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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상도 집
송상도(1871 - 1947)의 자는 성소, 호는 기려자, 미헌, 연파이며, 일제강점기 『기려수필(騎驢隨筆)』을 편찬한 유학자이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워 권상익(權相翊) 등 향내 제유(諸儒)와 교유하였으며, 당세의 명유인 곽종석(郭鍾錫)·전우(田愚) 등을 역방하면서 견문을 넓혔다. 송상도는 경학(經學)보다 사학(史學)에 힘을 쏟아 중국 역대의 사적(史籍)을 섭렵하였을 뿐 아니라 일찍이 조선왕조사의 편찬에 뜻을 두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명나라가 망한 뒤 기려도사(騎驢道士)가 명말(明末) 충신의 사적을 수집하였던 예에 따라, 우리 나라 애국지사의 사적을 편찬할 결심을 하였다. 전국 방방곡곡을 수십년간 돌아다니며 애국자의 유가족 또는 친지를 역방하면서 사적을 기록하는 한편, 사건 당시의 신문과 기타 자료를 수집하여 『기려수필(騎驢隨筆)』을 편찬하였다. 이렇듯 현지답사를 통하여 채록된 『기려수필(騎驢隨筆)』은 당시 항일투쟁의 실상을 알려주는 귀중한 문헌이다. 송상도는 1986년 건국표창, 1990년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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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봉서 묘
구봉서(1883 - 1927)는 일제의 국권 침탈에 대항하여 조국의 회복에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의병 투쟁에 가담하여 영천 지역을 중심으로 군자금 모금을 주도한 의병이다. 그는 1908년 5월경 흥해군 북안면 간곡동[현 영천시 임고면 사리]에서 홍덕화로부터 20냥을, 3일 뒤에는 다시 18냥의 군자금을 모금하고 이어 같은 달 17일에는 화승총으로 무장한 뒤 경산군 서면 오류동[현 영천시 고경면 오류리]에서 30냥을 모금하였으며, 영천군 고촌면 초일동[현 영천시 고경면 초일리] 동장으로부터도 30냥을 모금하는 등 주로 영천 지역에서 의병 군자금 모금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었다. 1909년 1월 2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강도죄로 징역 15년형을 언도받고 공소하였으나, 3월 13일 대구공소원에서 기각되어 복역하던 중인 1912년 1월 18일 징역 5년형으로 변경되어 옥고를 치렀다. 구봉서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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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용 추모비
김기용(1883 - 1938)은 경북 영천(永川) 사람이다. 1927년 조선은행 대구지점(朝鮮銀行大邱支店)에 폭탄을 투척한 장진홍(張鎭弘)과 회합하여 1928년 결사대원이 된 후 영천경찰서와 고향의 친일부호인 이인석(李仁錫)의 집에 폭탄을 투척하기로 계획하고 장진홍으로부터 폭탄 2개를 전달받아 폭탄투척을 위한 예행연습을 하며 기회를 노리던 중 일경에 붙잡혔다. 1930년 4월 24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살인예비죄로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1930년 장진홍이 옥중에서 변사(變死)하자 그 진상을 추궁하기 위하여 형무소장과의 면담을 요청하다가 간수가 폭언을 하자 분개하여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감옥을 파괴하다가 가중형 6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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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길, 이영환 추모비
김영길(1924 - 1962)은 경북 영천(永川) 사람이다. 1942년 박기수(朴基秀) 등 6인과 함께 항일비밀결사를 조직하고 1943년 4월에는 영천신사(永川神社)를 불태우고 대구(大邱)신사에 방화하였으나 실패하였으며, 동년 5월에는 대구 주둔 일본군 80연대 내에 세균을 투입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또 동년 밤중에 대구 시내 관공서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시내 곳곳에 일군 패전전황을 알리는 유인물을 살포하여 항일민족의식을 고취하였으며 일본군 24부대 병기고를 폭파하였다고 한다. 1944년에는 군자금 모집 중에 발각되어 징역 4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이영환(1924 - 1964)은 경북 영천(永川) 사람이다. 일제가 1937년 중일전쟁과 1941년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후 식량과 자원을 강제 수탈하는 한편 징용·징병등 각종 명목으로 한국인을 침략전쟁의 일선으로 끌어가자, 그는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결심하고 영천신사(永川神社)에 방화(放火)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할 계획을 세우고 이를 준비하던 중 밀고로 말미암아 동년 12월 4일 일경에 붙잡혔다고 한다. 그는 이일로 인하여 1945년 5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해방을 맞아 출옥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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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률 추모비
김상률(미상 - 1923)은 1919년 4월 15일 한말 의병장 출신인 박장호(朴長浩)·조맹선(趙孟善) 등이 중심이 되어 유하현 삼원보 서구 대화사에서 결성한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의 일원으로 활동하였으며 김승렬(金承烈)이라고도 불린다. 동지 5명과 함께 친일기관인 보민회(保民會)를 습격하는 등 친일파 제거에 진력하던 김상률은 1920년 9월 24일 동지 4인과 함께 평북 의주군 사산동 소나무 숲에서 일본 경찰과 충돌하였으며, 이어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이동순(李東順)의 밀고로 일경과 교전하였다. 1921년 3월 중순에는 압록강 유초도에 있으면서 교통국장 백승서(白承瑞)와 함께 안동현 일본영사관과 은행을 습격하고자 협의하던 중 일경 42명의 공격을 받아 반격하다가 밀선을 타고 탈출하였다. 1923년 2월 전덕원(全德元) 계열의 의용군이 의군부(義軍府)를 결성하자 김상률은 이에 가담하여 활동하였으며, 1923년 8월경 유격대장 이경일(李京日)의 지휘 하에 동지 50명과 함께 평북 의주군 청성진 주재소를 습격하다가 피체되어 단식 투쟁을 하다가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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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헌 추모비
손병헌(1870 - 1946)은 경북 영천(永川) 사람이다. 중국으로 망명하여 1921년 10월경 봉천성 환인현(桓仁縣) 지방에 중국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와 관련된 한교공회(韓僑公會)를 재건하여 총회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1922년 8월 환인현 남구(南區) 마권자(馬圈子)에서 무장독립군인 통군부(統軍府) 등 8개 단체대표가 모여 통의부(統義府)를 조직하자 이에 가입하여 윤세용(尹世茸)·이장녕(李章寧) 등과 함께 참모부 참모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그후 1926년부터는 간도 용정(龍井)에서 대성(大成)중학교의 교사로 민족교육을 실시하며 후진양성에 힘썼다고 한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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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표 추모비
이형표(1858 - 1924)는 경북 영천(永川) 사람이다. 정용기(鄭鏞基) 의진에 가담하여 경북 영천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는 대한제국 정부를 강박하여 「을사륵약(乙巳勒約)」을 체결하여 외교권을 박탈하고 주권을 제약하였다. 이에 분격하여 우리 민족은 전국 각지에서 대규모의 의병운동을 일으켜 무너져가는 국권을 회복코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이형표는 반일 의병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할 목적을 가지고 1906년 3월 정용기 의병장이 각 고을 포수(砲手) 및 민병들로 산남창의진(山南倡義陣)을 구성할 때 경북 영천군 담당자로 활동하였다. 을사륵약 이듬해인 1906년 영남에서 의병을 일으켜 북상할 것을 결심한 정용기(鄭鏞基) 의병장은 영천으로 내려가 통유문과 격려문을 각계 각층에 보내어 함께 의병에 참가하기를 권고하고 총 궐기를 촉구하였다. 또한 정용기 의병장은 각 지역별로 인원을 배치하여 의거 진행 계획에 대한 연락을 맡게 하였다. 당시 정용기 의병장 휘하에서 이를 담당하던 사람은 이형표 외에 이수인(李壽寅)·정치석(鄭致錫)·이두규(李斗圭)·정진영(鄭鎭英) 등이 있었다. 이들은 각지의 동지들과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는 한편 사재를 털어 무기와 군량·군복 등을 의병 진중에 헌납하는 등의 지원활동을 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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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필 기공비
이규필(1879 - 1915)의 자는 주범, 호는 관천이며, 영천 출신의 의병이다. 이규필(李圭弼)은 정환직(鄭煥直)과 그의 아들 정용기(鄭鏞基)가 주축이 된 영천 지역의 의병 조직인 산남의진(山南義陣)의 군사 소모단계에서부터 참여하여 각 지역을 연락하며 편성에 힘썼고, 창의 당시에는 연습장에 선임되었다. 1907년 산남의진을 재결성할 때에는 흥해·청하 등지에 파견되어 군사를 모집하는 한편, 본진의 우영장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정용기 대장이 1907년 9월 입암 전투에서 전사한 후 그의 아버지 정환직이 새로이 의진을 구성하자, 이규필은 좌영장에 임명되어 영천·영일·청송·영덕 등지에서 여러 차례 일군경과의 전투를 치러 혁혁한 공을 세웠다. 정환직 대장이 순절한 후 최세윤(崔世允)이 또 다시 의진을 재구성하자 우포장을 맡아 활약하였고, 최세윤이 체포된 후에도 이세기(李世紀)와 함께 끝까지 대일 항전을 계속하다가 국권 회복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울화병으로 사망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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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필 공적비
김동필(1860 - 1944)은 경상북도 영천군(永川郡) 신령(新寧面) 신덕동(新德洞)에서 태어났다. 1904년 2월 일제가 러일전쟁을 도발하고 일본군을 한국에 상륙시켜 내정을 간섭하고 「제일차한일의정서」를 강제 체결하여 침략정책을 강화하자 1905년 1월에 동지들과 함께 대한십삼도유약소(大韓十三道儒約所)를 설치하고 일제의 침략정책을 규탄하는 상소운동을 전개했으며, 각국 공사관에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는 공한을 보내었다. 또한 1905년 11월에는 매국단체 일진회(一進會)를 규탄하는 운동을 벌였다.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자, 을사조약의 파기와 을사5적의 처형을 요구하는 상소를 십삼도유약소의 동지들과 함께 연명으로 올리어 을사조약에 대한 반대투쟁을 전개하였다. 1907년 나인영(羅寅永) 오기호(吳基鎬) 등과 함께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하고 이완용 등 을사5적을 처단하려다가 발각되어 1907년 7월에 10년의 유배형을 당하였다. 1909년 이상설(李相卨)이 제2회 만국평화회에 파견하는 국내대표로 김동필과 김진구(金鎭九)를 선정하여 극비리에 이들에게 여비를 보내어 상해로 나오도록 촉구했으나 일제의 연금으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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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지역 3.1운동 발원지 표석
영천지역의 3.1운동은 18세의 구위준이 1919년 3월 15일 10시경 신녕면 화성동 소재 신녕공립보통학교 1학년 교실 밖 게시판에 많은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대한독립'이라는 글자를 써붙임으로써 시작되었다.그날의 일을 계기로 시작된 영천지역 3.1운동의 정신과 선조들의 얼을 널리 기리고자 2019년 3월에 영천시가 본 표석을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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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규섭 추모비
권규섭(1883 - 1907)은 한말 경상북도 영천 출신의 의병이다. 권규섭은 1906년 3월 영천과 신녕에서 활동하던 정환직(鄭煥直)과 그의 아들 정용기(鄭鏞基)에 의해 조직된 의병부대인 산남의진(山南義陣)에 참가하였다. 그 후 1907년 4월 산남의진이 재차 거의할 시 좌영장으로 임명되어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면서 영천·영일·청송 등지에서 일본군과의 여러 전투에 참전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다. 1907년 8월 정용기 대장을 비롯한 산남의진 본진 100여명과 함께 죽장의 매현으로 들어간 권규섭은, 9월 초 강릉으로 북상을 준비하던 중 일본군이 청송에서 죽장으로 이동한다는 정보를 접하고 기습 공격하여 적을 섬멸할 작전을 세웠다. 그러나 이세기(李世紀) 부장이 일본군 취사반 인원을 주력부대로 오판하여 성급히 공격을 감행하다가 매복해 있던 일본군 영천 수비대의 역습을 받자 그는 정용기(鄭鏞基) 대장이 이끄는 본부대와 매복해 있던 부대들과 합류하여 입암으로 나아가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그는 대장 정용기(鄭鏞基), 중군장 이한구(李韓久), 참모장 손영각(孫永珏) 등과 함께 전사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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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흥 추모비
정원흥(1912 - 1944)은 경상북도 영천(永川) 사람이다. 1932년 11월 일본으로 건너가 4년간 대판(大阪) 기옥현(埼玉縣) 등지에서 고학하면서 항일독립운동을 펴기 위해 동지규합에 노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36년 귀국하였다. 1941년 1월 일경의 감시를 피하여 다시 중국으로 건너간 그는 1944년까지 3년간 북경(北京)·천진(天津) 등지에서 동지들과 연계하여 항일독립운동을 폈다고 한다. 1944년 3월 초순 임시정부 계통의 공작원으로부터 임시정부의 밀명을 받고 귀국하여 영천지방의 유지인 정도영(鄭島榮)과 협의, 후방교란과 일제의 무력을 분산시킬 목적으로 대구의 동촌(東村) 비행장을 폭파할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계획이 노출되어 1944년 3월 27일 일경에 붙잡혔다. 그는 일본 헌병대로 이송되어 8개월에 걸쳐 가혹한 고문을 받았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자백을 거부하여 동지들의 희생을 막고 결국 일경의 고문으로 빈사상태가 되어 병보석되었으나 출옥한 후 7일만인 1944년 12월 15일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