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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화 집
이상화(1901 - 1943)는 대구(大邱) 사람이다. 일제에 대한 저항시인이며, 대구고보 재학시인 1919년 3월 8일의 대구서문외(西門外) 장날을 이용하여 이만집(李萬集)·김태련(金兌鍊)·김영서(金永瑞) 등과 함께 독립만세 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학생 시절인 1918년, 일제에 대한 민족 저항시 「신라제(新羅祭)의 노래」를 발표하여 민족의 독립정신을 고취시켰으며, 3월 8일의 서문외 장날의 독립만세 운동 때는 계성중학교(啓聖中學校) 학생들과의 연락책으로 활약하면서 연합시위를 전개하여, 여기에 모인 1천여명의 시위군중에게 독립선언문을 배포하는 등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그 뒤에도 저항시를 통하여 민족혼을 일깨웠는데 1922년에는 『백조(白潮)』지 창간호에 「나의 침실로」를, 1926년에는 『개벽(開闢)』지 6월호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등을 발표하였다. 1923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잡지 향영(響影)을 발간하였으며, 이듬해 귀국하여 1924년부터 1934년까지 문단을 제패했던 카프(KAPF : Korea Proletarian Artist Federation)를 발기하여 활동하였다. 1935년에는 중국으로 건너가 친형인 이상정(李相定) 중국군 장군과 조국의 독립을 위한 국내조직을 협의하고 1937년 귀국하였다. 그러나 곧 대구경찰서에 붙잡혀 2개월간 구금되어 고문을 받고 석방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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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화 시비, 약력비
이상화(1901 - 1943)는 대구(大邱) 사람이다. 일제에 대한 저항시인이며, 대구고보 재학시인 1919년 3월 8일의 대구서문외(西門外) 장날을 이용하여 이만집(李萬集)·김태련(金兌鍊)·김영서(金永瑞) 등과 함께 독립만세 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학생 시절인 1918년, 일제에 대한 민족 저항시 「신라제(新羅祭)의 노래」를 발표하여 민족의 독립정신을 고취시켰으며, 3월 8일의 서문외 장날의 독립만세 운동 때는 계성중학교(啓聖中學校) 학생들과의 연락책으로 활약하면서 연합시위를 전개하여, 여기에 모인 1천여명의 시위군중에게 독립선언문을 배포하는 등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그 뒤에도 저항시를 통하여 민족혼을 일깨웠는데 1922년에는 『백조(白潮)』지 창간호에 「나의 침실로」를, 1926년에는 『개벽(開闢)』지 6월호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등을 발표하였다. 1923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잡지 향영(響影)을 발간하였으며, 이듬해 귀국하여 1924년부터 1934년까지 문단을 제패했던 카프(KAPF : Korea Proletarian Artist Federation)를 발기하여 활동하였다. 1935년에는 중국으로 건너가 친형인 이상정(李相定) 중국군 장군과 조국의 독립을 위한 국내조직을 협의하고 1937년 귀국하였다. 그러나 곧 대구경찰서에 붙잡혀 2개월간 구금되어 고문을 받고 석방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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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돈 집
서상돈(1850 -1913)은 대구(大邱) 사람이다. 1898년 독립협회(獨立協會)와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의 간부로 활동하였고, 1907년 대구 광문사(廣文社)의 부사장으로 재직하면서 국채보상운동(國債補償運動)을 주도하였다. 서상돈은 1898년 3월부터 전개된 만민공동회에 독립협회 재무담당 간부로 참가하여, 러시아의 내정간섭을 규탄하고 내정문제로 민권보장 및 참정권획득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에 독립협회가 수구파에 의해 해산되자, 그는 고향인 대구로 내려와 광문사(廣文社)의 부사장으로 재직하면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등 실학자들의 저서를 출판하여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1907년 1월 대구 광문사의 특별회에서, 서상돈은 김광제(金光濟) 사장과 함께 일제에 빚진 1,300만원을 갚기 위한 금연운동을 전개할 것을 제의하는 한편, 800원을 선뜻 내놓았다. 이때 서상돈은 전체 인구 2,000만명이 담배를 끊어 그 돈을 모으면 부채를 모두 갚을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이렇듯 금연운동에서 비롯한 국채보상운동의 움직임은 서울의「대한매일신보」에 '국채보상취지서(國債報償趣旨書)'가 발표되면서 전국적 차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서상돈 등은 1907년 2월 대구 북후정(北後亭)에서 국채보상모금을 위한 국민대회를 열고 국채지원금 수합사무소(國債志願金 收合事務所)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이 운동은 전국적으로 파급되어 일대 사회운동으로 발전하여 나갔다. 비록 국채보상운동은 일제의 농간으로 뜻한 바를 이룰 수 없었지만, 일제의 경제침탈과 국권침탈에 대한 한국인의 각성을 촉구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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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정 집
이상정(1896 - 1947)은 경상북도 대구(大邱) 사람으로 시인 이상화(李相和)의 형이다. 독립운동을 할 때엔 이연호(李然浩)라는 이명을 사용했다. 1921년부터 1923년까지 평안북도 정주(定州)에 있는 오산학교(五山學校) 교사로 근무하면서 지하조직을 결성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다가 만주로 망명하였다. 만주에서 육영사업을 하며 독립운동에 가담, 활동하였다. 1926년부터 1927년까지는 동만주(東滿洲)에서 중국 풍옥상(馮玉祥)의 서북국민부대(西北國民部隊)에서 준장급 참모(准將級參謀)로 활약하였으며, 장개석의 부대와 통합됨에 따라 국민정부(國民政府) 정규군 소장(少將)으로 항일전선에서 활동하였다. 1932년 경에는 남창(南昌) 항공협진회 위원으로 임명되어 활약하였다. 1936년에 중일전쟁(中日戰爭)이 발발하자 중경(重慶)에 있는 임시정부의 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으나 중국 육군 참모학교의 교관으로 계속 활동하였다. 1939년 4월에는 민족전선통일을 기하기 위한 청년호성사(靑年呼聲社)를 조직하고 이건우(李健宇)와 함께 잡지 청년호성(靑年呼聲)을 창간하였다. 또한 1940년 9월에 광복군(光復軍) 창설을 적극 지원하였다. 1941년 10월에는 임시의정원 경상도의원에 다시 선출되었으며, 1942년 제34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최동오(崔東旿) 등 27명과 함께 연서로 "우리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최단 기간 내에 중 미, 영, 소 등 연합 각국 정부에 향하여 정식으로 우리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을 요구할 것"이라는 임시정부 승인에 관한 안을 제안하였다. 1942년 8월에 임시정부에서는 외무부 내에 외교연구위원회를 설치하고 외교 전반에 관한 문제를 연구 제공하도록 하였다. 이에 그는 신익희(申翼熙), 장건상(張建相), 이현수(李顯洙) 등과 함께 연구위원으로 선임되어 그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1944년에는 강창제(姜昌濟), 홍진(洪震) 등과 함께 신한민주당(新韓民主黨)을 창당하였으며, 1945년 2월에는 동당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그는 또한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중경(重慶)에서 중국 육군 유격대훈련학교 교관에 취임하여 후진 양성에 노력하였으며, 중국군 중장(中將)으로 진급하여 광복 후에는 북지방면(北支方面)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도왔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적을 인정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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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진건 집(추정)
현진건(1900 - 1943)은 김동인(金東仁)·염상섭(廉想涉)과 더불어 근대문학 초기에 단편소설 양식을 개척하고 사실주의 문학의 기틀을 마련한 작가이다. 특히 식민지시대의 현실대응 문제를 단편기교와 더불어 탁월하게 양식화한 작가로서 문학사적 위치를 크게 차지하고 있다. 1920년≪개벽 開闢≫에 <희생화 犧牲花>를 발표함으로써 문필 활동을 시작하여 <빈처 貧妻>(1921)로 문명을 얻었다. 1921년 조선일보사에 입사함으로써 언론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홍사용(洪思容)·이상화(李相和)·나도향(羅稻香)·박종화(朴鍾和) 등과 함께 ≪백조(白潮≫ 창간동인으로 참여하여 1920년대 신문학운동에 본격적으로 가담하였다. 1922년에는 동명사(東明社)에 입사, 1925년 그 후신인 ≪시대일보≫가 폐간되자 동아일보사로 옮겼다. 1932년 상해에서 활약하던 공산주의자인 셋째 형 정건(鼎健)의 체포와 죽음으로 깊은 충격을 받았는데, 그 자신도 1936년 동아일보사 사회부장 당시 일장기말살사건으로 인하여 구속되었다. 1937년 동아일보사를 사직하고 소설 창작에 전념하였으며, 빈궁 속에서도 친일문학에 가담하지 않은 채 지내다가 1943년 장결핵으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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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제우 순도비
최제우(1824 - 1864)는 조선 후기 시천주(侍天主)의 교리를 중심으로 한 동학을 창도한 종교창시자이다. 1861년 포교를 시작하였다. 곧 놀라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동학의 가르침을 따르게 되었다. 동학이 세력을 얻게 되자 기존 유림층에서는 비난의 소리가 높아져 서학, 즉 천주교를 신봉한다는 지목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톈진조약 후 영불연합군이 물러가서 조선침공의 위험이 없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민심이 가라앉게 되자, 조정에서는 서학을 다시 탄압하게 되었으므로 1861년 11월 호남으로 피신을 가게 되었다. 1862년 3월 경주로 되돌아갈 때까지의 남원의 은적암(隱寂庵) 피신생활 중 동학사상을 체계적으로 이론화하였다. 경주에 돌아와 포교에 전념하여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는데, 1862년 9월 사술(邪術)로 백성들을 현혹시킨다는 이유로 경주진영(慶州鎭營)에 체포되었으나 수백 명의 제자들이 석방을 청원하여 무죄방면되었다. 이 사건은 사람들에게 동학의 정당성을 관이 입증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신도가 더욱 증가하였으며, 포교방법의 신중성을 가져와 마음을 닦는 데 힘쓰지 않고 오직 이적만 추구하는 것을 신도들에게 경계하도록 하였다. 신도가 늘게 되자 그 해 12월 각지에 접(接)을 두고 접주(接主)가 관내의 신도를 다스리는 접주제를 만들어 경상도 · 전라도뿐만 아니라 충청도와 경기도에까지 교세가 확대되어 1863년에는 교인 3,000여 명, 접소 13개 소를 확보하였다. 이 해 7월 제자 최시형(崔時亨)을 북접주인으로 정하고 해월(海月)이라는 도호를 내린 뒤 8월 14일 도통을 전수하여 제2대 교주로 삼았다. 관헌의 지목을 받고 있음을 알고 미리 후계자를 정한 것이다. 이때 조정에서는 이미 동학의 교세확장에 두려움을 느끼고 그의 체포계책을 세우고 있었는데, 11월 20일 선전관(宣傳官) 정운구(鄭雲龜)에 의하여 제자 20여 명과 함께 경주에서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되는 도중 철종이 죽자 1864년 1월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이곳에서 심문받다가 3월 10일 사도난정(邪道亂正)의 죄목으로 대구장대(大邱將臺)에서 41세의 나이로 참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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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돈 상
서상돈(1850 -1913)은 대구(大邱) 사람이다. 1898년 독립협회(獨立協會)와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의 간부로 활동하였고, 1907년 대구 광문사(廣文社)의 부사장으로 재직하면서 국채보상운동(國債補償運動)을 주도하였다. 서상돈은 1898년 3월부터 전개된 만민공동회에 독립협회 재무담당 간부로 참가하여, 러시아의 내정간섭을 규탄하고 내정문제로 민권보장 및 참정권획득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에 독립협회가 수구파에 의해 해산되자, 그는 고향인 대구로 내려와 광문사(廣文社)의 부사장으로 재직하면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등 실학자들의 저서를 출판하여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1907년 1월 대구 광문사의 특별회에서, 서상돈은 김광제(金光濟) 사장과 함께 일제에 빚진 1,300만원을 갚기 위한 금연운동을 전개할 것을 제의하는 한편, 800원을 선뜻 내놓았다. 이때 서상돈은 전체 인구 2,000만명이 담배를 끊어 그 돈을 모으면 부채를 모두 갚을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이렇듯 금연운동에서 비롯한 국채보상운동의 움직임은 서울의「대한매일신보」에 '국채보상취지서(國債報償趣旨書)'가 발표되면서 전국적 차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서상돈 등은 1907년 2월 대구 북후정(北後亭)에서 국채보상모금을 위한 국민대회를 열고 국채지원금 수합사무소(國債志願金 收合事務所)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이 운동은 전국적으로 파급되어 일대 사회운동으로 발전하여 나갔다. 비록 국채보상운동은 일제의 농간으로 뜻한 바를 이룰 수 없었지만, 일제의 경제침탈과 국권침탈에 대한 한국인의 각성을 촉구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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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교 집
서상교(1923 - 2018)는 대구(大邱) 사람이다. 대구상업학교 재학중 1942년 5월에 동교생 이상호(李相虎)·김상길(金相吉) 등과 함께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맹세하고 항일학생결사 태극단(太極團)을 조직하였다. 이때 태극단이란 명칭은 한말이래 사용되어온 태극기를 상징하여 정한 것이며, 동 결사의 약칭으로 t.k.d를 사용하기도 했다. 이무렵 일제는 태평양전쟁을 도발하여 마지막 발악을 하던 때로 감시와 탄압을 더욱 가혹하게 했으나, 그와 동지들은 일본군입대 반대 등 일제식민통치에 대항하는 내용의 유인물을 만들어 뿌리면서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한편 조직확대를 위해 동지포섭 활동에 주력하였다. 그리하여 1943년 4월에 김정진(金正鎭)·이준윤(李浚允)·이원현(李元鉉)·윤삼용(尹三龍) 등을 동지로 포섭하였으며 계속 학교단위로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동년 5월에는 그동안 가입한 단원을 포함하여 전원이 대구시 앞산인 비파산(琵琶山) 약수터에 모여 결단식을 가졌으며, 그와 간부들은 구체적 투쟁방안에 관하여 협의하고 조직을 정비하였다. 태극단의 조직은 크게 일반조직, 특수조직으로 나누었으며 최고의결기관으로써 간부회의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일반조직은 다시 육성부(育成府) 아래 관방국(官房局)·체육국(體育局)·과학국(科學局) 등 3국을 두고, 그밑에 군사부(軍事部)·항공부(航空部) 등 10여부(部)를 두어 체계화했으며, 특수조직은 건아대(健兒隊)라 칭하여 중학교 1·2학년생과 국민학교 상급반 학생을 대원으로 가입시켜 이들을 장차 단원으로 육성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이때 그는 체육국장의 일을 맡아 단원의 연성활동(鍊成活動)을 지도·감독하였다. 한편 태극단의 투쟁방략은 조직확대를 통하여 전국의 학교와 각 지역별로 조직을 완성한 후 여론을 환기시키며 본격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는 것인데, 만약 국내에서의 투쟁이 여의치 못할 때에는 중국으로 집단 망명하여 그곳에서 항쟁을 계속한다는 계획도 세웠다. 그리하여 단원들은 용두산(龍頭山)·비파산 등 비밀장소를 이용하여 학술연구토론회·각종 체육회 등을 개최하여 동지간 유대의식과 민족적 교양의 함양 및 체력증강에 힘을 쏟았다. 또한 궁극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군사학 연구에도 정진하여 군사관계서적의 번역, 글라이더 및 폭발물 제조에 관한 연구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1943년 5월 배반자의 밀고로 태극단의 조직과 활동이 일경에 발각되었고 이로 인하여 그는 학교에서 수업도중 동지들과 함께 붙잡혔다. 그는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44년 1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단기 5년, 장기 7년형을 선고받고 인천소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8·15광복으로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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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암 집
이종암(1896 - 1930)은 대구(大邱) 사람이다. 대구공립보통학교(大邱公立普通學校)를 졸업하고 대구농업학교(大邱農業學校)를 거쳐 부산상업학교(釜山商業學校)에 다니다가 1916년 대구은행(大邱銀行)에 은행원으로 취직한 그는 출납계주임(出納係主任)이 되어 금고 열쇠를 맡아 2년간 재직하였다. 그러나 그는 독립운동을 하기로 결심하여 1917년 만주(滿洲)를 왕래하며 독립운동에 뜻을 둔 동지와 함께 조국광복투쟁을 결의, 비밀결사(秘密結社)를 조직하여 밀양에 거주하던 김대지(金大池)·구영필(具榮泌) 등의 동지를 얻었다. 그는 같은 해 12월 은행 금고 속에 있는 만 구백원의 돈을 꺼내, 동지들과 함께 처음에는 미주(美洲)로 유학코자 하였으나 세계 제1차대전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상해(上海)를 거쳐 만주로 갔다. 만주에서 그는 길림성 영안현 동경성(吉林省 寧安縣 東京城)의 간민소학교(墾民小學校)에 주소를 두고 1918년 2월에는 봉천성 통화현(奉天省 通化縣)에 있는 무관학교(武官學校)에 입학하였다. 이어 1919년 3·1독립운동이 발발하자, 직접 독립운동에 참여하기 위하여 교관인 서상락(徐相洛) 등의 동의를 얻어 무관학교를 그만두었다. 이어 1919년 11월 9일 길림성 파호문(巴虎門) 밖에서 김원봉(金元鳳)·이성우(李誠宇)·황상규(黃尙奎) 등과 함께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였으며 그와 김원봉은 상해(上海)로 가서 불란서 조계(租界)에 사는 김성근(金聲根)에게 폭탄제조방법을 습득하였다. 그리고 의열단원 곽재기(郭在驥)·이성우(李誠宇) 등은 상해에서 폭탄과 권총을 구입하여 이를 국내로 반입하여 앞으로 있을 거사에 대비하였다. 이종암이 대구은행에서 가져온 돈은 이러한 의열단의 활동자금으로 유용하게 쓰여졌고, 그 일부는 동지인 구영필(具榮泌)에게 전해져 만주 봉천(奉天)의 비밀결사인 삼광상회(三光商會)를 설치하는 자본금으로 쓰여졌다고 한다. 1922년 3월 그는 김원봉·김익상(金益相)·오성륜(吳成崙) 등과 함께 필리핀에서 상해로 오는 일본육군대장 전중의일(田中義一)을 처단하기로 결정하고 전중(田中)이 3월 28일 상해에 상륙할 때 처치하되 차질이 생기면 일본영사관(日本領事館)에서 있을 예정인 연회식 때 거사하기로 결정하였다. 거사 당일 전중이 상해의 세관부두로 상륙하자, 세관부두에 김익상과 오성륜 동지가 배치되었으므로 그는 거사의 성공을 빌며 소식을 기다렸으나, 불행히도 전중 암살은 실패하고 두 동지만 일경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1925년 9월 재정사정의 궁핍으로 활동이 힘들어지자 그는 국내에서 군자금을 모을 계획을 세우고, 선전용으로 신채호(申采浩)가 작성한 의열단선언서(義烈團宣言書, 일명 朝鮮革命宣言書)를 지참하고 대구로 잠입하였다. 그곳에서 이병호(李丙浩)의 안내로 이병태(李丙泰)를 만나 자신이 전에 부산금융조합(釜山金融組合)에 예금한 돈을 받기로 하였다. 그런데 이때 이미 일제 경찰의 추적을 받고, 그가 잠시 요양중이던 경북 달성군 달성면(慶北 達城郡 達城面) 이기양(李起陽)의 산장에서 1925년 11월 5일 일경에 붙잡히고 말았다. 그는 1926년 12월 2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 1930년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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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진건 현창비
현진건(1900 - 1943)은 김동인(金東仁)·염상섭(廉想涉)과 더불어 근대문학 초기에 단편소설 양식을 개척하고 사실주의 문학의 기틀을 마련한 작가이다. 특히 식민지시대의 현실대응 문제를 단편기교와 더불어 탁월하게 양식화한 작가로서 문학사적 위치를 크게 차지하고 있다. 1920년≪개벽 開闢≫에 <희생화 犧牲花>를 발표함으로써 문필 활동을 시작하여 <빈처 貧妻>(1921)로 문명을 얻었다. 1921년 조선일보사에 입사함으로써 언론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홍사용(洪思容)·이상화(李相和)·나도향(羅稻香)·박종화(朴鍾和) 등과 함께 ≪백조(白潮≫ 창간동인으로 참여하여 1920년대 신문학운동에 본격적으로 가담하였다. 1922년에는 동명사(東明社)에 입사, 1925년 그 후신인 ≪시대일보≫가 폐간되자 동아일보사로 옮겼다. 1932년 상해에서 활약하던 공산주의자인 셋째 형 정건(鼎健)의 체포와 죽음으로 깊은 충격을 받았는데, 그 자신도 1936년 동아일보사 사회부장 당시 일장기말살사건으로 인하여 구속되었다. 1937년 동아일보사를 사직하고 소설 창작에 전념하였으며, 빈궁 속에서도 친일문학에 가담하지 않은 채 지내다가 1943년 장결핵으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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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사 3.1운동 만세의거지 조형물
본 사적은 동화사 지방학림 학생들이 1919년 3월에 벌인 만세운동을 기념하는 사적이다. 서울 동국대학교 전신 불교중앙학림 학생 윤학조(스님)는 서울의 만세시위에 참가한 후 고향 대구로 내려와 권청학, 김문옥 등 후배 학인스님들을 만나 동화사 지방학림에서도 만세시위를 일으킬 것을 제의하자, 모두 대구 덕산정 남문 밖 시장에서 의거할 것을 합의하였다. 1919년 3월 28일 동화사 지방학림 학생 전원은 동화사 심검당에 모여, 30일에 거사를 계획하고 태극기를 준비하였다. 3월 29일 9명의 학생대표 학인스님들은 동화사를 떠나 대구부 덕산정에 있는 동화사 출장소인 포교당 김상의(金尙儀)의 집(현 대구 보현사)에 모여 시위를 준비하였다. 이들은 3월 30일 오후 2시 남문 밖 시장에서 수많은 장꾼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일으켰다. 그러나 일제 경찰의 출동으로 시위는 제지당하였고 주도자들은 체포되었다. 체포된 동화사 지방학림 학인스님 권청학, 김문옥 등 9명은 재판에서 10월 이상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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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회 대구지회 활동지(교남 YMCA회관)
신간회 대구지회 활동 사적지 표지석은 신간회 대구지회가 활동한 곳을 알리는 사적이며, 교남 YMCA 경북서원 앞에 표지석이 위치하여 있는데, 교남 YMCA 건물은 대구3.1만세운동기념관이 되었다. 신간회는 1927년 9월 3일 건립된 일제강점기 국내 최대의 항일민족 운동단체로, 민족적·정치적·경제적 예속의 탈피, 언론·집회·결사·출판의 자유의 쟁취, 청소년·여성의 형평운동 지원, 파벌주의·족보주의의 배격, 동양척식회사 반대, 근검절약 운동 전개 등의 활동을 목표로 하는데, 신간회 대구지회도 이에 따라 활동하였다. 구체적으로 신간회 대구지회는 강연회와 사강강좌, 노동야학 운영, 재만동포 폭압 규탄, 영남친목회, 경제연구회 반대 등을 통해 항일 민족의식 고취와 민족협동전선 형성에 힘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