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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독립운동기념탑(상무시민공원)
광주독립운동기념탑은 광주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을 선양하기 위하여 2014년에 건립되었다. 상무시민공원 내 부지 480㎡, 높이 14m 규모로 총공사비 8억 여원을 투입 조성됐으며, 탑과 조형벽, 동상 등으로 구성되었다. 탑 아래쪽 기단에는 광주독립운동 관련 유공자 1124명의 이름을 새겼고 탑신 주변에는 서재필(대한민국장), 양한묵(대통령장) 등 광주·전남 독립유공자 1,000여 명의 명단을 새겨 조국 독립을 위해 외세에 치열하게 맞선 선열들의 뜻이 후손들에 길이 기억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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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1929년 11월 3일 일어난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하여 일어났던 민족운동이다. 이 운동은 단순히 광주와 나주를 통학하던 한국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의 충돌 때문에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3·1운동 이후의 기만적인 소위 문화정책과 1929년부터 시작된 세계대공황, 1920년대 이후 노동·농민·학생운동의 성장 등 국내외의 복합적 요인으로 일어났다. 광주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파급되어 194개 학교가 시위, 동맹휴학 등으로 참가하였다. 참가 학생 수는 54,000여 명으로, 이는 당시 전체학생의 절반이 넘는 학생들이 나라와 민족의 독립을 위해 용감하게 참여하였으며, 이로 말미암아 582명이 퇴학을, 무기정학 2,330명이 무기정학을 당했으며, 1,462명이 검거되어 악형을 받았다. 이렇듯 정의감과 애국심이 강렬했던 학생들은 일제의 식민통치 아래에서 분연히 떨쳐 일어나 국가와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려 했던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여 1967년 광주광역시 동구 황금동에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을 건립하였다. 이후 2004년 광주광역시 서구 화정동에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을 신축하고,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전개 과정을 입체적으로 복합 전시 연출하여 2005년 11월 새롭게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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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 결성지(안일사)
1910년대 대구를 비롯한 영남지역 인사들이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비밀결사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를 결성한 곳이다. 조선국권회복단은 1908년 대구에서 만들어진 달성친목회가 1913년 시회(詩會) 형식을 빌어 조직되었다가 1915년 확대, 개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남지역 계몽계열 인사들이 주축을 이룬 조선국권회복단은 국외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동지 규합 및 군자금 모집에 힘썼다. 3.1운동 때에는 마산 등지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였다. 안일사는 고려 태조 오아건이 머물렀다고 하여 오랫동안 안일암으로 불리었다. 1960년대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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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영 순국기념탑
이시영(1882 - 1919)은 대구(大邱) 사람이다. 1914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의 방안을 모색하다가 귀국하여 1915년 음력 1월 윤상태(尹相泰)·박상진(朴尙鎭)·서상일(徐相日)·홍주일(洪宙一) 등과 함께 경북 달성군(達城郡)에서 시회(詩會)를 가장하여 비밀결사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을 조직하고 교통부장(交通部長)을 맡아 주도적으로 활동하였다. 동단은 대구를 중심으로 주로 경상우도(慶尙右道) 지역의 중산층 이상의 혁신유림들이 참여하여 곡물상의 상업조직과 사립교육기관을 통하여 독립군을 지원한 구국경제활동단체였다. 그는 만주·노령(露領)지방의 독립운동가들과 연계투쟁의 방안을 모색하는 한편 1916년 8월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의 김진우(金鎭瑀)·김진만(金鎭萬)·최병규(崔丙圭) 등과 연계하여 대구의 자산가 서우순(徐祐淳)으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던 중 일경에 붙잡혀 1917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실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19년 3·1독립운동 당시에는 서울의 만세시위에 참여한 후 운동의 확산을 위해 만주로 건너가 항일활동을 계속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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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화기념관, 이장가문화관
상화기념관은 이장가 문화관과 공간을 공유하고 있으며 ‘이장가’는 이상화의 할아버지인 금남 이동진 선생이 재산을 가족 및 친지에게 나누어준 일을 ‘이장’이라 일컬어 붙여진 이상화 집안의 가문이름이다. 이동진 선생에게 두 아들인 이일우, 이시우 형제가 있었고, 이시우 선생의 차남이 바로 우리가 잘 아는 이상화 시인이다. 이상화 기념관·이장가 문화관에서는 이상화 시인을 비롯하여 이장가 집안에서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오랜 기간 쌓은 민족 계몽운동 및 항일 독립운동의 업적을 살펴볼 수 있다. 이상화(1901 - 1943)는 일제강점기 「나의 침실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중의 사망」 등을 저술한 시인이다. 1901년에 태어나 1943년에 사망했다. 한때 일본에 유학했고 1922년 『백조』 창간호에 동인으로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창립회원으로 활동했고 의열단 관련 사건으로 구금되기도 했다. 초기의 시에서는 생명의 강렬한 욕망과 호흡, 인습에 대한 공공연한 반역과 도전이 드러난다. 사회참여적 색조를 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개벽』지 폐간의 계기가 된 작품으로, 치열한 반골기질이 표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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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운재
첨운재는 대구 상인동 출신으로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은 대구의 독립운동가 향산(香山) 윤상태(尹相泰.1882~1942)의 별서(別墅)로, 시도 짓고 동지들과 독립운동을 모의한 곳이다. 윤상태는 눈 내리던 1915년 1월 15일(음력) 시회(詩會)를 가장하여 앞산 안일사에서 비밀결사 단체인 조선국권회복단을 조직할 때, 통령(統領)으로 추대됐다. 1년 2개월여 옥고도 치른 윤상태 지사는 비밀결사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 가입, 향산상회(香山相會) 운영, 파리장서운동 참여, 월배 덕산학교(德山學校) 설립, 대구교남학교(현 대륜학교) 후원 등에 나섰고 '상해 독립자금 전달' 등으로 고문을 당한 뒤 사망한다. 이후 잊혀진 이곳은 2018년 손녀 윤이조의 「지나간 것은, 다 그립고 눈물겹다」라는 책으로 다시 알려졌는데, 당시 주변에는 물레방아와 연못도 있었다. 윤상태 지사는 월배의 아름다운 광경을 '달배육경(月背六景)'의 시로 남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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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채 구 묘
백남채(1888 - 1950)는 일제강점기 대구 독립만세운동과 관련된 독립운동가. 정치인이다. 1888년 경상북도 경산(慶山) 출생으로, 중국으로 건너가 북경대학(北京大學)을 졸업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서병우(徐丙佑), 홍주일(洪宙一), 이만집(李萬集), 김마리아 등과 시위운동을 계획하다 발각되어 2년 간 복역했다. 이후 희도보통학교(현재 대구종로초등학교) 교장을 지냈고, 대구요업주식회사 사장을 지냈다. 해방 후 과도입법의원을 거쳐 제헌국회의원이 되었으며, 재임 중 1949년 동료의원 99명과 함께 축첩공무원 추방에 대한 의견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1977년에 독립운동 경력이 인정되어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1990년에는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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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범학생독립운동기념탑
1938년 3월 일제는 ‘조선교육령’을 개정하고 조선의 민족성이 담겨있는 소설이나 시, 역사서 등을 읽는 것은 매우 엄격하게 금지하였다. 이에 대구사범학교에서는 문예부를 시작으로 연구회, 다혁당 등 3개의 비밀결사를 결성하여 독립을 위해 활동했다. 문예부에서는 조선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탐구, 그리고 당시 조선의 정세에 대한 의견을 나누며 항일 정신을 고취하였다. 연구회는 독립 쟁취라는 사명을 위해 자신들의 분야에서 심층적 연구를 통해 지식과 힘을 키웠다. 다혁당은 군사력을 키우기 위한 군사 훈련도 실시하였다. 1941년 일제 경찰은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교육을 한 사실을 알아낸 후 비밀 결사의 회원들, 조선인 교직원, 학부모를 모두 포함하여 총 300여명을 체포하는 ‘대구사범학교 사건’을 일으켰다. 이 중 35명이 구속되었으며, 그 중 5명은 영양실조와 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옥에서 순국하였다. 이 탑은 대구사범학교재학생 박효준 등이 항일결사 모임을 조직하여 일제 식민통치에 반대하는 항일투쟁을 전개한 데 대한 공훈을 기리고 옥중 순국한 강두안, 박제민, 박찬웅, 서민구, 장세화 등 5인에 대한 추모를 위하여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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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광 상
박희광(1901 - 1970)은 일제강점기 봉천성에서 보민회와 일민단 등 친일파 숙청작업을 담당한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밀양(密陽). 일명 박상만(朴相萬, 朴尙萬). 경상북도 선산 출신. 박윤하(朴胤夏)의 아들이다. 1912년 만주로 건너가 1919년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에 가입, 제5중대에 배속되어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봉천성(奉天省)에는 일제의 앞잡이 단체인 보민회(保民會)와 일민단(日民團) 등이 독립운동을 방해하고 동포들의 단합을 해치고 있었는데, 대한통의부의 명령에 따라 김광추(金光秋)·김병현(金炳賢)과 함께 이들의 숙청작업을 담당하였다. 1924년 6월 만주에서도 가장 악질적인 일제 앞잡이였던 보민회장 최정규(崔晶奎)의 집을 습격, 그의 장모와 서기 박원식(朴原植)을 사살하였다. 이어 군자금 모금을 위하여 활동하다가 김병현과 함께 중국경찰에 붙잡혀 일본경찰로 인도되었다. 관동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여순고등법원에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여순감옥에서 18년간 복역한 뒤 1943년 출옥하였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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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재룡 흉상, 공적비
우재룡(1884 - 1955)은 일제강점기 대한광복회를 결성하여 무기조달, 격문발송을 담당한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단양(丹陽). 일명 김경옥(金景玉)·김재수(金在洙)·김재서(金在瑞)·김상호(金尙浩)·김한조(金漢朝). 자는 이견(利見), 호는 백산(白山)이다. 1903년 대한제국 육군에 입대하여 참교(參校)로 근무하였다. 1906년 의병이 되기 위해 탈영, 영천의 정용기(鄭龍基)와 함께 산남의진(山南義陣)을 일으킨 뒤 연습장(練習將)으로 활약하면서 영일의 입암전투(立巖戰鬪) 등에서 많은 활약을 하였다. 정용기가 죽은 뒤에는 그를 계승한 그의 아버지 정환직(鄭煥直) 진영의 선봉장으로서 영일·경주·청송·영천·대구 근방에서 용맹을 떨쳤다. 1908년 무기조달 관계로 대구에 숨어들었다가 잡혀 종신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는데, 대한제국이 멸망한 뒤 1911년에 이른바 은사령에 따라 출옥하였다. 1915년 대구에서 박상진(朴尙鎭)·채기중(蔡基中)과 함께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를 결성하였다. 이 조직은 경상북도·충청남도·전라남도·황해도를 비롯한 전국으로 뻗어나가 1910년대 독립운동을 하는 국내 조직 중 가장 큰 규모로 발전하였다. 이때 국내와 국외의 연락책임을 맡아 국내에서는 광주·목포 등지에서 독립군 연락기지 건설과 군자금 모금을 위하여 활약하였고, 만주에서는 안동에 상주하면서 대한광복회와 재만독립군기지인 서간도의 부민단(扶民團), 신흥학교와의 연락업무를 맡았다. 또한 국내로 보내는 무기 조달과 격문 발송 등의 일을 맡아 보았다. 1917년을 전후하여 전국적으로 송달되어 화제가 되었던 대한광복회 격문은 거의 그의 주선에 의하여 배포된 것이다. 또 1917년 11월에 처단된 칠곡의 친일 부호 장승원(張承遠)과 1918년 1월에 처단된 아산의 친일파 도고면장 박용하(朴容夏)에 대한 암살 투쟁과 무기 공급 등에도 깊이 관여하였다. 1918년 대한광복회 조직이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거의 파괴당하자, 남아 있는 한훈(韓焄)·권영만(權寧萬)과 함께 대한광복회의 조직 회복에 주력하였다. 1920년 군산에서 일본 경찰에 잡혀 무기징역으로 옥고를 치렀다. 그 뒤 감형되어 1937년 풀려나왔다. 출옥 후 옥중에서 얻은 병이 깊어 권영만 등의 지원을 받아 살아가던 중 8·15광복을 맞았다. 그 뒤 권영만·이관구(李觀求: 일명 李海量) 등과 함께 대한광복회를 재건하여 독립운동 유적지를 정화하는 사업에 전념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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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단 학생 독립운동 기념탑
1942년 5월 대구상업고등학교 4학년 이상호가 서상교, 김상길 등과 조선이 처한 현실을 토로하고 항일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위하여 결성한 태극단은 치밀한 조직체계와 투쟁방안을 실현하려고 하다가 1943년 일경에 발각되어 단원 26명 전원이 체포되어 16명이 석방되고 10명이 취조를 받으며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일경의 모진 고문으로 이준윤이 병보석 석방 3일만에 숨지고, 3명이 추가로 불기소로 풀려났으며, 6명이 재판을 받아 미성년자의 최고형인 단기 5년이상 장기 10년형을 선고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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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병기 추모비
우병기(1903~1944)는 1903년 11월 10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에서 태어났다. 일본 도쿄에서 조선문제시국연구회(朝鮮問題時局硏究會)를 결성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호는 월해(月海)이다.우병기는 1920년대 초 윤상태(尹相泰)가 달성군 월배면[현 달서구 상인동]에 세운 사립 덕산학교(德山學校)에서 수학하였다. 1926년 일본 도쿄[東京]로 이주하여 양산제조업에 종사하였으며, 1939년 11월경부터 5명의 동지와 함께 조선문제시국연구회를 조직하고 조선 독립을 도모하였다. 우병기 등은 1941년 8월까지 8회에 걸쳐 모임을 가졌으며, 진천순모(鎭川淳模)[창씨명]·태원용(太原勇)·방산상봉(方山祥鳳)·봉곡태을(蜂谷台乙)·결성시백(結城時伯)·전윤필(全允弼) 등을 새로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모임에서는 주로 중일전쟁 이후의 조선 문제와 통제경제 등에 관한 토론을 벌였고, 향후 시국 대책을 논의하였다. 1941년 12월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재일 한인에 대한 감시가 강화되었다. 그 와중에 조선문제시국연구회 모임이 탄로나 우병기 등 여러 회원들이 체포되었다. 우병기는 1942년 3월 5일 함경북도 청진재판소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7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44년에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었고, 10월 26일 복역 중 사망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우병기의 공적을 기려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