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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삼 집
김동삼(1878 - 1937)의 본명은 긍식(肯植), 자는 한경(漢卿)이었는데, 만주로 망명해서는 이름을 동삼(東三), 자는 성지(省之), 호는 일송(一松)으로 고쳤다. 김동삼은 서간도 독립군 기지 개척의 선구자였으며, 만주 독립군의 통합에 노력했던 독립운동가이다. 한국 근대 질곡의 긴 역사 속에서 독립을 향한 김동삼의 본격적인 행보는 1907년부터 시작되었다. 김동삼은 1907년 3월 류인식(柳寅植)·김후병(金厚秉)·하중환(河中煥) 등과 함께 안동에 근대식 학교인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설립하고 교감으로 활동하였다. 협동학교에 재직하면서 그는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와 대동청년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나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해외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1911년 서간도 유하현 삼원포에 도착한 김동삼은 신흥강습소를 설립하고 경학사 사장 이상룡(李相龍)을 도와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힘을 쏟았다. 1913년 3월부터 이름을 중국 동삼성(東三省)의 호칭을 따서 ‘동삼(東三)’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1914년에는 신흥학교 1~4회 졸업생들과 그 분교, 노동야학 졸업생 385명을 인솔하여 통화현 팔리초 깊은 산 속에 백서농장(白西農庄)을 건립하고, 그 장주(庄主)가 되었다. 이는 김동삼이 만주 독립군의 거장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시점이다. 1919년 국내 3·1운동의 영향으로 길림에서도 「대한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는데, 이때 김동삼은 민족 대표 39인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3·1운동의 영향으로 서간도 한인 사회도 이에 호응하여 같은 해 4월 경학사의 후신이었던 부민단을 전 서간도 지역으로 확대하여 한족회를 설립하고, ‘군정부’라는 독립군 조직을 편성하였다. 이때 김동삼은 한족회의 서무사장(庶務司長)을 맡았다가, 11월 ‘군정부’가 서로군정서로 개편되면서 참모장에 취임하였다. 이후 1922년 6월 경신참변으로 붕괴되어 버린 동포 사회와 독립군을 통합하기 위해 남만통일회를 주도하여, 통군부(統軍府)를 탄생시켰다. 8월 30일 전만한족통일회가 결성되고, 통군부가 통의부(統義府)로 확대 개편되자, 교육부장이었던 김동삼은 통의부 총장을 맡게 되었다.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을 위해 1923년 1월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가 열리자 김동삼은 서로군정서와 남만주의 한인 대표로 참석하여 의장으로 선출되어, 독립운동 세력의 통일을 위해서 노력하였다. 당시 국민대표회의가 임시정부의 개조론·창조론으로 대립할 때 그는 개조론에 가세하였으나, 그 회의는 결국 결렬되고 말았다. 지속적으로 독립운동 단체 통합에 힘쓰던 김동삼은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북만주로 가서 활동을 모색하던 중 하얼빈에서 일제 밀정의 밀고로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그는 평양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37년 4월 13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시신은 평소에 그를 존경하던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이 거두어 장례를 지냈는데, 유언대로 화장하여 한강에 유해를 뿌렸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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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식 집
김병식(1856 - 1936)의 자는 제경, 호는 만원이며,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김병식은 1907년 내앞마을에 설립된 협동학교에서 교장으로 활동하였다. 협동학교는 안동의 혁신 유림인 김대락(金大洛)·이상룡(李相龍)·류인식(柳寅植)·김동삼(金東三) 등이 참여하여 인재를 양성한 안동 지역 최초의 근대식 중등 교육기관이었다. 이후 김병식은 1919년 3월 프랑스 파리강화회의에 일제의 조선 국권 침탈 과정을 폭로하면서 한국 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호소하기 위해서 김창숙(金昌淑)이 주도한 ‘파리장서의거’에 유림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파리장서의거는 1919년 3·1운동 직후 일부 유림 세력이 파리강화회의에 우리나라의 독립을 요구하는 긴 문장의 청원 서신을 보낸 사건이었다. 그러나 1919년 4월 서명 사실이 알려져 김병식은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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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섭 기념비
김지섭(1884 - 1928)의 자는 위경, 호는 추강이며, 의열단원으로서 일본 왕궁에 폭탄을 투척한 독립운동가이다. 1907년 보통학교 부교원 검정시험에 합격하여 상주보통학교에 부임하였다가 1년 만에 사직하였다. 1908년에 상경하여 광화신숙 일어전문과에 입학하여 일본어를 익혔다. 재판소 번역관 시험에 합격하여 1913년까지 번역관보, 통역생 겸 서기 등의 관직 생활을 하였다. 3 · 1운동 이후 중국 관내, 만주, 옌하이저우〔沿海州〕를 오가며 앞날을 모색하던 중 1921년 가을경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22년에는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1923년 간토대지진〔關東大地震〕이 일어나면서 일본인들에 의해 우리나라 동포들이 학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의열단 지도부는 이를 응징한다는 차원에서 도쿄〔東京〕의 제국의회에 폭탄을 던지고 주요 관리를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김지섭은 이를 실행할 의열단 기밀부 특파원에 자원하였다. 1923년 12월 20일 소형 폭탄 3개와 나카무라 히코타로〔中村彦太郞〕라는 가명의 일본인 명함 30매를 가지고 석탄 운반선을 이용하여 상하이를 출발하였다. 12월 31일 후쿠오카〔福岡〕에 도착하자 몰래 상륙하여 도쿄로 향하였다. 1924년 1월 5일 도쿄에 도착하여 무기한 연기된 제국의회를 대신해 왕궁을 폭파할 준비에 나서 낮 동안 왕궁 근처를 답사하였다. 그날 저녁 오후 7시 20분경 양복 주머니에 3개의 폭탄을 감추고 왕궁 근처에 도착해 불심검문을 받게 되자 폭탄 하나를 경찰에게 던졌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폭탄 2개를 꺼내 들고 왕궁 정문 앞 다리로 뛰어가 안전핀을 뽑지 못한 채 폭탄을 던졌다. 폭탄 3개는 모두 터지지 않았고 그 자리에서 붙잡혔다. 1월 6일 히비야경찰서〔日比谷警察署〕를 거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고 예심에 회부되면서 이치가야형무소〔市谷刑務所〕에 수감되었다. 4월 24일 도쿄지방재판소에서 예심이 종결되었다. 폭발물 취체 벌칙 위범, 강도 미수와 선박 침입죄로 정식 재판에 회부되었다. 11월 6일 도쿄지방재판소는 무기징역을 선고하였다. 도쿄공소원에 공소를 제기하여 1925년 3월부터 2심 재판이 시작되었다. 변호인들이 재판장의 불공정한 재판에 항의해 기피신청을 하자 “나는 조선 사람이니 일본 사람인 재판장이 어떠한 사람이 되든지 똑같을 것이니 기피신청(忌避申請)을 할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나는 아무 죄가 없으니 무죄를 선언하든지 제1심의 검사 청구대로 사형에 처하든지 하여 달라.”라고 하며 법정투쟁을 벌였다. 1925년 8월 12일 공소심에서도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변호사가 상고하자 이를 취하하는 서면을 제출하였다. 이후 도쿄 외곽의 지바형무소〔千葉刑務所〕로 이감되었다. 옥고를 치르던 중 1928년 2월 20일 뇌내출혈로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追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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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록 집(육우당)
이육사(1904 - 1944)의 본명은 이원록, 이원삼, 자는 태경, 아호는 육사이며, 일제강점기 「청포도」, 「절정」, 「광야」 등을 저술한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이다. 1925년에 형 이원기(李源琪), 아우 이원유(李源裕)와 함께 대구에서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였다. 1927년에는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이밖에도 1929년 광주학생운동, 1930년 대구 격문사건(檄文事件) 등에 연루되어 모두 17차에 걸쳐서 옥고를 치렀다. 중국을 자주 내왕하면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43년 가을 잠시 서울에 왔을 때 일본 관헌에게 붙잡혀, 베이징으로 송치되어 1944년 1월 베이징 감옥에서 작고하였다. 문단 활동은 조선일보사 대구지사에 근무하면서 1930년 1월 3일자 『조선일보』에 시작품 「말」과 『별건곤(別乾坤)』에 평문 「대구사회단체개관(大邱社會團體槪觀)」 등을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뒤 1935년 『신조선(新朝鮮)』에 「춘수삼제(春愁三題)」 · 「황혼(黃昏)」 등을 발표하면서 그의 시작 활동은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신조선』 · 『비판(批判)』 · 『풍림(風林)』 · 『조광(朝光)』 · 『문장(文章)』 · 『인문평론(人文評論)』 · 『청색지(靑色紙)』 · 『자오선(子午線)』 등에 30여 편의 시와 그밖에 소설 · 수필 · 문학평론 · 일반평문 등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생존시에는 작품집이 발간되지 않았고, 1946년 아우 이원조(李源朝)에 의하여 서울출판사에서 『육사시집(陸史詩集)』 초판본이 간행되었다. 대표작으로는 「황혼」 · 「청포도(靑葡萄)」(문장, 1939.8.) · 「절정(絶頂)」(문장, 1940.1.) · 「광야(曠野)」(자유신문, 1945.12.17.) · 「꽃」(자유신문, 1945.12.17.) 등을 꼽을 수 있다. 그의 시작세계는 크게 「절정」에서 보인 저항적 주제와 「청포도」 등에 나타난 실향 의식(失鄕意識)과 비애, 그리고 「광야」나 「꽃」에서 보인 초인 의지(超人意志)와 조국 광복에 대한 염원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의 생애는 부단한 옥고와 빈궁으로 엮어진 행정(行程)으로, 오직 조국의 독립과 광복만을 염원하고 지절(志節)로써 일관된 구국투쟁은 민족사에 큰 공적으로 남을 것이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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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영 기념비
이원영(1886-1958)은 해방 이후 대한예수교 장로회 교단대표를 역임한 목사이자 독립운동가이다. 1911년 봉성측량학원을 거쳐 보문의숙(寶文義塾)을 졸업하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 안동군 예안 장날인 3월 16일 예안선명학교와 예안보통학교 학생들을 동원,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만세운동의 주모자로 잡혀 1년형을 받고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수감중 장로교 장로 이상동(李尙洞)을 만나 감화를 받아 기독교에 귀의하게 되었고, 출감 후 안동성경학원에 입학, 교역자의 길을 택하였다. 졸업 후 안동지방의 농촌교회 전도사로 활동하는 한편, 본격적인 신학수업을 위하여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30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뒤 곧 경안노회로부터 목사 안수를 받고, 영주중앙교회에 취임하였다. 신사참배가 강요된 1938년 이후 이를 끝까지 거부함으로써 서너 차례에 걸쳐 투옥당하기도 하였다. 광복 후 안동서부교회를 시무하면서 안동성경학원을 개원하여 청소년교역자 양성에 진력하였다. 1945년 총회장으로 선출되어 대한예수교 장로회 교단의 대표직을 맡았다. 또, 1958년 안동서부교회 원로목사로 추대되었으며, 여러 차례에 걸쳐 노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신사참배를 부인한 출옥성도였으나 신사참배에 응한 동역자를 비판한 바 없고, 특히 성경강해교수법이 유명하였다. 1980년 대통령표창, 1990년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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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섭 집
김응섭은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며, 본관은 풍산(豊山). 이명은 김응범(金應範)이고, 자는 경장(景章), 호는 동전(東田)이다. 김응섭은 1908년 재경 영남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교남교육회의 본회 임원으로 참가하여 교육구국운동에 앞장서서 활동하였다. 1911년 1월에서 1912년 6월까지 평양지방법원의 판사, 검사를 역임한 뒤 대구에서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1913년 대구에서 결성된 비밀결사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회에 가입해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였고, 1919년 파리에 보낼 독립청원서를 영어로 번역하였다. 이후 김응섭은 만주로 망명, 서로군정서에 참여하여 이주 한인들의 정착 생활을 위해 활동하였다. 3·1운동 직후에는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임시정부의 법무장관으로 활약했으며 노령 블라디보스토크를 시찰하였다. 1920년 3월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서 한족회(韓族會)의 조직을 쇄신하고 법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21년 이르크츠크파 고려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22년 베르흐네우진스크 고려공산당연합대회에 출석해 임시집행부 위원이 되었다. 동년 6월 남만주군정서부총재로 활약하면서 김찬규를 국내의 경상북도 지역으로 파견해 군자금을 모집케 하였다. 그리고 이즈음 경상북도 출신의 김시현(金始顯), 신태식 등과 함께 의용단의 결성에도 참여하였다. 1923년 의열단에 가담하였다. 동년 6월 상하이에서 임시정부의 방향을 논의하기 위해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해, 창조파의 일원으로서 국민위원회 결성에 합류하였다. 1924년 11월 정의부가 발족되자 김응섭은 중앙심판원장을 맡아 활동하며 만주 지역 독립운동계의 대통합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이념 문제나 통합 방법을 극복하지 못하였다. 동년 12월 김응섭은 길림성(吉林省) 반석현(盤石縣)에서 안동 출신 이광민(李光民) 등과 함께 한족노동당을 결성하고 상무집행위원장 겸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1927년 9월경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의 간부가 되었다. 1928년 2월 길림성 반석현에서 한족노동당을 개편해 재만농민동맹(在滿農民同盟)을 결성하고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었다. 이 때 경상북도 출신의 김동삼·김원식·이영형·김상덕·이일심 등도 참여하였다. 동맹원은 경상도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을 중심으로 약 3천 내지 4천에 달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김응섭은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남만주 지역에서 사회주의 세력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1928년 5월 길림성에서 개최된 전민족유일당 조직촉성회의에 재만농민동맹 대표자로 참석해 촉성회파의 일원이 되었다. 남만주 지역에서의 재만농민동맹의 활동은 1930년대 중국공산당 만주성 반석현위원회의 구성을 가능케 했고, 나아가 뒷날 동북인민혁명군의 유력한 기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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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준희 묘
권준희(1849 - 1936)는 1849년 9월 14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풍서면(豊西面) 가곡리(佳谷里, 현 안동시 풍천면 가곡리) 가일마을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는 계상(啓象), 호는 우암(友巖)이다. 조선 후기 학자 병곡(屛谷) 권구(權榘)의 현손이다. 생부는 권찬(權鑽)이고, 백부 권익(權翼)에게 출계하여 수곡(樹谷) 권보(權甫)의 종손이 되었다. 경학(經學)을 비롯하여 『심경』·『근사록』등을 탐독하였고, 특히 예학(禮學)에 밝아 학자로서 이름이 높았다. 손자 권오돈(權五敦)·권오운(權五雲)·권오헌(權五憲)도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13년 풍기에서 조직된 광복단과 1915년 대구에서 조직된 조선국권회복단의 일부가 결합하여 1915년 7월 결성한 항일 비밀결사 대한광복회의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광복회 창립 목적은 국권을 회복하고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 만주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을 양성해 무력으로 일제와 전쟁을 치른다는 것이었다. 주요 활동은 군자금 모집이었다. 이에 류시만(柳時萬)·권준흥(權準興) 등과 함께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8년 1월 총사령 박상진(朴尙鎭)을 비롯해 채기중(蔡基中)·임세규(林世圭) 등 주요 인물이 일본 경찰에 체포될 때 함께 체포되었다. 당시 71세로 대한광복회 회원 중 가장 고령이었다. 공주감옥에 수감되어 고초를 겪다 1918년 5월 3일 증거 불충분으로 면소되어 풀려났다.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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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돈 묘
권오돈(1900 - 1928)의 자는 전현, 이칭은 권오상이며,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권오상은 1921년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재학 중이던 1924년 화요계 청년운동 단체인 신흥청년회(新興靑年會)에 가입하여 사회주의를 접하게 되었다. 이듬해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였고, 고려공산청년회 및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였다. 또한 조선학생과학연구회 결성에 참여하여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6년 4월 25일 조선학생과학연구회가 6·10만세 운동을 추진하자 권오상은 고려공산청년회와 조선학생과학연구회를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으며, 연희전문학교 학생들을 포섭하는 등 만세 운동을 준비하였다. 그런데 거사 직전인 6월 7일 계획이 탄로나 권오설 등 지도자들이 체포되고 말았다. 다행히 권오상이 이끄는 학생 조직의 계획은 발각되지 않아 계획대로 만세 운동을 추진하였다. 1926년 6월 10일 순종 국장일(國葬日)에 권오상은 연희전문학교 학생들과 함께 격문을 살포하고,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권오상은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1928년 2월 징역 1년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복역 중 고문의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1928년 5월 보석으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고문의 여독으로 동년 6월 3일 세상을 떠났다.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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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섭 집(영감댁)
본관은 풍산(豊山). 이명은 김응범(金應範)이고, 자는 경장(景章), 호는 동전(東田)이다. 1878년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에서 태어났다. 의열단원 김지섭(金祉燮)의 일가이다. [활동사항] 김응섭은 1908년 재경 영남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교남교육회의 본회 임원으로 참가하여 교육구국운동에 앞장서서 활동하였다. 1911년 1월에서 1912년 6월까지 평양지방법원의 판사, 검사를 역임한 뒤 대구에서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1913년 대구에서 결성된 비밀결사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회에 가입해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였고, 1919년 파리에 보낼 독립청원서를 영어로 번역하였다. 이후 김응섭은 만주로 망명, 서로군정서에 참여하여 이주 한인들의 정착 생활을 위해 활동하였다. 3·1운동 직후에는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임시정부의 법무장관으로 활약했으며 노령 블라디보스토크를 시찰하였다. 1920년 3월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서 한족회(韓族會)의 조직을 쇄신하고 법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21년 이르크츠크파 고려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22년 베르흐네우진스크 고려공산당연합대회에 출석해 임시집행부 위원이 되었다. 동년 6월 남만주군정서부총재로 활약하면서 김찬규를 국내의 경상북도 지역으로 파견해 군자금을 모집케 하였다. 그리고 이즈음 경상북도 출신의 김시현(金始顯), 신태식 등과 함께 의용단의 결성에도 참여하였다. 1923년 의열단에 가담하였다. 동년 6월 상하이에서 임시정부의 방향을 논의하기 위해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해, 창조파의 일원으로서 국민위원회 결성에 합류하였다. 1924년 11월 정의부가 발족되자 김응섭은 중앙심판원장을 맡아 활동하며 만주 지역 독립운동계의 대통합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이념 문제나 통합 방법을 극복하지 못하였다. 동년 12월 김응섭은 길림성(吉林省) 반석현(盤石縣)에서 안동 출신 이광민(李光民) 등과 함께 한족노동당을 결성하고 상무집행위원장 겸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1927년 9월경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의 간부가 되었다. 1928년 2월 길림성 반석현에서 한족노동당을 개편해 재만농민동맹(在滿農民同盟)을 결성하고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었다. 이 때 경상북도 출신의 김동삼·김원식·이영형·김상덕·이일심 등도 참여하였다. 동맹원은 경상도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을 중심으로 약 3천 내지 4천에 달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김응섭은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남만주 지역에서 사회주의 세력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1928년 5월 길림성에서 개최된 전민족유일당 조직촉성회의에 재만농민동맹 대표자로 참석해 촉성회파의 일원이 되었다. 남만주 지역에서의 재만농민동맹의 활동은 1930년대 중국공산당 만주성 반석현위원회의 구성을 가능케 했고, 나아가 뒷날 동북인민혁명군의 유력한 기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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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봉 집(학암고택)
김재봉(1891 - 1944)의 자는 주소, 호는 근전이며, 일제강점기, 조선공산당 초대 책임비서를 지낸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3. 1운동 후 서울에 올라가 『만선일보』 경성지사 기자로 있으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파견된 안상길과 만나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였다.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1921년 3월, 징역 6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2년 1월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하였다. 같은 해 10월 베르흐네우딘스크주1(Улан-Удэ, 울란우데) 고려공산당 통합 대회에 참여하였고, 대회가 결렬되자, 치바에서 열린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대회에 참여하여 중앙위원에 선임되었다. 1923년 2월 코민테른 지시로 블라디보스토크에 결성된 고려총국의 국내 파견원으로 서울에 귀국하였다. 3월 중립당, 북성회파 등과 연합하여 고려총국 국내부를 비밀리에 결성하고 책임비서에 선임되었다. 7월 신사상연구회(新思想硏究會) 결성에 참여하였고, 청년 단체 및 노동 단체의 통합에 주력하였다. 1924년 『조선일보』 기자로 재직하면서 서울파 등과 조선공산당 창립을 위한 ‘13인회’를 구성하였으나 협상이 결렬되어 실패하였다. 10월 ‘ 정재달(鄭在達)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곧 석방되었다. 공산주의 비밀결사 확대 중립당 그룹을 이끌면서 1924년 11월 합법 사상단체인 신사상연구회를 전국 조직인 화요회(火曜會)로 확대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1925년 4월 북풍파와 연합해 조선공산당을 결성하였다. 김재봉은 제1대 책임비서에 선임되어 조직 확대 및 여러 활동을 주도하였다. 1925년 11월 ‘제1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이 일어나자 후계당의 책임비서로 강달영(姜達永)을, 권오설(權五卨)을 고려공산청년회(약칭은 공청) 책임비서로 임명하는 등 후속 조치를 취하였다. 그 직후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신의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26년 6월 ‘제2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이 일어나자 7월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심리를 받았다. 1928년 2월 징역 6년 형을 선고받고 1931년 11월에 출옥하였다. 1944년 3월 수감 생활에 따른 건강 악화로 사망하였다. 2005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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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봉 어록비
김재봉(1891 - 1944)의 자는 주소, 호는 근전이며, 일제강점기, 조선공산당 초대 책임비서를 지낸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3. 1운동 후 서울에 올라가 『만선일보』 경성지사 기자로 있으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파견된 안상길과 만나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였다.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1921년 3월, 징역 6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2년 1월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하였다. 같은 해 10월 베르흐네우딘스크주1(Улан-Удэ, 울란우데) 고려공산당 통합 대회에 참여하였고, 대회가 결렬되자, 치바에서 열린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대회에 참여하여 중앙위원에 선임되었다. 1923년 2월 코민테른 지시로 블라디보스토크에 결성된 고려총국의 국내 파견원으로 서울에 귀국하였다. 3월 중립당, 북성회파 등과 연합하여 고려총국 국내부를 비밀리에 결성하고 책임비서에 선임되었다. 7월 신사상연구회(新思想硏究會) 결성에 참여하였고, 청년 단체 및 노동 단체의 통합에 주력하였다. 1924년 『조선일보』 기자로 재직하면서 서울파 등과 조선공산당 창립을 위한 ‘13인회’를 구성하였으나 협상이 결렬되어 실패하였다. 10월 ‘ 정재달(鄭在達)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곧 석방되었다. 공산주의 비밀결사 확대 중립당 그룹을 이끌면서 1924년 11월 합법 사상단체인 신사상연구회를 전국 조직인 화요회(火曜會)로 확대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1925년 4월 북풍파와 연합해 조선공산당을 결성하였다. 김재봉은 제1대 책임비서에 선임되어 조직 확대 및 여러 활동을 주도하였다. 1925년 11월 ‘제1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이 일어나자 후계당의 책임비서로 강달영(姜達永)을, 권오설(權五卨)을 고려공산청년회(약칭은 공청) 책임비서로 임명하는 등 후속 조치를 취하였다. 그 직후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신의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26년 6월 ‘제2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이 일어나자 7월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심리를 받았다. 1928년 2월 징역 6년 형을 선고받고 1931년 11월에 출옥하였다. 1944년 3월 수감 생활에 따른 건강 악화로 사망하였다. 2005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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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수 집
김만수(1892 - 1924)의 자는 회일이며, 일제강점기 서로군정서에 가담하여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을 침탈당하자, 동향인이며 친척인 김재봉(金在鳳)·김응섭(金應燮)·김지섭(金祉燮) 등과 항일투쟁을 결의하고 활동하다가 1913년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8년 이상룡(李相龍)이 세운 길남장(吉南莊)에서 영농생활을 하면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1919년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가담, 뒤에 군정서의 헌병이 되었다. 1924년 4월 동지 최병호(崔炳鎬)·유기동(柳基東) 등과 한인동포를 탄압하던 일본 총영사와 형사부장 등을 제거하기 위해 기회를 엿보던 중 일본경찰에 발각되어 포위공격을 받았다. 15시간 동안의 결사적인 항전 끝에 일본 총영사 및 일본경찰 10여 명을 사살하고 현장에서 장렬하게 순국하였다. 당시 중국 각 신문들은 이 사실을 크게 보도하여, 김만수의 공적을 안중근(安重根)의 의거와 같이 높이 평가하였다.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