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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범 공적비
전상범(1870-1911)은 경상남도 함양(咸陽) 출신이다. 1906년 5월 면암 최익현이 덕유산에서 의병의 기치를 드높일 때 중군장으로서 활약하였다고 한다. 1907년 7월 경남 거창 일대에서 거의, 의병장이 되어 안의에서 왜적과 접전을 벌였으나 의병 50명이 전사하고 20명이 부상을 당하는 참패를 겪었다. 그후 진주 의병장 유종환과 합진하여 용담·금산·영동 등지에서 왜적과 교전하였다. 1909년 2월 안의에서 그리고 4월에 거창에서 적과 격전을 전개하여 많은 전과를 거두었으나, 1911년 1월 양악(현 전북 장수군 계북면)에서 적과 교전 중 체포되어 대구감옥에 수감되었다. 틈을 엿보아 일차 탈출할 수 있었으나 다시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던 끝에 1911년 3월 7일 옥사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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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병선, 송병순 암각문
송병선(1836-1905)은 충청남도 회덕(懷德)에서 태어났다. 학행으로 천거 받아 서연관(書延官)과 경연관(經延官)을 지내었다. 1882년에 공조참판 사헌부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사임하고 충청북도 옥천(沃川)에 내려가 정자를 짓고 유학을 가르치면서 세상일을 잊고 지냈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이 소식을 들은 송병선은 나라가 위험에 처해 있음을 알고 상경하여 고종을 알현하고 을사5적의 처단과 을사조약의 파기를 건의하였으며, 을사조약 반대 투쟁을 계속하다가 경무사 윤철규(尹喆奎)에게 인치(引致)되어 강제로 향리에 호송되었다. 이에 국권을 빼앗김에 통분하여 세차례 다량의 독약을 마시고 황제와 국민과 유생들에게 드리는 유서를 남겨 놓고 자결 순국하였다. 유서에서는 을사5적의 처형과 을사조약의 파기 및 의(義)로서 궐기하여 국권을 찾을 것 등을 호소하였다. 고종은 그의 충절을 기리어 1906년 2월에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정부에서는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여 그의 공훈을 기렸으며, 충남 대전에는 고종의 건사지명(建祠之命)으로 건립된 문충사(文忠祠)가 있어 유품이 소장되어 있다. 송병순(1839-1912)은 을사조약을 반대하여 순절한 송병선(宋秉璿)의 아우이다. 일제가 1905년 11월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고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침탈하자 이에 대한 반대투쟁을 전개하여 일제침략을 규탄하고 을사5적을 성토하는 「토오적문(討五賊文)」을 지어 전국 유림에게 배포하고 국권회복에 궐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1906년에는 충청북도 영동(永同)군 학산(鶴山)면에 강당(講堂)을 건립하여 수백 명에게 민족독립사상을 교육하였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통분하여 여러 번 자결을 기도했으나 실패하고 두문불출하며 망국의 슬픔을 시로써 달래었다. 1912년 일제 헌병이 소위 은사금(恩賜金)을 가져 왔으나 거절했으며, 같은 해 일제가 회유책으로 경학원(經學院) 강사로 천거하자 이를 거절한 다음 유서를 남기고 독약을 마시고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충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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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수 기공비
문태수(1880~1913) 의병장은 경남 안의(安義) 출신으로, 이명은 문태서이다. 원래 기골이 장대하고 재주가 탁월하여 일찍부터 글을 배워 문리를 통달하였으며, 금강산에 들어가 병서(兵書)를 익히기도 하였다. 1905년 상경하여 면암 최익현(崔益鉉)을 예방하였으며, 격문을 내어 의병을 모집할 방책을 상의하고 호남지방으로 내려가서 지리산에 들어가 거의(擧義)하였다. 무주(茂朱)에서 의병 수십 명을 이끌고 덕유산으로 가던 중 일본군 수명을 사살하였다. 그 후 1906년 9월 중순경에 장수양악(長水陽岳)에서 박춘실(朴春實)을 만나 그를 선봉장으로 삼고 의병진을 합세하여 계속 전투를 전개하면서 팔공산(八公山)으로 들어갔다. 9월 하순에 장수읍을 함락시키고 일본군과 오래 교전하여 적군 30여 명을 사살하였지만 아군도 7명의 전사자를 냈다. 이 접전에서 일본군의 무기 40여 정을 노획하고 적군을 추격하여 무주 구천동에 이르러 김성범(金誠範)을 중군장으로 삼았다. 1907년 1월에 무주 부남면 고창곡(高昌谷)에서 일본군을 습격하여 적군 40여 명을 사살, 총기 50여 정을 빼앗은 뒤 덕유산 원통사(圓通寺)로 들어가니, 강원도 원주 사람 이병열(李秉烈) 등 7명이 와서 무기를 제조하는 등 협조하였다. 그 해 12월에 양주에서 각도의 의병진이 모일 때 호남군 100여 명을 이끌고 합세하니 호남창의대장에 추대되어 서울로의 진격작전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이듬해 1908년에는 무주 덕유산을 근거지로 영남·호남 및 호서일대에서 많은 활약을 하였다. 2월 28일 60명의 의병을 이끌고 무주 주재소를 급습하여 적 5명을 사살하고 적군에게 체포되었으나 극적으로 탈출하였다. 또한 4월에는 부하 150명을 통솔하고 장수읍(長水邑)을 공격하고 일본군 다수를 살상하였으며, 총기 등을 획득하고 주재소, 군아(郡衙) 등을 불질렀다. 이어 1909년 1월에는 지례군(知禮郡) 소재 대덕산(大德山)에서 안의군 방면으로 의병진을 이동시키고, 4월 24일에는 4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용담군(龍潭郡) 이동면 장전리(長田里)를 공격하였다. 무주군민들은 이러한 문태수의 항일전공을 기리기 위해 1909년 4월에 공덕비를 세웠으나 일본경찰에 의해 철거되고 말았다. 그 해 5월 8일에는 남원군 문성(文城) 동북지역에서 100여 명의 부하들과 더불어 일본군과 접전을 벌여 많은 전과를 올렸으며, 8월 중순경에도 의병 수십 명을 인솔하고 전라도에서 충북의 영동(永同)·청산(靑山)·옥천(沃川) 등의 지역으로 진군하여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이어 10월 30일에 경부선 이원역(伊院驛)을 습격, 방화하고 일본군 3명을 포로로 하였으며, 11월에는 무주군을 근거로 영동·옥천·청산·금산(錦山) 등에서 항일전을 벌여 적군을 다수 사살하고 총기를 노획하였다. 또한 1909년 12월에도 무주를 중심으로 주변 제지방에서 격렬한 전투를 계속 전개하였다. 이듬해인 1910년 대군을 휘하에 거느리고 서울로 진격하여 원흉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위시하여 일본군을 도륙코자 계획을 세웠으나 적이 미리 정보를 입수하여 각도, 각 항구 등에 헌병, 수비대, 기마병 등 만여 명을 배치하여 방어에 진력하니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재차 덕유산으로 들어가 훗일을 계획하다가 경술합방의 비통한 소식을 듣고 울분을 이기지 못하였다. 1911년 8월 17일에 덕유산 아래 매부의 집으로 잠시 내려가 매부의 지인(知人) 조기래(曺基來)와 함께 담화하던 중 일본군에 노출되어 포위·체포되었다. 체포된 후 진주로 압송되었다가 대구감옥으로 이송, 다시 서울로 옮겨졌으며, 시종 기개를 굽히지 않다가 1913년 2월 4일 옥중에서 자결하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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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응규 집
노응규 선생은 경남 함양 출신으로 본관은 광주(光州)로 노이선(盧以善)의 2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유생이었으나, 외세의 침략 속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을 찾아 사사(師事)하고, 연재 송병선(淵齋 宋秉璿), 입재 송근수(立齋 宋近洙)에게로 나아가 학문을 연마하고, 국가사를 논의하기도 하였다. 1895년 명성황후의 시해 이후 단발령이 내려지자 전국적인 봉기가 일어났고, 이에 1895년 10월 11일 밤중에 임최수(林最洙)·이도철(李道徹)·김재풍(金在豊) 등이 친일정부의 대신들을 처단하려는 사건이 있었다. 노응규도 그들과 약속하고 12일 새벽을 기하여 경복궁의 건춘문(建春門)을 열고 들어가서 궁중 수정전(修政殿)에 머물고 있던 대신들을 죽일 계획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친위대의 공격으로 중도에 좌절되고 말았다. 1896년 1월 7일 노응규는 안의에서 거의하여 의병을 이끌었고 진주로 나아가 의병들을 받아들여 세력을 불린 뒤 3월 28일 일제의 침략 교두보인 부산항을 공략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에 4월 19일 노응규는 의병을 해산하고 호남 등지로 피신하였고, 대한제국 선포 이후에는 관직에 몸담아 규장각 주사, 중추원 의관 등을 거쳐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될 때까지 동궁 시종관(東宮 侍從官)의 중책을 맡아 시종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노응규는 관직을 버리고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남하하였고, 1906년 늦가을 충북 황간군 상촌면 물한리 직평(黃澗郡上村面勿閑里稷坪)으로 들어가 다시 구국 항일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무장한 의병은 경부철도와 일본군 시설을 파괴하고 서울로 진격할 것을 목표로 황간 주민들의 협력을 받으며 전투를 전개했다. 그러나 1907년 1월 21일(양력), 장차 서울 진군을 계획하고 있을 때, 밀정에게 그 기밀이 누설되어 그의 수뇌 참모진과 더불어 체포되었다. 체포된 후 경성 경무 감옥소로 압송되어 검사의 엄중한 심문을 받았으나 끝내 굴하지 않고 그의 의절을 빛내었다. 동지들이 차입(差入)해 주는 사식(私食) 이외는 일체의 관급식(官給食)을 거절하였다. 2월 4일 발병하여 옥에 갇힌 지 1개월도 못되는 그해 2월 16일(음력 1월 4일)에 순국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신암 노응규의 의병 활동은 47세를 일기로 종지부를 찍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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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환 사적비
정규환 선생은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 모집 운동을 하다 피체되어 순국하였다. 정규환은 경남 함양(咸陽) 사람이다. 1919년 11월 함양군을 무대로 독립운동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이 전민족적으로 전개되는 상황에서 정규환은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하고 평소 뜻을 같이 하던, 고재경(高載景)·정재원(鄭在元) 등을 동지로 규합하였다. 이들은 해외 독립운동세력을 지원하기 위해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함양군 수동면 내백리(內栢里)에 사는 부호 차우진(車佑鎭)을 그 대상으로 삼았다. 이들은 1919년 11월 15일 오전 1시 경 차우진에게 독립운동을 하는 결사대라 소개하고 운동자금을 제공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차우진은 가진 돈이 없다며 음력 10월 1일에 일금 10,000원을 제공할 것을 약정하였다. 그는 12월 12일 약정한 군자금을 수령하기 위해 약속장소로 갔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는 이 일로 인하여 1920년 1월 9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소위 강도로 징역 2년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21년 3월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이 악화되어 가석방되었으나, 1921년 4월 16일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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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승현 기념비
하승현(1895~1919) 선생은 경상남도 함양(咸陽) 사람이다. 1919년 4월 2일의 함양읍 장날을 이용하여 전개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날의 독립만세운동은 3월 28일의 함양읍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주동했던 정순길(鄭淳吉)·윤보현(尹普鉉)·정순귀(鄭淳貴)·노경식(盧璟植) 등 4명이 일본 헌병에게 체포된 사실에 분개한 김한익(金漢益)에 의하여 계획되었다. 이소식을 들은 그는 이에 적극 찬성하여, 4월 2일 아침 일찍 장터로 나아갔다. 오후 5시경, 3천여명의 장꾼이 모이자, 김한익이 자신이 만든 대형 태극기를 들고 장터 중아에 쌓아 놓은 소금가마니 위로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자, 3천여명의 군중은 독립만세를 따라 외쳤으며 그는 선두에 서서 장터를 시위행진하였다. 그러나 긴급 출동한 일본 헌병에 의해 김한익이 체포되어 가자, 격노한 시위군중은 헌병분견소로 달려가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그는 윤영하(尹榮夏)와 함께 분견소 정문을 박차고 돌진하였다. 그러나 사태의 급박함을 느낀 일본 헌병의 야만적인 무차별 사격으로 그는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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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익 기념비
김한익(1890~1933) 선생은 경상남도 함양(咸陽) 사람이다. 1919년 4월 2일의 함양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만세운동을 계획하던 중, 3월 28일의 함양읍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주동하던 정순길(鄭淳吉)·윤보현(尹普鉉)·정순귀(鄭淳貴)·노경식(盧璟植) 등 4명이 일본 헌병에게 체포된 사건이 있었다. 이에 격분한 그는, 다음 장날인 4월 2일을 이용하여 동지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하고 인근지역의 동지를 규합하였다. 그는 4월 2일 아침 일찍 자기 집에서 대형 태극기를 만들어 가지고 장터로 나아갔다. 오후 5시경, 3천여명의 장꾼들이 이에 호응하자, 그는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시위행진하였다. 그러나 긴급 출동한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었으며, 이해 7월 28일 대구(大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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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승현 사적비
하승현(1895~1919) 선생은 경상남도 함양(咸陽) 사람이다. 1919년 4월 2일의 함양읍 장날을 이용하여 전개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날의 독립만세운동은 3월 28일의 함양읍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주동했던 정순길(鄭淳吉)·윤보현(尹普鉉)·정순귀(鄭淳貴)·노경식(盧璟植) 등 4명이 일본 헌병에게 체포된 사실에 분개한 김한익(金漢益)에 의하여 계획되었다. 이소식을 들은 그는 이에 적극 찬성하여, 4월 2일 아침 일찍 장터로 나아갔다. 오후 5시경, 3천여명의 장꾼이 모이자, 김한익이 자신이 만든 대형 태극기를 들고 장터 중아에 쌓아 놓은 소금가마니 위로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자, 3천여명의 군중은 독립만세를 따라 외쳤으며 그는 선두에 서서 장터를 시위행진하였다. 그러나 긴급 출동한 일본 헌병에 의해 김한익이 체포되어 가자, 격노한 시위군중은 헌병분견소로 달려가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그는 윤영하(尹榮夏)와 함께 분견소 정문을 박차고 돌진하였다. 그러나 사태의 급박함을 느낀 일본 헌병의 야만적인 무차별 사격으로 그는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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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읍 만세기념비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장터에서 3·1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킨 선열의 뜻을 기리기 위하여 함양군이 주관하여 1985년 12월에 건립한 기념비이다. 신라 때 최치원이 인공 숲으로 조성한 함양상림(咸陽上林, 사적 154) 내에 세워진 기념비는 기단 위에 윗부분이 완만한 지붕 모양인 오각형의 화강석 비신(碑身)을 세운 형태로 높이는 2.3m, 둘레는 2.5m, 너비는 0.5m이며, 부지 면적은 13㎡이다. 비신의 앞면에는 왼쪽 중앙부에 '함양읍 만세기념비'라고 두 줄의 한글로 새긴 검은색 화강석판을 부착하였고, 뒷면 중앙부에는 '그날의 함성'이라는 제하의 비문을 새긴 검은색 화강석판을 부착하였다. 2002년 11월에 국가보훈처에서 현충시설로 지정하였다. 기념비 옆에 당시 만세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김한익(金漢益) 기념비와 하승현(河昇鉉) 사직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1919년 3월 28일에 전개된 함양읍의 독립만세운동은 정순길(鄭淳吉)·윤보현(尹普鉉)·정순귀(鄭淳貴)·노경식(盧璟植) 등이 주도하였다. 이들은 당시 함양면(지금의 함양읍) 장날에 만세 의거를 일으키기로 결의하고 태극기 제작과 동지 규합에 나섰다. 3월 28일 아침부터 유달리 많은 장꾼이 모여들자 일경의 경계가 더욱 삼엄해져서 정순길 등 4명을 거사를 일으킬 시기를 엿보다가 오후 3시경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 재빨리 준비한 태극기를 군중에게 나누어주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장터에 모인 수천 명의 군중이 일제히 호응하여 소리 높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자 일경이 총검을 앞세워 정순길 등 4명을 연행하였다. 이날 만세 시위에 참가하였던 김한익은 다음 장날에 다시 의거를 일으킬 결심을 하고 동지를 규합하였다. 4월 2일 정오 무렵 장터에 30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김한익이 나서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군중이 일제히 호응하여 시위 행진을 전개하였다. 일제 헌병이 김한익을 주동자로 연행하자 분노한 군중이 헌병분견소로 몰려가 연행자 석방을 요구하였다. 격노한 윤영하(尹榮夏)가 헌병분견소 문을 박차고 돌진하자 일제 헌병이 일제히 사격을 가하여 하승현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그의 아버지 하재연(河在衍)과 동생 하재익(河在翼), 윤영하 등이 총상을 입었다. 하재익은 총상의 여독으로 신음하다가 1922년 5월에 순국하였다. 함양읍 장터 시위로 체포된 김한익은 징역 1년 6월, 윤보현은 징역 8월 형의 옥고를 치렀으며, 정순길은 태형 90대의 형벌을 당하였다. 후에 하승현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이, 김한익·하재익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이, 정순길·윤영하에게는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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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용성 사리탑, 탑비
용탑선원은 3.1독립운동 민족대표 백용성 선생의 유덕과 유훈을 기리는 탑과 비를 수호하기 위하여 1945년 경성선사를 비롯한 문도들이 세운 절이다. 백용성 선사의 법명 용(龍)자와 사리탑의 탑(塔)자를 택하여 용탑선원(龍塔禪院)이라 칭하고 참선 정진하는 도량으로 건립하였다. 백용성 선사는 부처님의 정법을 전수한 명안조사로서 한문경전을 최초로 한글로 번역 출간하였으며, 일제강점기 왜색화된 계율을 불교 본래 모습으로 회복하는데 전력을 다하였다. 이후 대한불교 조계종 종정과 해인총림 방장을 역임한 고암 대종사께서 수십 년간 주석하다가 1988년 열반하였으며, 백용성선사의 독립정신과 애국애족의 충정을 기리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 상당부분 지원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확장 개축하였다. 현재 암자 서쪽에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92호 용성선사 승탑 및 탑비가 있고, 보물 제1865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72(大方廣佛華嚴經 周本 卷七十二)를 소장하고 있다. 백용성(1864~1940)은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이며, 불교인이다. 해인사(海印寺)에 입산하여 수도한 후, 전국의 사찰을 돌며 심신을 수련하였다. 국권침탈 후에는 불법(佛法)에 의해 민족을 구해야 한다는 강한 신념으로 포교와 민중계몽운동에 힘썼다. 1919년 2월 27일에는 한용운(韓龍雲)에게 3·1독립만세운동의 계획을 듣고 자기의 인장을 위탁하여 불교측의 민족대표로서 서명 날인하게 하였다. 3월 1일 손병희(孫秉熙) 등의 민족대표와 함께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일본경찰에 의하여 경시청총감부(警視廳總監部)에 구금되었다가,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1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불교종단의 정화를 위하여 노력하던 중, 대처승(帶妻僧)을 인정하는 일본정부 내무대신(日本政府內務大臣) 앞으로 건의서를 제출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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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용성 행적비
백용성(1864~1940)은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이며, 불교인이다. 백용성의 속명은 백상규(白相奎), 법명은 진종(震鍾), 법호는 용성(龍城)으로, 1919년 3·1 운동 당시 민족 대표이자 부산 범어사에서 활동한 승려이다. 해인사(海印寺)에 입산하여 수도한 후, 전국의 사찰을 돌며 심신을 수련하였다. 국권침탈 후에는 불법(佛法)에 의해 민족을 구해야 한다는 강한 신념으로 포교와 민중계몽운동에 힘썼다. 1919년 2월 27일에는 한용운(韓龍雲)에게 3·1독립만세운동의 계획을 듣고 자기의 인장을 위탁하여 불교측의 민족대표로서 서명 날인하게 하였다. 3월 1일 손병희(孫秉熙) 등의 민족대표와 함께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일본경찰에 의하여 경시청총감부(警視廳總監部)에 구금되었다가,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1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불교종단의 정화를 위하여 노력하던 중, 대처승(帶妻僧)을 인정하는 일본정부 내무대신(日本政府內務大臣) 앞으로 건의서를 제출하기도 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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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규현 묘
윤규현(1894~1965)는 1919년 3월 23일 삼가면(三嘉面)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김상준(金相峻)과 함께 광무황제의 장례에 참예하기 위해 상경하였다가, 서울의 3·1운동에 참가한 후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각자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만세시위운동을 추진하였다. 김상준은 산청군 신동면 평지리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주도하였으며, 윤규현도 독립만세운동을 벌이기로 하고 동지들을 규합해 갔다. 그는 한필동(韓弼東)·허동규(許東奎)·한식동(韓湜東)·윤구현(尹求鉉)·윤승현(尹承鉉)·허장(許 ) 등과 더불어 삼가면·가회면·상백면 등 각면의 동지를 규합하면서 거사 준비를 해 나갔다. 그들은 3월 23일 삼가시장에서 거사하기로 합의하였다. 3월 23일 상백면에서는 약 4,000여 명의 군중이 만세시위를 전개하여 면사무소를 불태운 후 삼가시장으로 모여들었다. 이렇게 모인 군중은 12,000∼13,000명에 달하였다. 오후 3시, 임종봉이 열띤 연설을 하고 있는 도중, 일본 헌병이 쏜 총탄에 대퇴(大腿)를 맞아 단상 아래로 떨어졌다. 이를 본 군중들의 분노가 일시에 폭발하여 곤봉과 낫을 들고 경찰 주재소와 우체국으로 몰려갔다. 이에 놀란 일경들은 일제히 그들에게 총격을 가하여 순식간에 13명의 순국자와 3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 일로 인해 윤규현은 붙잡혀, 이해 9월 23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