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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의거 기념탑
상주 출신 독립운동가의 항일운동 기념탑이다. 1919년 3월 23일 상주군 상주장터에서 상주공립보통학교 졸업생 강용석과 성필환, 서울 중동학교 학생 한암회(일명 한감석[韓邯錫]), 상주공립보통학교 학생 조월연, 경성 국어보급학관 학생 석성기 등과 지역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3월 중순부터 계획을 세우고 1919년 3월 23일 오후 5시 30분경 상주장터에서 500여 명의 군중들과 3·1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87년 10월 18일, 상주 항일독립의거기념탑 건립추진위원회에서는 상주 출신 독립운동가 40명의 항일투쟁의 정신을 기리고자 이 탑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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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국채보상운동 발상기념비
상주시 외서면 이천리는 상주의 국채보상운동 발상지이다.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1월 29일 대구에서 서상돈, 김광제와 상주 출신 강신규 선생 등 16명의 애국지사들이 발의하여 같은 해 2월 21일 대구의 북후정에서 대구군민대회를 시작으로 전국에 확산된 국권회복운동이다. 이 운동은 일제가 조선의 경제권을 침탈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준 나라 빚 1,300만원을 2천만 동포가 3개월간 담배를 끊고 저축한 돈으로 경제적 주권을 회복하자는 애국운동으로서, 고종황제로부터 서민제중과 해외동포에 이르기까지 의연금 모금의 물결이 온 나라에 넘쳤다. 상주의 국채보상운동은 대구군민대회 직후 '외서면 유천동 국채보상 성명 성책"이 착성되여 이 마을 주민 41명과 이호서당이 16원 44전의 의연금을 출연한데 이어, 3월 3일에는 대구의 국채보상금 수급소로부터 상주 외서 이하리(오늘의 이천리) 국채보상소로 공한이 내려졌으니 이 마을이 상주 국채보상운동의 중심이었음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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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동학교당
상주 동학교당은 동학 교리를 바탕으로 교당을 운영하고 포교 활동을 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동학의 남쪽 책임자인 김주희가 대한제국 광무 8년(1904) 동학계 경천교를 창립한 이후 1915년 상주에 정착하였다. 1916년에 교당을 완공해 1943년까지 포교와 동학 세력의 확장에 힘쓴 동학교 본부이다. 공사비는 교인들의 성금으로 채웠고, 목재는 대부분 살림집을 헐어 재사용했다. 교당은 높은 산이 사방으로 에워싼 분지 안쪽 2개의 하천이 만나 이안천으로 흘러가는 ‘亞’자형 지형 중앙에 남동향으로 세워졌다. 중심 건물인 원채, 동재, 서재, 남재 4동이 가운데 안마당을 둘러싸고 ‘ㅁ’자 모양을 이룬 초가집이다. 원채는 예배실과 헌성실을 비롯해 부엌과 방을 겹으로 배열했다. 동재는 중앙에 마루 좌우로 교주 김주희가 거처하던 온돌방과 손님을 접대하던 응접실, 가사를 판자에 새겼던 판각실로 구성되어 있다. 서재는 남녀 교도들이 머무는 건물로 부엌, 남녀 교우실이 있다. 남재는 중앙의 대문 오른쪽에 곡식 창고와 소를 기르던 마구가 있고, 왼쪽에는 부교주와 다른 지역에서 온 남교도들이 머무는 방이 있다. 원채를 제외한 동・서・남재의 방 앞과 뒤, 옆에는 툇마루가 있는데, 이는 각 건물의 앞면을 서로 다르게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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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기중 집
채기중(1873 - 1921)은 일제강점기 대한광복회 경상도 책임자로 활약한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극오(極五). 호는 소몽(素夢). 일명 기중(基仲). 경상북도 상주 출신. 1910년대 국내에서 대표적인 독립운동단체인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과 대한광복회를 결성하여 활약하였다. 1913년에 류창순(庾昌淳)·류장렬(柳璋烈)·한훈(韓焄) 등과 함께 독립군단체로서 의병출신자의 집합체인 광복단을 결성하고, 군자금을 수합하기 위하여 강순필(姜順弼)과 함께 일본인이 경영하는 영월의 중석광산에 잠입, 활동하였다. 재만(在滿) 독립군과도 연락을 취하는 한편 대구에서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를 경영하던 애국지사 박상진(朴尙鎭)과도 연락하면서 1915년 초 대구에서 결성된 조선국권회복단을 협의하고 1915년 7월에 대한광복회를 조직하였다. 대한광복회는 박상진을 총사령으로 경상도·전라도·충청도·경기도·황해도 각지에 회원들이 결성되어 있었는데, 채기중은 경상도의 책임자였으며 전라도 조직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1917년 11월 광복회가 친일 부호 장승원(張承遠)을 처단할 때 이 공작을 직접 지휘하여 결행하였다. 1918년 광복회가 일본경찰에게 발각되자 상해로 망명하기 위하여 전라남도 목포에 잠적하였다가 붙잡혀 사형되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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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독립만세 기념비(상주)
3·1운동이 일어난 지 20여일 뒤인 1919년 3월23일 경북 상주읍(현 상주시) 장터에서 당시 학생이던 한암회·강용석·성해식·성필환·조월연·석성기 등 6명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소리를 듣고 장터에 모인 주민 500여명도 학생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벌였고, 만세운동을 주도한 학생 6명은 일본 경찰에 붙잡혀 1~2년씩 옥고를 치렀다. 상주읍의 만세운동은 농촌으로 번져 그해 3월29일 이안면 소암리 마을에서 채순만·채세현 선생이 만세를 불렀다. 이어 4월8일에는 화북면 장암리 속리산 문장대 일대에서 이성범·김재갑·홍종흠·이용희 선생, 9일에는 화북면 운흥리 마을 앞에서 김성희·정양수 선생 등이 동네 주민 100여명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다 일본 경찰에게 끌려가 옥고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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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기중 추모비
채기중(1873 - 1921)은 일제강점기 대한광복회 경상도 책임자로 활약한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극오(極五). 호는 소몽(素夢). 일명 기중(基仲). 경상북도 상주 출신. 1910년대 국내에서 대표적인 독립운동단체인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과 대한광복회를 결성하여 활약하였다. 1913년에 류창순(庾昌淳)·류장렬(柳璋烈)·한훈(韓焄) 등과 함께 독립군단체로서 의병출신자의 집합체인 광복단을 결성하고, 군자금을 수합하기 위하여 강순필(姜順弼)과 함께 일본인이 경영하는 영월의 중석광산에 잠입, 활동하였다. 재만(在滿) 독립군과도 연락을 취하는 한편 대구에서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를 경영하던 애국지사 박상진(朴尙鎭)과도 연락하면서 1915년 초 대구에서 결성된 조선국권회복단을 협의하고 1915년 7월에 대한광복회를 조직하였다. 대한광복회는 박상진을 총사령으로 경상도·전라도·충청도·경기도·황해도 각지에 회원들이 결성되어 있었는데, 채기중은 경상도의 책임자였으며 전라도 조직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1917년 11월 광복회가 친일 부호 장승원(張承遠)을 처단할 때 이 공작을 직접 지휘하여 결행하였다. 1918년 광복회가 일본경찰에게 발각되자 상해로 망명하기 위하여 전라남도 목포에 잠적하였다가 붙잡혀 사형되었다.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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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섬환 추모비
채섬환(1874 - 1944)은 경북 상주(尙州) 사람이다. 국가가 존망의 기로에 서자 채섬환은 국권회복을 위해 분연히 일어나 1907년 이강년(李康秊)의진에 참여하여 대일항전에 나섰다. 1896년에 이미 거의한 바 있는 이강년 의병장은 일제의 국권침탈에 맞서 1907년 3월 충북 제천(堤川)에서 재봉기하여 경상, 강원, 충청도 일대를 넘나들며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이와 같이 후기 의병사에 두드러진 활동을 전개한 이강년의진에서 채섬환은 좌종사(坐從事)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그러나 이강년 의병장이 같은 해 6월 청풍 작성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붙잡혀 교수형을 받고 순국하자 채섬환은 이강년 의병장 유족들의 생계를 돌보며 서당을 열어 후진양성에 힘썼다고 한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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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준 집
권준(1859 - 11959)은 일제강점기 때, 동양척식회사 투탄 의거, 동경 니주바시 투탄 의거 등과 관련된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안동(安東). 원명은 권중환(權重煥), 가명은 장수화(張樹華), 호는 백인(百忍) 또는 양무(揚武). 경상북도상주 출신이다. 경성공업전습소를 졸업하였다. 1919년 3·1운동 직후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졸업하였다. 1920년 길림에서 의열단 창단에 참여하고, 1921년 북경에서 동지들과 의열단(義烈團)을 창단하고, 이후 의열단의 종로경찰서·총독부·동양척식회사에의 투탄사건과 동경 니쥬바시투탄의거[二重橋投彈義擧] 때 자금조달의 활동을 하다가 국내에서 잡혀 일시 옥고를 겪은 뒤 다시 상해로 망명하였다. 1924년 상해에서 열린 중국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 참관인으로 참석, 손문(孫文)의 추천장을 받아 황푸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에 들어가 군사학을 전공, 졸업 후에는 손문의 북벌전쟁에 참여하였다. 1932년난징[南京]에서 국민당의 원조를 받아 한국인 군사학교를 설립하여 간부를 양성하였다. 1937년 조선의용대 비서장으로서 항일무한방위전(抗日武漢防衛戰)에 참가하였다. 1942년 조선의용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휘하의 광복군에 합류할 때 임시정부에 들어가 1944년에 내무부차장이 되었다. 광복 직후 무한지구 교포선무단장과 광복군 제5지대장에 임명되어 활동하다가 1946년 12월 귀국하였다. 1948년 정부수립 후 육군대령으로 특채되어 제106여단장·초대 수도경비사령관·103사단장·서부지구경비사령관 등을 지냈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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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병대 집 표지석, 순국비
노병대(1858 - 1913)는 대한제국기 군대해산 후 모병하여 충청북도, 경상북도에서 활약한에서 활동한 의병장이다. 초명은 노병직(盧炳稷), 자는 상요(相堯), 호는 금원(錦園). 경상북도 상주 출신이다. 허전(許傳)에게 배웠으며, 1889년(고종 26) 창릉참봉(昌陵參奉)이 되었다. 1895년 을미개혁 때 향교가 폐지된다는 소문을 듣고 극간으로 상소한 뒤, 다시 을미개혁을 주도하던 왜병을 물리치기 위하여 1898년 중국에 가서 지원군을 교섭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궁중의 일본세력을 축출하는 상소를 올려 고종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의병봉기의 밀칙(密勅)이 내리고, 비서원의 비서승(祕書丞) 벼슬까지 받았다. 밀칙을 받고 그날로 고향에 내려와 의병을 모았다. 1907년 8월 김운로(金雲老)·송창헌(宋昌憲)·임용헌(林容憲)과 함께 속리산에서 200명 정도의 의병을 일으켰다. 때마침 군대해산이 강행되매 해산병들이 의병투쟁에 합세함으로써 1,000명의 대부대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때 맹주로는 김운로가 추대되었지만, 노병대는 충청북도·경상북도 일대에서 명성을 크게 떨치었다. 노병대의 의병은 전라도와 경상남도일대까지 원정하며 왜병과 싸우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908년 보은에서 붙잡혔다. 왜병은 노병대의 높은 기상에 눌려 나중에는 한쪽 눈까지 빼버리는 악형을 가하였고, 공주재판소에서 10년형을 선고하였다. 수년간의 옥고 끝에 1911년 이른바 은사령에 따라 풀려나왔으나 다시 의병을 모으며 항전을 계획하였다. 그러던 중, 1913년 3월에 다시 붙잡혀 15년형을 받고 대구감옥에 투옥되었다. 여기에서 자결을 결심하고 28일간의 단식투쟁 끝에 순국하였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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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병대 사당
노병대(1858 - 1913)는 대한제국기 군대해산 후 모병하여 충청북도, 경상북도에서 활약한에서 활동한 의병장이다. 초명은 노병직(盧炳稷), 자는 상요(相堯), 호는 금원(錦園). 경상북도 상주 출신이다. 허전(許傳)에게 배웠으며, 1889년(고종 26) 창릉참봉(昌陵參奉)이 되었다. 1895년 을미개혁 때 향교가 폐지된다는 소문을 듣고 극간으로 상소한 뒤, 다시 을미개혁을 주도하던 왜병을 물리치기 위하여 1898년 중국에 가서 지원군을 교섭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궁중의 일본세력을 축출하는 상소를 올려 고종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의병봉기의 밀칙(密勅)이 내리고, 비서원의 비서승(祕書丞) 벼슬까지 받았다. 밀칙을 받고 그날로 고향에 내려와 의병을 모았다. 1907년 8월 김운로(金雲老)·송창헌(宋昌憲)·임용헌(林容憲)과 함께 속리산에서 200명 정도의 의병을 일으켰다. 때마침 군대해산이 강행되매 해산병들이 의병투쟁에 합세함으로써 1,000명의 대부대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때 맹주로는 김운로가 추대되었지만, 노병대는 충청북도·경상북도 일대에서 명성을 크게 떨치었다. 노병대의 의병은 전라도와 경상남도일대까지 원정하며 왜병과 싸우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908년 보은에서 붙잡혔다. 왜병은 노병대의 높은 기상에 눌려 나중에는 한쪽 눈까지 빼버리는 악형을 가하였고, 공주재판소에서 10년형을 선고하였다. 수년간의 옥고 끝에 1911년 이른바 은사령에 따라 풀려나왔으나 다시 의병을 모으며 항전을 계획하였다. 그러던 중, 1913년 3월에 다시 붙잡혀 15년형을 받고 대구감옥에 투옥되었다. 여기에서 자결을 결심하고 28일간의 단식투쟁 끝에 순국하였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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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병대 구 묘
노병대(1858 - 1913)는 대한제국기 군대해산 후 모병하여 충청북도, 경상북도에서 활약한에서 활동한 의병장이다. 초명은 노병직(盧炳稷), 자는 상요(相堯), 호는 금원(錦園). 경상북도 상주 출신이다. 허전(許傳)에게 배웠으며, 1889년(고종 26) 창릉참봉(昌陵參奉)이 되었다. 1895년 을미개혁 때 향교가 폐지된다는 소문을 듣고 극간으로 상소한 뒤, 다시 을미개혁을 주도하던 왜병을 물리치기 위하여 1898년 중국에 가서 지원군을 교섭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궁중의 일본세력을 축출하는 상소를 올려 고종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의병봉기의 밀칙(密勅)이 내리고, 비서원의 비서승(祕書丞) 벼슬까지 받았다. 밀칙을 받고 그날로 고향에 내려와 의병을 모았다. 1907년 8월 김운로(金雲老)·송창헌(宋昌憲)·임용헌(林容憲)과 함께 속리산에서 200명 정도의 의병을 일으켰다. 때마침 군대해산이 강행되매 해산병들이 의병투쟁에 합세함으로써 1,000명의 대부대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때 맹주로는 김운로가 추대되었지만, 노병대는 충청북도·경상북도 일대에서 명성을 크게 떨치었다. 노병대의 의병은 전라도와 경상남도일대까지 원정하며 왜병과 싸우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908년 보은에서 붙잡혔다. 왜병은 노병대의 높은 기상에 눌려 나중에는 한쪽 눈까지 빼버리는 악형을 가하였고, 공주재판소에서 10년형을 선고하였다. 수년간의 옥고 끝에 1911년 이른바 은사령에 따라 풀려나왔으나 다시 의병을 모으며 항전을 계획하였다. 그러던 중, 1913년 3월에 다시 붙잡혀 15년형을 받고 대구감옥에 투옥되었다. 여기에서 자결을 결심하고 28일간의 단식투쟁 끝에 순국하였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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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회 사적비
이용회(1892 - 1959)는 경북 상주(尙州) 사람이다. 1919년 당시 상주군 화북면 입석리(化北面 立石里)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장암리(壯岩里)에서 구장(區長) 이성범(李聖範)을 중심으로 김재갑(金在甲)·홍종흠(洪鍾欽)과 함께 4명이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이들은 전국 각지의 의거에 호응하여 이곳에서도 거사를 단행할 것을 협의한 후 4월 14일 리(里)내 각처에 독립만세운동 권고문을 보내고 태극기를 만드는 등 준비를 서둘러 갔다. 그는 4월 8일 속리산 문장대(俗離山 文藏臺)로 올라가서 백여 명의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높이 꽂고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상주의 일헌병에게 붙잡혔다. 그리하여 이해 5월 15일 대구지방법원 상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