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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필 기념비
박봉필(1908 - 1945)은 경상북도 예천 출신이다. 1931년 3월 남북 만주 각지에 흩어져 있는 한인 농민의 운동단체인 동성한교농민회(東省韓僑農民會)가 조직될 때 준비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34년 만주에서 김시현(金始顯)이 조직한 의열단(義烈團)에 입단하여 활동하였으며, 1941년 항일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쟁하다가 붙잡혔다. 1942년 만주의 신경고등법원(新京高等法院)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고 장춘형무소(長春刑務所)에 복역 중 일본 관동군(關東軍)에 의하여 총살당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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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식 집
김형식(1885 - 1972)은 경북 예천(醴泉) 사람이다. 그는 1919년 4월 2일 경북 예천군 용문면(龍門面) 상금곡동(上金谷洞)에서 수백 명의 군중을 주도하며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곳의 만세운동은 권석인(權錫寅)이 광무황제(光武皇帝) 인산(因山)에 참례차 상경했다가 서울의 3·1운동을 직접 목격하고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오면서 구체화되었다. 이에 평소 항일의식이 투철하던 김형식은 권석인·권석호(權錫虎)·권석효(權錫孝)·변용구(邊用九) 등과 함께 예천읍 장날인 3월 12일에 거사하기로 약정하고 독립선언서를 등사하는 등 준비를 진행하였다. 그런데 일경의 삼엄한 경계망으로 인하여 거사를 다음 장날인 3월 17일로 미루었으나, 이 때도 역시 일경의 철통같은 감시로 인하여 사전 탐지되어 중지하고 말았다. 이렇듯 거사가 지연됨에 따라, 김형식 등은 어떠한 일경의 탄압과 경계에도 불구하고 거사를 단행하기로 뜻을 굳히고 4월 2일 오후 10시에 만세시위를 단행하였다. 김형식은 수백여 명의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횃불을 앞세우고 면사무소와 동리 각처에서 시위를 전개하던 중 일경에 붙잡히고 말았다. 그는 이 일로 1919년 4월 15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으로부터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월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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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상 집
박주상(1831 - 1908)은 경상북도 예천(醴泉) 출신으로 초기 의병운동을 전개한 의병장이다. 1895년 을미년에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발발하고 이어서 단발령이 단행되는 등 일제의 내정간섭이 날로 노골화 되어가고 국운은 갈수록 쇠하여 갔다. 이에 박주상은 예천에서 동지들과 더불어 거의하여 의병을 모군하였다. 곧 동지들에 의하여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초기 의병활동에서 김하락(金河洛)·권세연(權世淵)·이강년(李康秊) 등과 연계하여 적군을 격멸시키는 등 의병장으로 크게 활약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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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항 묘
전기항(1827 - 1900)은 경상북도 예천 사람이다. 경상도 예천의 금당실에서 활약한 동학농민군이 1894년 8월 28일 화지 농민군과 함께 읍내를 공격하나 민보군의 반격으로 실패하고, 민보군은 금당실 일대의 동학농민군 근거지를 불태우는 등 혹심한 보복에 나섰다. 이때 동학 수괴로 알려진 모량도감(募糧都監) 전도야지 전기항을 추적했으나 잡지 못했다. 전기항은 가족과 함께 오랫동안 피신생활을 하여 금당실로 돌아갈 수 없었고, 손자 일호 대에 다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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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상 추모비
박주상(1831 - 1908)은 경상북도 예천(醴泉) 출신으로 초기 의병운동을 전개한 의병장이다. 1895년 을미년에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발발하고 이어서 단발령이 단행되는 등 일제의 내정간섭이 날로 노골화 되어가고 국운은 갈수록 쇠하여 갔다. 이에 박주상은 예천에서 동지들과 더불어 거의하여 의병을 모군하였다. 곧 동지들에 의하여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초기 의병활동에서 김하락(金河洛)·권세연(權世淵)·이강년(李康秊) 등과 연계하여 적군을 격멸시키는 등 의병장으로 크게 활약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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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원하 활동거점(병암정)
권원하(1898 - 1936)는 경북 예천(醴泉) 사람이다. 1919년 3·1운동 후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였으며, 동년 8월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 소재 신흥무관학교 제4기생으로 졸업하였다. 1920년 2월 군정서(軍政署)의 밀명을 띠고 입국하여 군자금 조달 및 무관생도 모집 등 활동을 하다가 동년 7월에 최재화(崔載華)·조강제(趙强濟)·배승환(裵昇煥)·김영철(金永哲) 등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고향으로 돌아가 조선일보 지국장을 지내면서 은밀히 항일운동을 계속하였으며, 1927년 6월에는 김상기(金相起)·남병태(南炳台)·박창호(朴昌鎬)·장대발(張大發) 등과 함께 예천군내 청년대회를 개최하고 신간회를 적극적으로 지원할 것을 결의하는 등 구국운동을 하였다. 그는 예천청년동맹회의 집행위원으로서 전예천청소년운동(全禮泉靑少年運動)의 통일을 기하여 계몽운동에 주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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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원하 독립기념비
권원하(1898 - 1936)는 경북 예천(醴泉) 사람이다. 1919년 3·1운동 후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였으며, 동년 8월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 소재 신흥무관학교 제4기생으로 졸업하였다. 1920년 2월 군정서(軍政署)의 밀명을 띠고 입국하여 군자금 조달 및 무관생도 모집 등 활동을 하다가 동년 7월에 최재화(崔載華)·조강제(趙强濟)·배승환(裵昇煥)·김영철(金永哲) 등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고향으로 돌아가 조선일보 지국장을 지내면서 은밀히 항일운동을 계속하였으며, 1927년 6월에는 김상기(金相起)·남병태(南炳台)·박창호(朴昌鎬)·장대발(張大發) 등과 함께 예천군내 청년대회를 개최하고 신간회를 적극적으로 지원할 것을 결의하는 등 구국운동을 하였다. 그는 예천청년동맹회의 집행위원으로서 전예천청소년운동(全禮泉靑少年運動)의 통일을 기하여 계몽운동에 주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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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이 기념비
한양이(1883 - 1946)는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을미의병 출신으로 문경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한바 있던 이강년(李康秊)이 의병활동의 재개하였다. 이에 한양이는 이강년 의진에 참가하고 농토 6,700여 평을 매각하여 군자금으로 희사하였다고 한다. 이강년 의진이 의병활동을 본격화시키자 그 종사관이 되어 소모활동을 전개하면서 원주(原州)·단양(丹陽)·제천(堤川)·문경·안동(安東)·내성(乃城)·재산(才山) 그리고 경기도 관악산 등의 전투에 참가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08년 6월 청풍 까치성(鵲城) 전투에서 의진이 크게 패하고 의병장 이강년이 체포되어 의진이 해산되자, 이등(伊藤)을 암살하고자 이강년의 장남 이승재(李承宰)와 함께 전국을 돌며 동지를 규합하였다. 이에 이기하(李起夏) 등으로 결사대를 조직하여 경성으로 잠입하는데 성공하였으나 이일이 적에게 탐지되어 은신하였다가 예천군 용궁(醴泉郡 龍宮)에서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다. 1912년 출옥 후에는 문경군 가은(加恩)에서 사숙을 열고 문인을 모아 배일 사상을 고취시키는 한편 동지를 규합하였다고 한다. 1919년 동지 이응수(李應洙)·서상업(徐相業)·김찬규(金燦奎) 등과 거사할 것을 상의하고, 이듬해 4월 의용단(義勇團)을 조직하였다. 한편 해외의 길림군정서(吉林軍政署) 및 흥업단(興業團)과 연락 제휴하고, 군정서로부터 군자금모집사서(軍資金募集辭書)·권총·폭탄·암호문·독립신문 등의 지원을 받고, 의용단 경북간사에 임명되어 무장독립운동을 추진하였다. 1922년 동지 이응수·이대기(李大基) 등과 함께 대구 계림여관(鷄林旅館)에 비밀사무실을 열어 연락서신을 작성하던 중 적의 밀정에게 탐지되어 50여 명의 동지와 함께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4년 출옥한 후에는 신태식(申泰植)·김찬규(金燦奎)·서상업 등과 다시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하다가 옥고의 여독이 재발하여 1939년까지 입산하여 정양하였다고 한다. 1940년에 예천군 유산면(柳山面)에서 사숙을 열고 문인을 모아 배일사상을 고취하는 한편 운강문집(雲崗文集)을 정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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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헌 묘
이용헌(1880 - 1934)은 1919년 4월 4일 경북 영주군(榮州郡) 하리면(下里面) 은산동(殷山洞) 황병석(黃炳奭) 집에서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그 날 오후 은산 시장에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로 인해 체포된 이용헌은 1919년 5월 1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8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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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애국지사 추모비
1919년 당시 풍기군 은풍현 은산동(당시 하리면 소재지이고, 5일마다 서는 장터임)을 중심으로 독립운동 활동을 하고 있던 오하근, 박인서, 권창수 등 청년학도병을 돕기 위하여 마을 유지인 이헌호, 이재덕, 이용헌, 채동진과 같이 독립자금을 마련하여 지원하고 있던 중 광무황제의 인산에 참여하기 위해 상경하여 서울시위운동에 참가하고 귀향한 오하근, 박인서가 영주읍 장날 1919년 3월 20일 오전 11시에 준비한 독립선언서를 군중에 나누어 준 후 힘차게 독립만세를 선창하였고, 장터에 모인 수백명의 군중이 여기에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부르며 군중이 시위행진을 강행하니 일본군 헌병은 총검으로 이들을 탄압하여 해산 시켰다.영주읍 만세시위에 고무된 오하근과 박인서 권창수(당시 22세)는 마을유지인 채동진(당시 42세), 이헌호(당시 46세), 이재덕(당시 54세), 이용헌(당시 40세)과 상의하여 주위마을 사람들을 은산동 장날인 4월 4일 동원하여 동지들과 함께 만세시위운동을 계획하고(지금의 하리면 은산동. 황병석의 집)에서 구체적인 거사를 논의 하였다.이날(1919년 4월 4일) 오후 6시경 마침 장이 열리고 있던 은산동 장터로 나아가 독립만세를 고창한 후 일본군 헌병주재소와 면사무소로 가서 이를 격파하라고 외쳤다. 그러나 이를 급히 듣고 달려온 일본군 헌병들에 의하여 당시 주동자인 권창수, 채동진, 이헌호, 이재덕, 이용헌을 비롯한 동지들은 모두 체포되고 말았다.이에 격분한 군중들은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독립만세를 불렀다. 권창수 외 4명은 이 일로 인하여 1919년 5월 16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개월 선고받고 옥고를 치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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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만세운동기념비
독립만세운동기념비는 1919년 4월 4일 은풍골 장날을 기해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기념하는 사적이다. 금곡리 출신 권창수, 이용현, 이재덕, 이헌호, 채동진을 중심으로 수많은 군중들이 은산 장터에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망설임없이 몸바친 지사들의 정신을 받들어 2017년 7월에 은풍골 향토사 연구회가 본 비를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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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우식 기적비
윤우식(1909 - 1934)은 1932년 6월경 경북 예천군(醴泉郡) 개포면(開浦面) 금동(琴洞)에서 ML당사건으로 복역하다가 1931년경 출옥한 한일청(韓一淸) 등과 함께 예천적색농민조합(醴泉赤色農民組合)을 조직하였다. 그 뒤 영주(榮州)·봉화(奉化) 등지에서 결사사건이 발각되자, 예천농민조합을 해산하고 동년 11월에 예천무명당(醴泉無名黨)을 결성하였다. 즉 한일청·박철호(朴鎬哲)·김기석(金己石) 등과 함께 모여 한국의 독립과 사회주의 실현을 목적으로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이때부터 이들은 1933년 6월경까지 각지의 동지를 규합하고 농촌진흥조합의 적화(赤化)를 비롯하여 무명당 산하에 사방(砂防) 그룹, 역(驛) 그룹, 교원(敎員) 그룹, 봉급자 그룹 등의 결성을 추진하면서 결사의 확대 강화, 주의의 보급에 진력하였다. 무명당 결성 이후 조직부를 맡은 윤우식은 윤태혁(尹泰赫)·윤성복(尹成福) 등의 동지들을 포섭하고 야학회 및 소비조합 설치 등을 도모하는 한편, 지보면(知保面)의 농촌진흥회를 이용하여 이립금(利立金)을 만들어 활동자금으로 삼았다. 예천무명당 사건으로 1934년 초순 이래 350여 명이 체포되었고, 그 가운데 11명이 1935년 5월 공판에 회부되었다. 이때 체포되어 고문을 받은 그는 그 후유증으로 공판에 회부되기 전인 1934년 10월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4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