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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시환 추모비
문시환 선생은 1923년 1월부터 5월까지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개편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가 개최되자, 경남기성회(慶南期成會) 대표로 동 회의에 참가하여 노동위원(勞動委員)으로 선출되었다. 그리하여 국민대표회의에서 임시정부를 확대 개조하려는 안창호(安昌浩) 계열의 개조파(改造派) 간부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 방략과 독립운동단체의 통일기관을 조직하기 위해 활동하였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의 결말이 흐지부지 끝나게 되자, 상해에서 보천교청년회(普天敎靑年會) 대표 강홍렬(姜弘烈) 등 개조파 지지자들과 함께 의열단(義烈團)에 입단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동년 6월말 의열단 총회에서 일제의 중요기관 폭파 및 요인 암살 등의 거사를 대대적으로 실행하기 위해 필요한 군자금 모집을 결의하자, 그는 군자금 모집요원으로 국내로 밀파되어 활동을 전개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1924년 2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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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시환 묘
문시환 선생은 1923년 1월부터 5월까지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개편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가 개최되자, 경남기성회(慶南期成會) 대표로 동 회의에 참가하여 노동위원(勞動委員)으로 선출되었다. 그리하여 국민대표회의에서 임시정부를 확대 개조하려는 안창호(安昌浩) 계열의 개조파(改造派) 간부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 방략과 독립운동단체의 통일기관을 조직하기 위해 활동하였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의 결말이 흐지부지 끝나게 되자, 상해에서 보천교청년회(普天敎靑年會) 대표 강홍렬(姜弘烈) 등 개조파 지지자들과 함께 의열단(義烈團)에 입단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동년 6월말 의열단 총회에서 일제의 중요기관 폭파 및 요인 암살 등의 거사를 대대적으로 실행하기 위해 필요한 군자금 모집을 결의하자, 그는 군자금 모집요원으로 국내로 밀파되어 활동을 전개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1924년 2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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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외득 행적비
김외득 선생은 경남 양산 출신이다. 서울의 보성중학교(普成中學校)에 재학 중이던 그는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호응하여 1930년 3월 만세시위운동을 폈다. 그는 이 일로 인하여 학교를 퇴학당한 후 귀향하여 1931년 4월에 조직된 양산농민조합(梁山農民組合)에 가입, 소년부원(少年部員)으로 활동하였다. 양산농민조합은 1932년 2월 20일 양산사회단체회관에서 제3회 정기총회를 개최하고 첫째, 소작권 영구확립, 둘째, 지세공과금(地稅公課金)의 지주부담, 셋째, 소작료 4할납부 등을 결의하였으나 일경은 신영업(申榮業)을 비롯한 16명의 조합간부들을 체포하였다. 그는 김장호(金章浩)와 함께 피체된 조합간부들을 구출할 것을 결의하고 최학윤(崔學潤)·최해금(崔海金)·최달수(崔達守)·김태근(金泰根) 등 3백여명의 조합원들을 주도하여 동년 3월 16일 양산경찰서에서 조합간부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운동을 폈다. 이때 일경의 발포로 인하여 조합원 윤복이(尹福伊)가 순국하였다. 일단 양산협동조합 사무소로 피신한 조합원들은 다시 피체된 조합간부들을 호송하는 도중 구출할 계획을 세웠으나 일경의 급습을 받아 그를 비롯한 170여 명의 조합원이 피체되었다. 그는 이 일로 인하여 1932년 10월 13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소요죄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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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 항일독립운동기념탑
경남 양산시 물금읍 가촌리 960-21 근린공원 양산 항일독립운동기념탑은 양산에서의 항일 활동 및 독립운동을 기리기 위해 2009년 1월 세워졌으며, 신라부터 조선시대까지의 항일 공신 및 일제 침략기의 의병장 활동, 3.1 만세운동, 동경 2.8 만세운동부터임시정부, 국내투쟁, 농민운동 및 민족 의식 함양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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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영 묘
정진영 선생은 경남 양산 사람이다. 1932년 3월 16일 경남 양산군 양산농민조합원의 구금에 항의하여 조합원들과 함께 경찰서를 습격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었다. 양산농민조합은 1932년 2월 20일 양산 사회단체회관에서 제3회 정기총회를 개최하고 첫째, 소작권 영구확립, 둘째, 지세공과금(地稅公課金)의 지주부담, 셋째, 소작료 4할납부 등을 결의하였으나 일경은 신영업(申榮業)을 비롯한 16명의 조합간부들을 체포하였다. 그는 김장호(金章浩)와 함께 피체된 조합간부들을 구출할 것을 결의하고 최학윤(崔學潤)·최해금(崔海金)·최달수(崔達守)·김태근(金泰根)등 3백여 명의 조합원들을 주도하여 동년 3월 16일 양산경찰서에서 조합 간부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운동을 폈다. 이때 일경의 발포로 인하여 조합원 윤복이(尹福伊)가 순국하였다. 일단 양산협동조합 사무소로 피신한 조합원들은 다시 피체된 조합간부들을 호송하는 도중 구출할 계획을 세웠으나 일경의 급습을 받아 정진영을 비롯한 170여 명의 조합원이 피체되었다. 그는 이 일로 체포되어 1932년 10월 13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소요죄로 징역 10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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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현진 집
윤현진 선생은 경상남도 양산(梁山) 사람이다. 1906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명치대학교(明治大學校) 법과에 입학 법률공부를 하였다. 그는 재학 중 조선유학생학우회(朝鮮留學生學友會)를 조직하고 총무로 선임되어 항일투쟁을 하였다. 졸업 후 귀국함과 동시에 1909년에는 백산 안희제(安熙濟) 등과 비밀결사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조직하여 활동하는 한편, 양산(梁山)에 의춘(宜春)학원을 설립하여 후진을 양성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 때는 고향에서 만세시위에 적극 가담 활동하고, 압록강을 건너 단신 상해로 망명하였다. 그는 그곳에 모인 독립지사 수십 명과 교류하기 시작하였으며, 이시영(李始榮)·이동녕(李東寧)·김구(金九)·노백린(盧伯麟)·여운형(呂運亨)·신익희 등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고, 이어 초대 재무차장에 선임되어 임정의 재정문제를 해결하는 데 최대의 노력을 경주하였다. 특히 백산상회자금(白山商會資金) 30만원을 임시정부 군자금으로 헌납함으로써 재정압박을 다소 완화시켰다. 이어 임시정부 상임위원회에서 재무위원장으로 선임되었고, 제2차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다시 내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동년 5월에는 구급의연금모집위원이 되어 어려운 임시정부의 재정문제를 해결하는 데 주력하였다.1920년에는 독립신문사를 주식회사로 확장하고 안창호와 같이 주금(株金)모집의 발기인이 되어 홍보활동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1921년 5월에는 국민대표회의기성회(國民代表會議期成會)를 조직하여 활동했으며, 같은 해 중한국민호조사를 결성, 중국과 같이 공동의 적인 일본을 섬멸할 계획을 수립하고 실천할 것을 결의하였다. 구국의 일념에서 건강을 돌보지 않고 구국투쟁에 헌신하던 그는 상해에서 30세로 요절하였다. 일제의 신문인 조일신문(朝日新聞)에서도 "형극(荊棘)의 배일 수완가 윤현진의 사(死)"라는 제목 하에 그의 사망은 임시정부의 패망이라고까지 논평할 만큼 그의 위치는 뚜렷하였다. 그는 임정요인들의 애도 속에 국장(國葬)으로 상해의 정안사(靜安寺) 외인묘지에 안장되었다.(1995년 유해봉환, 대전현충원 안장)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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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병희 추모비
서병희 장군은 경남 양산(梁山) 사람이다. 원래 향리인 양산에서 한의업을 경영하다가 광무황제(光武皇帝)가 강제퇴위되고 군대해산이 이루어진 다음인 1907년 음력 11월에 임진·한탄강 유역에서 활동하던 의병장 허위(許蔿)의 휘하에 들어갔다. 그 뒤 허위로부터 영남으로 내려가 거사하라는 명령을 받고 1907년 12월 28일 해산군인 51명을 거느리고 영남으로 내려와 윤정의(尹政儀)와 제휴, 의병항전을 벌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1908년 5월 윤정의와 결별한 뒤에는 향리인 양산 일대에서 독자적으로 활동, 양산군 하서면(下西面)·하북면(下北面) 등지에서 일군수비대와 교전을 벌이기도 하였다.그 뒤 1908년 8월 18일 경남 산청(山淸)으로 옮겨 그곳에서 활동하고 있던 박동의(朴東儀) 의병자의 휘하에 들어가 그 부장(部將)이 되어 이학로(李學魯)와 함께 산청군 두량곡(斗量谷)에서 일군수비대와 교전, 큰 전과를 거두었다. 그 뒤 이학로 부대의 향도관(嚮導官)으로 있다가 1909년 2월 독립하여 의병장이 된 이후 경상남도 전역을 전전하며 전과를 올렸다. 부대를 편성한 뒤 함안군(喊安郡) 군북면(郡北面)의 일군수비대와 경찰서에 각성을 촉구하는 격문을 발송하였으며, 같은해 6월 20일에는 칠원(漆原) 주재소를 습격하여 일순사 1명에게 중상을 입히는 한편 군자금 8백냥을 거두기도 하였다. 이어 8월에는 부하의병 5명을 거느리고 창원군(昌原郡) 양전면(良田面) 호라리(虎羅里)에 사는 부호 박진사(朴進士)로부터 군자금 30원을 거두었으며, 9월에는 부하 18명을 거느리고 재무주사(財務主事) 1명을 처단하고 11월에는 의령(宜寧)·고성(固城) 등지에서 군자금 200원을 모집하고 일상인을 사살하는 등 경남 일대를 전전하며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1909년 10월 11일 창원군 내서면(內西面) 여율리(餘栗里)에서 밀고를받고 출동한 마산주재소 일경 2명에게 붙잡혀 순국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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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현진 순국비
윤현진 선생은 경상남도 양산(梁山) 사람이다. 1906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명치대학교(明治大學校) 법과에 입학 법률공부를 하였다. 그는 재학 중 조선유학생학우회(朝鮮留學生學友會)를 조직하고 총무로 선임되어 항일투쟁을 하였다. 졸업 후 귀국함과 동시에 1909년에는 백산 안희제(安熙濟) 등과 비밀결사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조직하여 활동하는 한편, 양산(梁山)에 의춘(宜春)학원을 설립하여 후진을 양성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 때는 고향에서 만세시위에 적극 가담 활동하고, 압록강을 건너 단신 상해로 망명하였다. 그는 그곳에 모인 독립지사 수십 명과 교류하기 시작하였으며, 이시영(李始榮)·이동녕(李東寧)·김구(金九)·노백린(盧伯麟)·여운형(呂運亨)·신익희 등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고, 이어 초대 재무차장에 선임되어 임정의 재정문제를 해결하는 데 최대의 노력을 경주하였다. 특히 백산상회자금(白山商會資金) 30만원을 임시정부 군자금으로 헌납함으로써 재정압박을 다소 완화시켰다. 이어 임시정부 상임위원회에서 재무위원장으로 선임되었고, 제2차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다시 내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동년 5월에는 구급의연금모집위원이 되어 어려운 임시정부의 재정문제를 해결하는 데 주력하였다.1920년에는 독립신문사를 주식회사로 확장하고 안창호와 같이 주금(株金)모집의 발기인이 되어 홍보활동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1921년 5월에는 국민대표회의기성회(國民代表會議期成會)를 조직하여 활동했으며, 같은 해 중한국민호조사를 결성, 중국과 같이 공동의 적인 일본을 섬멸할 계획을 수립하고 실천할 것을 결의하였다. 구국의 일념에서 건강을 돌보지 않고 구국투쟁에 헌신하던 그는 상해에서 30세로 요절하였다. 일제의 신문인 조일신문(朝日新聞)에서도 "형극(荊棘)의 배일 수완가 윤현진의 사(死)"라는 제목 하에 그의 사망은 임시정부의 패망이라고까지 논평할 만큼 그의 위치는 뚜렷하였다. 그는 임정요인들의 애도 속에 국장(國葬)으로 상해의 정안사(靜安寺) 외인묘지에 안장되었다.(1995년 유해봉환, 대전현충원 안장)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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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 3.1만세 운동 발원지 표지석
양산3.1만세운동 발원지이다. 양산의 3.1운동은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서 낭독행사에서 비롯된 대규모 만세운동보다 다소 늦은 1919년 3월 27일과 4월 1일, 두차례 거사가 진행된것으로 잊혀져만 가는 애향심과 주인의식을 되살리고 만고충절의 도시 양산의 얼을 기념하는 구심점을 형성하기 위해 봉사단체가 앞장서야 한다는 명제 아래 양산3.1의거때 목숨 걸고 앞장섰던 선열들의 거룩한 애국충절 사상을 기리고 3.1운동의 정신을 계승 발전하는 마음으로 양산3.1만세운동 발원지표지석을 2007년에 건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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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호 묘
1919년 3월 13일의 동래읍(東萊邑)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당시 동래고보(東萊高普)의 학생대표로서 3월 7일 부산상업학교(釜山商業學校) 학생 대표들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해 받고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는 김귀룡(金貴龍)·엄진영(嚴進永) 등 대표들과 함께 구체적으로 계획을 진행시키던 중, 3월 10일 동래고보 선배로서 경성고등공업학교(京城高等工業學校)에 다니던 곽상훈(郭尙勳)이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하여 수학교사 이 환(李環)과 만나 독립만세운동에 대하여 상의하고 동래고보 학생의거의 배후 참모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갔다. 그는 주동 학생들과 함께 하숙방을 전전하면서 협의한 끝에, 동래읍 장날인 3월 13일 오후 2시를 거사일로 정하고, 독립선언서·태극기·독립만세기를 제작하기로 하였다. 이에 그는 3월 11일부터 13일에 걸쳐 고영건의 하숙집에서 학교 등사판을 이용하여 5백여매의 독립선언서와 대형 독립기, 그리고 수백매의 태극기와 광무황제(光武皇帝)의 독살을 폭로하는 오왕약살(吾王藥殺)이라는 격문도 준비하였다. 3월 13일 오후 2시, 그는 김귀룡과 함께 동래군청 앞 광장에 모인 시위군중에게 인쇄물을 살포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점차 장꾼들까지 가담하여 읍내는 흥분의 도가니가 되었다. 이 광경을 보고 감격한 어떤 조선인 경찰은 제복과 모자를 벗어 던지고 독립만세를 소리높여 외쳤다. 그러나 50여명의 일본군과 기마경찰이 출동하여 야만적인 발포를 감행하면서 닥치는 대로 체포하였다. 그도 이때에 체포되었으며, 이해 4월 30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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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말복 묘
김말복(1909-1985)은 경상남도 양산(梁山) 사람이다. 1939년 양산 통도중학교(通度中學校) 교사로 재직하면서 일본의 국체(國體) 및 식민통치와 왜곡된 역사를 부정하고 한국의 민족사, 언어, 문학을 교육하여 항일 독립사상과 민족의식을 고취하였으며, 일제의 내선일체(內鮮一體) 강요의 부당성과 허구성 및 3·1운동때의 일제의 한국민족 탄압정책을 비판하며 애국적 인재를 양성하는데 진력하다가 1939년 4월 15일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42년 5월 12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받고 부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43년 12월 14일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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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흥교 묘
한흥교 선생은 부산 동래(東萊) 사람으로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일본 강산(岡山)의학전문학교 졸업 후인 1911년 10월에 상해로 망명하여 중국혁명군 구호의장(救護醫長)으로서 소주(蘇州), 진강(鎭江) 등 전선에서 많은 전투에 참가하였다. 1912년에는 북벌혁명군(北伐革命軍) 홍십자회(紅十字會) 대장으로 피명되어 활동하였으며, 항주(杭州) 및 북경(北京)의학전문학교의 교수로 임명되어 재직하였다. 1912년에 상해(上海)에서 신규식(申圭植) 조성환(曺成煥)과 함께 동제사(同濟社) 조직에 참여하고 독립운동자들의 의료를 전담하였으며, 1914년 상해에서 병원을 개업하여 계속 활동하였다. 이후 일시 귀국하였다가 다시 북경(北京)으로 돌아와 1919년 3·1독립운동 이후 신채호와 함께 중외통신사(中外通信社), 전광신보사(展光新報社) 창립에 참여하고 노령(露領), 미주(美洲), 중국 각지에 신문을 발송하여 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 1925년 6월에는 북경(北京)에서 원세훈(元世勳) 송 호(宋虎) 등 동지들과 선두자사(先頭者社)를 조직하고 기관지 "앞잡이"를 발행하는 등 중국국민과 연합하여 항일전선을 구축하기 위한 운동을 벌여, 한 중연합으로 "타도일본"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1935년에는 북경(北京), 천진(天津) 등을 돌아다니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산서성 태원(山西省 太原)에 정착하여 대동병원(大同病院)을 개업한 뒤, 항일운동을 지원하였다고 한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