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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채룡 유허비
여채룡(1866 - 1936)은 여채룡은 경상북도 금릉(金陵) 출신이다. 을미사변이 발생하자 1896년 향리에서 의거의 기치를 올려 구성(龜城)·희곡(希谷)에서 전투를 전개하였으나 적에게 패하였다고 한다. 망국의 한을 깊이 간직하였다가 1921년 12월 조선총독에게 애국가(哀國歌) 및 포고문(布告文) 그리고 일왕 10죄론(日王十罪論) 등 설유문서(說諭文書)를 발송하였다. 한편 동지를 규합하여 국권회복을 도모하고자 애국가(哀國歌)·창의 통고문(倡義通告文) 등을 작성하여 평양 등 12개소의 향교에 발송하였다. 이상 일련의 항일투쟁이 적에게 노정되어 체포되었다.1924년 2월 25일 대구지방법원 김천(金泉)지청에서 소위 '제령(制令) 제7호위반' 혐의로 징역 10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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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균 유적지
이명균(1863 - 1923)은 일제강점기 조선독립운동후원의용단 단장 · 재무총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일명 명균(銘均). 경상북도 김천 출신. 1915년 데라우치[寺內正毅]가 해인사를 방문할 때 편강렬(片康烈)과 함께 암살을 계획하였으나 실패하자, 편강렬을 40일간 은신시킨 뒤 여비를 주어 만주로 망명시켰다. 3·1운동 때에는 경상남북도에서 활약하였다. 유림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파리장서(巴里長書)에 서명하여 일본경찰에 붙잡혔으나, 대구지방검찰청 검사국에서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1920년 3월경상북도 김천에서 김찬규(金燦奎)·신태식(申泰植)·이응수(李應洙) 등과 해외독립운동단체와 긴밀히 호응하여 국권회복에 이바지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조선독립운동후원의용단(朝鮮獨立運動後援義勇團)을 조직하고 경상북도 재무총장에 취임하였다. 또한, 가산이 부유하여 전후 5회에 걸쳐 10여 만 원을 상해임시정부로 보냈다. 그해 10월 상해임시정부로부터 다액의 군자금송부에 대한 감사의 뜻을 전달받음과 동시에 후원의용단의 단장과 재무총장에 임명되었다. 그뒤 경상남북도 각지에서 군자금모금활동을 전개하던 중 1922년 11월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고 발병하여 예심도중인 이듬해 3월에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얼마 후 순국하였다. 구속될 당시 송금하지 못한 군자금 8만 3000원을 보관하고 있었으나 압류되었다. 한편, 3,000여 석의 자산도 군자금으로 봉압되었으며, 그 뒤 가산이 완전히 기울어졌다. 1970년경상북도 김천에 순국기념비가 세워졌다.1963년 대통령표창이,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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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균 독립운동사적비
이경균(1850 - 1922)은 1919년 3월 곽종석(郭鍾錫) 등 유림 137명이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국제평화회의에 제출하고자 작성한 독립청원서(일명 파리장서)에 서명하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중 유림인사가 없다는데 통탄한 곽종석 등은 경북 성주군의 장석영(張錫英),송준필(宋浚弼),김창숙(金昌淑),송규선(宋圭善) 등과 함께 경상지역 양반 유생들을 규합하여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되는 파리강화회의(巴里講和會議)에 조선독립승인청원서를 제출하기로 하였다. 이후 김창숙이 유림대표로서 휴대한 청원서는 상해 도착 후 한문 3천부, 영문 2천부를 인쇄하여 이를 파리강화회의 및 구미(歐美),중국 국내 방면에 배부하였다. 이경균은 유림대표로 파리장서에 서명하였다.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0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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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균 유적비
이경균(1850 - 1922)은 1919년 3월 곽종석(郭鍾錫) 등 유림 137명이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국제평화회의에 제출하고자 작성한 독립청원서(일명 파리장서)에 서명하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중 유림인사가 없다는데 통탄한 곽종석 등은 경북 성주군의 장석영(張錫英),송준필(宋浚弼),김창숙(金昌淑),송규선(宋圭善) 등과 함께 경상지역 양반 유생들을 규합하여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되는 파리강화회의(巴里講和會議)에 조선독립승인청원서를 제출하기로 하였다. 이후 김창숙이 유림대표로서 휴대한 청원서는 상해 도착 후 한문 3천부, 영문 2천부를 인쇄하여 이를 파리강화회의 및 구미(歐美),중국 국내 방면에 배부하였다. 이경균은 유림대표로 파리장서에 서명하였다.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0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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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균 추모비
이석균(1855 - 1927)은 경북 김천(金泉) 사람이다. 1919년 3월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독립을 호소하기 위하여 김창숙(金昌淑) 등이 유림(儒林) 대표가 되어 작성한 독립청원서에 유림의 한 사람으로서 서명하는 등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세칭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이라고 불리우는 이 거사는 김복한(金福漢)을 중심으로 한 호서유림과 곽종석(郭鍾錫)을 중심으로 한 영남유림 137명이 참여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유림의 항일운동이었다. 파리장서의 요지는 일제가 자행한 명성황후·광무황제(光武皇帝)의 시해와 한국 주권의 찬탈과정을 폭로하면서 한국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들 유림은 김창숙(金昌淑)을 파리로 파견하고자 상해로 보냈으나, 직접 가지는 못하고 이 문서를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대표로 파리에 파견된 김규식(金奎植)에게 송달했으며, 국내의 각 향교에도 우송되었다. 그런데 이 일은 경상북도 상주의 만세운동과 관련하여 1919년 4월 12일 서명자의 한 사람이었던 송회근(宋晦根)이 붙잡히는 바람에 발각되었고, 이로써 이석균도 일경에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일제는 이들 유림이 한국인의 존경을 받는 인물들이었으므로 민족적 감정이 더욱 번질 것을 우려한 나머지 크게 부각시키지 않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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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중용 순충기념비
여중용(1856 - 1909)는 경상북도 금릉 구성 김평 출신이다. 1896년 1월 22일 김산 향교에서 의병을 조직하였다. 여중용은 군비 2천냥을 부담하고 예건대장기(禮建大將旗)와 김산복의대장기(金山伏義大將旗)를 만들어 세우고 금산 구성 지례 등지로 진군하였으나 구성에서 일군과 연합한 관군에 패전하였다. 1903년에는 날로 나라가 기울어 가는 것을 우려하여 전국의 의사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국난에 대처하여야 한다는 논지의 오백의사론(五百義士論)을 비롯하여 양병론(養兵論)을 발표하여 세론을 환기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1904년 3월에는 서울에서 충의사(忠義社)를 조직하고 133명의 지사를 규합하여 매년 2회씩 모여 국사를 논의하기로 하였다. 이해 여중용은 일본전권대사 이등박문(伊藤博文)을 비롯하여 주한일본공사, 주한일본육군사령관, 주한 청·영·미·불·독 등 외국공사, 일진회, 정부삼판서(政府三判書)에 항의서한을 보내어 한국의 독립을 위협하는 조약이나 군사활동이 동양의 평화를 파괴한다고 경고하였다. 그 일부는 전문이 황성신문(皇城新聞)에 게재되어 여론을 진작하는데 기여하였다. 1905년 5월에는 마침내 이병구(李秉九)·지우석(池禹錫)·우용택(禹龍澤) 등과 밀의하여 일본공사관 폭파계획을 세웠으나 사전에 탐지되어 동년 7월 24일 앞서의 항의서 발표와 관련하여 일본헌병대에 연행 구금되었다가 다시 폭파계획사건에 관련된 사실이 겹쳐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7개월만에 석방되었으나 혹독한 고문으로 조골(助骨)이 부러지는 등 상처를 입었다. 1906년 5월에 병중인데도 불구하고 서울에서 허 위, 이강년 등과 의병을 일으키기로 밀의하여 허 위는 안동, 이강년은 상주, 여중용은 금산에서 각각 의병을 일으켜 서울에 입성하기로 약조하였다. 약속에 따라 동년 8월 여중용은 귀향하여 김산군 병기소에서 무기를 수합하고 180명의 의병을 모집하였으나 병석에서 졸도하여 일어나지 못하였다. 1909년 오랜 투병 끝에 "죽어 귀신이 되어 원수를 갚고야 말겠다"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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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강렬 순국기념비
편강렬(1892 - 1929)은 일제강점기 105인 사건, 구월산주비단사건 등과 관련된 독립운동가이다. 호는 애사(愛史). 황해도 연백 출신. 편상훈(片相薰)의 셋째 아들이다. 이강년(李康秊)의 의병부대에 가담, 1907년 선봉장 겸 소모장이 되어 구국항일운동에 가담하였다. 1908년 서울 진공작전을 펴기 위해 휘하 의병부대를 인솔하고, 동해안을 돌아 강릉을 거쳐 경기도 양주에 당도했으나 일본의 대군을 만나 패하였다. 이 싸움에서 중상을 입고 태백산 본진으로 돌아가 재기의 날을 기다리던 중, 이듬해 봄 이 소식을 듣고 찾아온 큰형 편수열(片壽烈)의 권고로 귀가하였다. 1910년 평양 숭실학교를 다니면서 비밀지하운동을 전개하다, 이듬해 ‘105인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3년간 복역하였다. 출옥 후 영남 일대에서 동지를 모은 뒤 박상진(朴尙鎭) 등의 의병들이 조직한 광복단(光復團)에 가담, 활동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는 황해도 일대에서 맹활약하였고, 동생 편덕렬(片德烈)을 상해에 파견해 임시정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였다. 그러나 그 해 이른바 구월산주비단사건(九月山籌備團事件)에 관련되어 해주형무소에서 1년간 복역하였다. 출옥 후 상경하여 박영효(朴泳孝)·노심선(盧心仙)·김수장(金水長) 등과 국내 각지의 일제시설을 파괴할 것을 계획하고, 만주에 있는 각 단체와 연락을 취하기 위해 김경배(金庚培)·김태규(金泰奎)·조종호(趙鍾鎬) 등과 만주로 건너갔다. 1923년 회덕현(懷德縣) 오가자(五家子)에서 양기탁(梁起鐸)·남정(南正) 등과 의성단(義成團)을 조직, 단장으로 뽑혔다. 그 후 단원 5명과 함께 장춘(長春)에 있는 일본군을 습격하고, 봉천에서는 단원 7명과 함께 일본 헌병과 장시간 시가전을 벌여 수많은 일본군을 사살하였다. 또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통의부(統議府)·구국단(救國團)·길림주민회(吉林住民會) 등 만주에 있는 각 독립운동 단체와 서로 연락하며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25년 안창호(安昌浩)·양기탁 등과 만주에 있는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할 목적으로 활동 중 하얼빈에서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국내로 압송되어 7년 징역형을 받고, 신의주형무소에서 옥고중 척추염이 발병해 안동적십자병원에서 사망하였다.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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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률 행적비
김봉률(1897 - 1949)은 경남 합천(陜川) 사람이다. 1919년 3월 합천 해인사(海印寺)를 비롯한 경남 지역의 만세운동에 참가한 뒤 만주로 건너가 서간도 유하현(柳河縣)의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국내로 돌아와 문경 일대를 무대로 독립군 양성을 위한 군자금모집 활동을 하였다. 1919년 3월 만세운동이 일어나던 당시 해인사 부속 학림의 학생으로 재학하던 김봉률은 해인사의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서울에서 독립선언서가 전달되자 김봉률은 송복만(宋福晩)·최범술(崔凡述) 등과 함께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하고,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기 위해, 대구 등지로부터 30,000여 장이나 되는 종이를 구입하는 한편, 해인사의 등사판과 학교 등사판을 몰래 가져다 비밀리에 독립선언서를 등사하였다. 또한, 이들은 해인사 만세운동에 이어 경남 각지로 만세운동을 확산시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리하여 김봉률 등 학생 대표 30여 명은 각기 지역별로 분담하여 3인씩 대(隊)를 조직하였으며, 이들은 각기 분담한 지역에서 활동하다가 통영(統營)에서 집결하여 독립만세운동을 펼치기로 약속하였다. 김봉률은 강재호(姜在鎬)·기상섭(奇尙燮) 등과 함께 일대를 이루고, 경주·양산·통도사·범어사·동래·부산·김해지역에서 활동하였다. 그런데 거창·안의·함양·산청·남원 등지에서 활동하던 동지들이 일본헌병대와 일경에게 검거되면서 통영에서의 만세운동은 계획대로 실행할 수 없었다. 그 뒤 김봉률은 강재호·송복만·손덕주·박덕윤·김장윤 등 10여 명과 만주로 건너가 윤기섭(尹琦燮)·지청천(池靑天) 등이 운영하는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후, 독립군에 편성되어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1920년 9월 경, 김봉률은 박달준(朴達俊)·김장윤(金章允) 등과 함께 군자금 모집을 위해 국내로 잠입하였다. 이들은 경남 합천군(陜川郡) 가야면(加耶面)을 근거지로 삼고, 군정부(軍政府)의 인감과 영수증을 만든 후에, 경상도·충청도 일대의 사찰들을 돌아다니며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그러던 중 1921년 1월 경, 문경(聞慶) 금룡사(金龍寺)로 잠입하였으나 주지의 밀고로 붙잡혔다. 그는 이 일로 1921년 5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으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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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준필 사당(원계서원)
송준필(1869 - 1944)은 경상북도 성주(星州) 사람이다.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한 파리장서(巴里長書)에 한국 유림대표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으며, 4월 2일 성주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거국적인 3·1독립선언식의 민족대표 33인 중에 유학자들이 빠지게 된 것을 통분해 하고, 또 일제가 광무황제에게 결재하도록 강요한 독립불원서((獨立不願書)에 유림들이 들어있음을 알고, 한국 유림들이 조국의 독립을 간절히 원하고 있는 진정한 의사를 직접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데 참여하였다. 이에, 그는 소위 파리장서라고 하는 2,674자의 장문에 곽종석(郭鍾錫)·김복한(金福漢)·김창숙(金昌淑)·이기정(李基定) 등 한국 유림대표 137명 중 한사람으로서 서명하였다. 그후 이 파리장서는 김창숙이 상해(上海)로 전달하였고, 다시 파리에 한국대표로 파견되어 있던 김규식(金奎植)에게 송달하였으며, 국내의 향교에도 우송되었다. 그리고 이기정·이기원(李基元)으로부터 서울에서 전개된 독립선언식과 다른 지방의 독립만세운동 상황에 대하여 자세히 전해 들은 그는 송회근(宋晦根) 등 송씨문중의 유력자들을 불러놓고 이 지방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에 이기정·송회근·성대식(成大湜)·송수근(宋壽根)·송문근(宋文根)·이봉희(李鳳熙)·송인집(宋]寅輯)·송천흠(宋千欽) 등이 찬동하여, 성주읍 장날인 4월 2일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한편, 유진성(兪鎭成)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도들에 의한 독립만세운동 계획이 있음을 안 그는 이들과 협의하여 함께 공동전선을 펴기로 하고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사전준비를 마쳤다. 4월 2일 오후 1시, 점차 시위군중이 시장으로 몰려들고 있을 때, 먼저 경산동(京山洞) 관제묘(關帝廟) 뒷산에 집결하였던 기독교도들이 태극기를 높이 들고 시장을 향하여 독립만세를 외치자 그도 시장에 모인 3천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겁을 먹은 일본 경찰주재소에서 발포하여 시위군중을 해산시키려 했으나,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이에 굴하지 않고 밤 11시까지 계속해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그후 일제의 대대적인 검속 때 체포되어 대구(大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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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은거기념비
김구(1876~1949)는 황해도 해주목 출신이다. 독립운동가이자 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보수정당의 1세대 정치인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안창호, 이승만 등과 함께 지도자 출신 중 최순위권에 손꼽히는 인지도와 영향력을 가진 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동학 농민 혁명과 교육계몽운동에 참여했고, 1919년에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직접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내무총장 겸 노동국 총판, 국무령, 의정원 의원, 국무위원 겸 내무장, 재무장, 군무장을 거쳐 1940년 임시정부 주석에 선출되었고, 1945년까지 주석을 역임하며 임시정부의 지도자 역할을 수행했다. 광복 이후에는 본인은 반공주의자였지만 남북 분단과 남한 단독 정부 수립에는 반대하면서 통일론을 포기하지 않다가 1949년에 서울 경교장에서 반대 세력에 의해 암살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최고 명예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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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균 순국기념비
이명균(1863 - 1923)은 일제강점기 조선독립운동후원의용단 단장 · 재무총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일명 명균(銘均). 경상북도 김천 출신. 1915년 데라우치[寺內正毅]가 해인사를 방문할 때 편강렬(片康烈)과 함께 암살을 계획하였으나 실패하자, 편강렬을 40일간 은신시킨 뒤 여비를 주어 만주로 망명시켰다. 3·1운동 때에는 경상남북도에서 활약하였다. 유림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파리장서(巴里長書)에 서명하여 일본경찰에 붙잡혔으나, 대구지방검찰청 검사국에서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1920년 3월경상북도 김천에서 김찬규(金燦奎)·신태식(申泰植)·이응수(李應洙) 등과 해외독립운동단체와 긴밀히 호응하여 국권회복에 이바지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조선독립운동후원의용단(朝鮮獨立運動後援義勇團)을 조직하고 경상북도 재무총장에 취임하였다. 또한, 가산이 부유하여 전후 5회에 걸쳐 10여 만 원을 상해임시정부로 보냈다. 그해 10월 상해임시정부로부터 다액의 군자금송부에 대한 감사의 뜻을 전달받음과 동시에 후원의용단의 단장과 재무총장에 임명되었다. 그 뒤 경상남북도 각지에서 군자금모금활동을 전개하던 중 1922년 11월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고 발병하여 예심도중인 이듬해 3월에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얼마 후 순국하였다. 구속될 당시 송금하지 못한 군자금 8만 3000원을 보관하고 있었으나 압류되었다. 한편, 3,000여 석의 자산도 군자금으로 봉압되었으며, 그 뒤 가산이 완전히 기울어졌다. 1970년경상북도 김천에 순국기념비가 세워졌다.1963년 대통령표창이,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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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길 추모비
최익길(1862 - 1937)은 경북 김천(金泉) 사람이며, 이명은 최학길이다. 그는 1919년 3월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독립을 호소하기 위하여 김창숙(金昌淑) 등이 유림(儒林)대표가 되어 작성한 독립청원서에 유림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는 항일운동을 하였다. 세칭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이라고 불리우는 이 거사는 김복한(金福漢)을 중심으로 한 호서유림과 곽종석(郭鍾錫)을 중심으로 한 영남유림 137명이 참여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유림의 항일운동이었다. 파리장서의 요지는 일제가 자행한 명성황후·광무황제(光武皇帝)의 시해와 한국 주권의 찬탈과정을 폭로하면서 한국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들 유림은 김창숙(金昌淑)을 파리로 파견하고자 상해로 보냈으나, 직접 가지는 못하고 이 문서를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대표로 파리에 파견된 김규식(金奎植)에게 송달했으며, 국내의 각 향교에도 우송되었다. 그런데 이 일은 경상북도 상주의 만세운동과 관련하여 1919년 4월 12일 서명자의 한 사람이었던 송회근(宋晦根)이 붙잡히는 바람에 발각되었고, 이로써 최익길도 일경에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일제는 이들 유림이 한국인의 존경을 받는 인물들이었으므로 민족적 감정이 더욱 번질 것을 우려한 나머지 크게 부각시키지 않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