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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혁중 묘
안혁중 선생은 경상남도 함안(咸安) 사람이다. 1919년 3월 19일의 함안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광무황제(光武皇帝)의 인산에 참배 차 상경하였다가 독립선언식과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고 귀향한 조한휘(趙漢輝)·한종순(韓鍾淳)·이찬영(李讚榮)·조병흠(趙丙欽)·박건병(朴建秉)·강기수(姜琪秀)·한관렬(韓灌烈) 등에 의하여 계획되었다. 그들은 대산면(代山面)의 한문교사인 안지호(安知鎬)와 연락을 취하며 3월 19일의 함안읍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제작하는 한편, 이 계획을 각지에 알렸다. 이때 그도 이 계획에 적극 찬성하여, 3월 19일 정오, 읍내 봉성동(鳳城洞)에서 수백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오후 2시, 3천여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은 경찰주재소로 시위행진하였다. 이때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출동한 마산(馬山) 경찰서장 북촌(北村)과 현지 경찰들이 무력을 행사하려 하자, 격노한 시위군중은 도끼·몽둥이·돌을 들고 주재소로 들어가 공문서를 파기하고 건물을 파괴하였다. 또한 그들에게 독립선언서를 주고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으며, 그들이 이에 응하지 않자 구타하였다. 이어 시위군중은 폐쇄해 놓은 군청 문을 부수고 청사 안으로 들어가서 군수 민인호(閔麟鎬)를 붙잡아 제복과 모자를 벗기고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하며 구타하였다. 그리고 사기가 충천한 시위군중은 등기소·우편소·일본인 소학교를 차례로 시위행진하며 건물을 파괴하였다. 이때 조한국(趙漢國)·강상중(姜相中)이 마산의 일본군 수비대와 연락되는 전화선을 끊어 놓았는데, 오후 5시 40분경, 전화가 불통되자 비상사태가 돌발한 것으로 짐작하고 출동한 마산 중포병대대 병력 16명이 도착, 현지 경찰과 합세하여 총검을 휘두르며 주동자를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그도 이때에 체포되었으며, 이해 8월 20일 대구(大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이 확정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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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흠 묘
이경흠 선생은 경상남도 함안(咸安) 사람이다. 1919년 3월 20일의 군북면 군북(郡北面郡北)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3월 19일의 함안읍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주동하였던 조상규(趙相奎)·조용효(趙鏞孝)·이재형(愛在 )·조정래(趙正來)·조성규(趙聖奎)·조경식(趙璟植)·조형규(趙炯奎) 등에 의하여 계획되었는데, 그들은 미리 태극기를 제작해 놓고 인근지역에 이 계획을 알리는 등 사전준비를 진행하였다.이날의 독립만세운동은 오전 9시, 군북면 동촌리(東村里)의 신창학교(新昌學校)에서 50여명의 학생들에 의하여 시작되었는데, 이를 신호로 군북 장터에 있던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일제히 궐기하였다. 오후 1시경, 3천여명의 대대적인 시위군중이 만세운동을 전개하자, 군북경찰주재소의 경찰과 이곳에 파견되어 있던 마산(馬山) 중포병대대 병력 16명이 출동하여 공포를 발사하여 시위대열을 해산시켰다. 오후 5시경, 5천여명의 시위군중은 다시 궐기하여 경찰주재소로 달려갔다. 사태의 급박함을 느낀 일본 경찰이 공포를 발사하자, 격노한 시위군중은 투석으로 대항하여 주재소의 유리창과 벽을 파괴하였다. 그러자 일본 군경은 잔인하게도 시위대열에 조준사격을 감행하여 21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18명이 중상을 입었다.이때 선두에 서서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하던 그도 적의 흉탄에 맞고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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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숙 독립유공비
경남 함안(咸安) 사람이다. 일본 동경의 정칙중학교(正則中學校) 3학년 재학중인 1940년 여름에 방학을 이용하여 귀향해서, 모교인 함안읍내의 함안국민학교 운동회 때 운집한 군중앞으로 나아가 일제의 패망과 조국의 독립이 다가왔음을 외치며 독립만세를 고창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고 한다. 이로써 그는 1941년 8월 27일에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소위 육군형법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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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학교유허지비, 일심재유허비
1910년 애국지사 오봉(吾峯) 이연건(李鍊乾)선생과 백헌(白軒) 이중건(李重乾)선생께서 경남 함안군 여항면 외암리 두곡리(杜谷里)에 설립한 동명학교는 함안군에서 2번째 학교로서 최초의 사립학교이며, 설립배경과 취지는 일제치하의 유학 중심의 문중이 쇠퇴해감을 통감하고 민족 광복의 길은 2세 교육에 있음을 생각하여 신문학을 가르쳐 독립정신을 일깨우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오봉(吾峯) 이연건(李鍊乾), 문일(文一) 이백구(李伯九), 월담(月潭) 이학구(李鶴九), 백헌(白軒) 이중건(李重乾) 께서 일심재(一心齋) 재실을 철거하고 교실 6동을 건립하고, 1913년 개교는 하여 남녀공학 4년제로 처음엔 주간으로 수업하였으나 일제탄압에 야학으로 교육하였다, 학생들은 일백여명으로 적을 때에도 60여명은 되었고, 교사진은 이희석(李熹錫), 안기호(安畿鎬), 여해(呂海), 이영재(李榮宰), 안영중(安英中), 이필수(李弼洙), 박건영(朴鍵灵), 강기수(姜琪秀), 이은상(李殷相), 등은 민족사관이 뚜렷한 서울과 마산에서 초빙하여 이중건과 이연건 선생의 동지들이였다. 교사의 봉급은 이학구(李學九)의 도움을 받다가 그 사후는 이종곤(李鐘坤)의 도움을 받았다, 교육과목은 조선어, 노동독본, 노동산수, 국어와 일어(국어), 등이었고 국어는 일어로서 형식만 시간표에 넣고 가르치지 않았고, 민족의 정기를 고취하기 위하여 국사는 필수과목으로 사료되며, 동명학교는 함안 항일운동의 산실이 되었고 1919년 3월 19일 경남 함안군 함안읍 의거의 거점이 되어 의거에 사용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는 동명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손수 만들어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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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형 추모비
안재형 선생은 경남 함안 사람이다. 1919년 3월 19일의 함안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광무황제의 인산에 참배 차 상경하였다가 독립선언식과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고 귀향한 조한휘·한종순·이찬영·조병흠·박건병·강기수·한관렬등에 의하여 계획되었다. 그들은 대산면의 한문교사인 안지호와 연락을 취하며 3월 19일의 함안읍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제작하는 한편 이 계획을 각지에 알렸다. 이때 그도 이 계획에 적극 찬성하여 3월 19일 정오, 읍내 봉성동에서 수백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오후 2시, 3천여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은 경찰주재소로 시위행진하였다. 이때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출동한 마산 경찰서장 북촌과 현지 경찰들이 무력을 행사하려 하자, 격노한 시위군중은 도끼·몽둥이·돌을 들고 주재소로 들어가 공문서를 파기하고 건물을 파괴하였다. 또한 그들에게 독립선언서를 주고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으며, 이에 응하지 않자 구타하였다. 이어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폐쇄해 놓은 군청 문을 부수고 청사 안으로 들어가서 군수 민인호를 붙잡아 제복과 모자를 벗기고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하며 구타하였다. 그리고 사기가 충천한 시위군중은 등기소·우편소·일본인 소학교를 차례로 시위행진하며 건물을 파괴하였다. 이때 조한국·강상중이 마산의 일본군 수비대와 연락되는 전화선을 끊어 놓았는데, 오후 5시 40분경, 전화가 불통되자 비상사태가 돌발한 것으로 짐작하고 출동한 마산 중포병대대 병력 16명이 도착, 현지 경찰과 합세하여 총검을 휘두르며 주동자를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그도 이때에 체포되었으며, 이해 8월 20일 대구(大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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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원 묘
안재원 선생은 경남 함안 사람이다. 1919년 3월 19일의 함안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광무황제의 인산에 참배 차 상경하였다가, 그곳에서 전개된 독립선언식과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고 귀향한 조한휘·한종순·이찬영·조병흠·박건병·강기수·한관렬 등에 의하여 계획되었다. 그들은 대산면의 한문교사인 안지호와 연락을 취하며 3월 19일의 함안읍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제작하는 한편 이 계획을 각지에 알렸다. 이때 그도 이 계획에 적극 찬성하여 3월 19일 정오, 읍내 봉성동에서 수백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오후 2시, 3천여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은 경찰주재소로 시위행진하였다. 이때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출동한 마산 경찰서장 북촌과 현지 경찰들이 무력을 행사하려 하자, 격노한 시위군중은 도끼·몽둥이·돌을 들고 주재소로 들어가 공문서를 파기하고 건물을 파괴하였다. 또한 그들에게 독립선언서를 주고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이에 응하지 않자 구타하였다. 이어 시위군중은 폐쇄해 놓은 군청 문을 부수고 청사 안으로 들어가서 군수 민인호를 붙잡아 제복과 모자를 벗기고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하며 구타하였다. 그리고 사기가 충천한 시위군중은 등기소·우편소·일본인 소학교를 차례로 시위행진하며 그곳들을 습격하여 건물을 파괴하였다. 이때 조한국·강상중이 마산의 일본군 수비대와 연락되는 전화선을 끊어 놓았는데, 오후 5시 40분경, 전화가 불통되자 비상사태가 돌발한 것으로 짐작하고 출동한 마산 중포병대대 병력 16명이 도착, 현지 경찰과 합세하여 총검을 휘두르며 주동자를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그도 이때에 체포되었으며, 이해 8월 2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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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종순 묘
한종순 선생은 경상남도 함안(咸安) 사람이다. 1919년 3월 19일의 함안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광무황제(光武皇帝)의 인산에 참배 차 상경하였던 조한휘(趙漢輝)·조병흠(趙丙欽)·박건병(朴建秉)·강기수(姜琪秀)·한관렬(韓灌烈) 등과 그곳에서 전개된 독립선언식과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고 귀향하여 이들과 함께 대산면(代山面)의 한문교사인 안지호(安知鎬)와 연락을 취하면서 3월 19일의 함안읍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이 계획을 인근지역 주민에게 알렸다.3월 19일 정오, 그는 이찬영·이희석 등의 주동자들과 함께 인근의 비봉산(飛鳳山)에 올라가 고천제(告天祭)를 올린 후 곧 하산하여, 봉성동(鳳城洞)에 모인 수백명의 시위군중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누어주고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오후 2시, 3천여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은 경찰주재소로 시위행진하였다. 이때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출동한 마산(馬山) 경찰서장 북촌(北村)과 현지 경찰들이 무력을 행사하려 하자, 격노한 시위군중은 도끼·몽둥이·돌을 들고 주재소로 들어가 공문서를 파기하고 건물을 파괴하였다. 또한 그들에게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이에 응하지 않자 구타하였다. 이어 시위군중은 폐쇄해 놓은 군청 문을 부수고 청사 안으로 들어가서, 군수 민인호(閔麟鎬)를 붙잡아 제복과 모자를 벗기고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하며 구타하였다. 그리고 사기가 충천한 시위군중은 등기소·우편소·일본인 소학교를 시위행진하며 건물을 파괴하였다.이때 조한국(趙漢國)·강상중(姜相中)이 마산의 일본군 수비대와 연락되는 전화선을 끊어 놓았는데, 오후 5시 40분경, 전화가 불통되자 비상사태가 돌발한 것으로 짐작하고 출동한 마산 중포병대대 병력 16명이 도착, 현지 경찰과 합세하여 총검을 휘두르며 주동자를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그도 이때 체포되어 징역 4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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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구 구 묘
이인구 선생은 경남 함안 사람이다.1919년 3월 19일의 함안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광무황제의 인산에 참배 차 상경하였다가 그곳에서 전개된 독립선언식과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고 귀향한 조한휘·한종순·이찬영·조병흠·박건병·강기수·한관렬 등에 의하여 계획되었다. 그들은 대산면의 한문교사인 안지호와 연락을 취하며 3월 19일의 함안읍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제작하는 한편, 이 계획을 각지에 알렸다. 이때 그도 이 계획에 적극 찬성하여, 3월 19일 정오, 읍내 봉성동에서 수백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오후 2시, 그는 3천여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과 함께 경찰주재소로 시위행진하였다. 이때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출동한 마산 경찰서장 북촌과 현지 경찰들이 무력을 행사하려 하자, 격노한 시위군중은 도끼·몽둥이·돌을 들고 주재소로 들어가 공문서를 파기하고 건물을 파괴하였다. 또한 그들에게 독립선언서를 주고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으며, 그들이 이에 응하지 않자 구타하였다. 이어 시위군중은 폐쇄해 놓은 군청 문을 부수고 청사 안으로 들어가서 군수 민인호를 붙잡아 제복과 모자를 벗기고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하며 구타하였다. 그리고 사기가 충천한 시위군중은 등기소·우편소·일본인 소학교를 차례로 시위행진하며 건물을 파괴하였다. 이때 조한국·강상중이 마산의 일본군 수비대와 연락되는 전화선을 끊어 놓았는데, 오후 5시 40분경, 전화가 불통되자 비상사태가 돌발한 것으로 짐작한 마산 중포병대대 병력 16명이 도착, 현지 경찰과 합세하여 총검을 휘두르며 주동자를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그도 이때에 체포되었으며, 이해 8월 20일 대구복심에서 소위 소요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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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찬 묘
이종찬 선생은 경상남도 함안(咸安) 사람이다. 1919년 3월 19일의 함안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광무황제(光武皇帝)의 인산에 참배 차 상경하였다가 그곳에서 전개된 독립선언식과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고 귀향한 조한휘(趙漢輝)·한종순(韓鍾淳)·이찬영(李讚榮)·조병흠(趙丙欽)·박건병(朴建秉)·강기수(姜琪秀)·한관렬(韓灌烈) 등에 의하여 계획되었다. 그들은 대산면(代山面)의 한문교사인 안지호(安知鎬)와 연락을 취하며 3월 19일의 함안읍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제작하는 한편 이 계획을 각지에 알렸다. 이때 그도 이 계획에 적극 찬성하여, 3월 19일 정오, 읍내 봉성동(鳳城洞)에서 수백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오후 2시, 그는 3천여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과 함께 경찰주재소로 시위행진하였다. 이때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출동한 마산(馬山) 경찰서장 북촌(北村)과 현지 경찰들이 무력을 행사하려 하자, 격노한 시위군중은 도끼·몽둥이·돌을 들고 주재소로 들어가 공문서를 파기하고 건물을 파괴하였다. 또한 그들에게 독립선언서를 주고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으며 그들이 이에 응하지 않자 구타하였다. 이어 시위군중은 폐쇄해 놓은 군청 문을 부수고 청사 안으로 들어가서, 군수 민인호(閔麟鎬)를 붙잡아 제복과 모자를 벗기고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하며 구타하였다. 그리고 사기가 충천한 시위군중은 등기소·우편소·일본인 소학교를 차례로 시위행진하며 건물을 파괴하였다. 이때 조한국(趙漢國)·강상중(姜相中)이 마산의 일본군 수비대와 연락되는 전화선을 끊어 놓았는데, 오후 5시 40분경, 전화가 불통되자 비상사태가 돌발한 것으로 짐작한 마산 중포병대대 병력 16명이 도착, 현지 경찰과 합세하여 총검을 휘두르며 주동자를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그도 이때 체포되었으며, 이해 8월 20일 대구(大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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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장터 3.1독립운동기념비
1919년 3월 9일 함안군 연개장터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독립만세운동 당시 김세민의 개회사에 이어 유광도의 격려 연설과 김정오의 선언문 낭독이 있었고, 이를 계기로 경명학교 선생들을 선두로 많은 군중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감격에 북받쳐 울기도 하면서 산인면 각 부락을 순회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경남 함안군 칠북면 이령리 산111-1 3.1 독립운동 기념비(연개장터만세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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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상운 사적비
하상운 선생은 경남 함안(咸安) 사람이다. 1919년 3월 19일 경남 함안읍 장날에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고종황제의 인산에 참배 차, 서울에 올라갔다가, 독립선언식과 만세시위에 참가한 뒤, 함양으로 돌아온 조한휘(趙漢輝) 등 유지인사들에 의해 추진되었다. 이들은 귀향 즉시 대산면(大山面) 한문교사 안지호(安知鎬)와 연락을 취하며, 3월 19일 함안읍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인근 주민들에게 동참할 것을 권유하였다. 거사 당일인 3월 19일 정오경, 주도자들은 봉성동(鳳城洞)에 모인 수백여 명의 시위군중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누어주고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오후 2시, 하상운을 비롯한 3,000여 명의 시위군중은 주재소로 시위행진을 벌였다. 이때 일경들이 무력을 행사하자, 격노한 시위군중은 주재소로 들어가 공문서를 파기하고 건물을 파괴하였다. 이어 하상운은 시위군중들과 함께 군청으로 들어가 군수 민인호(閔麟鎬)를 붙잡아 제복과 모자를 벗기고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하며 구타 응징하였다. 그리고 사기가 충천한 시위군중은 등기소·우체국·일본인 소학교를 시위행진하며 건물을 파괴하였다. 그는 이 일로 붙잡혀 이해 5월 3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소위 소요, 보안법으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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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종일, 손연준 집
손양원 목사의 부친이신 애국지사 손종일 선생이 손양원 목사를 낳으신 생가 옆에 기념관을 만들었다. 손양원(손연준)은 경남 함안(咸安) 사람이다. 기독교 목회자로서 신사참배(神社參拜)를 반대하며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평소 항일의식이 투철하던 그는 1915년 칠원보통학교 재학시절부터 신사참배를 거부하였으며, 1919년 3·1운동 때에서는 서울의 중동학교 재학 중 만세시위에 참가했다가 퇴학을 당하였다. 이후 신학교(神學校)에 진학한 그는 신학교 졸업반 때인 1938년 기독교계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하여 총회에서 신사참배가 가결되는 것을 목도하면서 신사참배 반대투쟁을 벌이기로 의지를 굳혀 갔다. 졸업 후 그는 전남 여수(麗水)의 나병환자 요양소인 애양원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강연이나 회의 석상에서 신사참배의 부당성을 토로하고 일제가 패망할 것이라는 내용을 연설하는 등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그러던 중 1940년 9월 25일 일경에 붙잡혀 1941년 11월 4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