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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낙헌 사적비
김낙헌(1902 - 1965)은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영천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김낙헌(金洛憲)은 1919년 4월 26일 지금의 영천시 임고면 양평리에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하고 천으로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큰 기를 만들어서 4월 27일 영천시 창구동 장터 부근에서 독립 만세를 고창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었다. 5월 1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언도받고 공소하였으나, 6월 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6년에는 융희황제가 붕어하자 국복을 입지 않은 사람에게 규탄하는 글을 보냈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수개월간 구금되었고, 1938년에는 「대한복수가」를 작사하여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등 지역민에게 독립 계몽 사상 교육 활동을 전개하였다.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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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차 의병진 결성지(거동사)
거동사는 산남의진의 제3대 대장이었던 최세윤의 제4차 의병진 결성지이다. 최세윤(1867 - 1916)은 본관이 흥해이며, 호는 농고(農皐)이다. 최세한(崔世翰)으로 불리기도 했다. 1896년 안동의진의 아장(亞將)으로 활동하였다. 그 뒤 정환직이 아들 정용기에 이어 산남의진의 2대 대장에 취임하자, 여기에 참여하여 흥해지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이어 제2대 대장 정환직이 순국하자, 최세윤은 제3대 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최세윤은 1908년 2월 산남의진의 본대가 머물고 있는 보현산 거동사(巨洞寺)에 도착하였다. 그 후 한 달 정도 지나 대장으로 취임하였다. 최세윤은 대장에 오르자 산남의진이 목표로 삼고 있던 관동지방으로의 북상계획을 중단하였다. 그리고 경상도 일대에서 지구전을 펼칠 계획으로 부장들을 각 지역으로 나누어 배치하였다. 지역별 책임자를 선정하고 본부를 남동대산(南東大山)으로 옮긴 최세윤은 경주·울산·흥해·포항 지역은 본부에서 직접 담당하도록 하였다. 산남의진은 곳곳에서 유격전으로 일본군에 항전하여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항전을 이어가던 최세윤은 1908년 7월, 장기(長鬐) 용동(龍洞)에서 붙잡히고 말았다. 1916년 8월 9일 옥중에서 단식·순국하였다. 최세윤은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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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 묘
이석(1881 - 1909)은 대한제국기 산남의진에 입진하여 초장과 좌령장으로 활약한 의병이다. 자는 사옥(士玉)이고 경상북도 청송 출신이다. 1896년 을미의병이 각처에서 전개되자 의병부대에 입진하였으나 의병부대 해산조치에 따라 산으로 들어갔다. 그 뒤 1906년 을사의병의 일환으로 영천을 중심으로 산남의진(山南義陣)이 구성되자 의병장 정용기(鄭鏞基)의 휘하에서 초장(哨長)과 좌령장(左領將)으로 활약하였다. 1907년 남석문(南錫文)·정순기(鄭純基) 등과 청송·영덕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하던 중 남석문이 붙잡혀 처형당하자 중도에서 귀대하였다. 이때 의병장 정용기가 전사하고 정환직(鄭煥直)이 의병장으로 추대되자 중군(中軍)에 임명되었다. 얼마 후 정환직이 청하에서 패전하여 처형당하자 의병장으로 추대되었으나 사양하였다. 한편, 당시 산남의진은 의병장이 공석인 채 이미 구심력을 잃고 소규모의 유격부대로 재편되어갔다. 이에 소수의 부하만을 인솔하고 장기와 청하 등지를 진격, 일본군과 교전하였으며 이어서 울산으로 진군하던 중 일본군의 복병에게 크게 패하였다. 그 뒤 휘하의 의병을 해산하고 귀향하여 삼유산(三踰山) 아래 도평촌(道坪村)에 은거하던 중 1909년 7월에 붙잡혔다. 3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하던 중 탈옥하였으나 다시 붙잡혀 처형당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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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로 기념비
이학로(1867 - 1933)는 경상북도 영천(永川) 출신으로, 대한제국기 경상남도 산청, 함안 일대에서 활동한 의병장이다. 1907년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이 체결되고 이때 조·일 양국간에 교환된 비밀각서에 의하여 8월 1일을 기해 한국군이 해산되자 거의하여 산청군 덕산(德山)의 의병장 박동의(朴東儀) 의병부대의 부장(副將)이 되어 경상도 전역에 걸쳐서 의병운동을 하였다. 1908년 8월 18일 그의 향도관(響導官)인 서병희(徐炳熙)와 함께 의병 18명을 거느리고 산청군 두량곡(斗量谷)에서 일군수비대와 교전하여 적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는 전과를 올렸다. 1909년에는 산청군 덕산에서 서병희와 함께 부하 11명을 거느리고 함안군 산외면 방목동(山外面 放牧洞)에 사는 일본인 집을 습격하여 소각하였다. 그후 그의 부하로 활약하였던 서병희는 독립하여 스스로 의진을 이끄는 의병장이 되어 경상도 일원에서 계속 활약하다가 1909년 10월 11일 구마산주재소 일경에게 체포되어 순국하였다. 이학로는 1910년 이후까지 지리산(智異山), 가야산(伽倻山) 등에서 계속 항전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하나 그 기록은 찾을 수가 없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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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식 추모비
정규식(1920 - 1950)은 경북 영천(永川) 사람이다. 1941년 8월 일본 대판(大阪)에 소재한 대판공학교(大阪工學校)에 재학하면서 대판시 북구(北區)의 신문배달원 민춘기(閔春基)를 만나 민족해방을 위해 헌신할 것을 맹세하고 민족의식을 함양하기 위한 방편으로 『한국근대정치사』,『삼민주의(三民主義)』등 민족운동 관련서적을 탐독하면서 중국혁명의 대부 손문(孫文)의 삼민주의(三民主義)에 착안한 민족운동을 전개하여 한국의 삼천만 민중을 자각·분기시키려는 노력을 하였다. 또한 1942년 8월 동 신문점에 최문전(崔文典)이 고용되자 그를 동지로 가담시키고 9월 앵궁공원에서 회합하여 "한국 민족을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중략) 한국 청년층의 의식 선봉분자를 결집하여 독립혁명의 중핵 모체가 될 비밀결사를 조직해서 내외에서 조국 독립에 정진하고 있는 동지, 그 중에서도 만주지방을 본거지로 활동하고 있는 독립군과 연락하고 일본이 대동아전쟁으로 국력을 소모하고 있는 호기를 놓치지 말고, 한국 민중으로 하여금 독립혁명투쟁에 궐기시켜 일거에 목적을 완수해야 한다"는 근본 방침을 결정하였다. 이러한 방침에 따라 동지 획득과 동포에 대한 지도 계몽을 당면 목표로 설정한 그는 대판지역 한인 학생들을 중심으로 세계 정세와 한국통치문제를 설파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와 함께 1942년 8월 대구사범학교에 재학 중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붙잡혔던 서산옥제(西山玉濟)와 연락하고 9월 상순 동인과 대판에서 회합하여 비밀리에 독립혁명의 중핵 모체인 비밀결사를 조직하려다 발각되어 10월 20일 일경에 붙잡혔다. 1943년 대판지방재판소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44년 12월 10일 형기가 종료되어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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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남의진 추모비
본 비는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된 직후인 1906년 3월에 정환직, 정용기 부자에 의해 조직된 산남의진에 가담하여 영천, 영일, 청송 등을 비롯한 경상도 일대를 중심으로 강력한 대일 무장투쟁을 전개한 애국지사들을 추모하는 사적이다. 본 비에 기록된 산남의진 의병으로는 박한종, 조상환, 최치환, 전응팔, 강봉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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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환직 묘
정환직(1843 - 1907)은 대한제국기 의금부 금부도사, 중추원의관 등을 역임한 의병장이다. 1888년(고종 25) 의금부의 금부도사를 지냈으며, 1894년 삼남참오령(三南參伍領)에 임명되어 동학군을 진압하였다. 그 해 겨울 다시 토포사(討捕使)에 임명되어 고종의 밀지를 받고 황해도 지방의 동학군을 진압하였다. 그 공으로 태의원시종관(太醫院侍從官)이 되었다. 1899년 삼남검찰 겸 토포사(三南檢察兼討捕使)로 삼남 일대의 민정을 두루 살펴보았다. 1900년 도찰사에 임명되어 농민들의 원성이 높은 경주부윤을 파면하다 오히려 봉세관(俸稅官)에 의해 구금되었다. 석방된 뒤 관직에 뜻이 없어 사직할 것을 청하였으나 다시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에 제수되었다. 1905년 일제의 강권에 의해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고종이 정환직에게 밀지를 보내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할 것을 권하였다. 그 뒤 관직을 사직하고 아들 정용기(鄭鏞基)로 하여금, 고향에 내려가 의병을 모집하게 한 뒤 서울로 진격하여 황제를 구하고 국권을 회복하도록 하였다. 정용기가 청송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붙잡혀 석방된 뒤 의병활동이 부진하므로 이를 독려하고자 1907년 9월 19일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 해 10월 7일 정용기가 입암에서 영천수비대소속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가 총탄에 맞아 순절하자, 정순기(鄭純基)·이세기(李世紀)·우재룡(禹在龍) 등의 추대를 받아 삼남의병부대 의병장에 올랐다. 그 뒤 군세가 크게 떨치기 시작하자 여세를 몰아 동쪽으로 포항 등지, 서쪽으로 신령 등지, 북쪽으로 청송 등지를 공격하여 일본군 수비대에게 많은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전투 중 사상 당하는 의병이 속출하자 전의가 크게 떨어져, 이에 의병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다시 전열을 정비하고 각지에 소모군을 파견, 의병을 모집하였다. 이와 함께 무기와 탄약·군량 등을 준비하며, 국민들의 반일투쟁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전념하였다. 이때 병이 들어 신병을 치료하다 일본군 수비대에게 잡혔다. 일본군이 회유하고자 하였으나 끝까지 반일의 뜻을 굽히지 않다 총살형을 당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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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기 묘
정용기(1862 - 1907)는 한말 경상북도 영천 출신의 의병장으로, 아버지 정환직과 함께 산남의진을 결성하였다. 정용기는 국채 보상 운동을 위한 ‘단연회통문(斷煙會通文)’ 및 ‘의연금권고가(義捐金勸告歌)’와 정계의 부패를 비난하는 6개 조항을 들어 투서하였다. 그 외에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의 부정 행위를 탄핵한 ‘통곡조한국민(痛哭弔韓國民)’이란 글월 및 순절한 민영환(閔泳煥)을 추도하는 ‘혈죽가(血竹歌)’를 발표하고 격렬한 가두 연설을 전개해 대중의 각성과 단결을 환기시키기도 하였다. 이렇게 민중 계몽에 힘쓰던 중 고종황제의 밀명을 받은 부친 정환직(鄭煥直)과 영남에서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심하고, 고향인 영천으로 내려가 이한구(李韓久)·손영각(孫永珏)·정순기(鄭純基) 등과 힘을 합쳐 통유문과 권고문을 작성하여 각지에 배포하고 의병을 모집하여 ‘산남의진(山南義陣)’이라 이름하고 제1대 대장에 추대되었다. 정용기는 경주 우각리를 경유할 때 경주진위대의 간계로 체포되어 대구로 압송되었다가 아버지의 주선으로 석방된 후 1907년 4월 재차 거의하여 영덕의 신태호(申泰浩) 의병부대와 연락을 취하면서 영천·영일·청송 등지에서 일본군을 여러 차례 전투를 하였다. 1907년 8월 산남의진 본진 100여 명과 함께 죽장의 매현으로 들어가 9월 초 강릉으로 북상을 준비하던 중 1907년 9월 1일 입암에서 일본군 영천수비대의 역습을 받아 격렬히 싸우다가 이한구(李韓久)·손영각(孫永珏)·권규섭(權奎燮) 등과 함께 전사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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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기 사적비
산남의진 정대장 충효동 사적비는 산남의진을 결성한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출생지인 검단리를 충효동이라 이름짓고 그 사적을 기록한 비이다. 정씨 부자의 숭고한 사적을 기록하여 후세에 본보기로 삼고자 1988년 5월 10일에 본 비를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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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환직, 정용기 산남의진비
정환직(1843 - 1907)은 대한제국기 의금부 금부도사, 중추원의관 등을 역임한 의병장이다. 1888년(고종 25) 의금부의 금부도사를 지냈으며, 1894년 삼남참오령(三南參伍領)에 임명되어 동학군을 진압하였다. 그 해 겨울 다시 토포사(討捕使)에 임명되어 고종의 밀지를 받고 황해도 지방의 동학군을 진압하였다. 그 공으로 태의원시종관(太醫院侍從官)이 되었다. 1899년 삼남검찰 겸 토포사(三南檢察兼討捕使)로 삼남 일대의 민정을 두루 살펴보았다. 1900년 도찰사에 임명되어 농민들의 원성이 높은 경주부윤을 파면하다 오히려 봉세관(俸稅官)에 의해 구금되었다. 석방된 뒤 관직에 뜻이 없어 사직할 것을 청하였으나 다시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에 제수되었다. 1905년 일제의 강권에 의해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고종이 정환직에게 밀지를 보내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할 것을 권하였다. 그 뒤 관직을 사직하고 아들 정용기(鄭鏞基)로 하여금, 고향에 내려가 의병을 모집하게 한 뒤 서울로 진격하여 황제를 구하고 국권을 회복하도록 하였다. 정용기가 청송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붙잡혀 석방된 뒤 의병활동이 부진하므로 이를 독려하고자 1907년 9월 19일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 해 10월 7일 정용기가 입암에서 영천수비대소속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가 총탄에 맞아 순절하자, 정순기(鄭純基)·이세기(李世紀)·우재룡(禹在龍) 등의 추대를 받아 삼남의병부대 의병장에 올랐다. 그 뒤 군세가 크게 떨치기 시작하자 여세를 몰아 동쪽으로 포항 등지, 서쪽으로 신령 등지, 북쪽으로 청송 등지를 공격하여 일본군 수비대에게 많은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전투 중 사상 당하는 의병이 속출하자 전의가 크게 떨어져, 이에 의병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다시 전열을 정비하고 각지에 소모군을 파견, 의병을 모집하였다. 이와 함께 무기와 탄약·군량 등을 준비하며, 국민들의 반일투쟁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전념하였다. 이 때 병이 들어 신병을 치료하다 일본군 수비대에게 잡혔다. 일본군이 회유하고자 하였으나 끝까지 반일의 뜻을 굽히지 않다 총살형을 당해 순국하였다. 정용기(1862 - 1907)는 한말 경상북도 영천 출신의 의병장으로, 아버지 정환직과 함께 산남의진을 결성하였다. 정용기는 국채 보상 운동을 위한 ‘단연회통문(斷煙會通文)’ 및 ‘의연금권고가(義捐金勸告歌)’와 정계의 부패를 비난하는 6개 조항을 들어 투서하였다. 그 외에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의 부정 행위를 탄핵한 ‘통곡조한국민(痛哭弔韓國民)’이란 글월 및 순절한 민영환(閔泳煥)을 추도하는 ‘혈죽가(血竹歌)’를 발표하고 격렬한 가두 연설을 전개해 대중의 각성과 단결을 환기시키기도 하였다. 이렇게 민중 계몽에 힘쓰던 중 고종황제의 밀명을 받은 부친 정환직(鄭煥直)과 영남에서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심하고, 고향인 영천으로 내려가 이한구(李韓久)·손영각(孫永珏)·정순기(鄭純基) 등과 힘을 합쳐 통유문과 권고문을 작성하여 각지에 배포하고 의병을 모집하여 ‘산남의진(山南義陣)’이라 이름하고 제1대 대장에 추대되었다. 정용기는 경주 우각리를 경유할 때 경주진위대의 간계로 체포되어 대구로 압송되었다가 아버지의 주선으로 석방된 후 1907년 4월 재차 거의하여 영덕의 신태호(申泰浩) 의병부대와 연락을 취하면서 영천·영일·청송 등지에서 일본군을 여러 차례 전투를 하였다. 1907년 8월 산남의진 본진 100여 명과 함께 죽장의 매현으로 들어가 9월 초 강릉으로 북상을 준비하던 중 1907년 9월 1일 입암에서 일본군 영천수비대의 역습을 받아 격렬히 싸우다가 이한구(李韓久)·손영각(孫永珏)·권규섭(權奎燮) 등과 함께 전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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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만 집
조재만(1906 - 1990)은 경북 영천(永川) 사람으로, 이명은 조충환(曺忠煥) 또는 조용찬(曺瑢燦)이다. 1925년 9월 대구에서 조직된 비밀결사 암살단(暗殺團) 단원으로 활동하였다. 암살단은 1925년 9월 경, 장진홍(張鎭弘)·이원록(李源祿)·이원기(李源祺)·이원유(李源裕) 등에 의해 조직되었으며, 일제의 주요시설 파괴를 목적으로 하였다. 조재만은 암살단에 가입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활동하는 한편, 1927년 10월 경 장진홍과 함께 경북도청(慶北道廳)·경북경찰부(慶北警察部)·조선은행 대구지점(朝鮮銀行大邱支店)·식산은행 대구지점(殖産銀行大邱支店) 등지를 폭파시키고자 계획하였다. 1927년 10월 18일 오전 9시 경, 장진홍은 미리 준비한 폭탄 4개를 목표 지점에 1개씩 배달시켰으며, 이날 오전 11시 50분 경 폭탄이 폭발하여 은행원과 일경 등 5명이 중경상을 입는가 하면 유리창 70여 매가 완전히 부숴졌다. 일경은 이 사건에 대한 신문게재를 금지시키는 한편 비밀리에 조사를 진행시켰는데, 이때 조재만은 폭탄을 투척한 것과 연루되어 붙잡혔다. 그는 이 일로 소위 폭발물 취체규칙 및 치안유지법으로 2년 여의 옥고를 치렀다. 그 후 1931년에는 이원록과 함께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 북경(北京)으로 망명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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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만 추모비
조재만(1906 - 1990)은 경북 영천(永川) 사람으로, 이명은 조충환(曺忠煥) 또는 조용찬(曺瑢燦)이다. 1925년 9월 대구에서 조직된 비밀결사 암살단(暗殺團) 단원으로 활동하였다. 암살단은 1925년 9월 경, 장진홍(張鎭弘)·이원록(李源祿)·이원기(李源祺)·이원유(李源裕) 등에 의해 조직되었으며, 일제의 주요시설 파괴를 목적으로 하였다. 조재만은 암살단에 가입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활동하는 한편, 1927년 10월 경 장진홍과 함께 경북도청(慶北道廳)·경북경찰부(慶北警察部)·조선은행 대구지점(朝鮮銀行大邱支店)·식산은행 대구지점(殖産銀行大邱支店) 등지를 폭파시키고자 계획하였다. 1927년 10월 18일 오전 9시 경, 장진홍은 미리 준비한 폭탄 4개를 목표 지점에 1개씩 배달시켰으며, 이날 오전 11시 50분 경 폭탄이 폭발하여 은행원과 일경 등 5명이 중경상을 입는가 하면 유리창 70여 매가 완전히 부숴졌다. 일경은 이 사건에 대한 신문게재를 금지시키는 한편 비밀리에 조사를 진행시켰는데, 이때 조재만은 폭탄을 투척한 것과 연루되어 붙잡혔다. 그는 이 일로 소위 폭발물 취체규칙 및 치안유지법으로 2년 여의 옥고를 치렀다. 그 후 1931년에는 이원록과 함께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 북경(北京)으로 망명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