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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남의진 항일순국 무명3의사총
산남의진 제2대 정환직 대장은 이곳에서 체포되어 대구형무소로 끌려가던 중 영천 조양각 맞은편에서 총살당하여 순국했다. 정 대장이 체포될 당시 함께 있었던 의병 세 사람도 일제의 도륙으로 희생되었다. 왜군들이 완전히 떠난 후 3일 만에 마을주민들이 심하게 훼손된 주검을 수습하여 3기의 무덤을 만들어 두었으나 광복이 되어도 돌보는 사람이 없었다. 마을 청년들이 가시덤불에 방치되다시피 한 무덤을 보살피기 시작했는데, 1995년 도로 확장공사로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이에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면서 3인 합장묘를 만들고 작은 비석도 세우고 벌초를 하는 등 관리를 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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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근 묘
강대근(1891 - 1957)은 경북 영일(迎日) 사람이다. 1907년 정용기(鄭鏞基)가 이끄는 산남의진(山南義陣)에 참가하여 청하(淸河)·흥해(興海)·의성(義城)·청송(靑松) 등지에서 항일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이듬해 영일군(迎日郡) 죽장면(竹長面) 입암(立岩) 전투에서 패해 전상(戰傷)을 입고 피신하고 말았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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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남의진 발상기념비, 충의단
산남의진 전투지는 구한말 산남의진 김용기(1대) 김환직(2대) 최세윤(3대) 의병대장을 비롯한 포항· 영천지역 의병들이 죽장면 입암리 일원에서 치열한 항일 의병 전투를 벌였던 곳이다. 죽장면 입암서원 하천변 일대는 지난 1907년 8월 산남의진 의병들과 일본군 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여져 김용기 의병대장과 이한구·손영각 중군장 등 수많은 의병들이 숨진 곳이다. 산남의진(山南義陣)이란 구한말인 1906년부터 1910년까지 경북 영일, 영천, 청송, 경주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한 항일 의병부대를 말한다. 정용기(鄭鏞基, 1862~1907)은 1906년 3월 부친 정환직(鄭煥直, 1843~1907)의 권유를 받고 산남의진을 일으켰다. 결성 직후 신돌석 의병을 돕기 위해 영해로 진군하던 중 정용기가 체포되면서 해산하였다. 1906년 9월 석방된 정용기는 이듬해인 1907년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같은 해 8월 관동지역으로 북상하던 중 일본군이 포항 입암으로 들어왔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마침 인근에 주둔하고 있던 산남의진은 일본군을 기습 공경하였으나 오히려 집중공격을 받아 패하였다. 이 전투에서 정용기를 비롯하여 이한구.손영각 등 많은 의병들이 전사하였다.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들은 정환직은 흩어진 의병들을 수습하여 1907년 9월 다시 산남의진을 일으켜 대구.영천을 중심으로 항일투쟁을 지속하였다. 이에 산남의진발상기념비건립위원회(위원장 조성문, 총무 이석범)와 권태한 죽장중고등학교장 등 지역민들이 지난 1985년 입암리 하천 변에 ‘산남의진발상기념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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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남의병 전투지
포항시 북구 죽장면 입암리 산 25는 1907년 9월 산남의진이 일본군을 맞아 전투를 치른 곳이다. 산남의진(山南義陣)은 1906년 3월부터 1910년경까지 경상북도 영천, 청송, 영일 일대를 중심으로 정용기(鄭鏞基), 정환직(鄭煥直), 최세윤(崔世允) 의병장이 이끌던 의병부대였다. 의진은 처음부터 관동(關東)을 향한 북상을 목표로 정하고 활동하다 1907년 9월 입암전투(立岩戰鬪)에서 크게 패하였다. 이후 의진은 경상도의 여러 지역에서 격렬하게 항쟁하다 1910년 청송군 안덕면에서 벌어진 고와실전투(高臥室戰鬪)를 끝으로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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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구 묘
이한구(1870 - 1907)는 대한제국기 신성전투, 자양전투, 영일 입암리전투 등에 참전한 의병장이다.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한유(韓有). 영일(迎日)출신. 이언적(李彦廸)의 후손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을사오적의 주살을 외치며 의병장 정용기(鄭鏞基)와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이듬해 4월 동대산(東大山)에서 거의하여 산남의진(山南義陣)을 결성하고 중군장(中軍將)이 되어 정순기(鄭純基)·손영각(孫永珏) 등과 모든 일을 계획, 지도하였다. 이한구의 의병부대는 주왕산·약곡(藥谷)·청하(淸河) 등 각지의 전투에서 선봉으로 크게 활약하였다. 그 뒤 재봉기를 도모한 이한구는 1907년 9월 정용기와 함께 재기하여 청송의 신성(薪城)전투에서 일본군 3명을 사살하고 이어 자양(紫陽)전투에서 일본군 분견소장을 생포, 적군 3명을 사살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11일 강원도로 북상 도중 영일 입암리(立巖里)전투에서 정용기·손영각·권규섭(權奎燮) 등과 함께 전사, 순국하였다.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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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에서 가장 먼저 3.1운동이 일어난 곳 표지석(포항교회)
경북지역 최초 3.1운동이 일어난 곳은 당시 포항교회(구, 제일교회)와 여전장터 일원이며, 1919년 3.1운동 당시 교회 건물은 현재 포항소망교회로 자리하고 있다. 포항 3.1운동은 1919년 3월 11일, 경북에서 가장 먼저 일어났다. 서울에서 시작된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3월 8일, 대구에서 벌어진 시위에 포항대표로 최경성, 송문수가 참여하였다. 최경성은 현장에서 검거되지만 송문수는 독립선언서를 갖고 포항으로 돌아와 이기준, 이봉학, 장운환과 의논하여 장날인 11일을 거사일로 잡고 벽보와 선전문을 만들었으나 밀정의 신고로 일본 관헌에게 검거되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스스로 몰려나와 11일 1차 시위를 벌였으며, 일제 경찰의 총칼에도 굴하지 않고 12일에는 더욱 많은 사람들이 포항만세운동에 동참하면서 독립의지를 불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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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하장터 3.1만세의거기념비
윤영복은 청하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결심하고 오용간, 윤영만 등과 접촉하여 거사일을 청하장날인 3월 12일(음력 2월 11일)로 잡았다. 이어 동지를 규합하고 태극기를 만드는 등 치밀하게 준비를 했다. 3월 12일, 청하장터에 모인 동지들이 선창하고 군중들이 호응하면서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청하장터를 진동하였다. 그러자 일경과 헌병들이 달려와 총검으로 위협하여 군중을 해산하고, 주동 인물들을 검거하였다. 당시 청하장터 만세운동에 앞장섰다가 피검된 23인의 애국지사는 다음과 같다. 김만수, 김유곤, 김유선, 김종만, 김진봉, 김진순, 안덕화, 안도용, 안상종, 안천종, 안화종, 오용간, 윤도치, 윤영만, 윤영복, 이명만(태하), 이상호, 이영섭, 이준석(태원), 이준업(태정), 정백용, 정상득(성욱), 정재신(가나다 순). 피검된 애국지사 중 윤도치는 옥중에서 순국하셨고, 무죄석방된 윤영만을 제외한 나머지는 6월~1년 6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아 옥살이를 했으며, 출옥해서도 국외로 망명하거나 3.1동지회 등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지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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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호 집
이상호(1881 - 1954)는 경북 영일(迎日) 사람이다. 1919년 3월 22일 영일군 청하면(淸河面) 덕성리(德城里)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계획을 주도한 윤영복(尹永福)·오용간(吳用干)과 함께 덕성리 장터에서 수백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이를 탄압하는 일경에 붙잡혔다. 그후 4월 2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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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호 묘
이상호(1881 - 1954)는 경북 영일(迎日) 사람이다. 1919년 3월 22일 영일군 청하면(淸河面) 덕성리(德城里)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계획을 주도한 윤영복(尹永福)·오용간(吳用干)과 함께 덕성리 장터에서 수백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이를 탄압하는 일경에 붙잡혔다. 그후 4월 2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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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목 집
조성목(1868 - 1937)은 경북 영일(迎日) 사람이다. 1906년 3월 정용기(鄭鏞基)가 경북 영천(永川)에서 산남의진(山南義陣)을 조직할 때 그 휘하에 들어가 활동하였다. 그러나 1907년 7월 입암(立岩)전투에서 일군에 패하여 의병장 정용기를 비롯해 중군장·참모장·좌영장 등 의진의 핵심들이 일시에 전사해 의진이 해체되자 은둔하였다. 그 뒤 1927년 산남의진에 참가한 거의제공(擧義諸公)의 충절을 기리고자 참동계(參同 )를 만들고 서문(序文)을 작성, 배포하다가 붙잡혔으나 기소 중지로 풀려났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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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목 묘
조성목(1868 - 1937)은 경북 영일(迎日) 사람이다. 1906년 3월 정용기(鄭鏞基)가 경북 영천(永川)에서 산남의진(山南義陣)을 조직할 때 그 휘하에 들어가 활동하였다. 그러나 1907년 7월 입암(立岩)전투에서 일군에 패하여 의병장 정용기를 비롯해 중군장·참모장·좌영장 등 의진의 핵심들이 일시에 전사해 의진이 해체되자 은둔하였다. 그 뒤 1927년 산남의진에 참가한 거의제공(擧義諸公)의 충절을 기리고자 참동계(參同 )를 만들고 서문(序文)을 작성, 배포하다가 붙잡혔으나 기소 중지로 풀려났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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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병 항왜혈전 기념비
이 기념비는 산남의병의 숭고하고 청사에 길이 남을 항일독립정신을 기리고 그분들의 명예선양과 후세들에게 올바른 국가관과 애국심을 고취시키고자 1967년 포항시 북구 흥해읍 성내리 39-8(영일민속박물관내)에 건립되었다. 산남의진은 정용기 초대 대장과 제2대 정환직 대장이 의병을 이끌다 순국하자 제3대 최세윤 대장이 의진을 수습하여 일본군과 항쟁을 계속하였으며 최세윤 대장 역시 일본군에 피체되어 순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