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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흠 사적비
백성흠(1888 - 1922)은 경북 성주(星州) 사람이다. 1919년 3월 초순이래 전국적으로 독립만세 시위운동이 끊임없이 전개되자 성주군 성주면(星州面) 성주장터에서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하였다. 4월 2일 장터에 모인 많은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벌이다가 일경에게 붙잡혔다. 같은 해 4월 2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大邱刑務所)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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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해용 추념비
안해용(1873 - 1951)은 경북 성주(星州) 사람이다. 1913년 만주 통화현(通化縣) 강산두도구(崗山頭道溝)로 망명하였다가 1917년 유하현(柳河縣) 제2구 다화쇠(多花釗)로 이주하였다. 1920년 12월(음) 광복군사령부 참리부장 조병준(趙秉準)을 만나 동사령부에 입대하였으며, 곧이어 경상남북도 특파원으로 임명받고 배일사상이 강렬한 장정의 모집에 노력하였다. 1921년 7월(음)에는 이덕생(李德生)·이수건(李壽健) 등 2명을 도만시켰으며 안동(安東)읍내 기독교교회당에서 장로 김 모(金某)를 설득, 일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또한 1922년 10월 6일(음)에는 상주읍에 있는 교회당에서 목사 김동필(金東弼)에게 독립군 모집권유를 하기도 하였다. 동년 12월 4일 본적지에서 체포되어 압송 도중에는 성주읍내 및 왜관도선장 등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소리높이 외쳐 독립투사의 기개를 과시하였으며, 1923년 1월 23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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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희 기념비
이태희(1869 - 1919)는 경상북도 성주(星州) 사람이다. 1919년 4월 2일 성주읍 장날을 이용하여 이기정(李基定) 등이 주동하여 전개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날의 독만세운동은 이기정·성대식(成大湜)·송수근(宋壽根)·송우근(宋祐根)·장석영(張錫英)·송훈익(宋勳翼)·김희규(金熙奎)·송준필(宋浚弼)·이봉희(李鳳熙)·송회근(宋晦根)·송문근(宋文根)·송인집(宋寅輯)·송규선(宋圭善)·송천흠(宋千欽)을 중심으로 한 유림과 유진성(兪鎭成)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도들이 연합하여 전개하였다. 그는 이날 오후 1시경, 성주 장터에서 시위군중과 함께 대대적인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일본 경찰이 출동하여 해산을 명령하였지만,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이날의 독립만세시위는 밤 11시경까지 계속되었는데, 시위군중이 성주경찰서를 습격한다는 소문에 긴장하여 경계를 강화하고 있던 일본 경찰이 시위군중에 대한 횡포가 심해지자,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투석으로 이에 맞섰다. 그러나 겁을 먹은 일본경찰의 야만적인 발포로 선두에 서서 만세운동을 벌이던 그는, 결국 현장에서 순국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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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희 기념비
이봉희(1868 -1937)는 경북 안동(安東) 사람이다. 1905년 이상룡(李相龍)·박경종(朴慶鍾) 등과 함께 가야산(伽倻山)에 들어가 의병활동을 위한 기지건설을 도모하였으나 동지들의 순국으로 무위로 돌아갔다고 한다. 1908년 2월 이상룡과 함께 대한협회 안동지회(大韓協會 安東支會)를 결성하고 협동학교(協東學校) 설립에 참여하여 구국교육운동에 헌신하였다. 1911년 1월 중국 봉천성(奉天省) 유하현(柳河縣)에 정착하여 동지들과 독립운동을 위한 기지건설에 주력하였고 1914년 유하현에 소재한 구국교육기관인 신흥학교(新興學校)의 교장을 역임하는 등 수많은 독립운동 지도자들을 양성하였다. 1915년 동삼성에서 조직된 광복단(光復團)에 참여하여 활동하였으며, 농작지도 등을 통하여 간도(間島)에 거주하고 있던 한인들의 생활기반을 안정시키는데 힘썼다고 한다. 1919년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창설요원으로 활동하였고, 이듬해인 1920년에는 광복단의 서간도지역 외교원으로 임명되어 중국정부 등과 교섭하여 농토개척에 대한 허가를 얻어내었으며 화룡현(和龍縣) 일대에서 군자금 모집활동을 펴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37년 흑룡강성(黑龍江省)에서 사망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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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석 충의기적비
장기석(1860 - 1911)은 일제강점기 일본경찰을 구타하여 옥중에서 순절한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옥산(玉山). 자는 진여(震汝). 경상북도 성주 출신. 일찍 부모를 여의고 몹시 가난하여 38세까지 공부를 하지 못하였다. 부인 박씨와 함께 열심히 살아 재산을 모은 뒤, 공부를 못하였음을 부끄럽게 여겨 3년간 두문불출하고 밤낮없이 학업에 전념하였다. 일제강점기 때 성주군수와 경찰서장으로부터 메이지[明治]의 천장절(天長節) 경축식에 참석할 것을 강요받자, 이를 단호히 거절하고 일본경찰을 목침으로 때려 중상을 입힌 뒤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곳에서 바로 단식을 시작하여 10여일 만에 의식을 잃었다. 일본경찰들이 강제로 음식을 먹이려 하자 그릇으로 서장을 때리며 먹기를 거부, 옥중에서 순절하였다. 1963년 대통령 표창, 1977년에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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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석 해동청풍비, 박씨부인 기열비
해동청풍비(海東淸風碑) 이 비는 1936년 애국지사 자하 장기석선생의 충절을 추모하는 뜻있는 선비들이 정성을 모아 건립한 것인데, 얼마후 일본관헌에 의해 네조각으로 파손되어 천변에 깊이 묻혀 있던 것을 광복 후에 다시 발굴해서 원형대로 복원해 놓은것이다. 선생은 한일합방의 부당함을 단신으로 규탄하다가 왜경에 끌려가서 갖은 협박과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다가 옥중에서 단식 27일만에 순절하였다. 한편 선생의 부인 함양박씨는 일본정부가 이 비를 철거한다는 소식을 듣자 철거 전날밤에 소복을 한 채, 이제 나의 넋이 이 유지를 지키리라고 유언하고, 비 뒤에 있는 고목에 목을 걸어 자진하였다. 후일 이를 기려 부인의 기열비를 이 비 곁에 세웠다. 이 비를 해동청풍이라 이름한 것은 옛날 은나라 충신 백이숙재의 고사를 선생의 충절에 비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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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 대한독립만세 의거지 기림비
기미 대한독립만세의거지 기림비는 1919년 4월 2일 밤 11시에 여흥연(40세), 여춘연(21세), 여왕연(21세), 여문회(29세), 여호진(31세), 도무환(31세)등의 주도로, 벽진면 3백여 명과 월회당 앞 도로에서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한 후 동리를 누비면서 만세시위를 하다 붙잡혀 옥고 한 애국심을 널리 전하고자 세워진 비이다. 월회당은 1984년 5월 21일에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1919년 파리 만국 평화 회의에 보낼 파리 장서(巴里長書)를 써서 송준필(宋浚弼)과 김창숙(金昌淑), 여상윤(呂相胤) 등이 서명한 곳으로, 독립운동의 장소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월회당은 우리나라 최초로 향약을 교육하고 시행한 장소로서, 또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 만세 운동의 본거지로서 보존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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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무환 순국기념비
도무환(1888-1919)의 자는 주여, 자열, 호는 둔암, 졸수이며, 성주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어려서부터 집에서 세전(世傳)하는 한학을 수학하였으며, 충효가 출중하였다. 1907년 1월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 보상 운동이 경상북도 성주 지역에서도 전개되자 적극 참여하여 의연금을 지원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제의 무단 통치에 분개하여 동지들과 함께 시사를 논하는 한편, 국권 회복의 방책을 모색하였다. 1919년 4월 2일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해평동의 만세 시위 운동에 참여하였다. 이기정(李基定) 등의 성주 유림들이 주도하였던 성주읍 장날 만세 시위 운동에 참여하였다가 돌아오고 있던 같은 동리의 여우룡(呂又龍)·여왕연(呂旺淵)으로부터 일본 경찰의 야만적인 발포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분개한 도무환은 즉시 여홍연(呂弘淵)·여우룡·여왕연·여문회(呂文會)·여호진(呂鎬鎭) 등과 함께 성주읍 만세 시위에 참가하였다가 돌아오는 사람들을 규합하여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해평동에서 다시 만세 시위를 전개하기로 하였다. 1919년 4월 2일 밤 11시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해평동 월회당(月會堂) 앞 도로에서 이들 6명의 주도하에 300여 명의 사람들이 함께 독립 만세를 고창한 후 밤늦도록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벽진주재소(碧珍駐在所) 경찰들이 만세 시위를 저지하려 하자, 도무환은 “조선인들이 이 같은 독립 만세를 부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냐! 이를 저지하려는 너희들의 행동은 참으로 부당하다.”고 외치며 항의하였다. 군중들은 밤늦도록 시위를 한 뒤 흩어졌고, 시위를 주도했던 여홍연·여우룡·여왕연·여문회·여호진과 함께 검거되었다.도무환은 동지들과 함께 일경에 체포되어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조금도 굴하지 않고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1919년 4월 2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태형 90도(度)를 선고받았다. 그 외 여홍연 징역 1년, 여우룡과 여왕연 각기 징역 8월, 여호진과 여문회 각기 징역 6월을 선고받았다. 5월 20일 대구복심법원에 항소하였으나 기각되었고, 8월 6일 고등법원에서도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도무환은 태(笞) 90도의 처벌을 받고 출옥하였으나 가혹한 태형의 후유증으로 출옥한 이튿날인 1919년 6월 5일 사망하였다. 1983년 대통령 표창, 1991년 건국 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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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호문 집, 사당
석호문(1923-1981)의 자는 우익, 호는 호차이며, 성주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1942년 성주농업실수학교(星州農業實修學校)[지금의 성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에 강제 징집되어 중국 전선으로 보내졌다. 1944년 6월 중국 하남성(河南省)의 일본군 부대를 탈출하여 광복군에 합류한 후, 광복군 제2 지대 제3 구대 제1 분대에 배치되었다. 1945년 5월 광복군과 미군의 연합 군사 훈련에 참가하여, 3개월 동안 통신 파괴와 교란, 정보 수집, 유격대 조직 등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전술 훈련을 받았다. 교육 훈련이 끝나면 국내로 파견되어 일본군 군사 시설의 파괴와 함께 지하군을 조직하여 정보 활동을 벌이다가, 미군 상륙 부대와 협력하여 본토 수복 작전을 수행할 계획이었다. 1945년 8월 대한민국 임시 정부와 광복군이 한미 공동 작전 대원 및 제2 지대 대원 약 100명으로 만든 ‘국내정진군(國內挺進軍)’ 황해도반에 편성되었다. 노성환(盧星煥), 황삼룡(黃三龍), 이동환(李東煥), 홍기화(洪基華), 신덕영(申悳泳), 이우성(李宇成), 허봉석(許鳳錫), 송수일(宋秀一)과 함께 편성되어 국내 진입을 준비하다가, 8.15 광복을 맞이하였다. 1945년 12월 광복군 상사로 예편하고, 1946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 요인들이 주축이 된 한국독립당에 가담하여 초급 행정 특보 위원, 대표 행정 자치 위원을 지냈다. 1981년 10월 15일 서울에서 사망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82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으며, 1990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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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호문 공적비
석호문(1923-1981)의 자는 우익, 호는 호차이며, 성주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1942년 성주농업실수학교(星州農業實修學校)[지금의 성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에 강제 징집되어 중국 전선으로 보내졌다. 1944년 6월 중국 하남성(河南省)의 일본군 부대를 탈출하여 광복군에 합류한 후, 광복군 제2 지대 제3 구대 제1 분대에 배치되었다. 1945년 5월 광복군과 미군의 연합 군사 훈련에 참가하여, 3개월 동안 통신 파괴와 교란, 정보 수집, 유격대 조직 등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전술 훈련을 받았다. 교육 훈련이 끝나면 국내로 파견되어 일본군 군사 시설의 파괴와 함께 지하군을 조직하여 정보 활동을 벌이다가, 미군 상륙 부대와 협력하여 본토 수복 작전을 수행할 계획이었다. 1945년 8월 대한민국 임시 정부와 광복군이 한미 공동 작전 대원 및 제2 지대 대원 약 100명으로 만든 ‘국내정진군(國內挺進軍)’ 황해도반에 편성되었다. 노성환(盧星煥), 황삼룡(黃三龍), 이동환(李東煥), 홍기화(洪基華), 신덕영(申悳泳), 이우성(李宇成), 허봉석(許鳳錫), 송수일(宋秀一)과 함께 편성되어 국내 진입을 준비하다가, 8.15 광복을 맞이하였다. 1945년 12월 광복군 상사로 예편하고, 1946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 요인들이 주축이 된 한국독립당에 가담하여 초급 행정 특보 위원, 대표 행정 자치 위원을 지냈다. 1981년 10월 15일 서울에서 사망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82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으며, 1990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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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섭 묘
홍기섭(1873-1919)의 자는 학삼, 호는 우송이며, 성주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1905년 을사늑약 때 오적(五賊)을 성토하며 공론 환기를 위해 노력했고, 1910년 일제가 국권을 강탈하자 각처의 동지를 규합하고 국권 회복을 위한 구국책을 논의하는 등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자 송규선(宋圭善), 송우선(宋祐善), 송회근(宋晦根), 김창렬(金昌烈) 등과 함께 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선전문과 태극기를 만들어 각 동리로 배부하는 거사 준비를 하였다. 경상북도 성주 지역의 3.1 운동은 1919년 3월 28일 장날에 선남면 선원동[현 선원리]의 이현기(李玄琪) 등이 먼저 시작했으나, 가장 큰 만세 시위는 유림과 기독교 세력이 연합하여 추진한 4월 2일의 성주읍 장날 만세 시위였다. 홍기섭은 1919년 4월 2일 오후 1시경 성주읍 장터에서 이기정(李基定), 이기현, 송인집(宋寅輯), 송회근 등과 함께 시위를 주도하며 3,0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대대적인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일제 경찰이 출동하여 해산 명령을 내렸지만 굴하지 않고 계속 시위행진을 하였다. 주도 인물들은 즉각 경찰서로 연행되었고, 분노한 3,000여 명의 시위대가 경찰서로 몰려가 만세를 부르고 석방을 요구하며 투석전을 벌였다. 일경의 발포로 홍기섭과 이태희(李兌凞)가 현장에서 순국하고, 이봉희(李鳳熙) 등 7명이 부상을 입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대통령 표창, 1991년 건국 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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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섭 순국기념비
홍기섭(1873-1919)의 자는 학삼, 호는 우송이며, 성주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1905년 을사늑약 때 오적(五賊)을 성토하며 공론 환기를 위해 노력했고, 1910년 일제가 국권을 강탈하자 각처의 동지를 규합하고 국권 회복을 위한 구국책을 논의하는 등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자 송규선(宋圭善), 송우선(宋祐善), 송회근(宋晦根), 김창렬(金昌烈) 등과 함께 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선전문과 태극기를 만들어 각 동리로 배부하는 거사 준비를 하였다. 경상북도 성주 지역의 3.1 운동은 1919년 3월 28일 장날에 선남면 선원동[현 선원리]의 이현기(李玄琪) 등이 먼저 시작했으나, 가장 큰 만세 시위는 유림과 기독교 세력이 연합하여 추진한 4월 2일의 성주읍 장날 만세 시위였다. 홍기섭은 1919년 4월 2일 오후 1시경 성주읍 장터에서 이기정(李基定), 이기현, 송인집(宋寅輯), 송회근 등과 함께 시위를 주도하며 3,0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대대적인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일제 경찰이 출동하여 해산 명령을 내렸지만 굴하지 않고 계속 시위행진을 하였다. 주도 인물들은 즉각 경찰서로 연행되었고, 분노한 3,000여 명의 시위대가 경찰서로 몰려가 만세를 부르고 석방을 요구하며 투석전을 벌였다. 일경의 발포로 홍기섭과 이태희(李兌凞)가 현장에서 순국하고, 이봉희(李鳳熙) 등 7명이 부상을 입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대통령 표창, 1991년 건국 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