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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백 집
박연백(1869 - 1909)의 본은 밀양으로 박광호(朴光鎬)의 장남이며 경북 의성(義城) 출신이다. 평소부터 일제의 침략과 국사가 그릇됨을 한탄해 오던 중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거의(擧義)하여 적을 토벌할 것을 결심한 뒤 격문을 작성하여 사방으로 보내니 각 지역에서 의병이 모여들어 공산(孔山)에서 기병(起兵) 하였다. 1906년 7월 1일 일본군과 교전하여 죽창이나 나무막대기 등으로 신무기에 대항하여 적 십 수명을 도륙한 뒤 기세를 올려 의성·의흥(義興)·영천(永川)·청송(靑松) 등지로 전전하면서 야간기습과 화공혈전을 단행하여 일본군을 토벌하였다. 1907년 10월 영천의병장 정관녀(鄭寬汝)와 합세하여 경주 죽지면(竹枝面) 입암리(立岩里)에서 치열한 교전을 벌였는데 정관녀가 도중에 전사하였다. 적군이 사방에서 공격하니 악전고투 끝에 포위망을 뚫고 후퇴하였으나 의병의 희생이 컸다. 그 해 11월 25일 부하 100여 명을 이끌고 의성군사무소, 일경 분견소를 습격하였고 12월 23일에는 청송군 소정리(所井里)에서 적군과 교전하였으며 또한 25일에 의성군에서 일본 수비대와 접전하는 등 맹렬히 활동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대거 증강으로 인해 더 이상의 항쟁이 곤란함을 인지하고 의병진을 해산하였으며, 1909년 11월 20일에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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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백 망제지단
박연백(1869 - 1909)의 본은 밀양으로 박광호(朴光鎬)의 장남이며 경북 의성(義城) 출신이다. 평소부터 일제의 침략과 국사가 그릇됨을 한탄해 오던 중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거의(擧義)하여 적을 토벌할 것을 결심한 뒤 격문을 작성하여 사방으로 보내니 각 지역에서 의병이 모여들어 공산(孔山)에서 기병(起兵) 하였다. 1906년 7월 1일 일본군과 교전하여 죽창이나 나무막대기 등으로 신무기에 대항하여 적 십 수명을 도륙한 뒤 기세를 올려 의성·의흥(義興)·영천(永川)·청송(靑松) 등지로 전전하면서 야간기습과 화공혈전을 단행하여 일본군을 토벌하였다. 1907년 10월 영천의병장 정관녀(鄭寬汝)와 합세하여 경주 죽지면(竹枝面) 입암리(立岩里)에서 치열한 교전을 벌였는데 정관녀가 도중에 전사하였다. 적군이 사방에서 공격하니 악전고투 끝에 포위망을 뚫고 후퇴하였으나 의병의 희생이 컸다. 그 해 11월 25일 부하 100여 명을 이끌고 의성군사무소, 일경 분견소를 습격하였고 12월 23일에는 청송군 소정리(所井里)에서 적군과 교전하였으며 또한 25일에 의성군에서 일본 수비대와 접전하는 등 맹렬히 활동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대거 증강으로 인해 더 이상의 항쟁이 곤란함을 인지하고 의병진을 해산하였으며, 1909년 11월 20일에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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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한룡 기적비
최한룡(1849 - 1917)은 경북 청도 출신으로 1907년 4월부터 국권회복을 부르짖는 격문을 발표하였고, 1907년 7월에는 부하 70명을 거느린 의병장으로 청도·영천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최한룡은 1905년 을사늑약에 분개하여 국권회복을 모색하던 중 1906년 산남의진(山南義陣)에 참전하였다. 1906년 4월 산남의진의 대장 정용기(鄭鏞基)가 신광면 우각동(牛角洞)에서 경주진위대에 체포당한 뒤 자수하였으나 일본군의 악형으로 하반신 불구가 되었다. 최한룡은 1907년 4월부터 1908년 1월 사이에 일본의 침략을 비판하고 국권회복을 부르짖는 다섯 차례의 격문(檄文)을 발표하였다. 즉 <天下에 告示하는 文>(1907. 4), <國債償還件>(1907. 5), <斷髮令件>(1907. 7), <埃及近代史를 읽고 大韓國의 危急함을 歎함>(1908. 1), <國體로서 賊國을 討伐할 件>(1908. 1) 등을 통해서 국민들의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 그리고 1907년 7월경 부하 70여 명으로 창의, 의병장으로 청도·영천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최한룡은 1908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대구경찰서에서 심문을 받았으며, 1909년 이후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해 해인사(海印寺) 등지에서 은거하였다. 최한룡은 합천 해인사와 경남 밀양(密陽)에 거주하는 사위 박재하(朴在夏)의 집에서 신병을 치료하며 요양을 하다가 1917년 10월 26일 사망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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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묘전비
이정희(1881 - 1955)는 경북 청도(淸道) 사람이다. 그는 1915년 음력 1월 15일 박상진(朴尙鎭)·서상일(徐相日)·이시영(李始榮)·박영모(朴永模)·홍주일(洪宙一) 등과 함께 경북 대구(大邱) 안일암(安逸庵)에서 시회(詩會)를 가장하여 비밀결사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을 결성하였다. 동단은 대구를 중심으로 주로 경상우도((慶尙右道) 지역의 중산층 이상의 혁신유림들이 참여하여 사립교육기관과 곡물상의 상업조직을 통하여 독립군을 지원한 구국경제활동단체였다. 조선국권회복단은 1915년 7월 15일에 풍기(豊基)의 광복단(光復團)과 조직을 합쳐 독립군 양성과 군자금 모집, 그리고 무기구입을 목적으로 한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로 발전하였다. 그는 대한광복회의 고문으로 활동하다가 1918년 1월 대구의 광복회 조직이 노출되어 일경에 붙잡혔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동년 10월에 석방되었다. 그는 1920년에 고향인 청도군 매전면(梅田面) 온막동(溫幕洞)에 온명학원(溫明學院)을 설립하고 후진양성에 주력하는 한편 민족의식 고취에 노력하였다. 또한 1921년에 경성북도 초대 평의원(評議員)으로 당선된 후 임시정부(臨時政府) 후원단체인 의용단(義勇團)을 조직하여 군자금 모집활동을 펴다가 1922년 일경에 붙잡혀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계속하여 항일운동과 민족의식 고취에 노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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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연리 3.1운동기념비
일제강점기 폭압에 시달리던 우리 민족의 울분은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3.1독립선언서거 발표되자 목숨을 건 대한독립만세 함성이 되어 전국 방방곡곡으로 울러 퍼져갔다. 청도군에서 제일 먼저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곳이 바로 청도군 매전면 장연리이다. 1919년 3월 11일 장연리 길명의 농민 김집이는 이 마을 고성이씨 이원당 문중 제례에 참석하기 위해 여러지역에서 모여든 사람들로부터 전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대한독립만세운동의 소식을 전해 듣고는 비분강개를 금할 수 없었다. 의분을 참지못한 그는 같은 마일에 사는 노이만, 이선이, 이작지, 이용술, 최두천, 이학천, 배돌이 등과 함께 그날 밤 9시와 이튿날 밤 9시 두차례에 걸쳐 연인원 100여 명의 주민들을 동원하여 횃불을 들고 마을 골목을 누비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후 길명마을의 독립운동가 이동기 선생 집 앞에서 다시금 모여 해산하였다. 당시 일본 경찰 주재소에서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뒤늦게 인지하고 주동 인물을 수소문하여 주동자 이선이, 이작지, 이용술, 최두천, 이학천, 배돌이 선생등을 검거하여 고문 후 대구지방검찰청으로 이송하였지만 모두 불기소로 석방되었다. 김집이 선생과 노이만선생은 함께 도주하였는데 후일 노이만 선생만 검거되어 보안법 위반으로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4개월을 선고받아 복역하였고 김집이 선생은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 행방불명되어 생사를 알 수 없다. 이후 일제의 갖은 탄압으로 만세운동 관련 선생들의 가족들은 온갖 고초를 다 겪었으며 마을을 떠나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우리 청도군 3.1운동의 효시가 된 장연리 3월 11일 대한독립만세 시위 기념비 건립은 장연리 출향인과 주민들이 중심이 되어 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성금을 모으고, 청도군청 청도군새마울회 관내 사회단체 초,중학교 총동창회 전국매전며 향우회 등에서도 성금과 후원을 하여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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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일 탄생지 표지석
홍주일(1875 - 1927)은 대구(大邱) 사람이다.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朝鮮國權恢復團中央總部)의 간부로서 활약하고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1915년 1월 15일 달성군 수성면 안일암(達城郡壽城面安逸庵)에서 시회(詩會)란 명목으로 모임을 갖고, 윤상태(尹相泰)·서상일(徐相日)·이시영(李始榮)·박영모(朴永模)·이영국(李永局)·서병룡(徐丙龍)·김 규(金圭)·정순영(鄭舜永)·황병기(黃炳基) 등의 동지와 함께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라는 비밀결사를 만들어, 기밀부장(機密部長)으로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1년여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하던 해에는 대구에 명신학교(明新學校)를 설립하고 교장을 취임하여 학생들에게 조국광복의 기수가 될 것을 역설하고, 광복회(光復會)·의용민족대동단(義勇民族大同團) 등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각 민족단체의 지도자들과 계속적인 연락을 취하였다.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확산되어 가던 1919년 3월 서울의 이갑성(李甲成)과 연락을 취하면서, 김태련(金兌鍊)·이만집(李萬集) 등의 동지와 함께 대구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던 중, 3월 3일 일제의 예비검속 때 체포되어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1년 출옥 후 대구에서 교남학교(嬌南學校)를 설립하고, 교육을 통하여 항일사상을 고취하다가 일본 경찰의 강권 발동으로 교직을 박탈당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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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년 3.18 대한독립만세의거비
운문면 3.18 독립운동은 그해 3월 고종황제 국장에 참가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김상구, 김종태가 당시 사립 문명학교장 김우곤의 집에 동지 여러명을 모아 독립회를 조직하고 거사를 모의한 후 결의문을 만들어 각 동네에 붙이면서 시작되었다. 거사 택일을 고대하던 중, 3월 18일 정보를 입수한 왜경들이 독립회 청장년들을 모두 잡아가려하자 동네 주민들과 독립회원들이 힘을 합쳐 몽둥이와 솥뚜껑을 들고 대항하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운문면 3.18독립운동 기념관과 기미년 3.18 대한독립만세의거비 모두 위의 독립운동에 참여한 선조들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기리고 계승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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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연리 3.1독립만세운동기념비
거연리3.1독립만세운동기념비는 1919년 3월 31일에 일어난 거면리 독립만세운동을 기념하는 사적이다. 민족이 일제 식민 통치하에 고통을 받던 때 서기 1919년 3월 31일 대성면(현 청도읍) 거연리의 서기철(徐基喆)이 운영하던 단산봉양서당(丹山鳳陽書堂)의 학생 이승옥(李承玉, 구 李承德)은 전국적인 만세운동에 동참하고자 태극기를 만들어 그 옆에 '대한독립만세'라 쓴 다음, 마을 앞을 지나는 경부선 철로가에 세워 은밀히 다른 사람들을 선동하였다.그 후, 4월 20일 이승옥은 같은 마을의 이만희(李晩羲), 성상영(成祥永 구 成三佰), 최갑수(崔甲壽), 최주식(崔周軾 구 崔述勤) 등과 뜻을 모아 단산봉양서당에서 태극기를 제작하여 전과 같이 철로가에 세웠다.이 시위로 인해 관련자들은 보안법 제7조 위반죄로 기소되어 이승옥은 징역 1년, 이만희, 성상영, 최갑수, 최주식 등은 각기 징역 10월에 처해졌다. 위와 같은 순국선열들의 숭고한 뜻을 가슴 깊이 새기고 길이 전하고자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며 거연리 3.1 독립만세운동 기념비 건립위원회가 본 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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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독립운동 유공자 유허지 비
단산서당 3·1운동지는 1919년 4월 20일 이승덕을 비롯한 단산서당 학생들이 만세시위를 모의하고 태극기를 만들던 곳이다. 단산서당은 없어지고 현재 밭으로 변했지만, 마을주민들이 그 터에 '기미독립운동유공자 유허지'라는 표지석을 세워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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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의거추모탑
항일 독립 의거 추모탑은 1919년 3월 14일 유천장터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과 왜인 응징사건, 그리고 내호리를 중심으로 당시 항일 독립 운동을 했던 동진회의 활동을 기록하고 있다. 먼저 유천장터 독립만세운동이란 1919년 파고다공원에서의 3.1독립만세운동에 호응하여 김보곤은 마을동지들을 규합하고 의명학당에서 태극기를 만들어 3월 14일 유천 장터에서 독립만세를 외친 일이다. 그러나 헌병경찰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었고 의명학당은 독립활동 모의거점으로 지목되어 폐쇄하였다. 이후 유호동장은 헌병대에 소환되고 자제단 가입을 주민에게 강여 주지하였다. 왜인 응징사건은 이어서 5월 7일 아침 7시경 청년 20여 명이 유천역에 정차중인 만주행 군용차가 지나가지 못하도록 저지하며 소동을 벌인 일로부터 시작한다. 오전 10시경 독립만세 함성에 주민 모두가 유호장터에서 감행하고 오후 4시경에 강제로 해산 당하였다. 다시 저녁 7시경 유호장터에서 "왜놈들아 물러가라!" 고함치기 시작했고, 이에 일본인이 칼을 가지고 이종현의 입술을 결단내는 야만적 행동을 벌이자 급격히 운집한 주민은 왜인 7명을 처참하게 응징하였다. 결국 대구 헌병대가 저녁 9시 반에 군용차로 출동하여 총을 난사하였다. 또한, 1941년 설을 맞아 청도군 유호리의 청년 10여 명이 모여 민족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뜻을 모으고, 1월 27일 비밀결사를 조직하였고, 그 결사의 이름은 ‘동쪽으로 진격하여 일본 제국을 무너뜨리자’는 의미로 동진회(東進會)라 하였다. 본 단체는 항일독립운동 비밀결사로서 일제의 군수품 수송을 방해할 목적으로 철도, 경찰, 관공서 등의 일제의 통치기관을 파괴할 계획을 세웠다. 또 농민회를 통해 농촌에 강요되는 황국신민화정책, 일상생활 통제의 국가총동원 체제 등에 저항하였다. 그리고 소년독성회를 통해 민족의식을 고양하고, 장차 동진회의 행동 대원으로 양성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결국 1943년 9월 동진회는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50여 명이 체포되었고, 그 중 10명은 1944년 12월 재판에 회부되었다. 허남귤과 이길우 두 사람은 부산형무소에서 옥중 사망하였다. 이상도(李相道)를 제외한 나머지는 공판 계류 중 해방을 맞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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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봉 묘
강성봉(1873 - 1951)은 경상북도 청도(淸道) 사람이다. 이곳은 3월 15일 밤 김상구(金相久)·김종태(金鍾台)·손기현(孫琪鉉) 등이 동포의 궐기를 촉구하는 20여매의 격문을 작성하여 운문면 방음동(雲門面芳音洞)·대천동(大川洞)·오진동(梧津洞) 일대에 붙였다가 18일 운문주재소에서 조사를 받은 바 있었다. 김진효(金鎭孝)·홍해성(洪海性)·김종태 등은 이날 조사를 받고 돌아오는 도중, 면사무소에 들어가 면서기들에게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큰 깃발을 제작하도록 부탁하여, 그것을 휘두르면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튿날 오후 6시경, 청도경찰서에서 일본경찰 1명과 순사보 4명이 김상구를 체포하기 위하여 출동했다가 부재중이자 대신 그의 어머니를 이웃의 문명학교(文明學敎)로 연행하려 하였다. 이때 이를 목격한 김의택(金義澤)·김병준(金秉濬)은 이를 말리다가 마을 사람들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김병준으로부터 이 소식을 들은 그는 즉시 3백여명의 주민과 함께 곤봉을 들고 현장으로 달려가 순사들에게 곤봉세례를 가하여 쫓아버렸다. 그러나 그는 곧 체포되었으며, 이해 5월 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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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재식 묘
강재식(1895 - 1963)은 경북 청도(淸道) 사람이다. 1919년 3월 18일 청도군 운문면(雲門面)에서 김진효(金鎭孝)·김종태(金鍾台) 등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하고 운문 장날을 이용, 다수의 군중과 함께 일경주재소를 습격하여 일경들을 구타하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행진을 벌이다가 붙잡혔다. 이해 5월 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공소를 제기하였으나, 7월 5일 대구복심법원과 9월 25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