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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걸 묘
곽걸(1868 - 1927)은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독립을 호소하기위해 유림대표가 작성한 독립청원서 파리장서에 유림의 한 사람으로 서명했다. 파리장서는 파리에 한국대표로 파견되어있던 김규식에게 송달되고, 국내외 각 향교에 우송되어 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립 의지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곽걸은 동년에 다른 서명자인 송회근과 함께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으나 일제는 이들이 한국인의 존경을 받는 유림들이었으므로 민족적 감정이 번질 것을 우려해 부각시키지 않았다. 1998년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려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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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수빈 추모비
곽수빈(1882 - 1951)은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유림대표가 작성한 독립청원서 파리장서에 유림의 한 사람으로 서명했다. 파리장서는 파리에 한국대표로 파견되어 있던 김규식에게 송달되고, 국내외 각 향교에 우송되어 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립 의지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곽수빈은 동년에다른 서명자와 함께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으나 일제는 이들이 한국인의 존경을 받는 유림들이었으므로 민족적 감정이 번질 것을 우려해 부각시키지 않았다. 1995년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려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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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태진 현창비(우곡면 답곡리)
곽태진(1917-2006)은 1917년 5월 18일 경상북도 고령군 우곡면 답곡리에서 아버지 곽종의와 어머니 경주 김씨 김금선 사이의 2남 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942년 3월 성일영·도종표(都鍾杓) 등 동지 100여 명을 규합하여 항일 비밀결사인 호의단(護義團)을 조직해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현풍신사(玄風神社)에 방화하는 등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으며, 고령군·청도군 등의 경찰서에서 무기를 탈취하여 무장 봉기를 계획하던 중, 1945년 5월 경상남도 창녕군 이방면 야산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고,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수감되었다. 그러다가 같은 해 옥중에서 8.15 광복을 맞았으며, 같은 날 대구지검에서 기소유예로 불기소처분을 받고 출옥할 수 있었다. 광복 이후 정계에 입문하였으며 1946년 한국민주당 경북도당 청년부장을 지내고, 1950년 제2대 민의원 선거에 고령군 지역 민주국민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1년 3월 29일 서민호(徐珉濠), 엄상섭(嚴詳燮), 고영완(高永完) 등 동료 국회의원들과 함께 국민방위군 사건의 진상을 폭로하였다. 1953년 민주당 발기인으로, 1960년 제5대 민의원 선거에 고령군 지역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5·16 군사정변으로 국회가 해산되면서 민의원 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1981년∼1985년까지 민권당 부총재를 역임하였고,건국대학교 기성회 이사, 독립운동가연맹 이사 등을 역임했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수여되었고,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수여되었다. 그의 유해는 2006년 4월 14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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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철휴 흉상
경상북도 고령군에 위치한 애국지사 해영 신철휴(1898 - 1980)선생 흉상이다. 1919년 만주에서 의열단 결성에 참가해 의열단 첫 사업인 밀양경찰서 폭파거사에 참여해 활동하던 중 체포되어 7년의 옥고를 치르고 출옥했다. 이후 ‘경북의열단사건’, ‘청주일심단사건’ 등에 연루되었으나 불기소 처분되었고 1928년 신간회 고령지부장으로 활약했다. 1990년 정부에서 선생의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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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득 기념비, 영화소개비
김유영(1908 - 1940)은 일제강점기 「유랑」, 「애련송」, 「수선화」 등의 작품에 관여한 영화인. 영화감독이다.1925년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곧 영화계에 투신하였다. 카프(KAPF)의 연극부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안종화(安鍾和)·이우(李愚)·이경손(李慶孫) 등이 1927년에 영화예술 연구를 위해 조직한 조선영화예술협회에 가입하였고, 거기에 카프파 영화인들을 끌어들였다.1928년에 신경향파(新傾向派) 계열의 최초의 영화이며 무산계급 농민의 저항을 그린 「유랑(流浪)」을 처음으로 감독하였으나 흥행에는 실패하였다. 1929년에는 협회의 명칭이 시대에 뒤떨어졌다 하여 서울키노(혹은 서울영화공장)로 개칭하고 제2회 작품으로 무산계급 민중의 서러움과 투쟁을 그린 「혼가(昏街)」를 감독하였다.이 영화도 흥행에는 실패하였지만 무산계급영화의 제작을 전국적으로 파급시켰다. 그러나 지방에서의 프로영화 제작은 자본부족으로 거의가 제작 중에 중단되었다. 제3회 작품으로 「화륜(火輪)」(1931)을 감독해 내놓았으나 계급투쟁과 사상을 지나치게 직선적으로 표현하였기 때문에 호응을 받지 못하였다.무성영화시대에 무기로서의 영화운동을 펼쳤던 카프계열의 영화는 여기서 막을 내렸다. 1938년에는 이구영(李龜永)·이명우(李明雨)·김태진(金兌鎭)·안종화 등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제인 ‘조선일보영화제’를 개최하였다.1939년에는 최금동(崔琴桐)의 『동아일보』신춘문예 당선작인 「애련송(愛戀頌)」의 감독을 맡아 재기하였고, 1940년에 「수선화」를 감독, 그 개봉을 앞두고 죽었다. 그는 프로영화운동을 펼친 영화감독으로서, 노골적으로 좌익으로 기울지는 않고 민족항일기에 고통받는 민중의 삶을 사실주의적으로 그렸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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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상순 기념비, 송덕비, 공적비
남상순(1926-1978)의 호는 흑구이다. 남상순은 1941년 일본에서 충성회를 조직해 항일활동을 전개했다. 수시로 귀국하며 국내의 청소년층을 지도하고, 민중계몽에 힘쓰며 실력양성을 하던 중발각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옥고를 치렀다. 1990년 정부에서 그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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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박 기념비
황진박(1888 - 1942)은 1919년 서울에서 3.1독립운동에 참가했고, 1927년경북 도내의 중요기관 폭파와 요인 암살을 계획하던 중 일경에 붙잡혀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동지 장진홍의 자결사건이 일어나자 감옥문을 파괴하고 독립만세를 외치는 등 옥중토쟁을 벌였다. 1990년 정부에서 고인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967년 원정 황선생 기념사업회에서 황진박선생 기념비를 건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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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전쟁 선산 창의비
경상도 북부 동학농민군의 활동은 일본군의 동향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5월 초 조선에 출병한 일본군의 움직임이 어느 지역보다 직접적으로 관찰되었고, 그에 대한 민중의 반감이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조선에 출병한 일본군은 청나라와의 일전에 대비하기 위해 부산에서 서울까지의 전선가설을 서둘렀고, 7월 중순에는 부산·구포·삼랑진·물금포·밀양·청도·대구·다부역·낙동·해평·태봉·문경 등에 설치되었다. 각 병참부에는 일본군이 주둔하였으며, 농민군은 이에 반감을 품고 이들을 물리치려 하였고 일본군은 보급과 통신의 요충지인 병참소가 언제 농민군의 공격을 받을지 몰랐기 때문에 오히려 주변의 농민군 세력이 강성해지면 곧장 기습적으로 공격하여 그 세력을 위축시키고자 하였다.선산 가까이에는 해평과 낙동 두 곳에 일본군 병참소가 설치되었다. 선산 지역에서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활발해지는 것은 1894년 여름부터였을 것으로 보이지만, 이들이 선산성을 점령한 것은 9월 20일 이후 무렵이었고, 여기에는 김천지역 농민군도 합세하였다. 선산관아가 농민군에게 점령당하자 선산의 향리들이 몰래 낙동의 일본병참부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일본군은 10월 1일 선산성을 점령해 있던 농민군을 공격하였다. 농민군은 김천의 접주 김정문 휘하의 농민군 15명을 포함하여 다수의 사상자를 내고 선산성에서 퇴각하였다. 이때 선산성을 공격한 일본군은 낙동병참두의 병력과 부산수비대에서 파견된 후지타(藤田)부대였다. 후지타는 하사 4명, 병졸 60명, 통역 2명, 인부 10명을 이끌고 8월 29일 낙동에 도착한 후 낙동병참사령관의 지휘를 받아 일대의 농민군 진압에 투입되었다. 그의 부대는 9월 29일 상주성을 공격하여 농민군을 몰아낸 이틀 후인 10월 1일 다시 선산부를 공격한 것이다. 현재 자료상 확인되는 선산농민군 지도자로는 신두문(申斗文)이 있다. “거괴(巨魁)”로 표현되던 그는 11월 10일경 선산부에 체포되었으며, 선산관아에 수감되어 있다가 12월 14일 상주 소모영의 소모사 정의묵에 의해 총살되었다.〈갑오농민군 선산읍성 전적비〉 및 〈갑오전쟁선산창의비〉는 이러한 선산지역 동학농민군의 활동의 기념하여 세워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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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교리 효시지비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이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 후 왕후폐위조칙이 발표되자 유생들은 폐위조처에 반대하고 일본군을 토벌·구축하여 국모의 원수를 갚을 것을 주장했다. 여기에 단발령 시행이 더해지자 일반 백성들까지 반일·반정부 항쟁에 나서서 친일파를 처단하고 관군과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지방의 유력 유생 중심으로 구성된 의병대의 규모는 지역별로 수천에서 수만 명에 달했고 서울·경기 지역에서 시작된 의병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내각이 친러파로 교체되고 단발령 철폐와 미납 공세 탕감 조처가 내려지면서 점차 쇠퇴하였다.선산을미의병효시지비에는 ‘嶺南義兵將 韓敎履(영남의병장 한교리)’라고 새겨져 있어 한교리(韓敎履)라는 의병장이 효수(梟首)되었던 것을 기리며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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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환 공적비
권오환(1892 - 1957)은 경상북도 선산(善山) 사람이다. 1919년 4월 12일의 선산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전국 각지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향인 선산에서는 아직까지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지 않고 있음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4월 12일 선산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를 주동하기로 결심하였으며, 이원길(李元吉)·박희목(朴喜穆)·전용신(田容信) 등에게 그 취지를 설명하고 찬성을 얻었다. 4월 12일 오후 5시경, 동지들과 함께 선산읍 장터에 나아가 독립만세를 선창하며, 이에 호응하는 50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고 피신하였다. 그러나 이날 밤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이해 5월 2일 대구(大邱)지방법원 김천(金泉)지청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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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대항일행적비
항일투사로 활동한 일문삼대 한교리, 한정교, 한중석 항일행적비를 정체불명인이 쇠망치로 내리쳐 행적비를 파손하고 강물에 넘어뜨렸고, 그 후 파손된 항일행적비가 되었다. 삼대가 모두 독립운동을 했으며 특히 한정교는 1919년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뤘다. 2008년 정부는 한정교선생의 공훈을 기려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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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교 기념비
1894년 한교리의 지도와 한정교의 돌격아래에 선산갑오전쟁농민군이 일본군 최대탄약기지 병참부를 야습했다. 일문삼대 한교리, 한정교, 한중석은 모두 항일투사로 활동했으며 특히 한정교는 1919년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