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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봉 추모기적비
최수봉(1894-1921)은 경상남도 밀양 사람이다. 기독교 신자였던 그는 향리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27세가 되는 해 사립동화학교(私立東和學校)에 입학하여 전홍균 밑에서 2년간 수학한 후 다시 1912년 동래(東萊) 범어사(梵魚寺)의 불교 학교인 명정학교(明正學校)를 졸업하였다. 또한 1913년 평양 숭실학교(平壤崇實學校)에 입학하여 3년간 수학 중 학교가 폐교당하자, 중퇴하고 말았다. 그 후 독립쟁취의 신념을 갖고 남만주 지방으로 망명한 그는 봉천(奉天), 안동(安東) 등지를 왕래하며 동지를 규합하기도 하였으며 한때 평안도 정주(定州)에서 광산노동 또는 우편집배원 노릇도 하며 때를 기다렸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날 당시 의열단(義烈團)과 연락이 닿아 있던 고인덕이 폭약과 폭탄 제조기를 갖고 모종의 거사를 준비중에 있었는데 이때 그는 동지 고인덕에게 즉각 자신의 독립투쟁의 결의를 전하고 고인덕으로부터 폭탄과 제조기를 전해 받아 산속으로 들어가서 폭탄을 제조하여 송혜덕에게 일단 보관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1920년 12월 27일, 밀양경찰서의 와타나베 스에지로(渡邊末次郞) 서장이 전 서원을 모아놓고 훈시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즉시 폭탄을 찾아 경찰서를 폭파하기로 결정한 그는 준비된 2개의 폭탄을 경찰서를 겨냥하여 던지고 밀양 서문(西門)으로 도피하였다. 그러나 일경의 추격을 받게 되어 자결하려다 미수에 그치고 붙잡히고 말았다. 1921년 4월 16일 사형을 선고받은 그는 동년 7월 8일 오후 3시, 대구감옥 교수대에서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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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복 공적 안내판
김영복(1920-1993)은 경상남도 밀양 사람의 학생이었다. 대구사범학교 재학 중이던 1941년 1월에 동교생 임굉, 이태길, 최낙철 등과 함께 당시 대구 동운동(東雲洞) 소재 이무영의 집에 모여 항일학생결사 '연구회(硏究會)'를 조직하였다. 연구회는 조국 독립을 위한 실력 배양과 민족의식 고취를 목적한 단체로서, 회원들은 당시 국제정세를 분석하여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고 다가온 독립에 대비하기 위해 실력을 양성해서 독립 후 각기 전문 분야의 최고 권위자가 될 것을 다짐했다. 따라서 이들은 학술연구를 표방하면서 항일의식을 고양했으며, 비밀엄수, 매월 10일 연구발표와 하급생 지도 및 동지 포섭 등의 방침을 정하였다. 또한 각 부서를 정했는데 이때 그는 이과부 책임 겸 사무원의 일을 맡았다. 동회는 1941년 2월부터 동년 3월까지 여섯 차례의 모임을 갖고 활동 및 결의사항을 추진하였다. 그런데 회원들이 졸업을 하게 됨에 따라 이들은 장기적인 사업 계획을 구상하였다. 즉, 졸업 후에 각기 국민학교 교사로 부임하게 되면 우수한 아동들에게 수재교육을 실시하여 독립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현지의 활동 상황 및 성과를 매월 1회 사무원에게 보고하도록 하고 이렇게 보고된 상황은 취합하여 다시 전 회원에게 배부하기로 하였는데 이때 우송 방법은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공문을 가장하기로 했다. 그는 1941년 3월에 동교 졸업 후 충남 예산군 소재 신암공립국민학교에 근무하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앙양시키며 연구회의 사업을 수행하였다. 그런데 1941년 7월, 대구사범학교 윤독회의 〈반딧불〉이 일경의 손에 들어가게 됨에 따라 대구사범학교 비밀결사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도 일경에 붙잡혔으며 그 후 미결수로 2년여 동안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1943년 11월에 대전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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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기념비
경상남도 밀양에 위치한 3.1운동 기념비이다. 본 비는 1919년 4월 10일 청도면 인산리 주민들에 의해 일어난 만세운동을 기념하는 사적이다. 3월 13일 밀양면 만세운동에 이어 4월 10일 밤 10시경, 면민들이 인산리 전단 광장에 모여 나팔 소리를 신호로 만세운동을 전개하며 당시 광산업을 하던 일본인촌으로 몰려갔다. 그들은 일본인 집에 돌을 던지면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러한 청도면민들의 나라 사랑 정신을 기념하고 후세에 전하고자, 2007년 12월에 밀양문화원이 본 비를 건립하였다. 경상남도 밀양시 청도면 인산리 667-1 미리벌중학교 옆 주차장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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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범술 묘(부도)
최범술(1904-1979)은 경상남도 사천 사람이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해인사(海印寺) 지방학림(地方學林)에 재학하면서 서울에 유학 중인 최원형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받아서, 동지들과 함께 만여 매를 인쇄하여 합천(陜川), 의령(宜寧), 진주(晋州), 사천(泗川) 등 일대의 책임을 맡아 배포하면서 해인사를 중심으로 한 만세 시위를 주동하였다. 1931년 3월 한용운이 불교계의 비밀결사인 만당(卍黨)을 조직하자 이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피체되어 징역 6개월 형을 받았으며 그 후에도 수차례에 걸쳐서 피검되어 투옥되었다. 1942년 7월에는 김법린 등과 해인사, 다솔사 등에서 수강생들에게 한글을 가르쳤고,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 운동에 연루되어 홍원(洪原)경찰서에 수감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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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당 근거지(다솔사)
경상남도 사천 봉명산 자락 아래에 다솔사가 위치하고 있다. 다솔사는 511년(신라 지증왕 12)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영악사(靈嶽寺)로 창건하여, 636년(선덕여왕 5) 건물 2동을 신축하고 다솔사로 개칭하였다. 676년(문무왕 16) 의상(義湘) 대사가 다시 영봉사(靈鳳寺)라고 고쳐 부른 뒤, 신라 말기 도선(道詵) 국사가 중건하고 다시 다솔사로 이름을 고쳤다고 한다. 1500년의 역사를 간직한 다솔사는 경남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이며 일제강점기에 한용운이 수도하던 곳으로 항일기지의 역할을 했다. 또한 소설가 김동리가 한동안 머물며 <등신불>을 집필하기도 하였으며 1960년대 다솔사의 주지였던 효당 최범술은 다솔사 야산에서 차밭을 직접 가꾸고 차를 직접 만들어 세상에 알렸다. 만당(卐堂)은 불교계 청년들이 1930년 5월 한용운의 영향을 받아 호국 불교의 전통을 잇고, 한국 불교의 자주화와 대중화를 위하여 조직한 것이다. 만당은 국내뿐만 아니라 일본 도쿄에도 지부를 설치하여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만당 주도자들은 일제의 식민불교 정책에 대항하면서 다솔사를 근거지로 불교혁신과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뿐만 아니라 한용운, 김법린, 최범술 등은 다솔사를 기점으로 교육활동 또한 활발하게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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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근 묘
이영근(1894-1922)은 경남 사천(泗川) 사람으로, 1919년 4월 5일 경남 사천군 곤명면(昆明面) 금성리(金城里)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유림 출신 이영근은 3월 18일 진주의 만세운동 소식을 접하고 사천에서의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평소 항일의식이 투철하던 그는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상황에서 이웃의 진주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게 되자, 뜻을 같이하던 금성서당의 훈장 정원주, 문형근 등에게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주장하여 동조를 받아 거사를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이영근 등은 격문과 태극기 등을 인쇄하고 제작하는 한편 동지를 규합해 나갔다. 그리고 거사 당일인 4월 5일에는 마을 앞 덕천(德川) 변에서 주민 2백여 명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일제는 헌병대를 출동시켜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는데, 이영근은 만세현장에서 붙잡혔다. 그는 이 일로 1919년 5월 19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형(笞刑) 90도를 받았는데, 장독(杖毒)으로 고초를 겪다가 1922년 8월 8일에 29세로 요절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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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양 기미년 독립의거 기념비
경상남도 사천에 위치한 곤양 기미년 독립의거 기념비이다. 본 비는 1919년 3월 13일 곤양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기념하는 사적이다. 송전리에 살던 김진곤은 서울의 만세운동 소식을 듣고 이에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쓴 태극기를 만들고 객사 응취루 2층에 올라 만세를 높이 부르고, 주재소에 태극기를 투척하였다. 그리고 함께 역사 연구모임을 만들어 밤마다 국권 회복을 논의했던 박계술, 조효제, 박삼칠, 정각린, 강삼문, 문재규 등도 그날의 만세에 합세하였다. 14일에는 성내리에서 군중들과 더불어 만세를 불렀다.이후 곤양의 주민들은 만세 의거에 대한 강건한 의지를 끊임없이 이어갔다. 4월 6일, 4월 19일에는 곤양 보통학교 생도들이 김진곤 등과 더불어 곤양 시장에서 군중을 이끌어 만세를 불렀다.일제는 선조로부터 국가에 대한 애국심과 자긍심을 물려받은 곤양면민들을 강압과 폭력으로 의거를 혹 짓눌러 보기도 하고, 협박과 회유로 민족정기를 말살하려 하였으나, 곤양에서 퍼지는 독립의 강건한 의지는 막을 수 없었다. 오히려 곤양을 최초로 서부 경남 전역으로 만세 의거가 펼쳐져 나갔다. 또한 기미년 곤양의 항일정신은 여러 방향으로 투쟁을 이어갔다. 맥사리 출신의 경성고보 학생 최원형은 최범술에게 독립선언서를 우송하고, 서울에서 3.1 독립 만세에 참여하여 고초를 당하였다. 그 뒤 임시정부에 자금조달을 하는 등 독립운동에 전념하다가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성내리 출신 조우제는 곤양과 인근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전국적으로 활동하면서 비밀결사대를 조직하여 일제 관공서에 폭탄 투척 등의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기미년 이후, 곤양은 곤명 서포지역과 더불어 한편으로 문화운동을 전개하여, 문맹 퇴치, 농민 활동도 이어나갔다. 다솔사에서는 전국적으로 활동하던 만당을 통한 항일운동이 있었다. 위와 같은 곤양면민들의 공로와 애국정신을 기념하기 위해, 2020년 3월 2일에 곤양면장 황대성 외 수많은 면민들의 협찬으로 곤양 기미년 독립의거 기념비 추진위원회가 본 비를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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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형 기적비
최원형(1901-1945)은 경남 사천의 학생이었다. 1919년 당시 경성고등보통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그는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참가하여 만세 시위를 펼쳤으며 최범술에게 독립선언서를 우송하였고, 1921년 일본으로 유학한 후에도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고 한다.1941년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도발하자 이를 조국 독립의 호기로 생각한 그는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고자 일본에서 귀향하는 한 소녀를 통하여 고향 친구이며 자산가인 정재홍에게 독립운동 자금 5천 원을 송금해 달라는 밀서를 보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실이 일경에 밀고됨으로 인해 1942년 2월 일본에서 붙잡혀 경남경찰서로 압송되었다. 그는 1942년 6월 9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5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2월 8일 대전형무소에서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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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 항일운동 기념탑
경상남도 사천에 위치한 사천 항일운동 기념탑이다. 본 탑은 일제의 침탈로 빼앗긴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헌신한 사천인들의 애국정신을 기리는 사적이다. 사천에서는 독립을 위한 여러 사회단체들이 조직되었고, 유림들은 충효를 바탕으로, 다솔사에서는 만당이라는 항일 비밀결사 모임으로 독립운동에 앞장섰으며, 천도교 등 종교단체에서는 만방에 우리의 자주성을 알렸다. 사천인들의 항일정신을 기리고 널리 알리고자 이은식이 글을 짓고, 윤영미가 글을 쓰고, 사천시장 박동식이 본 탑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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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천 3.1운동 기념비
경상남도 사천에 위치한 우천 3.1운동 기념비이다. 1910년 일제는 을사늑약을 통해 조선의 국권을 침탈한 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각 분야에서 한민족을 폭력적으로 억압하고 수탈하는 무단통치를 실시했다. 이와 같은 일본의 폭압적이고 부당한 침략에 항거하기 위한 독립만세시위가 전국에서 일어났고, 또한 사천시 사남면 우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일제에 대한 항거를 준비하고 있던 김관일, 김주봉, 김기범, 문종석, 문명표, 김수명, 김또정일, 김몽우, 김재상, 김덕우, 김장언, 곽정삼, 곽응삼, 곽의삼, 문득용, 문석표, 문정표는 1919년 4월 중순경 터골산에서 일본 기마 헌병 3명이 능화마을 앞 대로를 지나가는 것을 보고 독립만세를 높이 외쳤다. 그러자 일본 헌병은 17명 전원을 체포하여 사천읍 헌병대로 연행한 뒤 잔악한 고문을 15일간이나 자행했고, 이들은 초주검의 상태에서 겨우 석방되었다. 민족의 독립을 위해 온몸을 바친 선조의 업적을 기리고 그 뜻을 후대의 모습으로 삼고자, 2016년에 사천시의 협조를 받아 본 비가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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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계묵 묘
손계묵(1893-1919)은 경상남도 사천 사람이다. 1919년 3월 18일 진주 의거 소식을 들은 사천보통학교 재학생 황순주, 박기현, 김종철은 진주에 있는 강대창의 주선으로 강달영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입수한 뒤 사천으로 돌아왔다. 이들은 동지를 규합하고 3월 21일 사천보통학교 졸업식이 끝나는 시간에 독립만세운동을 하기로 정하였으나, 이들은 헌병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헌병은 학생들에게 무자비한 고문을 퍼부었고, 이에 군민들은 분노하였다. 학생의거 이후 1919년 4월, 경남 사천군(泗川郡) 사천면(泗川面) 두량리(斗良里)에 손계묵은 유승갑과 함께 도로공사 인부의 선두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만세에 호응한 수백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사천읍으로 향하였지만, 이 정보를 듣고 출동한 일본 헌병들의 장검에 찔리고 난타를 당하여 수십 명의 군중이 부상을 입었다. 결국 손계묵은 체포되었고 부산형무소에서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14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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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의거 기적비
경상남도 사천에 위치한 3.1의거 기적비이다. 1919년 3월 1일을 시작으로 하여 전국에서 국권을 되찾기 위해 독립만세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사천에서는 3월 13일 곤양을 시작으로 하여 3월 21일에는 사천읍, 3월 25일에는 삼천포, 4월 5일에는 곤명, 4월 10일에는 서포에서 의거가 일어났다. 이러한 의거는 학생들과 지역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시민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들은 졸업식이나 시장 등 군중이 모일 수 있는 날이나 장소를 택하여 준비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누어주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때 수많은 사람들이 일제헌병에 의해 고초를 당하거나 목숨을 잃었다. 3.1의거 기적비는 위와 같은 애국지사들의 희생과 숭고한 정신을 길이 후세에 기리기 위해 1969년에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