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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훈 묘도비
허훈(1836 - 1907)은 경북 선산(善山) 사람이다. 의병장 왕산(旺山) 허위(許蔿)의 맏형이다. 1895년 아우 허위가 거의(擧義)할 때 토지 3천여 두락(斗落)을 매각하여 군자금으로 제공하는 등 의병활동에 적극 협조하였다. 1896년에는 진보(眞寶)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안동(安東)·영해(寧海)·영양(英陽)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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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훈 묘
허훈(1836 - 1907)은 경북 선산(善山) 사람이다. 의병장 왕산(旺山) 허위(許蔿)의 맏형이다. 1895년 아우 허위가 거의(擧義)할 때 토지 3천여 두락(斗落)을 매각하여 군자금으로 제공하는 등 의병활동에 적극 협조하였다. 1896년에는 진보(眞寶)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안동(安東)·영해(寧海)·영양(英陽)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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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규 기념비
이현규(이하현, 1874 - 1917)의 본관은 재령(載寧)으로 경상북도 영양(英陽) 출신이다. 이현규는 어려서부터 기품이 늠름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투철하였던 바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늑결되자 통분을 참지 못하고 부근의 동지들과 협의하며 각지로 연락을 취하여 11월 하순경에 청송(靑松)의 주왕사(周王寺)에서 동지 수십 명과 더불어 회합하여 적을 토벌할 것을 결의하고 여러 군(郡)과 읍에 격문을 보내 거의(擧義)의 뜻을 전했다. 그 해 12월 중순에는 울진의 불영사(佛影寺)에서 안동(安東), 청송, 진보(眞宝), 영양 등의 지역으로부터 모여든 동지들과 의병을 일으켰는데, 중의(衆議)에 의해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이어 격문을 발송하고 의병, 무기, 군자금 등을 모집하니 500여명이 의병에 투신하여 왔으므로 이들을 주왕산(周王山)과 청량산(淸涼山) 등에서 훈련시킨 뒤 이듬해인 1906년 2월에 의진(義陣)을 편성하였다. 아울러 유시연(柳時淵)을 중군장(中軍將)에, 신형일(申衡一)을 소모장(召募將)에, 김대규(金大圭)를 도포장(都砲將)에, 권대성(權大聲)을 집사(執事)에 각각 임명하고 전투태세를 갖추어 진격하여 일본군과 수십 차에 걸쳐 교전(交戰)하였다. 그 해 4월에 진보 근처 "오누지(池)"가에서 강원, 경상도 의병의 소탕책임자인 일본 헌병 오장(伍長) 무등(武藤)이 이끄는 헌병부대와 교전하였는데 치열한 전투 끝에 일본군이 패하여 달아나니 의병진을 이끌고 파천면(巴川面) 어천(漁川)까지 추격해서 대장 이하 적군 수명을 사살하였다. 이 전투에서 의병장인 이한규는 심한 상처를 입고도 다시 의병을 정비한 수 5월에는 울진(蔚珍) 죽변에 있는 왜관(倭館)을 격파하고 이어 영양의 북쪽에 주둔한 적군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이 증원부대를 이끌고 대대적으로 공격하였는데 악전고투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도포장을 비롯 많은 의병을 상실하였다. 그리하여 의병진을 수습하여 후퇴한 후 재기(再起)를 약속하고 해산하였다. 이처럼 독립 의진으로서 활약하는 한편 신돌석(申乭石) 의진과 연합하여 그 돌격장으로 활약하여 영해(寧海) 성을 함락하는 크나큰 공헌을 세우기도 하였다. 즉 왜적이 한국 관병들을 움직여 강원도 평해(平海)를 진공하였으므로 의진은 평해를 철수한 후 많은 의병을 거느리고 영해(寧海)를 수복하기 위해 진공하였다. 그러나 적이 이미 들어와 성에 총혈(銃穴)을 뚫고 대비하고 있었다. 이때 선봉장의 임무를 맡은 이현규는 서문을 파괴하고 불을 질렀다. 이로써 의진은 과감하게 진격할 수 있었고 적은 궤주하였다. 그 후에는 영일군 청하면 모진리(牟津里)에 피신하여 상처를 치료하면서도 글방에서 2세 교육에 주력하는 한편 항일구국사상을 고취시키며 재기를 도모하였지만 총상으로 인한 여독으로 1917년 2월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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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의병 오누이지 전적기념비
본 비는 오누이지 전투의 공로를 기념하기 위한 사적이다. 1905년 11월 청송의 대전사(大典寺)에서 김대규(金大圭)·신형일(申衡一)·권이달(權理達, 權大聲)·조완이(趙完伊)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킨 이현규(李鉉圭, 字 夏玄)는 그 해 12월 울진군 불영사(佛影寺)에서 약 500명이 모인 가운데 안동·청송·진보·영양의 4군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다. 그 뒤 1906년 2월 영양군 입암면 교리에서 의병부대 조직을 편성하였다. 그 뒤 이현규는 일본군과 수십 차례 전투를 치렀다. 특히 1906년 4월 헌병 오장(伍長) 무토[武藤]가 이끄는 일본군과 진보 장수령(長水嶺) 일대 교전하였는데, 진보 오누이지 전투에서는 무토 등 10여 명의 일본군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집사 조완이가 전사하고, 이현규도 총상을 입게 되었다. 그 뒤에도 이현규는 항전을 이어가다가 1909년 봄 부대를 해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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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성지 사적비
심성지(1831 - 1904)는 경북 청송(靑松) 사람이다. 경북 청송에서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심성지는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의 변보(變報)를 전해듣고 비분강개하였는데, 이어서 일제와 친일정권에 의해 을미개혁(乙未改革)으로 단발령까지 강행되자, 그것에 대한 반감이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그러던 중 1896년 정월에 안동의병진의 유시연(柳時淵)이 포수 20여 명을 대동하고 청송으로 와 군기고를 습격하였으며, 외지에서는 거의 촉구「격문(檄文)」이 내도하였다. 이에 청송의 유생들은 향회(鄕會)를 개최하여 1896년 정월 29일 그를 의병장에 추대하였다. 그리고 2월 2일에는 참모와 서기 등 약간명의 간부진을 선출하였으며, 3일부터 인근 청년들을 모집하여 군사훈련을 실시하면서 사태의 추이를 살피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군사훈련을 하는 데 필요한 군량을 확보하는 일이었다. 이에 따라 5일에 모량도감(募粮都監)을 설치하고 각 문중에 할당하여 군량미를 모았다. 그리고 9일 참모진을 구성하였는데, 김대락(金大洛)으로 중군장을 삼고, 남두희(南斗凞)로 우익장을 삼았다. 10일에는 참모 남승철(南升喆)을 사병도총(司兵都摠)으로 삼았다. 그 후 대구에서 일본군이 의병을 토벌하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4월 2일 심성지 의병장은 중군장 김대락에서 포정(砲丁) 60명을 이끌고 감은리(甘隱里)의 뒷산을 지키도록 하였다. 그러나 적병들이 먼저 그곳을 점령하였으므로 청송·의성·영천의 3의병진이 연합하여 마을 앞에 진을 치고 적들의 공격을 막았다. 의병진은 치열하게 전투를 전개하여 적병 7,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고, 날이 저물자 적들은 퇴각하고 말았다. 이처럼 심성지 의병장이 이끄는 청송의병은 대승을 거두었으나, 광무황제의 의병 해산조칙이 내려짐에 따라 의병진을 해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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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철희 집
신철희(1895 - 1965)는 1920년 음력 8월경 경북 청송(靑松)에서 차경석(車京錫)을 교주로 하는 흠치교에 가입하여, 겉으로 종교 활동을 표방하며 독립운동에 진력하기로 결의하였다. 흠치교는 교주 밑에 60인의 고문을 두고, 각 고문 밑에 6인조, 6인조 밑에 각 12인조, 12인조 밑에 각 8인조, 8인조 밑에 각 15인조 등을 두는 조직 체계를 구성하였다. 이 같은 조직구성으로 흠치교는 경북 일대에서 급속히 확산될 수 있었다. 이들은 1924년 갑자(甲子)해에 흠치교의 힘에 의해 조선이 독립이 될 것이라고 선전하면서 자금모집 및 교도증대에 힘을 쏟았는데, 신철희는 8인조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일경에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신철희는 이 일로 인해 1921년 7월 11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소위 대정8년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여 1921년 11월 2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면소(免訴) 처분을 받기까지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9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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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철희 유지비
신철희(1895 - 1965)는 1920년 음력 8월경 경북 청송(靑松)에서 차경석(車京錫)을 교주로 하는 흠치교에 가입하여, 겉으로 종교 활동을 표방하며 독립운동에 진력하기로 결의하였다. 흠치교는 교주 밑에 60인의 고문을 두고, 각 고문 밑에 6인조, 6인조 밑에 각 12인조, 12인조 밑에 각 8인조, 8인조 밑에 각 15인조 등을 두는 조직 체계를 구성하였다. 이 같은 조직구성으로 흠치교는 경북 일대에서 급속히 확산될 수 있었다. 이들은 1924년 갑자(甲子)해에 흠치교의 힘에 의해 조선이 독립이 될 것이라고 선전하면서 자금모집 및 교도증대에 힘을 쏟았는데, 신철희는 8인조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일경에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신철희는 이 일로 인해 1921년 7월 11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소위 대정8년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여 1921년 11월 2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면소(免訴) 처분을 받기까지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9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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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석술 기념비
남석술(1877 - 1907)은 경상북도 청송(靑松) 출신이다. 1906년 4월 정용기(鄭鏞基)·이한구(李韓久)·정순기(鄭純基)·손영각(孫永珏) 등이 중심이 되어 영천(永川)을 거점으로 하여 신령(新寧)·흥해(興海)·청하(淸河)·기계(杞溪)·죽장(竹長) 등지의 우국지사들을 규합하여 산남의진(山南義陣)이 구성되었다. 이에 남석술은 의병장 정용기의 휘하에 입대하여 의병을 소모하고, 군자금을 조달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고 전한다. 처음에 영덕(盈德)을 공격하여 적장 4명을 사살하고 적의 병영을 방화하는 등 여러 차례 적과 교전하였다고 한다. 1907년 12월 의병장 정용기가 순국하자, 우재룡(禹在龍)·이세기(李世紀) 등이 흩어진 의병을 재정비하고 정용기의 부친인 동엄 정환직(東 鄭煥直)을 추대하여 의병장으로 삼고, 영덕 서암(盈德 西岩) 전투에서 적과 교전할 때 이 격전에 참여하였다가 전투 중에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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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열 묘
윤기열(1878 - 1917)은 경상북도 청송(靑松) 출신이다. 1906년 산남의진(山南義陣)이 조직되고 의병장으로 정용기(鄭鏞基)가 추대되자, 동의진에 입진하여 지례(知禮)·고령(高靈)을 담당하였으며 이초장(二哨長)이 되었다가 후에 도포장(都暑將)으로 임명되었다. 대체로 의성(義城)·청송(靑松)·진보(鎭寶)·장서(長署) 등지에서 적과 교전하였는데 접전할 때는 위난을 가리지 않고 용맹하였다. 1907년 이세기(李世紀)와 같이 장서(長署) 읍을 습격하여 왜적을 전멸시켰을 뿐 아니라, 분파소(分派所)·세무서·우체소·서기청(書記廳)을 방화·소각하는 등의 전과를 올렸다. 1908년 왜장 삼이태랑(森伊太郞)을 사살하고 그의 군도를 노획하여 그후 항시 그 칼을 휴대하고 다녔다. 1909년에는 산남의진의 각부대를 각지로 분파하여 큰 산을 점령하고 유격전을 전개하였는데, 많은 전과를 올렸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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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석인 묘
남석인(1878 - 1907)은 본관은 영양(英陽). 별명은 남우팔(南又八), 자는 우팔(禹八). 경상북도 청송 출신. 남천주(南天柱)의 후손이며, 산남의진(山南義陣)에서 활약한 남석문(南錫文)의 육촌이다. 남석우(南錫佑)의 포군에서 종사(從事)로 일하던 중, 1905년 을사조약의 강제체결 소식을 접하였다. 이 때 고종의 시종관을 지내던 정환직(鄭煥直)이 아들 정용기(鄭鏞基)를 고향 영천으로 귀향시켜 산남의진을 구성할 것을 명하자, 이에 가담하여 청송지방 소모장이 되었다. 서종용(徐鍾容)·남석구(南錫球)·임중호(林中虎)·심일지(沈一之) 등과 모병활동을 하며 때를 기다리다가, 4월 정용기가 대구에서 아버지 정환직이 체포되었다는 관의 유혹에 빠져 붙잡혀 구속되었다. 정용기의 사촌 사홍(士弘)이 의병 30명을 거느리고 활약하고 있음을 듣고, 4월 12일 이운경(李雲景)·정천여(鄭千汝)·남석문과 함께 출전하였다. 경주를 거쳐 영덕에 이르러 이한주(李漢主) 의진과 합진, 포대장이 되었다. 26일 80명을 거느리고 출전하였으나 영덕 적암지(赤巖地)에서 경주 진위대의 습격을 받아 의병을 해산하고 귀향하였다. 1907년 5월 정사홍의 권고로 다시 거의하여 각처에서 군자금을 모금, 이세기(李世紀)와 구입한 무기를 감추어두고, 청송 보현산(普賢山)에 유진하였다. 6월 포군 모병차 입암(立巖) 등지에서 활약하던 중 이세기와 함께 붙잡혔는데 이세기는 탈출하였다. 1907년 9월 4일 재판에서 종신형을 언도받았으며, 무기은닉처문제로 고문 끝에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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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복수 유허비
남복수(1880 -1931)는 경상북도 청송(靑松) 출신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늑결되자 고종황제는 측근의 정환직(鄭煥直)에게 항일의병운동의 재개를 종용하였다. 정환직은 황제의 뜻을 받들어 장남 정용기(鄭鏞基)에게 고향 영천(永川)으로 내려가 의병을 조직할 것을 명하고 중앙에서 적극 협력할 것을 약속하였다. 이에 정용기는 어릴 적 죽마고우인 이한구(李韓久)·손영각(孫永珏) 등과 의논하여 영남과 관동 일대의 지사들을 규합하여 이른바 산남의진(山南義陣)의 창단을 보게 되었다. 이에 남복수는 산남의진에 입대하여 의병운동의 효과적 전개를 위하여 군자금과 무기를 모집하여 조달하는 등 헌신적으로 투신하였다. 한편 입암(立岩)·영천 등지의 전투에서 적과 격전을 전개하던 중 부상을 입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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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능호 기적비
조능호(1852 - 1925)는 경북 청송(靑松) 사람이다. 경북 청송에서 거의한 심성지(沈誠之)의진에 참여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활동하였다. 1896년 1월 안동의진의 소모장인 유시연(柳時淵)이 청송에서 군기(軍器)를 모집하고 외지에서 거의를 촉구하는 격문이 전해지자 이에 고무된 유림들은 토적복수(討賊復讐)를 기치로 의진결성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청송의 향교(鄕校) 유림 200여 명이 모여 거의를 결의한 후 심성지를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김대락(金大洛)을 중군장, 남두희(南斗凞)를 우익장, 서효신(徐孝信)을 소모장에 임명하는 등 진용을 갖추었다. 이어 심성지의진은 군량을 수합하고 군사를 소모하여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등 군세확장에 힘을 기울였는데 조능호도 이때 종사에 선임되었다. 이윽고 같은 해 4월 2일 김대락이 이끄는 심성지의진의 주력부대는 인근지역의 김상종(金象鍾)의진 및 김하락(金河洛)의진과 연계하여 감은리(甘隱里) 뒷산에서 적군과 조우하여 교전 끝에 적군 7∼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계속해서 마평(馬平)과 경주(慶州) 등지에서 교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전하였다. 같은 해 4월 심성지의진은 좌익장 권성하 등으로 하여금 3초(哨)의 군사를 이끌고 영덕의진을 지원케 하는 등 인근지역의 의진과 연계하여 활동하기도 하였으나 임금의 해산 조칙(詔勅)에 따라 부득이 해진(解陣)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