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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장서비(일해공원)
1919년 3월 한국유림 대표 137인이 조국 독립을 온 세계에 호소하기위하여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되는 세계평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낸 사건이 있었다. 한국유림독립운동 파리장서에 서명하신 137인중 합천인은 11명으로 문용,송호완, 송호곤,송호기,송철수,박익희,송재락,전석구,전석윤,김상진,김동수뿐만아니라, 서명에 빠진 윤중수와 함께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려고 희생하신 합천인의 독립정신을 기리고자 파리장서비를 세웠다.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한국 유림은 파리에서 열린 세계평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서한을 제출해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떨친 공헌을 하였다. 파리 장서는 일제의 한국 주권 찬탈 과정을 폭로하고 식민 지배의 불법성과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하여 한국의 모든 계층과 사회 집단이 독립을 열망하고 있음을 국내외에 널리 알렸던 서한이다. 곽종석, 김복한을 비롯하여 유림 대표 137명이 서명한 이 장서를 김창숙으로 하여금 상해로 가져가도록 하였고 이를 다시 김규식을 통하여 파리 강화회의에 제출되었다. 일본은 파리장서 운동에 참가한 유림들은 체포 투옥하는 등 가혹하게 탄압하였으며(제1차 유림단 사건), 이 사건을 계기로 유림계는 한말 구국운동의 전통을 계승하여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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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대왕산 죽창의거 공적비
1944년 7월 15일 밤 자인면 원방보에서 안창률, 김명돌, 성상용, 송수답 등 29인이 모여 돌이 많고 산세가 험한 대왕산에 진지를 구축하고 신축 중에 있는 남산 주재소를 습격하는 것을 일차 목표로 하고 준비에 착수하였다. 7월25일 밤 축장으로 전원 무장하고 대왕산에 집결하여 26일 아침 안병률의 선창으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7월 26일 무장한 일경 30명을 돌과 죽창으로 맞서 물리쳤고 8월 5일에도 일경 30명을 격퇴하였으나 보급이 끊기고 식량이 바닥나 8월 10일에서 13일 사이에 전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8.15광복으로 자유의 몸이 되었으나 안창률, 김경화 선생은 옥중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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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운동기념탑
일본의 36년간 억압과 식민지 생활에서 나라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희생하신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님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청소년들에게 올바른 국가관과 애국정신을 심어주기 위하야 2021년 5월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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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대왕산 죽창의거 전적지비
일제가 우리 고유문화와 정신을 말살하고 최후의 발악적인 식민지 정책기 자행되던 1944년 6월 민족의 차별과 일제 압정을 성토하고 징병, 징용을 거부하며 조국독립운도을 위해 일제에 항거키로 결의했다. 본 항일운동은 남산면 거주 안창률등 29명의 청년들이 대왕산에서 1944년 7월 25일 부터 8월 13일까지 20여일이상 죽창으로 일제의 총칼및 비행기에 대항하면서 대왕산정상에 돌로 성을 쌓고 막사를 지어 진지를 구축하고 3개 소대와 특공대, 정보연락대등 결심대를 편성하여 3차례에 걸친 격전을 치르는 중 식량조달차 하산하였다가 전원이 체포되어 경산경찰서에서 50여일의 고문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았으며 대구 형무소로 수감되어 보안법, 육해공 형법위반, 치안유지특별법위반등의 죄명으로 옥고를 치르다가 8.15광복으로 자유의 몸이 되이 되었으나 안창율, 김경하 지사는 옥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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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식 묘
이영식(1897 ~ 1981), 결코 죽일 수 없는 사람, 호는 성산(惺山)이다. 이영식은 경상북도 성주 출신으로 1919년, 계성학교 5학년 재학 당시, 이만집 등과 함께 대구와 서울에서 3·1독립운동에 참여하였고 그로 인해 서대문형무소에서 6개월 옥고를 치렀다. 이후에도 서울, 수원, 조치원, 청주, 공주, 대전, 상주, 김천, 대구, 경주로 옮겨가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중에 다시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1년 6개월 복역하였다. 출옥 후 1927년 일본으로 건너가 고베(神戶)신학교를 졸업, 이후 고국으로 돌아와 대구애락원 나환자교회에 부임하여 약 7년간 나병환자(한센병)와 생활하였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함경북도, 만주국 간도성 등등에서 목사로 시무하였으며 일본 요코하마의 조선인 교회에서도 활동하였으나 광복 직전에 귀국하였다. 광복 후 장애인 복지와 특수교육 지도자양성에 힘썼으며 1946년 대구맹아학원(大邱盲啞學院)을 설립을 시작으로 심신장애인의 교육과 복지에 평생 헌신하였다. 6.25 전쟁 시 피난을 갔다가 인민위원회에 연행되어 성주 가천지서에서 총살형을 당할 위기에 처했으나 장애인을 위해 헌신해 온 그의 사연이 밝혀지면서 죽음을 면했다. 이영식이 '결코 죽일 수 없는 사람'이라는 별칭을 얻게 된 사건이다. 평생 특수교육과 사회복지 분야의 발전을 위해 힘썼으며 현 대구대학교 전신인 한국사회사업대학, 대구보명학교, 대구 보건학교 등을 설립하였다. 정부에서는 각각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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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병률 기념비
허병률(1885 - 1943)은 일제강점기 광복회원으로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1917년 박상진(朴尙鎭)·채기중(蔡基中)이 조직한 광복회(光復會)에 가입, 독립운동을 시작하였다. 1919년 9월 경 양한위(梁漢緯)·권태일(權泰鎰)로부터 상해판 『독립신문』 및 경고문 등을 전달받아 부호와 관공리에게 발송, 최대한의 지원을 호소하여 모금한 8,000원의 군자금을 1920년 상해(上海)로 가서 임시정부에 전달하였다. 그 해 8월에 박용선(朴容善)·조한명(趙漢明)·이동찬(李東燦) 등과 군자금 모집을 모의하고 권총과 탄약을 휴대, 서울 서린동에 사는 엄홍섭(嚴弘燮)을 설득하여 2만원을 군자금으로 교부받아 곧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송금하는 등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였다. 일본경찰에 붙잡혀 1921년 6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1963년 대통령표창,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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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동상 기적비
허동상(1908 - 1951)은 경북 경산(慶山) 사람이다. 1930년 1월 경산군 하양서당(河陽書堂)의 훈장(訓長)이던 그는 전년도 11월 광주(光州)에서 발생한 학생항일시위운동의 전국적인 확산에 자극받아, 대구(大邱)에서도 학생들이 항일시위운동을 전개할 것을 촉구하는 격문을 작성하여, 동월 14일과 15일 새벽에 대구고등보통학교, 대구여자고등보통학교, 대구상업하교 등 시내 각급학교의 담장에 붙이기도 하고 발송하기도 하였다. 이 일로 인해 동월 18일 대구경찰서에 붙잡힌 그는 1930년 2월 2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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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규 집
김봉규(1892 - 1968)는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경상북도 경주 출생. 1919년 3·1운동 때 향리에서 참여하였다. 1920년 송두환(宋斗煥)·최윤동(崔胤東)·이수영(李遂榮) 등과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령에 따라 대구일대를 중심으로, 일반국민으로부터 직장인·부호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그 대상자를 삼아 군자금 조달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김봉규 등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자금조달원을 미행하던 일본경찰 카이[甲斐]가 위협하고 체포하려 할 때, 김봉규가 사살하였으나 곧 체포되었다. 1924년 11월 하순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으며, 만기로 출옥하였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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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규 공적비
김봉규(1892 - 1968)는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경상북도 경주 출생. 1919년 3·1운동 때 향리에서 참여하였다. 1920년 송두환(宋斗煥)·최윤동(崔胤東)·이수영(李遂榮) 등과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령에 따라 대구일대를 중심으로, 일반국민으로부터 직장인·부호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그 대상자를 삼아 군자금 조달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김봉규 등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자금조달원을 미행하던 일본경찰 카이[甲斐]가 위협하고 체포하려 할 때, 김봉규가 사살하였으나 곧 체포되었다. 1924년 11월 하순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으며, 만기로 출옥하였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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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규 묘
김봉규(1892 - 1968)는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경상북도 경주 출생. 1919년 3·1운동 때 향리에서 참여하였다. 1920년 송두환(宋斗煥)·최윤동(崔胤東)·이수영(李遂榮) 등과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령에 따라 대구일대를 중심으로, 일반국민으로부터 직장인·부호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그 대상자를 삼아 군자금 조달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김봉규 등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자금조달원을 미행하던 일본경찰 카이[甲斐]가 위협하고 체포하려 할 때, 김봉규가 사살하였으나 곧 체포되었다. 1924년 11월 하순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으며, 만기로 출옥하였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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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내영 집
정내영(1900 - 1961)은 1920년 송두환·김종철·최해규·정동석·김봉규 등과 경북 유림단 의거에 참여했고 의령경찰을 사살하고 도피하던 중, 1924년 체포되어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후에도 중국과 국내를 비밀리에 다니면서 계속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1990년 정부는 선생의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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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내영 공적비
정내영(1900 - 1961)은 1920년 송두환·김종철·최해규·정동석·김봉규 등과 경북 유림단 의거에 참여했고 의령경찰을 사살하고 도피하던 중, 1924년 체포되어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후에도 중국과 국내를 비밀리에 다니면서 계속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1990년 정부는 선생의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