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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면주 묘
이면주(1827 - 1910)는 조선 후기에, 이조좌랑, 자여도찰방, 이조좌랑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이석우(李錫宇). 자는 윤래(允來), 호는 계은(桂隱)·하계(霞溪). 경상북도 봉화 출신. 태종대왕의 7남 온령군(溫寜君)의 후손으로 이치두(李致斗)의 아들이다. 김숙(金熽)의 문인이다. 1850년(철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순강원수봉관(順康院守奉官)에 제수되었다가 전적·지평·이조좌랑을 역임한 뒤 1860년 자여도찰방(自如道察訪)이 되었다. 1862년 간신배의 모함에 빠져 무주로 귀양갔다가 이듬해 특사로 풀려났다. 1864년 정언·장령, 이듬해 부수찬, 1866년 부교리·좌부승지·동부승지, 1879년 병조참의, 1891년 부승지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1905년 일제가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하자 그 조약의 파기와 을사5적의 처형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1910년에 국치를 당하자 음독자결하였다.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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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면주 집
이면주(1827 - 1910)는 조선 후기에, 이조좌랑, 자여도찰방, 이조좌랑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이석우(李錫宇). 자는 윤래(允來), 호는 계은(桂隱)·하계(霞溪). 경상북도 봉화 출신. 태종대왕의 7남 온령군(溫寜君)의 후손으로 이치두(李致斗)의 아들이다. 김숙(金熽)의 문인이다. 1850년(철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순강원수봉관(順康院守奉官)에 제수되었다가 전적·지평·이조좌랑을 역임한 뒤 1860년 자여도찰방(自如道察訪)이 되었다. 1862년 간신배의 모함에 빠져 무주로 귀양갔다가 이듬해 특사로 풀려났다. 1864년 정언·장령, 이듬해 부수찬, 1866년 부교리·좌부승지·동부승지, 1879년 병조참의, 1891년 부승지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1905년 일제가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하자 그 조약의 파기와 을사5적의 처형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1910년에 국치를 당하자 음독자결하였다.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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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세연 집
권세연(1836 - 1899)은 개항기 때, 민비시해사건과 단발령을 계기로 경상북도 안동에서 활동한 의병장이다. 본관은 안동(安東). 호는 성대(星臺). 경상북도 봉화 출신이다. 참봉을 지냈으며, 안동 병진의 정신적 지주 구실을 하였다. 1895년 민비시해사건과 단발령에 격분한 안동지역 의병들은 안동관찰부를 점령하고, 유지호(柳止浩)·김흥락(金興洛) 등 참모진은 권세연을 안동의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이에 권세연은 격문을 발표하여, 각지의 의병부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민심을 크게 격려, 고무시켰다. 이 격문에는 침략자 일본에 대한 적개심과 거기에 부화뇌동하는 자에 대한 증오심이 설득력 있게 표현되어 있어, 의병규합에 큰 몫을 하였다. 또한, 이것이 계기가 되어 1896년에는 예안의 이만도(李晩燾), 영양의 조승기(趙承基), 문경의 이강년(李康秊)·유시연(柳時淵)·김도화(金道和)·김도현(金道鉉) 등 각지의 의병장들과도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그러나 1월 28일 안동으로부터 도망쳤던 관찰사 김석중(金奭中)이 많은 관군을 끌고 공격하여 의병들이 패배하였다. 권세연은 최후까지 싸워서 한 몸을 바치고자 하였으나, 참모들의 간곡한 권고에 못이겨 피신하였다.1983년에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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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림단 독립청원서 작성지(추원재)
사동 추원재는 충재 권벌(冲齋 權橃)의 손자인 권래(權來)의 묘소를 관리하기 위하여 장자인 권상충(權尙忠)이 1621년에 처음 건립하고, 증손인 권두응(權斗應)이 증축하는 등 수차례 중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추원재는 상실(上室)과 동루(東樓) 및 관리사로 이루어져 있으며, 동루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2층 누각 건물로 심벽[기둥사이에 기둥이 드러나게 만든 벽]없이 판벽으로만 구성되어 있어 특징적이다. 또한 이 건물은 독립운동사에서 독특한 자취를 가지고 있는데, 1919년 기미 「파리장서」가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성재 권상익(省齋 權相翊)이 일부 유림들과 다시 외교활동에 나설 계획을 세우고, 중국의 유력한 인물에게 독립청원서를 보내기 위하여 1920년에 「제2차 장서」를 작성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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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장서비(송록서원)
1919년 파리에서 열린 세계만국평화회의에서 제출된 독립청원서에 서명한 137인의 한국유림 중 봉화출신 9분의 공적을 기리기위해 건립하였다. 파리장서사건은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보내기 위해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서한을 작성한 사건이다.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자 유림측에서도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되는 강화회의에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장문의 서한을 작성하였다. 이 사건은 전에 의병을 일으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던 호서지방의 유종(儒宗)인 전 승지 김복한(金福漢)을 중심으로, 대부분 의병에 참여하였던 김덕진(金德鎭)·안병찬(安炳瓚)·김봉제(金鳳濟)·임한주(林翰周)·전양진(田穰鎭)·최중식(崔中軾) 등에 의해 이뤄졌다. 그들이 작성한 서한은 현존하지 않는다. 그러나 요지는 일본의 배신행위와 명성황후(明成皇后)와 고종의 시해, 그리고 한국주권의 찬탈과정을 폭로하고 한국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호서지방 유림들의 활동이 전개되고 있을 때, 영남유림에서도 곽종석(郭鍾錫)·김창숙(金昌淑) 등이 필두로 같은 목적의 일이 추진되고 있었다. 그 뒤 영남유림은 이런 사실을 알고 영남본(嶺南本)을 전용학(田溶學)에게 주며 홍성으로 가서 호서본(湖西本)과 비교, 검토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교정본이 작성되기 전에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선정된 김창숙이 시급히 상해(上海)로 출발하게 되었다. 이에 서울유림들은 영남본이나 호서본의 내용이 서로 뜻이 같으나, 영남본이 호서본보다 포괄적이면서도 뜻이 명확하다는 여론에 따라 김창숙에게 영남본을 주어 출발시켰다. 그리고 장서 말미에 134명 유림대표가 서명하였으며, 대표파견 경비는 황일성(黃佾性)이 조달하였다. 그러나 장서는 김창숙이 파리로 가져가지 못하고, 당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 대표로 선정되어 파리에 가 있던 김규식(金奎植)에게 송달되었으며, 또한 국내 각 향교에도 우송되었다. 그런데 같은 해 4월 12일경상북도 성주의 만세시위운동에 관련되어 일본경찰에 붙잡혔던 송회근(宋晦根)에 의해 사건이 발각됨으로써 관계자들이 피체되어 옥고를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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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기, 김정진 집
김홍기(1884 - 1954)는 경상북도 봉화(奉化) 사람이다. 1919년 3·1운동 때에 김창숙(金昌淑)·곽종석(郭鍾錫) 등을 중심으로 전국 유림대표 137명이 파리 강화회의에 독립을 청원하는 파리장서(巴里長書)를 발송하는 운동을 함에 각 지방 유림대표를 심방하여 서명 날인을 받는 활동을 하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25년 8월 김창숙이 중국으로부터 비밀리에 입국하여 내몽고(內蒙古)지방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할 자금으로 20만원의 군자금 모금을 목표로 활동할 때에 이에 찬동하여 김창숙의 지령서를 김뇌식(金賚植)에게 전달하고 군자금 모금활동을 함께 하기로 하고 2천원을 기탁받았으며, 김뇌식과 동행하여 강필(姜必)을 방문해서 또한 2천원을 기탁받아 함께 4천원을 그와·김뇌식·강 필 3인이 동행하여 동래에 은신해 있는 김창숙에게 전달하였으며, 김창숙의 군자금 모금사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1926년 3월 이 군자금 모금운동이 일제에 발각되자 그도 역시 붙잡혀 수개월간 미결감에 수감되었다가 출감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인정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정진(1925 - 2013)은 경북 봉화(奉化) 사람이다. 대구상업학교 재학중 1943년 4월에 동교생 이상호(李相虎) 등이 주도하여 조직한 항일학생결사 태극단(太極團)에 가입 활약하였다. 1942년 5월에 결성된 태극단은 조국독립을 위한 비밀결사로서 전국적 조직을 통한 무력항쟁을 목적으로 하였다. 따라서 동단원들은 우선 조직확대를 위해 동지포섭 활동에 힘을 쏟았다. 1943년 5월에는 그동안 가입한 단원 전원이 대구시 앞산이 비파산(琵琶山) 약수터에 모여 결단식을 갖고, 구체적 투쟁방안에 관하여 협의하고 조직을 정비하였다. 태극단의 조직은 크게 일반조직, 특수조직으로 나누었으며 최고의결기관으로서 간부회의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일반조직은 다시 육성부(育成府) 아래 3국(局), 10여부(部)를 두었으며, 특수조직은 건아대(健兒隊)라 칭하여 중학교 1, 2학년생과 국민학교 상급반 학생을 대원으로 가입시켜 장차 단원으로 육성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이때 그는 비서장 및 관방국 경제부장으로 활동하였다. 태극단의 투쟁방략은 조직확대를 통하여 전국의 학교와 각 지역별로 조직을 완성한 후 여론을 환기시키며 본격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는 것인데, 만약 국내에서의 투쟁이 여의치 못할 때에는 중국으로 집단 망명하여 그곳에서 항쟁을 계속한다는 계획도 세웠다. 그리하여 단원들은 용두산(龍頭山)·비파산 등 비밀장소를 이용하여 학술연구토론회, 각종 체육회를 개최하여 동지간 유대의식과 민족적 교양의 함양 및 체력증강에 노력하였다. 또한 궁극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군사학 연구에도 정진하여 군사관계서적의 번역, 글라이더 및 폭발물 제조에 관한 연구도 추진하였다. 그러나 1943년 5월 배반자의 밀고로 태극단의 조직과 활동이 일경에 발각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그는 학교에서 수업도중 동지들과 함께 붙잡혔다. 그는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44년 1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단기 2년, 장기 3년형을 선고받고 김천소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8·15광복으로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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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래미마을 독립운동기념비
바래미 항일 독립운동은 바래미가 생가인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1879-1962) 선생이 1919년 바래미 만회고택 명월루와 해관구택에서 제1차유림단사건(일명 파리장서사건)이 된 ‘파리장서’를 작성하고 서명을 시작함으로써 비롯되었다. 1925년에는 만주와 몽고 접경지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 위한 모금 운동이 발각된 제2차유림단사건이 있었는데, 이 때도 바래미에서 황소 쉰 마리 값을 모금, 심산 선생에게 건넨 사실이 발각되어 온 마을이 쑥밭이 되는 비운을 겪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더욱 심해진 왜경의 감시 속에서도 선조의 애국충정과 선비 정신을 이어받은 젊은 세대들이 1933년 비밀결사단체를 조직하여 항일 운동을 하다 발각된 독서회 사건으로 또 많은 사람들이 옥고를 치러야 했고, 이러한 바래미 항일 독립운동은 학생층에까지 3대(三代)로 이어져 대구, 일본, 만주 등지에서도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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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우 집
김창우(1854 - 1937)는 경북 봉화(奉化) 사람이다. 그는 1919년 3월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독립을 호소하기 위하여 김창숙(金昌淑) 등이 유림대표가 되어 작성한 독립청원서에 유림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고 동(同)문서를 배포하는 등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세칭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이라고 불리는 이 거사에는 김복한(金福漢)을 중심으로 한 호서유림과 곽종석(郭鍾錫)을 중심으로 한 영남유림 137명이 참여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유림의 항일운동이었다. 파리장서의 요지는 일제가 자행한 명성황후·광무황제(光武皇帝)의 시해와 한국 주권의 찬탈과정을 폭로하면서 한국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들 유림은 김창숙(金昌淑)을 파리로 파견하고자 상해로 보냈으나, 직접 가지는 못하고 이 문서를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대표로 파리에 파견된 김규식(金奎植)에게 송달했으며, 국내의 각 향교에도 우송되었다. 그런데 이 일은 경상북도 상주의 만세운동과 관련하여 1919년 4월 12일 서명자의 한 사람이었던 송회근(宋晦根)이 붙잡히는 바람에 발각되었다. 이로써 김창우도 일경에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일제는 이들 유림이 한국인의 존경을 받는 인물들이었으므로 민족적 감정이 더욱 번질 것을 우려한 나머지 크게 부각시키지 않았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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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뇌식 집
김뇌식(1877 - 1935)은 경상북도 봉화(奉化) 사람이다. 1925년 8월 김창숙(金昌淑)이 중국으로부터 비밀리에 입국하여(동년 8월 17일 서울에 도착) 내몽고(內蒙古) 지방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할 자금으로 20만원 모금을 목표로 활동할 때 이에 찬동하여 2천원의 거액을 모금하여 전달하고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1926년 3월 이 군자금 모금운동을 위하여 다시 태극단(太極團)을 조직 활동하다가 일경에게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인정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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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영 집
김건영(1848 - 1924)은 경북 봉화(奉化) 사람이다. 그는 1919년 3월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독립을 호소하기 위하여 김창숙(金昌淑) 등이 유림(儒林) 대표가 되어 작성한 독립청원서에 유림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고 동(同)문서를 배포하는 등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세칭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이라고 불리는 이 거사에는 김복한(金福漢)을 중심으로 한 호서유림과 곽종석(郭鍾錫)을 중심으로 한 영남유림 137명이 참여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유림의 항일운동이었다. 파리장서의 요지는 일제가 자행한 명성황후·광무황제(光武皇帝)의 시해와 한국 주권의 찬탈과정을 폭로하면서 한국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들 유림은 김창숙(金昌淑)을 파리로 파견하고자 상해로 보냈으나, 직접 가지는 못하고 이 문서를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대표로 파리에 파견된 김규식(金奎植)에게 송달했으며, 국내의 각 향교에도 우송되었다. 그런데 이 일은 경상북도 상주의 만세운동과 관련하여 1919년 4월 12일 서명자의 한 사람이었던 송회근(宋晦根)이 피체되면서 발각되었다. 이로써 김건영도 일경에 피체되어 고초를 겪었다. 일제는 이들 유림이 한국인의 존경을 받는 인물들이었으므로 민족적 감정이 더욱 번질 것을 우려한 나머지 크게 부각시키지 않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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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흠 묘
이동흠(1881 - 1967)은 경북 안동(安東) 사람이다. 한말 우국지사 이만도(李晩燾)의 손자이다. 그는 1918년 4월 2일 경북 봉화군(奉化郡)의 부호 이정필(李廷弼)에게 군자금으로 천원을 헌납하라는 광복회(光復會) 명의의 통고문을 발송하였으나, 이와 관련하여 면장(面長) 이명호(李明鎬)와 함께 일경에 붙잡혀 1918년 11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5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 후 그는 1925년 김창숙(金昌淑)을 중심으로 한 경북유림단(慶北儒林團)에 참가하여 군자금 모집활동을 벌였다. 경북유림단은 중국 내몽고(內蒙古) 지방의 미간지 및 황무지 20만정보를 매입하여 남북만주의 동포들로 하여금 개간토록 한 후 학교를 세우고 독립군을 양성할 것을 계획하고 이에 필요한 자금으로 20만원의 군자금을 모금코자 하였다. 이동흠은 정수기(鄭守基)를 통하여 유림단의 이러한 독립운동 계획을 듣고 이에 뜻을 같이하여 군자금 모금에 힘을 쏟았다. 그는 1926년 1월 경북 달성(達城)·영양(英陽) 등지에서 최해윤(崔海潤)·이현병(李鉉秉)으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펴던 중 1926년 5월 10일 일경에 붙잡혔다. 1927년 2월 1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면소(免訴) 판결을 받고 풀려났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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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규 묘
이만규(1845 - 1921)는 일제강점기 만국평화회의에 유림단대표로 독립청원서를 발송한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진성(眞城). 초명은 이만효(李晩孝). 자는 순칙(順則), 호는 유천(柳川). 경상북도 안동 출신. 대사성 이휘준의 아들로 이휘택(李彙澤)에게 입양되었으며, 애국지사 이만도(李晩燾)의 아우이다. 1879년(고종 16) 생원이 되고, 1883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직장·전적·지평을 역임하였다. 1894년 부교리 겸 동학교수(副校理兼東學敎授)가 되었으나 이듬해 을미사변으로 민비(閔妃)가 시해되자 사직하였다. 1896년 예안군수가 되었으나,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사직하고 향리에 은퇴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우리나라가 병탄되자 입산하여 단식하고, 이듬해 일제가 주는 이른바 은사금을 거절하였다. 1919년 고종의 인산에 참석하고, 김창숙(金昌淑)·곽종석(郭鍾錫) 등과 협의하여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유림단대표로 독립청원서를 발송한 뒤 검거되어 성산(星山)감옥에서 옥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