임을 주장하는 독립운동 후원단체였다. 이 연구회는 독립투사들에 대한 무료 변론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족을 돌보는 일까지 했다. 10여 년 동안 맡았던 사건 가운데에는 여운형 · 안창호 등에 대한 치안유지법위반사건, 김상옥의사사건, 광주항일학생운동, 6 · 10만세운동, 정의부 · 광복단사건, 조선공산당사건 등이 있었다. 한편 1927년에 이상재의 뒤를 이어 신간회의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었고, 광주학생사건 때는 진상조사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32년 보성전문학교의 이사로서 운영난을 타개하기 위하여 김성수에게 인수를 알선하였으며, 신간회가 해체되고 사상사건의 변론에서도 제한을 받게 되자, 1932년부터는 경기도 양주군으로 내려가 농사를 지으면서 광복될 때까지 13년간을 은둔생활로 일관하였다. 따라서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고, 일제의 배급도 받지 않았다. 1964년 1월 13일 간염으로 서울 인현동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1963년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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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시경 구 묘
주시경(1876 - 1914)은 일제강점기 『국어문법』, 『말의 소리』 등을 저술한 학자. 국어학자이다. 본관은 상주(尙州). 초명은 상호(相鎬), 일명 한힌샘 · 백천(白泉). 황해도 봉산 출생. 아버지는 주학원(周鶴苑)이며, 어머니는 연안이씨이다. 둘째아들로 둘째아버지 주학만(周鶴萬)에게 입양되었다. 어려서 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우다가 양아버지를 따라 1887년 6월에 상경하였다. 국어운동은 특히 한어개인교사, 상동사립학숙 국어문법과 병설, 상동청년학원 교사 및 국어야학과 설치, 국어강습소 및 조선어강습원 개설 등에서 심혈을 기울였다. 경술국치 후에는 숙명여자고등학교를 비롯하여 무릇 9개교에서 가르치는 한편, 일요일에는 조선어강습원에서 수많은 후진을 깨우치기에 ‘주보따리’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동분서주하며 정열을 불태웠다. 그가 가장 정성을 다한 국어연구는 국문동식회를 비롯한 의학교내 국어연구회 연구원 및 제술원, 학부 국문연구소 주임위원(奏任委員), 국어강습소 졸업생과 설립한 국어연구학회, 조선광문회 사전편찬 등의 활동을 통하여 깊어졌다. 그의 연구는 새받침을 처음으로 주장한 1897년 『독립신문』에 발표한 논설 「국문론」에서 그 방향이 시사된 바와 같이 우리말을 핵심으로 한 국어문법의 체계화였다. 주된 업적은 필사본 『국문문법』(1905), 유인본 『대한국어문법』 (國文講義, 1906), 국문연구소 유인본 「국문연구안」(1907∼1908), 『국어문전음학』(1908), 필사본 『말』(1908년 경), 국문연구소 필사본 『국문연구』(1909), 유인본 『고등국어문전』(1909년 경) 등이며, 학문적 축적을 거쳐 대표적 저술인 『국어문법』(1910)을 이룩하였다. 이 책은 독자적으로 개척한 초기국어문법의 하나로서 국어의 특성에 입각한 음운 · 품사 · 구문 · 어휘의 4부를 갖추고 있다. 특히, 그 구문론은 직소분석(IC분석)의 원리가 엿보이는 구문도해를 최초로 이룩한 것으로 크게 평가되고 있다. 그의 연구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거듭된 그 수정판(1911 · 1913), 유인본 『소리갈』(1913년 경)을 거치는 동안에 순우리말로 서술하기에 그 나름대로 성공한 『말의 소리』(1914)를 저술하였다. 마지막 저술인 이 책은 구조언어학적 이론을 구체적으로 창안한 세계 최초의 업적으로 높이 평가된다. 즉, 음운론에서 음소(音素, phoneme)주1에 해당하는 ‘고나’의 발견, 형태론으로 어소(語素, morpheme)주2에 해당하는 ‘늣씨’의 발견은 서구언어학에 수십 년 앞선 큰 업적이었기 때문이다. 수리학을 바탕으로 한 논리적 구성으로 심화시켜 이러한 학문을 이룩하였는데, 그것은 황무지에서 국어학을 개척한 공로로 인정된다. 그는 또한 이러한 논리에 입각해서 새받침에 의한 표의주의적 철자법, 한자폐지와 한자어의 순화, 한글의 풀어쓰기 등 급진적인 어문혁명을 부르짖었다. 그의 이러한 학문과 주장은 학교와 강습소에서 길러낸 많은 후진이 형성된 후 주시경학파를 통해서 이어졌으며, 후대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그의 후진양성에 관해서는 새로 나타난 「한글모죽보기」(1917년 경)에서 최현배(崔鉉培) · 신명균(申明均) · 김두봉(金枓奉) · 권덕규(權悳奎) · 정열모(鄭烈模) · 이규영(李奎榮) · 장지영(張志暎) · 정국채(鄭國采) · 김원우(金元祐) · 안동수(安東洙) 등 550여 명의 강습생 명단으로 구체적으로 밝혀졌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국어국문의 과학적 연구와 교육이 민족의 독립과 발전에 끼친 공훈을 기리어 1980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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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섭 문학비
주요섭(1902 - 1972)은 일제강점기 「추운 밤」, 「사랑손님과 어머니」, 「봉천역식당」 등을 저술한 소설가이다. 호는 여심(餘心) 또는 여심생(餘心生). 평양 출신. 목사 주공삼(朱孔三)의 8남매 중 둘째 아들이다. 시인 주요한(朱耀翰)의 아우이다. 평양에서 성장하였다. 1921년 4월『개벽(開闢)』 제10호에 단편소설 「추운 밤」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여 「여대생과 밍크코우트」(1970)에 이르기까지 40편 가량의 단편소설을 비롯하여 「구름을 잡으려고」(1923)와 「길」(1938) 등 4편의 장편소설과 「첫사랑」(1925)과 「미완성(未完成)」(1936) 등 2편의 중편소설을 남겼다. 「김유신(Kim Yu Shin)」(1947과 「The Frost of the White Rock」(1963) 등의 영문 소설도 있다. 그의 작품 세계는 대략 4단계의 변모 과정을 거치고 있는데, 첫째는 「추운 밤」부터 「인력거군(人力車軍)」(1925)·「살인(殺人)」(1925)·「개밥」(1927) 등이 쓰여진 1921년부터 1927년까지의 시기로 주로 극빈한 사람들의 생활과 갈등을 동정하는 시선과 인도주의적 자세로 그려보였다. 이것은 이른바 신경향파로 지목되는 당대의 유행적 경향과도 일치한다. 둘째는 「할머니」(1930)에서 「사랑손님과 어머니」(1935)·「아네모네의 마담」(1936)·「추물(醜物)」(1936)·「봉천역식당(奉天驛食堂)」(1937)·「왜 왔던고」(1937)에 이르는 시기로, 문단의 주목을 받게 된 것도 바로 이 때이다. 그의 대표작 및 성숙한 작품들이 발표되었으며 기성 윤리나 외모 또는 배신으로 인한 사랑의 좌절이나 향수 등을 그려 삶의 의미를 추구하였다. 셋째는 1946년부터 1958년까지의 시기로 「입을 열어 말하라」(1946)·「대학교수(大學敎授)와 모리배(謀利輩)」(1948)·「해방일주년(解放一周年)」(1948)·「이십오년」(1950) 등을 통하여 광복 후의 무질서와 혼란을 고발하고 비판하면서 사회의식을 각성하고 자아의 자각을 탐색하여나갔다. 넷째는 1960년부터 1970년까지의 시기로 「세 죽음」(1965)·「열 줌의 흙」(1967)·「죽고 싶어하는 여인」(1968)·「여대생과 밍크코우트」 등을 통하여 삶과 죽음의 문제, 인간다운 삶의 문제 등을 다루었다. 이러한 변모 과정은 근대적 리얼리즘의 일반적인 성격이 한국 문학 속에서 보편적인 태도와 기법으로 나타나게 되는 데 기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4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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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기념관
유일한(1895-1971)은 주식회사 유한양행(柳韓洋行) 창업자이다. 1939년 중국에서 한인독립운동단체인 광복진선(光復陣線)과 민족전선(民族戰線)이 하나로 통합되고 중·일(中日)간의 전쟁이 고조되던 즈음인 1940년 9월 북미 대한인국민회는, 미주와 하와이 각 단체 대표자들에게 연석회의를 개최하여 시국대책을 강구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에 따라 1941년 4월 20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미국내 각 한인단체 대표들이 모여 개최한 해외한족대회(海外韓族大會)의 결의에 따라 동년 8월 미주내 모든 단체들을 통합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가 조직되다. 미주 로스앤젤레스에 설치된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執行部) 위원으로 선임된 그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후원과 외교 및 선전사업을 추진하였다. 또한 동년 12월에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 위원으로 미국 육군사령부의 허가를 얻어 로스앤젤레스에 캘리포니아주 민병대 소속으로 일명 맹호군(猛虎軍)인 한인국방경위대(韓人國防警衛隊)를 편성하는데 적극 후원하였다. 1942년 당시 미육군 전략처(OSS)의 한국담당 고문으로 활약하며 펄벅과 교유하기도 한 그는 동년 8월 로스엔젤레스 시청 앞에서 맹호군 창설과 함께 진행된 현기식(懸旗式)에 참여하여 이승만(李承晩)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부장 조소앙(趙素昻) 등의 축사를 낭독하는 등 맹호군 창설과 현기식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한편, 동년 10월 미국정부 전략청(戰略廳)에서 재미한족연합위원회 기획연구부(企劃硏究部) 위원장이었던 그에게 전략청의 전쟁 수행에 도움을 주는 연구서 작성을 권유하자, 1943년 11월 맹호군 사령관 김용성(金容成), 이사 송헌주(宋憲澍) 등과 함께 한국인이 태평양전쟁에 보다 유효하게 참가하기 위한 『한국과 태평양전쟁(Korea & Pacific War)』이란 비망록을 작성·간행하여 한국독립의 당위성을 홍보하는 동시에 지속적으로 군자금을 출연하여 독립자금을 적극 후원하기도 하였다. 1944년 11월 『아시아와 아메리카(Asia and the America)』란 잡지에 「한국과의 교역을 권한다(Do Business with Korea)」라는 기고문을 게재하여 한국의 사정을 세계에 널리 홍보하였으며, 1945년 1월에는 미국 버지니아주 핫스프링에서 태평양연안 12개국 대표 160명이 참석한 IPR(Institute of Pacific Relation) 회의에 정한경·전경무(田耕武) 등과 함께 한국 대표로 참석하여 우리의 독립 당위성을 강조하는 모임을 개최하고 한국의 독립문제를 공론화하는 외교적 성과를 이룩하였다. 또한 곧 이어 동년 1월 미군의 한국침투작전의 일환인 냅코(Napko) 작전계획에 따라 캘리포니아주에 특수공작을 위한 한인훈련부대가 설치되자, 이에 입대하여 제1조 책임자로 선임되어 무기·비무장전투법·지도읽기·파괴·무전·촬영·낙하산훈련·비밀먹 사용법·선전·일본인의 특성 등에 대한 훈련을 받으며 임시정부의 OSS작전과 양면작전을 전개하여 국내에 침투하려고 하였으나, 일본군의 항복으로 인해 국내정진작전은 좌절되고 말았다. 그 후 1946년 귀국하여 유한양행을 민족자본 사업으로 육성하는 한편, 육영사업에도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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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묘
이승만(1875-1965)의 호는 우남, 초명은 이승룡이며,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제1, 2, 3대 대통령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1898년에는 러시아의 이권침탈을 규탄하기 위해 열린 만민공동회에 참여하면서 독립협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같은 해 4월 일간지인 『매일신문』을 창간해 기재원(기자)과 주필을 지냈으며, 8월에는 『제국신문』을 창간해 편집과 논설을 담당하였다. 11월 투서사건으로 독립협회 간부들이 체포되자 이에 대한 항의 시위를 주도하였고, 이들이 석방된 뒤 중추원(中樞院) 의관(議官)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1899년 1월 박영효(朴泳孝)와 관련된 고종 황제 폐위 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1904년 8월까지 5년 7개월 간 한성감옥에 투옥되었다. 그가 구금된 직후 주한미국공사였던 알렌이 이승만의 석방을 요구하였지만 거부당하였고, 1899년 1월 말 탈옥을 시도하다 실패해 종신형을 언도받았다. 이후 감옥에서 『청일전기(淸日戰紀)』를 편역하고, 『독립정신』을 저술하였다. 또한 『신영한사전』을 편찬하였으며, 『제국신문』에 논설을 투고하였다. 『독립정신』은 그가 출옥한 이후인 1910년 LA에서 처음으로 출판되었다. 『청일전기(淸日戰紀)』는 1917년 하와이에서 출간되었다. 1904년 8월 9일 특별 사면령을 받고 감옥에서 석방되었다. 같은 해 11월 민영환(閔泳煥)과 한규설(韓圭卨)의 주선으로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기 위해 미국으로 갔다. 1905년 2월 워싱턴 DC의 조지워싱턴 대학(George Washington University)에 2학년 장학생으로 입학한 직후 한국에 왔던 선교사의 주선으로 미국 상원의원 휴 딘스모어(Hugh A. Dinsmore), 국무장관 존 헤이(John Hay)와 면담하였다. 1905년 4월 세례를 받았고, 8월에는 태프트(William H. Taft) 국무장관의 주선으로 시어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과 만났다. 이승만은 이 자리에서 한국의 독립 보존을 청원하였지만 러일전쟁을 계기로 미국은 일본을 지지하는 정책을 취하게 되어 성과를 거두지 못 하였다. 대학 재학 시 미국의 대외정책이 일본에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도록 활동하였던 스티븐슨(Stevens, D.W.)을 암살한 전명운(田明雲)과 장인환(張仁煥)의 재판에 통역요청을 받았으나, 미국 사회 내의 부정적 여론을 이유로 거부하였다. 1910년 3월 재미동포 조직이었던 국민회에 가입하였으며, 같은 해 8월 귀국하였다. 귀국 직후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청년부 간사이자 감리교 선교사로 활동하던 중 1912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일제의 압박을 받자, 같은 해 4월 감리교 선교부의 도움으로 미국 미네소타에서 열린 국제감리교대회 참석을 빌미로 도미하였다. 이후 1945년 10월 귀국 때까지 계속 미국에서 활동하였다. 국제감리교대회 참석 후 네브라스카(Nebraska)에 갔다가 1900년대 초 옥중에서 만났던 박용만(朴容萬)의 도움으로 1913년 2월 하와이 호놀룰루(Honolulu)로 활동 근거지를 옮겼다. 같은 해 8월부터 호놀룰루에서 한인감리교회의 한인기독학원을 운영하였으며, 『태평양잡지』를 발간하였다. 이승만은 이 시기 ‘105인 사건’의 실상을 다룬 『한국교회핍박』을 저술하였고, 옥중 저서인 『독립정신』과 『청일전기』를 출판하였다. 또한 ‘한인기독학원’을 ‘한인중앙학원’으로 개명하고 민족교육과 선교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하와이에서 활동한 지 1년이 지날 무렵 박용만이 무력투쟁을 위해 국민군단을 창설하자, 이에 이승만은 교육을 통한 실력양성을 주장하면서 서로 대립하였다. 이승만은 재미동포의 가장 큰 조직이었던 국민회 회장 선출과 자금 사용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였고, 국민군단의 일본군 선박 폭파미수사건을 계기로 박용만이 하와이를 떠난 후 국민회를 주도적으로 운영하였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의 윌슨(Thomas Woodrow Wilson) 대통령은 민족자결주의 주창하면서 국제연맹(The League of Nations)을 구상하였고, 이승만은 한국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하에 둘 것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1919년 2월 25일 윌슨 대통령에게 제출하여 장차 완전한 독립을 준다는 보장 하에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받는 것이 일본의 식민지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고 주장하였다.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은 1919년 9월 6일 이승만을 임시 대통령으로 추대하여 1920년 12월부터 약 6개월 동안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수행하였다. 그는 1921년 5월 워싱턴에서 개최될 군축회의(The Washington Disarmament Conference)에 참석을 목적으로 상해에서 미국으로 갔다. 1925년 3월 11일 임시정부 의정원은 이승만을 탄핵해 대통령직을 박탈하였다. 임시정부 인사들은 이승만이 주장한 국제연맹 위임통치안을 미국에 의한 위임통치로 오해하고 강하게 비판하였다. 그가 상해 임시정부에서 직접 직책을 수행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함께 임시정부 의정원의 결의를 무시하였다는 것도 주요한 이유였다. 조소앙은 이 탄핵안을 반대하였지만, 대다수 임시정부 요인들이 주도한 탄핵안은 통과되었다. 의정원의 폐지령에도 불구하고 구미위원부의 활동은 1929년까지 계속되었고, 이승만은 여기에서 외교활동을 계속하였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조병옥, 허정, 장택상 등이 당시 구미위원부의 활동을 도왔던 유학생들이었다. 구미위원부에서 활동하면서 임시정부의 재정을 도맡았던 이승만은 1932년 11월 국제연맹에 한국의 독립을 탄원할 임무를 받고 전권대사에 임명되었다. 1933년 1월과 2월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 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국제연맹에서의 활동이 인정받으면서 1933년 11월 이승만은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선출되었고, 1934년에는 외무위원회 외교위원, 1940년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1942년 8월 29일부터 미국의 소리 방송에서 일본의 패망과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방송을 시작하였고, 같은 해 9월에는 미국 전략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s)과 연락해 임시정부의 광복군이 미군과 함께 작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연결하는 활동을 하였다. 또한 태평양 전쟁 시기 미국과 소련이 얄타회담에서 한반도 문제에 대해 합의한 후에는 소련을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1945년 8월 15일 해방 후 10월 16일 귀국하였다. 귀국 직전 일본 도쿄에서 맥아더 장군, 하지 미군정 사령관과 회합을 한 후 귀국한 이승만은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과 한국민주당의 영수직을 거절하였다. 그 대신 1945년 10월 23일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조직해 회장에 추대되었다. 1948년에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하고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65년 7월 19일 하와이 호놀룰루 요양원에서 사망하였다. 같은 해 7월 27일 가족장으로 영결식이 있었고,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1949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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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요인묘역
국립서울현충원은 1993년 상해만국공묘에 안치되어 있던 상해 임시정부 요인 5위의 영현을 환국봉안하면서 임시정부요인 묘역을 조성하였다. 임시정부요인 묘역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요 직위를 역임한 순국선열 18위가 모셔져 있다. 한국통사, 독립운동지혈사를 저술해 민족혼을 일깨웠던 박은식 대한민국임시정부 2대 대통령을 비롯해 신규식, 노백린, 김인전, 안태국 지사의 유해 5위를 1993년 8월 상해만국공묘로부터 모셔 오면서 조성된 묘역이다. 위쪽 묘역에는 국가원수급인 박은식, 이상룡, 홍진, 양기탁 4위가 모셔져 있고, 아래쪽 묘역에는 국무총리를 역임했던 노백린, 외무총장을 역임했던 신규식, 광복군총사령관을 역임했던 지청천 장군 등 14위가 모셔져 있다. 이 곳에 계신 순국선열 18위는 다음과 같다. 양기탁 국무령, 홍진 국무령, 박은식 2대 대통령, 이상룡 초대국무령, 황학수 생계부장, 이유필 내무총장, 박찬익 외무총장, 김인전 의정원의장, 신규식 국무총리, 노백린 국무총리, 김동삼 국무원, 조경한 국무위원, 지청천 군무부장, 오영선 법무총장, 김성숙 국무위원, 이강 의정원의장, 손정도 의정원의장, 윤세용 국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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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열대
충열대는 일제에게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해 국내는 물론 중국, 러시아, 미국 등지에서 의병활동과 독립투쟁을 하시다가 돌아가신 후 묘역에 안장된 순국선열 및 애국지사들과 시신도 없고 후손도 없어서 무후선열제단에 위패로 봉안된 순국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고 추모하는 제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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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공원비
삼일공원(三一公園) 유래 - 3.1운동 당시 여성 참가자였던 최은희씨가 "직접 일병의 총칼에 대결했던 홍안의 소녀들이 이제는 귀가 멀고, 눈이 어둡고, 허리가 굽은 할머니가 되었으나, 나머지 기백을 다시 모아 망각속에 사그러져 가는 그날의 분노와 저항을 되새기면서 쇠잔한 몸이지만 나머지 생애에서 무엇을 조국에 바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1967년 4월 15일 동아일보에 "독립공원을 설립해야한다"는 글을 투고하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건의하였다. 정부는 1967년 5월 15일 공원을 지정하고 1989년부터 1990년까지 공원을 조성 현재의 3.1공원으로 개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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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만식 기념관
조만식(1883 - 1950)은 일제강점기 조선물산장려회 회장, 신간회회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본관은 창녕(昌寧), 호는 고당(古堂)이고 평안남도 강서 출신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한학을 수학하고 15세에부터 22세까지 평양성 내 상점에서 일하며 소년시절을 보냈다. 23세에 평양 숭실중학(崇實中學)에 입학하면서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908년 일본 동경으로 유학,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를 거쳐 1910년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학부에 입학하였다. 유학 중 백남훈(白南薰) · 김정식(金貞植)과 함께 장로교 · 감리교연합회 조선인교회를 설립하였고, 간디(Gandhi, M. K.)의 무저항주의에 심취하여 민족운동의 거울로 삼았다. 1913년 메이지대학을 졸업한 후 귀국하여 평안북도 정주에 동지인 이승훈(李承薰)이 설립한 오산학교(五山學校)의 교사가 되었으며, 2년 후인 1915년 교장이 되었다. 1919년 교장직을 사임하고 3 · 1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잡혀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다시 오산학교 교장으로 복귀하였으나 일본관헌의 탄압으로 제대로 재직하지 못하고 평양으로 돌아가 1921년 평양기독교청년회 총무에 취임하는 한편, 산정현교회(山亭峴敎會)의 장로가 되었다. 이 무렵 알게 된 평생의 심우(心友) 오윤선(吳胤善)과 함께 1922년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奬勵會)를 조직, 그 회장이 되어 국산품애용운동을 벌였다. 1923년 송진우(宋鎭禹) · 김성수(金性洙) 등과 함께 연정회(硏政會)를 발기하여 민립대학기성회(民立大學期成會)를 조직하였으나 일제탄압으로 실패하였고, 숭인중학교(崇仁中學校) 교장을 지내다가 1926년 일제에 의해 강제 사임당하였다. 1924년 신간회(新幹會)에 참여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활동이 좌절되었다. 1930년 관서체육회(關西體育會) 회장으로 민족지도자 육성에 이바지하였고, 1932년 조선일보사 사장에 추대되어 언론을 통하여 민족의 기개를 펴는 데 앞장섰다. 1936년 전국적인 민족정신 앙양운동의 일환으로 평양에서 을지문덕장군수보회(乙支文德將軍修保會)를 설립하였다. 이 무렵에 평양조선인사회의 유일한 공회당이었던 백선행기념관(白善行記念館)을 개설하고 인정도서관(仁貞圖書館)을 세웠다. 1943년 지원병제도가 실시되자 협조를 간청해온 재조선군일본인사령관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郎]의 면담요청을 거절하여 한때 구금당하였다. 광복 직후 평안남도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하여 그 위원장이 되었다. 소련군정당국이 그들이 만든 최고행정기관인 북조선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거절하였다. 1945년 11월 3일 조선민주당(朝鮮民主黨)을 창당하여 당수가 되었다. 이 조선민주당을 통하여 북한에서 반탁운동을 전개하다가 1946년 1월 5일 소련군에 의해 고려호텔에 연금당하였다. 그 뒤 생사가 분명하지 않은 가운데 1950년 6 · 25전쟁 직전 평양방송이 그와, 체포된 간첩 김삼룡(金三龍) · 이주하(李舟河)의 교환을 제의하였다. 공산군의 평양철수시 그들에 의하여 총살된 것으로 전해진다. 평생을 기독교정신의 실천가로서 생활하였고, 일제에 대하여는 비폭력 · 무저항 · 불복종의 간디즘으로 대항하였다. 1970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으며, 1991년 국립서울현충원에 유발(죽은 이의 머리카락)이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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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실출신 독립유공자 추모비
이 추모비는 일제강점기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위해 헌신한 숭실대학교 독립유공자를 추모하고 기념하기 위해서 2020년 10월 숭실대학교 개교 123주년을 맞이하여 건립하였다. 숭실대학교는 1897년 개교 이래 근대 문명 교육을 선도하며 민족의 자주적 근대화와 독립에 앞장섰다. 관서지방 '항일독립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고, 이로 인하여 일제로 부터 '불온사상의 온상'으로 낙인찍혀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숭실대학교 출신의 독립유공자들은 을사늑약 반대, 신민회 및 조선국민회 활동 등을 전개하면서 3.1운동과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주도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추모비에 숭실의 독립유공자들이 추구했던 독립의 반석을 형상화하고, 추모벽에 독립유공자를 명각하여 그들의 고귀한 희생정신과 애국혼을 기리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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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대섭 집
심훈(1901-1936). 본명은 심대섭(沈大燮). 본관은 청송(靑松). 호는 해풍(海風). 아명은 삼준 또는 삼보. 서울 출생이다. 일제강점기 「상록수」, 「영원의 미소」, 「황공」 등을 저술한 소설가, 시인, 영화인이다. 1915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고, 1917년 왕족인 이해영(李海暎)과 혼인하였다. 1919년 3 · 1운동에 가담하여 투옥, 퇴학당하였다. 192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1921년 항저우(杭州) 치장대학(之江大學)에 입학하였다. 1923년 귀국하여 연극 · 영화 · 소설집필 등에 몰두하였는데 처음에는 특히 영화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1924년 이해영과 이혼하였고 같은 해 동아일보사에 입사하였다. 1925년 조일제(趙一齊) 번안의 「장한몽(長恨夢)」이 영화화될 때 이수일(李守一)역으로 출연하였고, 1926년 우리 나라 최초의 영화소설 「탈춤」을 『동아일보』에 연재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도일하여 본격적인 영화수업을 받은 뒤 귀국하여 영화 「먼동이 틀 때」를 원작집필 · 각색 · 감독으로 제작하였으며 이를 단성사에서 개봉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식민지 현실을 다루었던 이 영화는 「어둠에서 어둠으로」라는 제목이 말썽을 빚자 개작한 작품이며 영화제작은 이것으로 마지막이었다. 그 뒤 1928년 조선일보사에 다시 입사하였고, 1930년 안정옥(安貞玉)과 재혼하였다. 1931년 경성방송국(京城放送局)으로 옮겼으나 사상 문제로 곧 퇴직하였다. 1932년 고향인 충청남도 당진으로 낙향하여 집필에 전념하다가 이듬해 상경하여 조선중앙일보사에 입사하였으나 다시 낙향하였다. 1936년 장티푸스로 사망하였다. 「동방의 애인」 · 「불사조」 등 두 번에 걸친 연재 중단사건과 애국시 「그날이 오면」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작품에는 강한 민족의식이 담겨 있다. 「영원의 미소」에는 가난한 인텔리주4의 계급적 저항의식, 식민지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비판정신, 그리고 귀농 의지가 잘 그려져 있으며 대표작 「상록수」에서는 젊은이들의 희생적인 농촌사업을 통하여 강한 휴머니즘과 저항의식을 고취시킨다. 행동적이고 저항적인 지성인이었던 그의 작품들에는 민족주의와 계급적 저항의식 및 휴머니즘이 기본정신으로 관류하고 있다. 특히, 농민계몽문학에서 이후의 리얼리즘에 입각한 본격적인 농민문학의 장을 여는 데 크게 공헌한 작가로서 의의를 지닌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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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유적지 마포형무소 표지석
1912년 일제가 경성형무소를 설치하여 항일(抗日)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들이 옥고(獄苦)를 치렀던 유적지이다. 이 일대(공덕동 105번지)는 일제강점기 경성감옥이 있던 자리이다. 경성감옥이라는 이름은 원래 1908년 10월에 신설된 서대문감옥(西大門監獄)을 가리키는 표현이었으나, 1912년 9월 조선총독부가 마포 공덕리에 추가로 감옥을 짓고 이곳의 명칭으로 바꿔 부르도록 했다. 경성감옥은 장기수(長期囚) 위주의 남자 수형자를 수용하였으며, 일제에 의해 체포된 많은 애국독립지사들이 이곳에서 수감생활을 했다. 특히 1919년 3.1독립선언 사건 때는 최남선(崔南善), 한용운(韓龍雲), 오세창(吳世昌) 등 다수의 관련 인물들이 서대문감옥에서 이감되어 옥고를 겪었다. 마포삼성아파트 자리(도화동 7번지)에 있던 마포연와공장(麻浦煉瓦工場)은 노역장 시설로 사용되었다. 경성감옥은 1926년 경성형무소(京城刑務所)로 개칭 되었다가 해방 이후 마포형무소(麻浦刑務所, 1946년 4월)를 거쳐 다시 마포교도소(麻浦矯導所, 1961년 12월)로 변경되었다. 도시화의 여파로 1963년 마포교도소는 경기도 안양읍으로 옮겨 안양교도소(安養矯導所)로 전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