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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도 묘
이만도(1842 - 1910)의 자는 관필, 호는 향산이며, 조선 후기 사간원정언, 교리, 중학교수 등을 역임한 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이다. 1866년(고종 3) 정시에 장원급제하여 성균관전적에 임명되었다가 병조좌랑에 제수되었다. 이어 사간원정언에 임명되고, 홍문관부수찬으로서 남학교수(南學敎授)를 겸하였다. 또한 대신(문신)으로서 선전관을 겸하기도 하였다. 이 후 부교리·장령·지평·우통례(右通禮)·병조정랑·충청장시도사(忠淸掌試都事)·교리·응교·사간·집의·중학교수(中學敎授) 등을 역임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명성이 높았다. 또한 시강(侍講) 및 빈대(賓對) 때에 이만도가 상주하는 말을 고종이 모두 기꺼이 받아들였다고 한다. 1876년 일본대사 구로다[黑田淸隆]가 와서 강화도조약을 체결할 때 최익현(崔益鉉)이 반대 상소를 올리자,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한목소리로 공격을 하였다. 그 때 집의로서 탄핵문의 문구가 사리에 맞지 않다고 없앴다가 대사헌의 미움을 받아 집의직을 삭탈당하였다. 그 뒤 다시 복직되고, 사성·응교·장악정(掌樂正) 등을 역임하였다. 그 해 가을 양산군수에 제수되어 굶주리는 백성을 보살피고 탐관오리를 소탕하는 데 공을 세웠다. 1878년 다시 집의에 임명되어 홍문관·사헌부·사간원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1882년 통정대부에 올라 곧 공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사임하였다. 세상이 어수선해지자 벼슬길을 단념, 동부승지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 뒤 백동(柏洞)에 작은 서재를 지어 놓고 경서를 연구하며 날을 보내다가,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예안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1905년 강제로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을사오적의 매국죄를 통렬하게 공박하는 소를 올렸다. 1907년 순종이 즉위한 뒤 가선대부에, 1910년 자헌대부에 승자되었다. 그 해 8월 일제에 의해 한국이 병탄되자 유서를 지어 남긴 뒤 단식 24일 만에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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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업, 김락 묘
이중업(1863 - 1921)은 일제강점기 『기암유고(起巖遺稿)』, 『대학정의(大學精義)』 등을 저술한 유학자.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광초(廣初), 소자는 계상(桂祥), 호는 기암(起巖). 이황(李滉)의 12세손으로 아버지는 자헌대부(資憲大夫) 승지(承旨) 이만도(李晩燾)인데, 경술국치 후에 단식(斷食)으로 순국하였다.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 권승하(權承夏)의 딸인 숙부인(淑夫人)이다. 처음에는 숙부에게서 가학을 닦았으며, 후에는 김흥락(金興洛)에게서 수학하였다. 1919년 그는 고종황제 장례에 참석하여 3·1만세운동을 보고는 크게 느낀 바가 있어 고향에 내려와 유림들을 규합하여 파리만국회담에 참가할 일을 도모하고, 곽종석(郭鍾錫)과 함께 「파리장서(巴里長書)」를 작성하여 서명운동을 일으켰다. 이 후 집을 떠나 전국을 돌아다니며 당시의 시대 상황과 세계의 정세를 탐문하고 유림들의 애국 충정심을 불러일으켰으며, 애국 지사를 방문하여 광복운동을 의논하였다. 결국 병이 나서 1920년에는 고양(高陽)의 산사(山寺)에 기거를 했는데 자식들이 귀가하기를 간절히 청했으나 ‘애국지사들이 해외에서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광복을 위해 고생하는데 집에 편히 있을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퇴계집』과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을 탐구하였고, 우리 나라와 중국의 역대 역사 및 왕조의 치란(治亂)과 선유 제현들의 학문 및 그 특징과 차이점 등에 대해서도 정통하였으며, 우리나라 세가(世家)들의 보계(譜系)에도 밝았다고 한다. 저술로는 『기암유고(起巖遺稿)』 28권 14책, 『대학정의(大學精義)』·『양전합선(兩全合選)』 등이 있다.1983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1990년 애족장이 추서되었다.김락(1863 - 1929)은 일제강점기 예안군에서 3·1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다. 김락(金洛)은 예안군(경상북도 안동) 3·1만세시위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다. 친정과 시가가 모두 항일독립운동가 집안으로, 친인척 중에 추서된 독립운동가가 무려 25명이나 된다.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김락이 참여한 예안 3·1만세시위는 고종인산에 참가했던 이동봉(李東鳳)·이용호(李用鎬)·김동택(李東澤)·신응한(申應漢) 등이 서울의 시위를 직접보고 돌아와 그 소식을 전하면서 계획이 추진되었다. 3월 17일 오후 3시 경 30여 명의 군중이 면사무소 뒤편 선성산(宣城山)에 올라가 일본이 세운 '어대전기념비(御大典紀念碑)'를 쓰러뜨리는 것을 시작으로, 시장 주변에 모여 있던 3개의 시위대 100여 명이 일제히 시장을 향하여 진격해 갔다. 시위대는 미리 정보를 탐지하고 수비대까지 동원한 일본 경찰의 진압에도 굴하지 않고 이동봉의 인솔 하에 예안주재소로 몰려갔다. 그러나 주동자를 비롯한 15명이 체포되었으며, 시위 군중들이 해산 당하였다. 오후 6시경, 다시 격분한 시위군중들이 구금자의 석방을 요구하며 주재소로 몰려왔다. 경찰의 해산 명령에도 불구하고 1500여 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은 돌멩이와 기왓장을 던지면서 주재소로 밀고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다시 25명이 체포되었다. 3월 22일 다시 2차 시위가 일어나 오후 7시에 약 2000명의 민중들이 태극기를 들고 동부동과 서부동, 선성산 위에서 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일본 경찰의 발포로 13명이 부상을 입고 3명이 체포되었는데, 김락도 그 중 한 명이었다. 2001년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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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벽 항일의거기념비
1908년 5월 15일 일본군은 서벽리에 주둔하고 있던 의병 약 500여 명이 5월 19일 봉화를 습격하고, 20일에는 영주를 습격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이에 영천수비대는 풍기분견소와 주재소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서벽전투는 1908년 5월 17일 새벽 4시에 시작되었다. 영천수비대는 봉화 오록에서 주실령을 넘어 두내리를 경유해 서벽리로 들어가려 하였고, 민긍호 부대와 이강년 부대는 서벽리 동쪽의 골짜기 입구에서 영천수비대를 포위하여 공격하였다. 4시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일본군 3명은 행방불명이 되고, 나머지는 주실령을 넘어 내성으로 퇴각하였다. 서벽전투가 있었던 격전지 자리인 봉화군 춘양면 서벽리 350(서벽초등학교 교정 입구)에 1984년 12월 항일의거기념비를 세워 서벽전투의 승전과 항전의병들의 애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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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립 묘
김명립(1893 - 1978)은 대한제국기 이강년의 의병부대에서 활동한 의병. 독립운동가이다. 일명 김유근(金有根). 경상북도 봉화 출신. 김성원(金聖元)의 아들이다. 1907년부터 의병장 이강년(李康䄵)의 부대에서 활동하던 아버지를 귀가시키고 뒤를 이어 의병진에 가담하였다. 경상북도일대에서 여러 차례 전투에 참가하였다. 1909년에는 출신지인 봉화군 재산면을 근거로 군자금 조달을 위하여 활동하다가 일본경찰에 잡혔다. 1910년 6월 안해룡(安海龍) 등 동지 3명과 함께 화승총·몽둥이로 무장하고 재산면에 사는 정봉규(鄭鳳奎)로부터 현금과 삼베를, 시장에서 여인숙을 하는 신성수(申聖壽)로부터 현금 등을 각각 군자금으로 모집하였다. 그 뒤 사실이 발각되어 일본헌병에게 잡혔다가 6년 후인 1916년 3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0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하던 중 1924년 징역 8년형으로 감형됨과 동시에 석방되었다.1986년에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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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경 집
권상경(1890 - 1958)은 김창숙(金昌淑)의 만몽(滿蒙) 황무지 개척과 무관학교 설립을 위한 군자금 모집에 협조하였다. 김창숙은 만몽(滿蒙)의 황무지를 개척하고 그 수익으로 무관학교를 설립하는 동시에 만주에 있는 조선청년으로 하여금 무기를 훈련하여 마침내 독립을 이루겠다는 생각으로 조선에 들어와 영남 부호들에게 그 자금 20만원을 거두기로 하고 1925년 6월 하순 북경을 떠나 조선에 들어왔다. 그해 10월 김창숙은 경북 봉화군(奉化郡) 부호 권상경(權相經)에게 이상의 군자금을 청구했고, 그는 이러한 자금 모집에 응하여 총 천원의 자금을 제공하였다가 1926년 5월 9일 경북경찰부(慶北警察部)에 체포되었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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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정 망미대
망미(望美)라는 말은 중국의 소식(蘇軾 :소동파)의 적벽부(赤碧賦)중 묘묘혜여회(渺渺兮余懷) 망미인혜천일방(望美人兮天一方)에서 따온말로 그 뜻은 “아득하고 아득한 나의 회포여, 미인(임금)을 하늘 저 끝에 바라보도다”라는 뜻을 가진 것으로 망미대(望美臺)는 대(臺)를 쌓아 임금을 그리며 국운회복을 염원한 곳이다. 태고정 망루 망미대는 강필이 지은 곳이다.강필(1878 - 1942)은 경북 봉화(奉化) 사람이다. 그는 중국 북경(北京)에서 김창숙(金昌淑) 등이 세운 이상촌 건설에 찬동하여 2천 원의 군자금을 기부하였다. 1925년 김창국 등은 내몽고(內蒙古) 지방의 미간지와 황무지 20만 정보를 매입하여 이상촌(理想村)을 건설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즉 만주 지역의 한인들을 집결시켜 개간사업을 일으키고, 그 수익금으로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설립하여 군대를 양성하는 둔병식(屯兵式) 제도를 실시함으로써 10년 동안의 실력양성을 통하여 독립을 달성한다는 원대한 포부를 지니고 있었다. 이 때 필요한 군자금은 국내에서 조달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봉화의 유지였던 그는 김창희(金昌禧)에게 군자금 2천 원을 전달하여 김창숙 등이 계획한 이상촌 건설을 지원하였다. 그런데 이 일이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그는 붙잡혀 고초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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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필 집
강필(1878 - 1942)은 경북 봉화(奉化) 사람이다. 그는 중국 북경(北京)에서 김창숙(金昌淑) 등이 세운 이상촌 건설에 찬동하여 2천 원의 군자금을 기부하였다. 1925년 김창국 등은 내몽고(內蒙古) 지방의 미간지와 황무지 20만 정보를 매입하여 이상촌(理想村)을 건설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즉 만주 지역의 한인들을 집결시켜 개간사업을 일으키고, 그 수익금으로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설립하여 군대를 양성하는 둔병식(屯兵式) 제도를 실시함으로써 10년 동안의 실력양성을 통하여 독립을 달성한다는 원대한 포부를 지니고 있었다. 이 때 필요한 군자금은 국내에서 조달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봉화의 유지였던 그는 김창희(金昌禧)에게 군자금 2천 원을 전달하여 김창숙 등이 계획한 이상촌 건설을 지원하였다. 그런데 이 일이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그는 붙잡혀 고초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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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병대 기념비
노병대(1858 - 1913)는 대한제국기 군대해산 후 모병하여 충청북도, 경상북도에서 활약한에서 활동한 의병장이다. 초명은 노병직(盧炳稷), 자는 상요(相堯), 호는 금원(錦園). 경상북도 상주 출신이다. 허전(許傳)에게 배웠으며, 1889년(고종 26) 창릉참봉(昌陵參奉)이 되었다. 1895년 을미개혁 때 향교가 폐지된다는 소문을 듣고 극간으로 상소한 뒤, 다시 을미개혁을 주도하던 왜병을 물리치기 위하여 1898년 중국에 가서 지원군을 교섭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궁중의 일본세력을 축출하는 상소를 올려 고종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그리하여 의병봉기의 밀칙(密勅)이 내리고, 비서원의 비서승(祕書丞) 벼슬까지 받았다. 밀칙을 받고 그날로 고향에 내려와 의병을 모았다. 1907년 8월 김운로(金雲老)·송창헌(宋昌憲)·임용헌(林容憲)과 함께 속리산에서 200명 정도의 의병을 일으켰다. 때마침 군대해산이 강행되매 해산병들이 의병투쟁에 합세함으로써 1,000명의 대부대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때 맹주로는 김운로가 추대되었지만, 노병대는 충청북도·경상북도 일대에서 명성을 크게 떨치었다. 노병대의 의병은 전라도와 경상남도일대까지 원정하며 왜병과 싸우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908년 보은에서 붙잡혔다. 왜병은 노병대의 높은 기상에 눌려 나중에는 한쪽 눈까지 빼버리는 악형을 가하였고, 공주재판소에서 10년형을 선고하였다. 수년간의 옥고 끝에 1911년 이른바 은사령에 따라 풀려나왔으나 다시 의병을 모으며 항전을 계획하였다. 그러던 중, 1913년 3월에 다시 붙잡혀 15년형을 받고 대구감옥에 투옥되었다. 여기에서 자결을 결심하고 28일간의 단식투쟁 끝에 순국하였다.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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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해식 유적비
성해식(1899 - 1939)은 경상북도 상주(尙州) 사람이다. 1919년 3월 23일의 상주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날 오후 5시 30분경, 한암회(韓岩回)가 시장 복판에서 태극기를 흔들면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다가 마침 시장에서 경계근무 중이던 일본 헌병에 의해 체포되자 시장 안에 있던 군중은 크게 동요하였다. 이때 그는 시장 입구의 계단에 올라가 5백여명의 군중을 향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역설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어떤 돌파구를 기다리던 시위군중은 이에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긴급 출동한 일본 군경이 총검으로 시위군중을 강제 해산시켰다. 그는 이때에 체포되었으며, 이해 4월 28일 대구(大邱)지방법원 상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받고 경성(京城)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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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해식 묘
성해식(1899 - 1939)은 경상북도 상주(尙州) 사람이다. 1919년 3월 23일의 상주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날 오후 5시 30분경, 한암회(韓岩回)가 시장 복판에서 태극기를 흔들면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다가 마침 시장에서 경계근무 중이던 일본 헌병에 의해 체포되자 시장 안에 있던 군중은 크게 동요하였다. 이때 그는 시장 입구의 계단에 올라가 5백여명의 군중을 향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역설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어떤 돌파구를 기다리던 시위군중은 이에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긴급 출동한 일본 군경이 총검으로 시위군중을 강제 해산시켰다. 그는 이때에 체포되었으며, 이해 4월 28일 대구(大邱)지방법원 상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받고 경성(京城)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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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동학농민혁명 기념비
동학교주 최시형의 기포령 이후 북접의 상주농민군이 봉기를 준비하여 1894년 5월 무렵부터 상주지역 동학농민군이 활발히 활동을 전개하였다. 일본영사관에서는 5월 10일 경상도 선산, 상주, 유곡 등이 ‘동학농민군의 소굴’인 것으로 파악했다. 상주지역 동학농민군이 상주관아를 점령한 시기는 1894년 9월 22일경이다. 그러나 9월 28일 낙동병참소의 일본군의 공격으로 100여 명의 농민군 희생자를 내고 상주에서 후퇴하였고, 1894년 10월 이후부터 상주의 동학농민군은 상주 소모영으로 끌려와 처형되었다. 처형된 인원은 총 42명으로 파악된다. 1996년 상주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중심이 되고, 상주시, 상주시의회, 상주농민회, 상주산업대학교 등 각급 민간단체와 시민들이 힘을 모아 상주산업대학 맞은 편에 <동학농민혁명 100주년기념상>을 건립하였고, 2008년 도로공사 중 기념상이 훼손되어 현 위치에 <상주동학농민혁명기념비>를 재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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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시 국채보상운동기념비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1월 대구에서 김광제, 서상돈 등에 의하여 일제가 조선의 경제를 침탈하기 위하여 벌인 1,300만원의 국채를 갚기 위한 국권수호운동으로 국채를 국민들의 모금으로 갚기 위하여 발의된 국권회복운동으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상주지역의 국채보상운동은 상주시 외서면 이천리에서 시작되었으며 이해 3월 3일 김재익, 박정분을 발기인으로 국채보상상주의무소취지서를 발표하였다. 함창지역의 취지서는 황성신문 3월 24일자에 의하면 채규일, 김규환, 정동락, 박주환 등이 발기인이고 회장은 신관희, 부회장은 권용학, 총무는 김면수이며, 상주지역이 일찍 국채보상운동에 참여 하게 된 것은 지역출신인 강신규가 대동광문회 국채보상운동의 발기인으로 참여 하였기 때문이다. 상주지역에서는 다양한 계층에서 의연금 모금에 참여하였다. 사대부들은 향교를 통하여 200원을 출연하였고, 문중의 경우는 외서면 오씨문중, 최씨문중, 이씨문중이 참여를 하였었다. 개인으로는 장교익, 김문화는 각 40원을, 채규일 30원, 강석희, 강신규부자, 박정분, 서상요, 손국인, 김성득, 이장금 등이 20원, 김규환, 김도식, 강윤희 등이 10원을 의연하자 모금운동은 전지역으로 확산되었고, 특히 1원의 기부 참여자가 많았다. 국채보상운동은 국가가 위기에 처하였을 때 전개한 세계사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국권수호 운동이었고 발전한 대한민국의 원동력이었다. 이러한 선조들의 훌륭한 정신을 오늘날 나눔과 책임의 시대정신과도 연결된다. 그리하여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애국심을 고향하고자 이 비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