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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산 생가(김도현, 김동현 집)
애국지사 벽산 김도현 선생과 아우이신 양우 김동현 선생이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형제는 백촌 김문기의 15대손이셨다. 이 집은 'ㅁ'형태의 건축물로 18세기 이후 양식을 갖추고 있으나 기록으로는 16세기 후반경에 건축했다고 전해진다. 정침은 정면과 측면이 각 4칸, 대문채는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구성되었다. 김도현(1852 - 1914)은 을미사변 이후 대한제국 강제 병합 이전까지 의병 활동을 전개한 의병장이다. 검산(劒山)에 본거지를 두고 청량산(淸凉山)에서 모병(募兵)하였다. 1896년 1월 13일(양력 2월)에 안동부로 진군하여 김도화(金道和)를 대장으로 추대하였다. 이때 영천(영주)에서 김우창(金禹昌), 영양에서 조승기(趙承基), 진보에서 허훈(許薰)이 일어나 진영을 형성하였다. 김도현은 청송(靑松) · 의성(義城) · 영덕(盈德) · 영해(寧海)를 순방하면서 의병 봉기를 촉구하였다. 그리고 선성(宣城) 진영의 중군장이 되었다. 상주 태봉(胎峯)의 일본군 기지를 공략하다 실패하였으나 김도현의 의진은 독립부대로 활약하며 그해 10월 15일(음력 9월 9일) 영양군 청기면 여미리(余味里)에서 해산할 때까지 민용호(閔龍鎬)의 초청을 받아 강릉에 갔던 때를 제외하고는 경상북도 동북부 일대에서 유격 활동을 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선성(宣城)에 모인 후 각 고을에 통문을 보냈다. 1906년 4월에 삼남 지방 사람들에게 격문을 돌려서 재차 의병을 일으키기 위한 활동을 사방으로 전개하였다. 그러던 중 일제에 의해 사전 발각되어 1907년 2월에 체포되었다가 대구 감옥에 수감되었다. 1909년에는 영양에서 영흥학교를 설립하여 육영업에 힘쓰다가, 1914년 부친의 사후 투신하여 생을 마감하였다.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追敍)되었다. 김동현(1862 - 1939)은 의병장 벽산(碧山) 김도현(金道鉉)의 아우로서 김도현 의진에 참여하여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1896년 1월 경북 상주 함창의 태봉(胎峰)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병참부대를 공략하였다. 이 때 김도현은 선성의진(宣城義陣)의 중군장(中軍將)으로 태봉전투에 참전하였다. 그 후 김도현은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편성하여 강릉(江陵)에서 활동하고 있던 민용호부대(閔龍鎬部隊)의 초청을 받아 활동하는 등 10월 15일까지 항전하였다. 1903년 김도현은 영양·청송·진보·영덕·영해 등의 오읍도집강(五邑都執綱)에 임명되어 화적 토벌에 참여하였다. 1906년 1월 27일 오읍도집강 시절 양성한 사포(私砲) 5·60명으로 영양에서 창의하였으나 안동진위대(安東鎭衛隊)에 체포되어 대구감옥에 구금되었다가 석방되었다. 1909년 영양에서 영흥학교(英興學校)를 설립하고 신교육구국운동(新敎育救國運動)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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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현 항일공적비
김동현(1862 - 1939)은 의병장 벽산(碧山) 김도현(金道鉉)의 아우로서 김도현의진(金道鉉義陣)에 참여하여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1896년 1월 안동부 관할 각 군에서 봉기한 의병들은 경북 상주 함창의 태봉(胎峰)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병참부대를 공략하였다. 이 때 김도현은 선성의진(宣城義陣)의 중군장(中軍將)으로 태봉전투(胎峰戰鬪)에 참전하였다. 그 후 김도현은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편성하여 강릉(江陵)에서 활동하고 있던 민용호부대(閔龍鎬部隊)의 초청을 받아 활동하는 등 10월 15일까지 항전하였다. 1903년 김도현은 영양·청송·진보·영덕·영해 등의 오읍도집강(五邑都執綱)에 임명되어 화적 토벌에 참여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 후 김도현은 서울로 올라가 상소를 올리는 한편, 외국 공관에 <포고서양각국문(布告西洋各國文)>이라는 포고문을 발송하여 역적의 처단과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였다. 1906년 1월 27일 오읍도집강 시절 양성한 사포(私砲) 5·60명으로 영양에서 창의하였으나 안동진위대(安東鎭衛隊)에 체포되어 대구감옥에 구금되었다가 석방되었다. 1906년 가을 고종황제의 기의밀칙(起義密勅)을 받은 김도현은 <의격고삼남각군문(擬檄告三南各郡文)>을 발송하여 국권회복을 역설하기도 하였으나 기의(起義)에는 실패하였다. 1909년 영양에서 영흥학교(英興學校)를 설립하고 신교육구국운동(新敎育救國運動)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김동현은 1896년 김도현의진에 참여하여 경북 상주 태봉에서 왜적 5명을 사살한 것을 비롯하여 강릉, 삼척, 영양 등지에서 전투를 전개하였고, 1906년 김도현의진의 2차 봉기 준비과정에서 체포되어 4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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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순절기념비(청기면)
창의순절기념비는 벽산 김도현선생을 중심으로 펼쳐진 한말 의병항쟁의 업적을 기리고 그 뜻을 이어가려는 다짐을 담아 1988년 광복절에 세웠다. 전국에서 1894년부터 1909년까지 전개되었던 한말 의병 항쟁 중 벽산 선생이 앞장서서 펼친 투쟁은 1896년 영양의병, 예안의병, 강릉의병 그리고 1905년 외교권을 빼앗기자 다시 일어나 이듬해까지 활약한 영양의병이었다. 함께 나선 인물로는 안동의병 류시연, 상주 태봉전투를 치러낸 예안의병 이만도, 이중린, 이인화, 삼척전투를 함께 벌인 강릉의병 민용호, 그리고 벽산의 친동생 김동현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알려지지 못했지만 청기 농민들의 희생을 잊지 말아야하겠다. 이곳에 함께 새겨진 분들의 성함은 아래와 같다. 의거참전의사 김도현, 권한모, 김영섭, 김호현, 이만도, 오유승, 김예흠, 김계현, 조승기, 정득만, 김재흠, 심의영, 김병식, 김홍제, 김약흠, 정태모, 유시연, 김문제, 김두현, 김명제, 정덕순, 김봉제, 김익흠, 김상조, 심계오, 권양오, 김성춘, 김상진, 박수종, 안광옥, 김동흠, 남조한, 이중언, 송지학, 김영찬, 안경순, 고인식, 정규현, 김용술, 박석래, 정성담, 박노석, 김한현, 김순흠, 남종언, 권위동, 김상현, 김용흠, 이원여, 한개동, 김석현, 김장흠, 이경담, 김상훈, 김서현, 김성락, 이오동, 권위업, 김직현, 이인화, 유회식, 김성수, 남규원, 유지호, 김성박, 김영두, 김찬명, 김서술, 정치모, 김영조, 김영기, 조병희, 김경흠, 김영우, 오석인, 김보현, 김원흠, 신충일, 김락현, 김대현, 정건모, 김성모, 김만현, 유연박, 김락서, 김성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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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현 유허비
김도현(1852 - 1914)의 자는 명옥, 호는 벽산, 이명은 한자가 다른 김도현(金燾鉉)이며, 을미사변 이후 대한제국 강제 병합 이전까지 의병 활동을 전개한 의병장이다. 1895년 을미사변 직후 의병을 일으켰다. 일족들과 함께 검산(劒山)에 본거지를 두고 청량산(淸凉山)에서 모병(募兵)하였다. 이 무렵 유시연(柳時淵) · 권세연(權世淵) 등의 의진이 안동(安東) 일대에 집결하여 안동 입성을 계획하고 있었으므로 여기에 합세하였다. 1896년 1월 13일(양력 2월)에 안동부로 진군하기 시작하였다. 안동부에 입성한 의진에서는 안동 도총(安東都摠) 김도화(金道和)를 대장으로 추대하였다. 이때 영천(영주)에서 김우창(金禹昌), 영양에서 조승기(趙承基), 진보에서 허훈(許薰)이 일어나 진영을 형성하였다. 김도현은 청송(靑松) · 의성(義城) · 영덕(盈德) · 영해(寧海)를 순방하면서 의병 봉기를 촉구하였다. 그리고 선성(宣城) 진영의 중군장이 되었다. 원래 중군장인 김석교(金奭敎)가 제천 의진의 서상렬(徐相烈)의 부대로 옮겨가면서 그 후임에 앉은 것이다. 이후 상주 태봉(胎峯)의 일본군 기지를 공략하다 실패한 후 안동 일대의 의병 진영이 크게 타격을 받았다. 하지만 김도현의 의진은 이후 독립부대로 활약하게 되어 그해 10월 15일(음력 9월 9일) 영양군 청기면 여미리(余味里)에서 해산할 때까지 민용호(閔龍鎬)의 초청을 받아 강릉에 갔던 때를 제외하고는 경상북도 동북부 일대에서 유격 활동을 폈다. 을미의병은 대부분 친일 내각의 퇴각, 단발령의 철회 등으로 1896년 5월경 해산하게 되었다. 그러나 김도현은 10월 15일까지 항전함으로써 이 시기 의병장 중에서 가장 오래 투쟁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김도현은 김상종(金象鍾) 등과 앞장서 주선하여 선성(宣城)에 모인 후 각 고을에 통문을 보냈다. 그리고 서울에 올라가서 통문을 보냈다. 그러나 이미 기울어진 대세를 바로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김도현은 서울에서의 투쟁을 멈추고 귀향하였다. 1906년 4월에 삼남 지방 사람들에게 격문을 돌려서 재차 의병을 일으키기 위한 활동을 사방으로 전개하였다. 일을 은밀하게 진전시키던 중 일제에 의해 사전 발각되어 1907년 2월에 체포되었다가 대구 감옥에 수감되었다. 1909년에는 학교를 설립하여 육영사업에 힘쓰다가, 1914년 부친의 사후 투신하여 생을 마감하였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追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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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 3·1의거 기념탑
영양군 청기리의 마을 소개와 3.1운동의 역사, 마을 사람들의 독립 운동과 출신 유공자들을 소개하고 기리기 위하여 세워진 기념탑이다. 2002년 8월 15일 광복절 보훈처, 경상북도와 영양군의 후원으로 만들어졌다. 영양 출신의 오윤승·오석준 등은 고종황제가 갑자기 붕어했다는 소식을 들려오자, 시해당했다고 판단하고 고종의 인산일인 3월 3일에 망곡례를 올렸다. 3·1독립운동이 지방으로 전파되어 가던 중인 3월 17일에는 예안에서, 18일에는 안동 · 영해 · 영덕 등지에서 만세시위운동이 번져갔다. 3월 21일에는 영양 인근의 임동장터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오석준과 오윤승, 유동수, 이원오 등은 영양장날을 기하여 만세시위를 일으킬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24일 저녁 7시쯤 오석준과 오윤승이 주민을 동원하니 삽시간에 400여 명의 주민들이 동원되자 청기면 면사무소 뜰안에서 만세 함성을 터져나왔다. 시위대는 가가호호를 돌면서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할 것을 권유하였다. 3월 25일 영양장날에 시위할 것을 기리면서 해산하였다. 이날의 시위로 167명이 일경에 검거되었다. 세워진 탑의 형상은 우리 민족이 일본의 강점기 동안 억눌린 민족혼을 일깨우고 자주 독립을 위하여 분연히 일어선 독립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표현하였다. 힘차고 강렬한 의지를 불끈 쥔 주먹으로 만족의 기상을 표현하였으며 만백성이 힘을 모아 독립을 쟁취하고자 함을 남.녀.노.소를 상징하는 세개의 주먹으로 표현하였다. 손과 손을 맞잡아 한 몸 한 뜻이라는 의미를 조형적으로 표현하여 서로 파고드는 듯한 손의 표현을 하였으며 줄기찬 기상을 직선적인 선과 면을 이용하여 나타냄과 동시에 역동적이고 힘찬 기상을 표현 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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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석준 묘
오석준(1876 - 1951)은 1919년 3월 25일의 영양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3월 21일 안동군 임동면 편항(安東郡臨東面鞭巷)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주동했던 유동수(柳東洙)·이강욱(李康郁)·홍명성(洪明聖) 등이 이곳으로 와서 입암면 대천동(立岩面大泉洞) 이원오(李元五)의 집에 모여 비밀회합을 갖고, 3울 25일의 영양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기로 결의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곳 일본군 헌병분견소에서는 3월 25일의 독립만세시위 계획을 미리 알고 이날 아침부터 읍내로 들어오는 4개의 입구에 군경을 배치시키고 삼엄한 경비를 하였다. 이날 낮 12시 30분경, 각지로부터 6백여명의 시위군중이 10∼20명씩 무리를 지어 영양읍내로 들어왔다. 이에 일본 군경은 읍외의 2,5km 지점에서 일일이 신체 검색을 하여 되돌려 보내려고 하였으나, 대부분의 군중은 이를 뿌리치고 읍내로 들어와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이날 그도 일본 군경의 만류를 뿌리치고 읍내로 들어와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자 일제는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한 시위군중 중 167명을 금융조합 창고에 가두고 개별적으로 조사한 후 모두 방면하였는데, 오직 그만은 주동자로 검거되어, 이해 5월 19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0년에 대통령표창을,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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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석준 기념관
오석준(1876 - 1951)은 1919년 3월 25일의 영양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3월 21일 안동군 임동면 편항(安東郡臨東面鞭巷)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주동했던 유동수(柳東洙)·이강욱(李康郁)·홍명성(洪明聖) 등이 이곳으로 와서 입암면 대천동(立岩面大泉洞) 이원오(李元五)의 집에 모여 비밀회합을 갖고, 3울 25일의 영양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기로 결의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곳 일본군 헌병분견소에서는 3월 25일의 독립만세시위 계획을 미리 알고 이날 아침부터 읍내로 들어오는 4개의 입구에 군경을 배치시키고 삼엄한 경비를 하였다. 이날 낮 12시 30분경, 각지로부터 6백여명의 시위군중이 10∼20명씩 무리를 지어 영양읍내로 들어왔다. 이에 일본 군경은 읍외의 2,5km 지점에서 일일이 신체 검색을 하여 되돌려 보내려고 하였으나, 대부분의 군중은 이를 뿌리치고 읍내로 들어와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이날 그도 일본 군경의 만류를 뿌리치고 읍내로 들어와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자 일제는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한 시위군중 중 167명을 금융조합 창고에 가두고 개별적으로 조사한 후 모두 방면하였는데, 오직 그만은 주동자로 검거되어, 이해 5월 19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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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상도 추모비
송상도(1871 - 1947)의 자는 성소, 호는 기려자, 미헌, 연파이며, 일제강점기 『기려수필(騎驢隨筆)』을 편찬한 유학자이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워 권상익(權相翊) 등 향내 제유(諸儒)와 교유하였으며, 당세의 명유인 곽종석(郭鍾錫)·전우(田愚) 등을 역방하면서 견문을 넓혔다. 송상도는 경학(經學)보다 사학(史學)에 힘을 쏟아 중국 역대의 사적(史籍)을 섭렵하였을 뿐 아니라 일찍이 조선왕조사의 편찬에 뜻을 두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명나라가 망한 뒤 기려도사(騎驢道士)가 명말(明末) 충신의 사적을 수집하였던 예에 따라, 우리 나라 애국지사의 사적을 편찬할 결심을 하였다. 전국 방방곡곡을 수십년간 돌아다니며 애국자의 유가족 또는 친지를 역방하면서 사적을 기록하는 한편, 사건 당시의 신문과 기타 자료를 수집하여 『기려수필(騎驢隨筆)』을 편찬하였다. 이렇듯 현지답사를 통하여 채록된 『기려수필(騎驢隨筆)』은 당시 항일투쟁의 실상을 알려주는 귀중한 문헌이다. 1986년 건국표창,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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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서 기적비
박인서(1886 - 1957)는 1919년 3월 21일 경북 영주군(榮州郡) 읍내 장날에 일어난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평소 일제 식민지통치의 부당성에 대하여 항일의식이 투철하였던 그는 광무황제(光武皇帝) 인산(因山)에 참례하기 위해 상경했다가 서울에서 3·1운동의 광경을 직접 보고 돌아와 친분이 두터운 오하근(吳夏根)과 함께 만세운동을 계획해 나갔다. 봉화군(奉化郡) 상운면(祥雲面) 내림리(內林里)에 살던 그가 영주 읍내에서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한 것은 지리적으로 영주 읍내가 가까웠던 것도 있지만, 영주 읍내의 장이 컸으므로 만세시위를 크게 일으킬 수 있다는 뜻에서 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3월 21일 영주 읍내 장날을 이용하여 거사하기로 뜻을 모으고, 활동구역을 분담하여 봉화군 일대는 박인서가 맡기로 하고 영주군 일대는 오하근이 맡아 동지 포섭과 만세운동에 필요한 준비를 진행시켰다. 그는 권태중(權泰中)으로 하여금 태극기 15매를 제작케 하는 한편 봉화군 일대의 인사들에게 만세시위 계획을 알림으로써 다수의 동지를 포섭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거사 당일인 3월 21일 오전 11시를 기해 박인서와 오하근 등은 장터로 나아가 미리 준비해 간 태극기를 배포하면서 독립만세를 선창하였고, 이에 따라 수백 명의 군중들이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이에 일본군 헌병은 총검으로 탄압하면서 시위대를 해산하려고 했으나, 박인서 등은 굴하지 않고 시위대를 독려하면서 만세시위를 계속 강행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히고 말았다. 그는 이 일로 인하여 1919년 3월 25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아 공소하였으나 4월 16일 대구복심법원과 5월 8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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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달연 집
금달연(琴達淵, 1874-1914)은 경상북도 순흥 출신이며, 본관은 봉화이다. 1905년 을사늑약이 있자 영주에서 김낙임(金樂任)과 함께 의병을 조직하고,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1907년에는 이강년 의병부대의 중군장 김상태(金相泰)와 연합하여 순흥에 있는 일본 헌병분견소를 습격하는 등 일본군과 접전을 벌였다. 1907년 음력 9월에 이르러 금달연은 이강년 의병부대에 합류하였다. 영주·순흥·풍기·봉화·단양 등지에서 다른 지역 의병들과 연합하여 일본군 헌병분경소와 수비대를 공격하였다. 1908년에는 이강년의 종사부에서 활약하였다. 그런데 음력 9월 19일 이강년(李康秊)이 붙잡히자 김상태와 함께 의병을 수습하고 선봉장이 되어, 영주·단양 일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며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09년 7월 일본군에게 붙잡혀 종신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다 1914년 10월 21일 끝내 순국하였다.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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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승 사당(백산서원)
서재승(1876 - 1915)은 자는 성서, 호는 죽림이며, 대한제국기 을사조약 체결 후 탁지부 주사를 사직하고 군량모집 등의 활동을 전개한 의병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의분을 참지 못하여 탁지부 주사의 직을 사임하고 의병활동에 투신하여 군량모집 등에 활약하였다. 그 뒤 1909년 스스로 의병을 일으켜 수 년간에 걸쳐 항일전을 계속하다가 전세가 불리하여 영주군에 피신하였다. 1915년 친일첩자의 밀고로 붙잡혀 서울로 압송해가던 중 고문을 심하게 받다가, 그 해 7월 기주(基州: 지금의 풍기)에서 총살당하였다.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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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승 묘
서재승(1876 - 1915)은 자는 성서, 호는 죽림이며, 대한제국기 을사조약 체결 후 탁지부 주사를 사직하고 군량모집 등의 활동을 전개한 의병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의분을 참지 못하여 탁지부 주사의 직을 사임하고 의병활동에 투신하여 군량모집 등에 활약하였다. 그 뒤 1909년 스스로 의병을 일으켜 수 년간에 걸쳐 항일전을 계속하다가 전세가 불리하여 영주군에 피신하였다. 1915년 친일첩자의 밀고로 붙잡혀 서울로 압송해가던 중 고문을 심하게 받다가, 그 해 7월 기주(基州: 지금의 풍기)에서 총살당하였다.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