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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교재 묘
이교재(1887-1933)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경상남도, 경상북도 일대에서 「독립선언서」을 배부하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혀 진주형무소에서 3년간 복역하였다. 출옥 후에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가담, 경상남북도 상주대표로 임명되어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23년 9월 임시정부 밀명을 받고 국내 잠입하여 경북 통영군 통영면에서 활동하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혀 대구지방법원에서 5년의 징역형을 언도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출옥 후 상해로 망명하다가 신의주에서 붙잡혀 서울서대문형무소에서 2년 동안 복역한 뒤 다시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활약하였다. 그 후 김구(金九)의 위임장을 가지고 국내로 은밀히 들어와 군자금을 모집하거나 정보의 수집 및 전달, 밀정의 파악 등으로 맹활약중 일본경찰에 다시 붙잡혔다. 6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아 부산형무소에서 복역중 1933년 2월 옥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인정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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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승 묘
조계승(1880~1943)은 1919년 3월 19일의 함안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광무황제의 장례에 참배 차 상경하였다가, 독립선언식과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고 귀향한 조한휘(趙漢輝)·한종순(韓鍾淳)·이찬영(李讚榮)·조병흠(趙丙欽)·박건병(朴建秉)·강기수(姜琪秀)·한관렬(韓灌烈) 등에 의하여 계획되었다. 그들은 안지호(安知鎬)와 연락을 취하여 3월 19일의 함안읍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제작하는 한편 이 계획을 각지에 알렸다. 이때 그도 이 계획에 적극 찬성하여 3월 19일 정오, 읍내 봉성동(鳳城洞)에서 수백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오후 2시, 3천여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은 경찰주재소로 시위행진하였다. 이때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출동한 마산(馬山) 경찰서장 북촌(北村)과 현지 경찰들이 무력을 행사하려 하자, 격노한 시위군중은 주재소로 들어가 공문서를 파기하고 건물을 파괴하였다. 또한 그들에게 독립선언서를 주고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이어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폐쇄해 놓은 군청 문을 부수고 청사 안으로 들어가서 군수 민인호(閔麟鎬)를 붙잡아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하며 구타하였다. 그리고 시위군중은 등기소·우편소·일본인 소학교를 차례로 시위행진하여 건물을 파괴하였다. 이때 조한국(趙漢國)·강상중(姜相中)이 마산의 일본군 수비대와 연락되는 전화선을 끊어 놓았는데, 전화가 불통되자 비상사태가 돌발한 것으로 짐작하고 출동한 마산 중포병대대 병력이 현지 경찰과 합세하여 주동자를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그도 이때 체포되어 대구(大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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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승 창의비, 공적 안내판
서암 조계승(1880~1943)은 1919년 3월 19일의 함안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광무황제의 장례에 참배 차 상경하였다가, 독립선언식과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고 귀향한 조한휘(趙漢輝)·한종순(韓鍾淳)·이찬영(李讚榮)·조병흠(趙丙欽)·박건병(朴建秉)·강기수(姜琪秀)·한관렬(韓灌烈) 등에 의하여 계획되었다. 그들은 안지호(安知鎬)와 연락을 취하여 3월 19일의 함안읍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제작하는 한편 이 계획을 각지에 알렸다. 이때 그도 이 계획에 적극 찬성하여 3월 19일 정오, 읍내 봉성동(鳳城洞)에서 수백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오후 2시, 3천여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은 경찰주재소로 시위행진하였다. 이때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출동한 마산(馬山) 경찰서장 북촌(北村)과 현지 경찰들이 무력을 행사하려 하자, 격노한 시위군중은 주재소로 들어가 공문서를 파기하고 건물을 파괴하였다. 또한 그들에게 독립선언서를 주고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이어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폐쇄해 놓은 군청 문을 부수고 청사 안으로 들어가서 군수 민인호(閔麟鎬)를 붙잡아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하며 구타하였다. 그리고 시위군중은 등기소·우편소·일본인 소학교를 차례로 시위행진하여 건물을 파괴하였다. 이때 조한국(趙漢國)·강상중(姜相中)이 마산의 일본군 수비대와 연락되는 전화선을 끊어 놓았는데, 전화가 불통되자 비상사태가 돌발한 것으로 짐작하고 출동한 마산 중포병대대 병력이 현지 경찰과 합세하여 주동자를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그도 이때 체포되어 대구(大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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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대 기적비
조병대(1901~1978)은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19일 경상남도 함안군(咸安郡) 읍내 장터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은 군내 대산면(代山面), 가야면(伽倻面), 여항면(艅航面), 함안면 등의 주민들이 합세하여 대규모로 전개되었다. 사전에 지역 유지들의 협의로 계획된 만세시위에는 태극기와 「독립선언서」까지 준비되었다. 여항면(艅航面)에 거주하던 조병대는 사전에 만세시위 계획을 접하고, 태극기 등을 배포하며 거사를 준비하였다. 3월 19일 장날에 맞춰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는 시위대의 앞에 서서 독립만세를 부르며 경찰주재소로 행진했다. 오후 들어 2~3천명으로 늘어난 시위 군중은 주재소, 함안군청, 부산지방법원 함안출장소 등을 돌며 만세행진을 벌였다. 일본 군경은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조병대는 주재소를 습격하고 독립만세를 불렀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정부는 2019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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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3.1만세의거 독립선언서 낭독지(추산정)
마산 3.1만세의거 독립선언서 낭독 장소 안내판은 창원시 마산합포구 추산동 추산어린이집 앞에 위치해 있는 이곳은 '추산정'이라는 정자가 있던 장소로 대략 250~300년 전에 세워졌다고 전해진다. 일제초기시절 추산일대는 숲과 고목이 우거져 구마산 주민들의 피서 장소로 여름에는 피서객이 모여들었으며 활쏘기, 백일장 등 사람들이즐겨 찾는 문화공간으로 활용되었다. 특히 일제강점기에는 시국강연회를 비롯한 각종 민족운동을 위한 모임도 거행되었으며, 무엇보다 1919년 마산 3.1독립만세운동은 3월 3일 이곳에서 김용환이 독립선언서를 군중에 배포하는 일로 시작되었다. 추산정에 고종황제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군중들이 모인 가운데 김용환이 독립선언서를 기습 낭독하자 군중들은 일제히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후 3월 10일에는 뜻있는 사람들이 추산정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던 중 일본 헌병과 충돌해 모두 체포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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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철 묘
지전 김형철 선생(1891~1965)은 1891년 창원시 마산합포구 동성동에서 태어나 일본 오카야마(岡山)의전을 졸업하고, 1918년 10월 자신의 집 근처(현 한국투자증권 마산지점)에 최초의 경남 한국인 병원인 마산삼성병원을 개원하였다. 이 병원은 개원 4개월만인 1919년 3월 20일 함안 군복 독립운동과 4월 3일 마산삼진연합 독립운동 당시에 부상당한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을 무상으로 치료 활동을 펼쳤던 곳이다. 삼성병원은 개원 후 1919년 3·1운동 당시 부상자 치료에 정성을 다한 김형철 선생의 애국정신이 배어 있던 곳이다. 선생은 1919년 3월 20일 함안군북독립운동과 4월 3일 마산삼진연합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일제에 의해 다친 수많은 부상자를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병원 지하실 등에서 무상으로 치료해 주었다. 또 병원을 찾지 못하는 부상자는 왕진 가방을 들고 찾아가 직접 치료하기도 했다. 이런 사실을 알아차린 일본 경찰은 김 선생을 경찰서에 연금하기도 했다. 김 선생이 1965년 1월 세상을 뜨자 마산시의사회 등이 1965년 8월 15일 현 마산대학교 교정 한쪽에 선생의 기념비를 세웠다. 삼성병원은 1957년 3월 15일 폐업했다.김형철 선생은 일제의 지배정책에 반대해 결성된 신간회의 활동을 도운 것으로도 알려졌다. 김형철 선생의 이러한 항일운동은 김녕김씨 종친회가 그의 독립유공자 지정을 위해 관련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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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도석 기념비
명도석(1885~1954)는 1919년 3월 12일 경남 마산의 만세시위를 추진하기 위해 최용규(崔龍奎) 등과 사전협의하여 3월 21일 마산 장날을 기하여 거사키로 작정하였다. 또 당일의 시위를 위한 자금을 지원하는 한편 태극기와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을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행진 시위하게 하였다. 1920년 가을 미국에서 항일활동을 펴던 박용만(朴容萬)의 밀사와 중국에서 만나던 중 일경에게 붙잡혀 6개월간 구류되었다가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1921년 7월 20일 마산 노동야학의 교사가 되어 청소년들에게 한글을 가르쳐주며 항일교육에 힘썼다. 또한 1927년 7월 20일 신간회(新幹會) 마산지회창립대회(馬山支會創立大會)에서 간사로 선출되고, 1930년 3월 31일 제3회 정기총회에서 집행위원이 되어 신간회(新幹會) 해소시까지 활동하였다. 1940년 2월 일제는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요하였으나 끝까지 거부함으로써 민족정신을 고수하였으며, 1944년 8월 그는 여운형(呂運亨)의 주도로 전국에 걸쳐 결성된 건국동맹(建國同盟) 경상남도 조직책으로 위촉되어 활동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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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상 시비
노산 이은상(1903~1982)은 1928년에 계명구락부의 조선어사전 편찬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29년에는 월간잡지 『신생(新生)』의 편집장으로 활동하였다. 1931년 6월부터 동아일보에 35회에 걸쳐 빼앗긴 조국의 국토와 문화재에 얽힌 심정을 술회한 「향산유기(香山遊記)」를 연재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34년 5월 진단학회(震檀學會) 창립의 발기인으로 참가했다. 1934년 국가적 인재를 양성할 교육기관으로 양사원(養士院)을 설치할 것을 이극노(李克魯)·안호상(安浩相)·이윤재(李允宰) 등과 추진하였다. 1937년에 조선일보에 「한라산 등반기(漢拏山登攀記)」, 1938년에 「지리산 탐험기(智異山探險記)」를 발표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또한 1938년에 조선일보의 주간으로 있으면서 일본군의 명칭을 「아군(我軍)」, 「황군(皇軍)」으로 표기하는 것을 반대하고 동년 6월에 사직하였다. 1942년 10월에 일제가 한국민족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어 말살정책을 대폭 강화하고 한글 연구자들을 탄압하기 위하여 만들어 낸 조선어학회운동(朝鮮語學會運動)으로 구속되어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와 함흥경찰서에서 일제의 잔혹한 고문과 악형을 받았으며, 1943년 9월 18일 함흥지방법원에서 기소유예로 석방되었으나, 실질적으로 1년간의 옥고를 겪었다.일제강점기간에 한국민족 고유의 시조(時調) 분야에서 우수한 작품을 창작하여 민족문화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인정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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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신학교 표지석(마산회원구 회원동)
창신학교는 1906년 경상남도 마산에 설립되었던 초 · 중등 과정의 사립학교이다. 1906년 5월 17일에 이승규가 독서숙(讀書塾)을 설치하였고, 2년 후인 1908년에서야 인가를 받아 마산시 상남동에 사립 창신학교가 정식으로 설립되었다. 교육목적은 교육을 통하여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을 배양하고, 민족의식의 고취를 함양하는 데에 있었다. 따라서 교과서는 애국심과 관련된 내용이었고, 교정에 태극기를 달았으며 모든 모임에서 애국가를 불렀다. 창신학교와 의신여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은 1919년에 마산에서 발생한 ‘기미만세의거(己未萬歲義擧)’에서 그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 후 선교사들은 1924년 마산시 회원동(현 창신중·고등학교 자리)에 본격적으로 신축교사를 마련하여 정규 중등교육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일제 탄압 등의 여러가지 이유로 창신중학교는 1931년에, 창신초등학교는 1939년에 폐교 되었다. 1948년 창신학교가 재건된 이후 초등과는 재건하지 않고, 정부의 학제에 따라 중·고등학교 만을 재건 운영하고 있다. 창신학교는 멸실되고 터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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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중세 순국기념비
배중세(1893~1944)의 이명으로는 배행농이 있다. 배중세는 1919년 11월 9일 만주 길림성의 화성여관에서 의열단이 조직될 때 창단시부터 참여하여 단장인 동지 김원봉(金元鳳) 등과 함께 무력에 의한 항일독립투쟁을 결의하였다. 의열단은 길림에서 조직되었으나 일정한 소재지가 없이 만주·상해·남경·북경 등지로 전전하면서 무력을 유일한 독립수단으로 삼고 다수의 일제 요인과 주구를 처단하고 일제의 관공서도 많이 폭파하였는데 그 첫사업이 밀양경찰서 폭파거사였다. 1920년 초에 곽재기(郭在驥) 등이 만주로부터 폭탄 등 무기를 가지고 입국하여 먼저 밀양경찰서를 폭파하려고 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곽재기를 비롯한 동지들이 붙잡혀 투옥될 때 그도 이 거사의 연루자로 붙잡혀 1921년 6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대구에서 경북의열단(慶北義烈團)에 가담하여 활동하던 중 세칭 '양건호 사건' [양건호는 의열단원 이종암(李鍾岩)의 가명]에 연루·붙잡혀 1926년 12월 2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7년 12월 출옥후 항일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43년 1월 대구형무소에 구금되어 1944년 1월 23일 옥중 순국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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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중세 묘
배중세(1893~1944)의 이명으로는 배행농이 있다. 배중세는 1919년 11월 9일 만주 길림성의 화성여관에서 의열단이 조직될 때 창단시부터 참여하여 단장인 동지 김원봉(金元鳳) 등과 함께 무력에 의한 항일독립투쟁을 결의하였다. 의열단은 길림에서 조직되었으나 일정한 소재지가 없이 만주·상해·남경·북경 등지로 전전하면서 무력을 유일한 독립수단으로 삼고 다수의 일제 요인과 주구를 처단하고 일제의 관공서도 많이 폭파하였는데 그 첫사업이 밀양경찰서 폭파거사였다. 1920년 초에 곽재기(郭在驥) 등이 만주로부터 폭탄 등 무기를 가지고 입국하여 먼저 밀양경찰서를 폭파하려고 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곽재기를 비롯한 동지들이 붙잡혀 투옥될 때 그도 이 거사의 연루자로 붙잡혀 1921년 6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대구에서 경북의열단(慶北義烈團)에 가담하여 활동하던 중 세칭 양건호 사건 [양건호는 의열단원 이종암(李鍾岩)의 가명]에 연루·붙잡혀 1926년 12월 2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7년 12월 출옥후 항일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43년 1월 대구형무소에 구금되어 1944년 1월 23일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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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용봉 묘
안용봉(1912 - 1957)의 이명으로는 김상수(金尙洙, 金相洙), 김성수(金性洙), 김학주(金學周), 김학동(金學童), 김학수(金學壽), 김수개(金壽介), 안승현(安承賢), 김명산(金命山), 김달문(金達文), 김종수(金鍾洙)가 있다. 안용봉은 1930년대 서울과 부산 등지에서 적색노동조합과 청년회를 조직하는 등 신사상에 입각한 민족통일전선운동을 전개하였다.안용봉은 1933년 6월경, 서울 계동에서 안승락(安承樂)으로부터 「자본주의의 음모」, 「제2빈핍물어」 등을 교재로 사회주의 사상의 이론 및 실천에 관한 교육을 받았다.1934년 3월경, 서울 영등포에서 김희성(金熙星)을 만나 신사상을 교육하였다. 1935년 1월경, 김희성의 소개로 정재봉(鄭載鳳)과 만나 수차례 모임을 갖고 국제정세에 대한 검토, 자본주의국가 대 소비에트전쟁을 준비하는 적색노동조합 등의 실행에 관한 협의를 하였고, 7월에 당시 제사공장 직공이던 김희성과 모든 직공을 궐기시켜 동맹파업을 실행하였다. 8월 중순경 검거를 피해 창원·부산 지역을 전전하였다. 이후 안용봉은 1941년 3월경 체포될 때까지 9년여 동안 활동을 계속하였다. 안용봉은 1941년 5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미결구류 30일 통산)을 받아 17개월을 복역하고 1942년 10월 30일 출옥하였다.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