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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돈호 집(유우당)
이돈호(1868 - 1942)는 1919년 3월, 유림의 대표로 파리장서에 서명한 인물이다. 선생의 조카인 이병각 지사 역시 조지훈, 오일도, 조세림등과 더불어 항일애국시인으로 활약하였다.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은 김복한(金福漢)을 중심으로 한 호서유림과 곽종석(郭鍾錫)을 중심으로 한 영남유림 137명이 참여한 항일운동이었다. 파리장서의 요지는 일제가 자행한 명성황후·광무황제(光武皇帝)의 시해와 한국 주권의 찬탈과정을 폭로하면서 한국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경상북도 상주의 만세운동과 관련하여 1919년 4월 12일 서명자의 한 사람이었던 송회근(宋晦根)이 붙잡히는 바람에 발각되었다. 이로써 이돈호도 일경에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일제는 이들 유림이 한국인의 존경을 받는 인물들이었으므로 민족적 감정이 더욱 번질 것을 우려한 나머지 크게 부각시키지 않았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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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청년연맹 석보지부
영양청년동맹 석보지부(永陽靑年同盟石堡支部)는 석보면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청년 모임의 이름이다. 당시 김수봉(金壽鳳), 박수봉(朴壽奉), 박주억(朴周億), 이돌몽(李乭蒙), 이성암(李成岩), 이태을(李太乙), 이현량(李鉉良)이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이들은1930년 2월 8일 회관에 모여 독립운동을 모의하고 석보면에서도 만세운동을 펼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리고 1930년 2월 11일 석보면 원리동 장날에 격문을 뿌리고 만세운동을 펼칠 것을 결의하였다. 이들은 원리장날에 조선총독부의 탄압을 규탄하고, 광주학생운동으로 체포된 학생들을 석방하라는 내용의 격문을 800여 장 배포하고, 만세운동을 펼쳤다. ‘영양격문사건’으로 보도된 이 만세운동은 영양청년동맹과 석보지부의 근간을 흔들었다. 이 때 체포된 이들은 영양청년동맹 석보지부 회원이자 신간회 영양지회 회원이었고 노동야학을 주도하던 인물이었다.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회원들은 모두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1930년 3월 25일 방청이 금지된 상황에서 1차 공판이 열렸다. 박수봉(朴壽奉)·박주억(朴周億)·이태을(李太乙)·이돌몽(李乭蒙)은 징역 2년, 김수봉(金壽鳳)·이성암(李成岩)은 징역 1년 6개월, 이현량(李鉉良)은 징역 8월을 받았다. 이후 석보지부의 활동을 지원하였던 영양청년동맹도 그 활동이 자유로울 수 없어서 영양지역 청년회 활동이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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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암고택(유공자의 집)
김택진(1874 - 1961)은 일찍이 유학을 공부하였고, 명망 있는 여러 유학자와 교유하였다. 1910년 국권 피탈로 통분하던 중 김창숙(金昌淑)[1879~1962]을 중심으로 유림단의 독립청원운동이 전개되자 참여하였다. 유림단의 유림대표들은 1919년 3월 프랑스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하여 「독립청원서」를 작성해서 보냈는데, 영주 지역에서는 김택진을 비롯해 김동진(金東鎭)[1867~1952]·정태진(丁泰鎭)[1876~1960] 등이 함께 서명하였다. 이 의거를 독립청원운동 또는 파리장서사건이라고 하는데, 김복한(金福漢)[1860~1924]을 중심으로 한 호서 유림과 곽종석(郭鍾錫)[1846~1919]을 중심으로 한 영남 유림 137명이 참여한 명실상부 유림단의 독립운동이었다.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할 「독립청원서」의 내용은 일제가 저지른 만행, 명성황후 시해와 고종 광무황제의 독살 및 한국 국권의 찬탈 과정을 폭로하면서 한국 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세계만방에 주장하는 것이었다. 「독립청원서」는 유림대표 김창숙이 상하이를 거쳐 파리로 가져가려 했으나, 사정이 어려워 신한청년당의 대표로 파리에 파견된 김규식(金奎植)[1881~1950]에게 우송되었으며, 각국 공사관과 국내의 각 향교에도 발송되었다. 그러나 이 일은 1919년 4월 2일 성주 지역의 3.1운동 전개 과정에서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어 곽종석을 비롯한 독립청원운동 관련자들이 대부분 체포되었다. 김택진도 이때 체포되어 유치장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7년 신간회가 결성되자, 1927년 12월 신간회 영주지회의 제1회 대회에서 부회장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김택진은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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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현 집(추모각)
남자현(1872 - 1933)은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군사기관과 농어촌을 순회하며 독립정신을 고취시킨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만주로 망명하여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서 활약하는 한편,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각 단체와 군사기관, 농어촌을 순회하면서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동만주 12곳에 교회와 예배당을 세워 전도하였으며, 10여 곳에 여자교육회를 설립해 여성을 계몽하는 데도 힘썼다. 또한, 남만주 각지를 순회하면서 동포간의 단합과 군자금 모집을 위하여 활약하였다. 1924년 채찬(蔡燦)·이청산(李靑山) 등과 총독 사이토[齋藤實]를 암살할 것을 계획하였으나 미수에 그치고 다시 만주로 돌아갔다. 마침 그때 길림(吉林)주민회장 이규동(李圭東), 의성단장(義成團長) 편강렬(片康烈)·양기탁(梁起鐸)·손일민(孫一民) 등이 주동이 되어 재만독립운동단체의 통일을 발기하자 이에 적극 참가하여 크게 공헌하였다. 1928년 길림에서 김동삼(金東三)·안창호(安昌浩) 등 47명이 중국 경찰에 검거되자 지성으로 간호하며 석방운동에 온 힘을 기울였다. 1931년 김동삼이 하얼빈[哈爾濱]에서 붙잡히자 그를 탈출시키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였으나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1932년 국제연맹 리튼조사단이 하얼빈에 오자, 흰 수건에 ‘한국독립원(韓國獨立願)’이라는 혈서를 써서 조사단에 보내 우리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1933년 이규동 등과 주만일본대사 무토 노부요시[武藤信義]를 죽이기로 하고, 동지와의 연락 및 무기운반 등의 임무를 띠고 걸인노파 차림으로 하얼빈 교외 정양가(正陽街)를 지나다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6개월 동안 갖은 혹형을 받다가 단식투쟁을 전개하고 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지느니라.”라는 말을 남기고 하얼빈에서 세상을 떠났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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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규 독립운동기념비
이현규(1974 - 1917)의 자는 하현, 호는 우해, 내산, 이칭은 능우이며, 대한제국기 경상북도와 강원도 일대에서 활약한 의병장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그 해 11월 청송 주왕산(周王山)에서 동지 수십 명이 모여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기로 하고 부근에 통문을 보내어 강원도·경상도의 의사들을 모집하였다. 12월 중순경 울진 불영사(佛影寺)에서 안동·청송·진보·영양의 4군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의병 500여 명을 주왕산에서 훈련시켜 1906년 2월 영양군 입암면 교리에서 의병진을 편성한 뒤 일본군과 수십 회 교전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4월에는 진보의 오누저수지에서 당시 일본군의 강원도·경상도의 이른바 의병소탕부대의 책임자를 비롯, 일본군 수십명을 사살하였으며, 신돌석(申乭錫)·정용기(鄭鏞基) 등의 의병부대와 제휴, 경상북도와 강원도 일대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1906년 5월 울진·죽변·왜관의 일본군을 격파하고 영양 북방의 일본군을 공격하다가 적의 역습을 받아 부상을 당하고 도포장(都砲將) 김대규(金大圭)가 전사하자 후퇴하여 의병부대를 해산하였다. 이 후 영일군 청하면 모진리 산속에 은거하여 상처를 치료하면서 후진을 양성하는 일에 힘썼으나, 총상의 여독으로 죽었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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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순봉 집
엄순봉(1906 - 1938)의 일명은 엄형순이며, 일제강점기 남화한인청년연맹, 한족총연합회, 재만주조선인 아나키스트 연맹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집안이 빈궁하여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던 중 생계유지를 위해 1923년 만주로 건너갔다. 농업노동에 종사하다가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이 발발하자 안주할 땅을 찾아 중국땅을 돌아다녔다. 그러던 중 상해(上海)부근 남상(南翔)의 입달학원(立達學院) 교사 유자명(柳子明)을 만나게 되면서 남상에서 5리쯤 떨어진 남당(南塘)에서 농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부터 무정부주의 색채가 짙어지게 되었다. 1932년 12월 상해 프랑스조계내의 복이리로정원방(福履理路亭元芳)에서 백정기(白貞基)·원심창(元心昌) 등을 만나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33년 5월 오면직(吳冕稙)·주열(朱烈)·안경근(安敬根)과 함께 일제 영사관 밀정 이종홍(李鐘洪)을 처단하였다. 그리고 8월 1일 정화암(鄭華巖)과 함께 105인사건에 연루되었던, 자칭 애국자 옥관빈(玉觀彬)이 당시 상해에 와서 일본 관헌과 내통하고 있음을 알고, 그의 사촌형인 옥성빈(玉成彬)의 집을 찾아 가는 것을 권총으로 처단하였다. 1934년 3월 초순, 당시 아리요시[有吉明] 공사가 무정부주의자들을 탄압하고, 또한 장개석(蔣介石)을 4,000만원으로 매수하여 만주를 포기하게 하고 열하에서 저항하지 못하도록 하려고 하자, 그를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공사가 일본으로 이 문제를 협의하러 출발하기 전에, 3월 17일 당시 일본인이 경영하던 고급음식점에서 송별회를 연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그래서 백정기·이강훈·원심창 등 3명으로 하여금 부근의 중국집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살해하도록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어 1935년 3월 25일 이규호(李圭虎)와 함께 정화암·이달(李達)·전이방(田理芳) 등과 협의하여 상해조선인거류민회 부회장인 이용로(李容魯, 일명 李榮魯)가 일본총영사와 내통함을 알고 집으로 찾아가 처단하였다. 거사 직후 붙잡혀 1936년 3월에 사형언도를 받았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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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호국공원
영양 호국공원은 부지면적 3만548㎡에 총사업비 32억여원을 들여 신규로 준공한 것으로 충혼탑과 베트남 참전기념비를 비롯해 무공수훈자전공비, 삼의사비, 독립운동합동기념비 등을 이설하고 공원조성, 광장, 주차장 등 부대시설을 설치했으며 지난 2009년 착공해 2012년 6월 준공됐다. 이곳에 세운 독립운동 합동기념비는 영양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107명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87년 영양읍 서부리에 건립됐다. 기념비에는 107명의 이름을 새겨 넣어 후세의 귀감으로 삼았다. 그리고 영양3의사비는 영양군을 대표하는 독립유공자인 김도현, 남자현, 엄순봉 지사를 추모하기 위해 1977년 건립된 것이다. 김도현은 한말의 항일 의병장으로 영양·안동 지방의 의병을 모아 항전했고, 영양에 영흥학교를 세워 육영사업에 힘쓰다가 부친이 사망하자 망국을 개탄하는 시를 남기고 투신자살했다. 남자현은 서로군정서 등에서 활약한 여성 독립운동가로서 총독 사이토 마코토의 암살을 계획했으며 혈서 '조선독립원'을 작성하여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으며 일본 만주국대사를 암살하려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엄순봉은 1933년 북만주에서 한족총연합회를 조직, 청년부장이 되었으며, 재만조선인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입한 뒤 백정기·정화암 등과 상해로 갔다. 1935년 조선인거류민회 부회장으로 있던 친일파 이영로를 처단하여 1936년 사형선고를 받고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김도현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남자현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1963년에는 엄순봉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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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현 기적비(호국공원)
김도현(1852 - 1914)의 자는 명옥, 호는 벽산, 이명은 한자가 다른 김도현(金燾鉉)이며, 을미사변 이후 대한제국 강제 병합 이전까지 의병 활동을 전개한 의병장이다. 1895년 을미사변 직후 의병을 일으켰다. 일족들과 함께 검산(劒山)에 본거지를 두고 청량산(淸凉山)에서 모병(募兵)하였다. 이 무렵 유시연(柳時淵) · 권세연(權世淵) 등의 의진이 안동(安東) 일대에 집결하여 안동 입성을 계획하고 있었으므로 여기에 합세하였다. 1896년 1월 13일(양력 2월)에 안동부로 진군하기 시작하였다. 안동부에 입성한 의진에서는 안동 도총(安東都摠) 김도화(金道和)를 대장으로 추대하였다. 이때 영천(영주)에서 김우창(金禹昌), 영양에서 조승기(趙承基), 진보에서 허훈(許薰)이 일어나 진영을 형성하였다. 김도현은 청송(靑松) · 의성(義城) · 영덕(盈德) · 영해(寧海)를 순방하면서 의병 봉기를 촉구하였다. 그리고 선성(宣城) 진영의 중군장이 되었다. 원래 중군장인 김석교(金奭敎)가 제천 의진의 서상렬(徐相烈)의 부대로 옮겨가면서 그 후임에 앉은 것이다. 이후 상주 태봉(胎峯)의 일본군 기지를 공략하다 실패한 후 안동 일대의 의병 진영이 크게 타격을 받았다. 하지만 김도현의 의진은 이후 독립부대로 활약하게 되어 그해 10월 15일(음력 9월 9일) 영양군 청기면 여미리(余味里)에서 해산할 때까지 민용호(閔龍鎬)의 초청을 받아 강릉에 갔던 때를 제외하고는 경상북도 동북부 일대에서 유격 활동을 폈다. 을미의병은 대부분 친일 내각의 퇴각, 단발령의 철회 등으로 1896년 5월경 해산하게 되었다. 그러나 김도현은 10월 15일까지 항전함으로써 이 시기 의병장 중에서 가장 오래 투쟁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김도현은 김상종(金象鍾) 등과 앞장서 주선하여 선성(宣城)에 모인 후 각 고을에 통문을 보냈다. 그리고 서울에 올라가서 통문을 보냈다. 그러나 이미 기울어진 대세를 바로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김도현은 서울에서의 투쟁을 멈추고 귀향하였다. 1906년 4월에 삼남 지방 사람들에게 격문을 돌려서 재차 의병을 일으키기 위한 활동을 사방으로 전개하였다. 일을 은밀하게 진전시키던 중 일제에 의해 사전 발각되어 1907년 2월에 체포되었다가 대구 감옥에 수감되었다. 1909년에는 학교를 설립하여 육영사업에 힘쓰다가, 1914년 부친의 사후 투신하여 생을 마감하였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追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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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현 기적비(호국공원)
남자현(1872 - 1933)은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군사기관과 농어촌을 순회하며 독립정신을 고취시킨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만주로 망명하여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서 활약하는 한편,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각 단체와 군사기관, 농어촌을 순회하면서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동만주 12곳에 교회와 예배당을 세워 전도하였으며, 10여 곳에 여자교육회를 설립해 여성을 계몽하는 데도 힘썼다. 또한, 남만주 각지를 순회하면서 동포간의 단합과 군자금 모집을 위하여 활약하였다. 1924년 채찬(蔡燦)·이청산(李靑山) 등과 총독 사이토[齋藤實]를 암살할 것을 계획하였으나 미수에 그치고 다시 만주로 돌아갔다. 마침 그때 길림(吉林)주민회장 이규동(李圭東), 의성단장(義成團長) 편강렬(片康烈)·양기탁(梁起鐸)·손일민(孫一民) 등이 주동이 되어 재만독립운동단체의 통일을 발기하자 이에 적극 참가하여 크게 공헌하였다. 1928년 길림에서 김동삼(金東三)·안창호(安昌浩) 등 47명이 중국 경찰에 검거되자 지성으로 간호하며 석방운동에 온 힘을 기울였다. 1931년 김동삼이 하얼빈[哈爾濱]에서 붙잡히자 그를 탈출시키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였으나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1932년 국제연맹 리튼조사단이 하얼빈에 오자, 흰 수건에 ‘한국독립원(韓國獨立願)’이라는 혈서를 써서 조사단에 보내 우리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1933년 이규동 등과 주만일본대사 무토 노부요시[武藤信義]를 죽이기로 하고, 동지와의 연락 및 무기운반 등의 임무를 띠고 걸인노파 차림으로 하얼빈 교외 정양가(正陽街)를 지나다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6개월 동안 갖은 혹형을 받다가 단식투쟁을 전개하고 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지느니라.”라는 말을 남기고 하얼빈에서 세상을 떠났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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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순봉 기적비(호국공원)
엄순봉(1906 - 1938)의 일명은 엄형순이며, 일제강점기 남화한인청년연맹, 한족총연합회, 재만주조선인 아나키스트 연맹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집안이 빈궁하여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던 중 생계유지를 위해 1923년 만주로 건너갔다. 농업노동에 종사하다가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이 발발하자 안주할 땅을 찾아 중국땅을 돌아다녔다. 그러던 중 상해(上海)부근 남상(南翔)의 입달학원(立達學院) 교사 유자명(柳子明)을 만나게 되면서 남상에서 5리쯤 떨어진 남당(南塘)에서 농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부터 무정부주의 색채가 짙어지게 되었다. 1932년 12월 상해 프랑스조계내의 복이리로정원방(福履理路亭元芳)에서 백정기(白貞基)·원심창(元心昌) 등을 만나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33년 5월 오면직(吳冕稙)·주열(朱烈)·안경근(安敬根)과 함께 일제 영사관 밀정 이종홍(李鐘洪)을 처단하였다. 그리고 8월 1일 정화암(鄭華巖)과 함께 105인사건에 연루되었던, 자칭 애국자 옥관빈(玉觀彬)이 당시 상해에 와서 일본 관헌과 내통하고 있음을 알고, 그의 사촌형인 옥성빈(玉成彬)의 집을 찾아 가는 것을 권총으로 처단하였다. 1934년 3월 초순, 당시 아리요시[有吉明] 공사가 무정부주의자들을 탄압하고, 또한 장개석(蔣介石)을 4,000만원으로 매수하여 만주를 포기하게 하고 열하에서 저항하지 못하도록 하려고 하자, 그를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공사가 일본으로 이 문제를 협의하러 출발하기 전에, 3월 17일 당시 일본인이 경영하던 고급음식점에서 송별회를 연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그래서 백정기·이강훈·원심창 등 3명으로 하여금 부근의 중국집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살해하도록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어 1935년 3월 25일 이규호(李圭虎)와 함께 정화암·이달(李達)·전이방(田理芳) 등과 협의하여 상해조선인거류민회 부회장인 이용로(李容魯, 일명 李榮魯)가 일본총영사와 내통함을 알고 집으로 찾아가 처단하였다. 거사 직후 붙잡혀 1936년 3월에 사형언도를 받았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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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규 기념비
김대규(1878 - 1907)는 대한제국기 을사조약 체결 후 경상도, 강원도에서 활동한 의병장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이에 비분하여 의거하였다. 청송 주왕사(周王寺)와 울진 불영사(佛影寺)에서 이현규(李鉉圭)와 함께 경상도·강원도지방의 의병 500여 명을 모아 무술훈련을 실시하고, 1906년 2월에 경상북도 영양군 입암면의 교동에 있는 자택에서 의진을 구성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이 때 도포장(都砲將)으로 선임되었으며, 그 해 4월 진보의 오루저수지에서 일본헌병 부토[武藤] 이하 1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5월에는 울진·죽변 등지에서 일본군을 격파하고 11월에는 안동 임동면과 영양 입암면의 접경 산악지대에서 활동하다가 적의 방화로 순국하였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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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령 순국지사 합동기념비
사부령 순국지사 합동기념비는 사부령에서 일제와 싸우다 순국한 의병들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기념비이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분격한 입암면 주민들이 1896년 음력 5월 12일 정태모(정성첨)공을 필두로 연당리 사부령에서 최후의 일각까지 싸우다가 김상조(金商祖), 정태모(鄭泰模), 김상진(金商璡), 안경순(安景順), 김계현(金桂鉉), 김순흠(金舜欽), 김장흠(金漳欽), 김용흠(金溶欽), 심의형(沈宜瀅), 박석래(朴錫來), 남조한(南朝漢) 등 열 두분의 지사가 순국하였다. 벽산(碧山) 김도현 의병장은 을미년 11월 일제가 단발령을 강요한다는 급보를 받고 거의하였다. 그리하여 김도현 의병장은 1895년 12월 청량산에서 거병하여 전투적 의병으로의 위용을 갖추었다. 그 후 민용호(閔龍鎬) 의진의 요청으로 김도현은 60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강릉으로 진군하여 연합작전으로 강릉·정선·삼척 일대에서 활약하기도 하였다. 그 후 을미의병은 1896년 여름 거의 해산하였고, 광무황제도 의병해산에 관한 조칙을 내리고 선유사를 각지에 파견하여 해산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김도현 의진은 해산하지 않고 소청(小靑)의 검각산성(劍角山城)에 본진을 두고 면내에 통문을 돌리며 의병들을 모아 항쟁을 계속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장을 추서하였다.정성첨(1853-1896)은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의 변보(變報)를 전해듣고 비분강개하였는데, 이어서 일제와 친일정권에 의해 을미개혁(乙未改革)으로 단발령까지 강행되자 그 분노는 폭발하여 토역복수(討逆復讐)를 부르짖고 영양에서 일어난 김도현 의진을 지원하였다. 그리고 김도현 의진을 지원하던 중 1896년 5월 12일 일본군이 출몰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30여 명의 민병(民兵)을 이끌고 영양군 입암면(立岩面) 연당리(蓮塘里) 사부령(思夫嶺) 고개에서 일분군을 습격하였으나 무기의 열세로 패배하였고, 이 전투중에 정성첨은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