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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지 집
김대지(1891-1942)는 경남 밀양의 독립운동가이다. 1910년 국권이 침탈되자 조국 광복에 헌신할 것을 결심하고, 비밀결사 일합사(一合社)를 조직하였으며, 황상규, 고인덕, 김원봉 등과 동화학원(東和學院)에서 2세 교육을 실시하였다고 한다. 1917년부터는 만주의 길림(吉林), 봉천(奉天) 지방을 왕래하면서 국권회복운동을 계획하다가 체포되어 1918년 5월 평양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개월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만주로 망명하여 동삼성(東三省)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계획하였으며, 이어서 김동삼, 이시영, 조소앙, 이회영 등과 함께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10일, 초대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어 의정 활동에 참여하였으며, 동년 11월에는 밀양군 조사원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그 후 임시정부 교통 차장, 내무위원 등을 역임하였으며, 1921년 11월에는 북경(北京)에서 임시정부와 별개로 조직된 조선공화정부(朝鮮共和政府)에 참여하여 이상용을 대통령으로 추대하고 그는 내무총장에 임명되어 소위 삼남파(三南派)에 의한 정부를 경영하기로 하였다. 1920년에는 김원봉의 의열단(義烈團) 조직을 지원했으며, 곽재기의 밀양경찰서 폭탄 투척 및 일제 요인 사살 계획에도 참여하였다. 이후 1925년까지 의열단장 김원봉의 자문에 응하여 무장 항일 투쟁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1928년에는 다시 만주로 들어가 길림성(吉林省) 영고탑(寧古塔)에서 의료업에 종사하면서 지하활동을 계속하다가 빈강성(濱江省) 파언현(巴彦縣)에서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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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환 집
김병환(1889-1947)은 경남 밀양 사람이다. 밀양에서 백미(白米) 소매상을 하던 중, 1919년 3·1독립운동이 발발하자 동향(同鄕, 같은 고향 출신)의 윤소룡 등과 함께 밀양의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붙잡혀 징역 6개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1년에는 동지 김재수, 곽재기, 이일경, 황상규 등 의열단원들과 조선총독부의 폭파를 준비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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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세주 집
윤세주(1901-1942)는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밀양에서 대규모 시위를 주동하였으며, 독립신문 밀양지국을 운영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1년 6개월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만주로 망명하여 유하현(柳河縣) 고산자(孤山子)에서 신흥(新興)학교에 입학하여 군사훈련을 받았다.1919년 11월 9일에 길림성(吉林省) 파호문(巴虎門) 밖의 화성여관(華盛旅館)에서 김원봉, 황상규, 곽재기 등과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고 무장항일투쟁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그 제1차 목표로 일제 핵심 인물 암살과,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등 주요 기관을 폭파할 계획을 세우고 같은 해 연말 경 국내에 특파되었다. 그러나 부산과 밀양에 반입된 폭탄과 무기 등이 일경에게 발각되어, 선언문 등과 함께 압수되었으며, 이에 윤세주는 동지들과 같이 체포되었다. 1921년 6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 형을 받고 다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민족문화사업에 참가하여 표면적으로는 중외(中外)일보 기자와 경남 주식회사 사장으로 일하다가 1932년 다시 남경(南京)으로 망명하였다. 이곳에서 조선민족혁명당 간부학교를 제1기생으로 수료하고, 정치철학 교관으로 근무하였으며, 1934년 3월에는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결성을 위한 집행위원에 선출되어 독립운동 전선의 통일을 기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또한 1935년 4월에는 낙양(洛陽)군관학교를 졸업한 군사 간부들에게 사회과학을 교육하는 교관으로도 활약하였다.1936년 8월 민족혁명당이 창립되자 그는 중앙집행위원과 중앙상무위원 등으로 선출되어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1938년 10월 중국 한구(漢口)에서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가 조직되자, 그는 한문반 주편위원(韓文班主編委員)에 임명되어 기관지 「전고(戰鼓)」를 편찬 발행하였다. 1942년 5월 태항산(太行山)에서 마전반격전(麻田反擊戰)에 참전하였다가 동년 6월에 전사하여 중국 태항산에 안장되었다. 이후 1950년에 중국 한단시 진기로예 국가열사능원으로 묘가 이장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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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3 밀양 만세운동 청동상
경상남도 밀양에 위치한 독립만세운동 청동상이다. 본 사적은 1919년 3월 13일 밀양면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기념하는 것으로, 해당 만세운동은 영남지역 최초로 천여 명이 넘게 참여한 대규모 만세운동이다. 3.13 밀양면 만세운동은 3.1운동을 직접 경험한 윤치형, 윤세주가 스승 전홍표와 논의하여 전개되었고, 장날인 3월 13일에 무려 천여 명이 참여한 대규모 만세운동이다. 이 사건은 영남지역 만세운동의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고, 이후 밀양에서 여러 만세운동이 일어나는 단초가 되었다. 경상남도 밀양시 의열기념관 옆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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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홍표 집
전홍표(1869-1929)는 경상남도 밀양 사람이다. 한말(대한제국의 마지막 시기)부터 밀양의 동화학교(東化學校), 개창학교(開昌學校), 밀흥야학교(密興夜學校) 등 다수의 사립학교 설립에 기부금을 내고 교육 계몽운동에 종사하였다. 일제 강제 병합 이후인 1910년대에도 동화중학교 교장으로서 1914년 3월 강제 폐교될 때까지 학생들에게 국권 회복과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교육을 펼쳤다. 그 덕분에 동화중학교에서는 의열단(義烈團) 단장 김원봉을 비롯하여 윤세주, 김상윤, 한봉근, 최수봉 등 다수의 항일 독립운동가가 배출될 수 있었다.1921년 7월 13일 밤, 밀양군 밀양면(密陽面) 청년회관에서 한인수, 하경용 등 수십 명과 모여, 같은 날 사형집행을 당한 동화학교 제자 최수봉을 위한 부의금 모집을 발의하였다. 이후 한인수 외 3명이 모집위원이 되어 부의금을 모집하여 유족들에게 전달하였다. 또한 밀양청년회(密陽靑年會) 회원 30여 명과 함께 최수봉의 유해를 인수받아 밀양청년회 주최로 ‘사체환영회(死體歡迎會)’를 개최하고 최수봉의 고향인 상남면(上南面) 마산리(馬山里)에 안치하고 장사를 지낼 수 있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활동으로 인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21년 10월 13일 부산지방법원(釜山地方法院)에서 벌금 100원에 처해졌다. 이에 불복하여 공소를 제기했는데, 1922년 1월 21일 대구복심법원(大丘覆審法院)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이른바 ‘1920년 부령(府令) 제160호 및 기부금모집단속규칙(寄附金募集取締規則) 위반’으로 징역 10개월(미결구류 90일 형기산입)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다시 상고를 제기하였으나, 같은 해 3월 9일 고등법원(高等法院)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18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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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규 집
황상규(1891-1931)는 경남 밀양 사람으로서 일찍이 교육사업에 뜻을 두고 밀양에서 고명학원(高明學院)에 교사로 재직하면서 ≪동국사감(東國史鑑)≫이란 역사 교재를 저술하였다. 또한 전홍표가 경영하던 동화학원(東化學院)을 인수하여 청년학도 200여 명을 배출시켰다. 그러나 일경의 탄압에 의해 1918년 만주(滿洲) 길림(吉林)으로 망명하였다. 이곳에는 일찍부터 여준, 유동열, 김동삼, 김좌진 등의 쟁쟁한 독립운동가들이 있어서, 이들과 함께 3·1독립선언서에 앞서 독자적으로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를 발표하고, 1919년 4월 대한정의군정사(大韓正義軍政司)에 가담하여 회계과장(會計課長) 일을 맡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그리고 황상규는 1919년 11월 9일 김원봉 등과 함께 의열단을 조직하여 일제 기관의 파괴와 침략자 및 매국노의 암살 등을 꾀하였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김원봉, 이성우 등은 중국 상해(上海)에서 필요한 폭탄과 권총 등을 구입하였고, 1920년 5월 13일 황상규는 곽재기 등과 함께 서울에 잠입하여 거사 대상을 물색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경기도 경찰부에 탐지되어 결국 동년 6월 한인 형사 김태석(金泰錫)에게 모두 붙잡히고 말았다. 1921년, 7년 징역형을 선고받은 그는 만기 출옥 후에도 조국광복 투쟁에 매진하여, 신생활사(新生活社)를 창건하고 신간회(新幹會) 중앙간부,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 간부 등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1920년대 후반부터 1931년 9월 1일 고향에서 별세하기까지 향리에 노동야학원(勞動夜學院)과 여자야학원(女子夜學院)을 설립하여 교육을 통한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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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보은 집
윤보은(1898-1945)은 경상남도 밀양 사람으로, 1919년 3월 13일 밀양 장날에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주도하였다. 밀양 장날의 만세운동은 윤세주, 윤치형 등이 고종 인산(因山)에 참례하였다가, 만세운동을 목격하고 돌아와 이 사실을 동화학교(同和學校) 교장 전홍표에게 전하면서 추진되었다.전홍표는 밀양지역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힘을 쏟았으므로 많은 청년들이 그를 따랐다. 그리하여 3월 12일 밤 윤보은, 윤세주, 박만수, 정동찬 등과 모여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의논하고 윤세주 집을 거점으로 준비에 착수하였다. 이들은 3월 13일 밀양 읍내 장날을 거사 일로 정하고, 독립선언서를 밀양면사무소와 부북면(府北面)사무소 등지에서 등사판을 몰래 가져와 위북산(偉北山)에서 밤을 새워 수백 매를 인쇄하는 한편, 수백 장의 태극기도 제작하였다.거사 당일 오후 1시 30분 무렵, 윤보은 등은 윤세주의 독립선언서 낭독에 이어 미리 준비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군중들에게 배포하면서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때 장터에는 수천의 군중이 운집하여 함께 만세를 부르면서 시위행진을 벌였다. 밀양 거리는 온통 만세 군중의 시위로 아수라장이 되었고, 부산에서 출동한 일본 헌병과 수비대는 주모자 체포에 무자비한 행동을 가하였다. 그러던 중에도 다음날인 3월 14일에는 밀양공립보통학교 학생 160여 명이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며 거리로 뛰쳐나와 행진하니 거리의 주민들도 이에 호응하였다. 결국 군경의 탄압으로 시위대열은 해산되고 윤보은 등의 주모자는 일본 헌병에 의해 붙잡혔다. 윤보은은 이 일로 1919년 4월 14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3개월 형을 받고 부산감옥에서 4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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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방우 집
윤방우(1896-1927)는 경상남도 밀양 사람으로, 1919년 3월 13일 밀양 장날에 전개된 독립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밀양 장날의 만세운동은 윤세주, 윤치형 등이 고종 인산(因山)에 참례하였다가, 만세운동을 목격하고 돌아와 이 사실을 동화학교(同和學校) 교장 전홍표에게 전하면서 추진되었다. 전홍표는 밀양지역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힘을 쏟았으므로 많은 청년들이 그를 따랐다. 그리하여 윤방우는 권재호, 김병환, 이장수, 윤보은, 김소지 등과 함께 전홍표의 지도에 따라 만세운동 계획을 진행해 나갔다. 이들은 3월 13일 밀양 읍내 장날을 거사 일로 정하고, 독립선언서를 밀양면사무소와 부북면(府北面)사무소 등지에서 등사판을 몰래 가져와 위북산(偉北山)에서 밤을 새워 수백 매를 인쇄하는 한편, 수백 장의 태극기도 제작하였다.거사 당일 오후 1시 30분 무렵, 윤보은 등은 윤세주의 독립선언서 낭독에 이어 미리 준비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군중들에게 배포하면서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때 장터에는 수천의 군중이 운집하여 함께 만세를 부르면서 시위행진을 벌였다. 윤방우는 시위대의 선봉에 서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부산에서 출동한 일본 헌병에 의해 붙잡혔다. 그는 이 일로 1919년 4월 14일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를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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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형 집
윤치형(1893-1970)은 경남 밀양 사람이다. 1919년 3·1 독립운동 때에는 부산(釜山)에 거주하였던 윤치형은 3·1 독립운동 당시 부산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는 이유로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출옥 후, 그는 만주(滿洲)로 망명하여 같은 해 11월 9일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였다. 의열단은 조선독립의열단(朝鮮獨立義烈團)으로도 불리는 비밀단체로서 국내에 있는 일제의 중요기관과 매국노 및 친일파를 처단하여 조국 독립을 쟁취하려는 조직이었다. 단원으로는 단장인 김원봉을 비롯하여 황상규, 이동암, 이성우 등 13명이었다. 1920년에 의열단의 국내 거사 대상 중 하나인 밀양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이 최수봉의 주도로 12월 27일에 일어나자, 그는 이 거사에 사용된 폭약의 구입과 국내 반입과 관련하여 붙잡혔다. 결국 1921년 6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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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수, 강덕수 집
강인수(1900-1992)는 경남 밀양의 독립운동가이다. 김원봉이 조직한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군사훈련의 필요성을 느끼고 1924년 10월에 중국군 간부 양성 학교인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제4기 보병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후 중국군 장교로서 교관(敎官), 중국군 배련영장(排連營長) 부단장 주임(副團長主任) 등을 역임하면서 대일전(對日戰)에 참여하였다. 1940년 7월부터는 조선의용군 및 조선민족혁명당 특파원 등으로서 활동하기도 하였다.광복 후에는 임시정부가 환국을 결정함에 따라 일본군 내의 한적 사병 접수 업무 및 광복군의 확군 문제와 일본군 무장해제의 협조, 그리고 한국 교포들의 생명과 재산 보호를 위한 임시정부와 중국 정부 간의 합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방침에 따라 광복군 총사령 이청천 장군의 명령으로 광복군 각 지대에서 일본군 점령지역에 군사특파단을 파견하도록 하는 동시에 일본군 내 한적 사병을 접수하여 잠편지대(暫編支隊, 잠정적으로 편성된 지대라는 뜻으로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올 일본군 출신 조선 병사들을 잠정적으로 수용하는 부대)를 주요 도시에 설치하게 되었다. 한적 사병의 인원을 약 10만 명으로 보고 기설 3개 지대 외에 7개 잠편지대를 증설하여 도합 10개 지대로 확장하며 각 지대는 완전한 사단 편제로 조직한다는 계획이었다. 따라서 잠편지대는 1945년 10월 중순부터 10월 말까지 전방에서 각각 조직되었다. 이때 그는 광동(廣東) 잠편지대에 참모로 배속되어 지대장인 최덕신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1951년에는 중국군 육군 소장에 승진되어 계속 복무하다가 1965년에 퇴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강덕수(1904-1938)는 1919년 당시 그는 밀양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15세의 소년이었다. 그는 동교 졸업생인 윤차암, 윤수선, 김성선, 박소수 등과 함께 4월 2일에 영남루(嶺南樓) 뒷산으로 놀러 갔다가, 부산공립상업학교에 진학한 윤수선으로부터 부산에서는 학생들이 조선의 독립을 위해 만세를 고창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이에 그는 친구들에게 밀양에서도 학생들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하자고 제의하였고, 친구들도 그의 발의에 동의하여 그들은 2일 밤 밀양공립보통학교 생도들을 규합하여 만세 시위를 실행할 것을 결의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동교 졸업생인 정선호의 집에 들러 그에게도 만세 시위의 실행 계획을 말하고 동의를 얻어 총 6인이 함께 주도하기로 하였다. 4월 2일 저녁 식사 후 그와 동지들은 생도들에게 학교 교정으로 모일 것을 권유하였다. 20~30명의 생도들이 모이자, 그들은 생도들을 학교 화장실 부근에 대기시켰다가 대오를 이루어 행진을 시작하였다. 이때 박차용은 나팔을 불며 생도들의 선두에 섰고, 그와 동지들도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학교 서쪽 무안가도(武安街道)를 행진하고 우측으로 돌아 북문(北門)까지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날의 만세 시위로 강덕수는 일경에 체포되어 1개월여의 옥고를 치르던 중, 1919년 5월 5일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4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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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최초 밀양만세의거 발상지
경상남도 밀양에 위치한 영남최초 밀양만세의거 발상지이다. 1919년 서울에 올라가서 3.1 만세운동을 직접 목격한 윤세주와 윤치형은 독립선언문을 구해 밀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선생 전홍표와 황상규의 지도 아래, 김병환, 이장수, 정동찬, 박만수 등 19명의 동지들과 규합하여 3월 13일을 기해 밀양 장터에서 1천 명의 군중이 참여한 가운데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3.13 만세운동은 영남 지역에서 최초로 일어난 만세운동으로, 이후 여러 만세운동이 일어나는 단초가 되었다.본 사적은 경남 밀양시 내일동 268-1, 내일동 행정복지센터 건너편 밀양 관아지 정문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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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수 집
이장수는 경상남도 밀양 사람으로, 1919년 3월 13일 경남 밀양군에서 밀양 장날을 기해 일어난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밀양 장날의 만세운동은 윤세주, 윤치형 등이 고종 인산(因山)에 참례하였다가 만세운동을 목격하고 돌아와 이 사실을 동화학교(同和學校) 교장 전홍표에게 전하면서 추진되었다. 전홍표는 밀양 지역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힘을 쏟았으므로, 많은 청년들이 그를 따랐다. 그리하여 이장수, 윤소룡 등은 전홍표의 지도에 따라 만세운동 계획을 진행했다. 이들은 3월 13일 밀양 읍내 장날을 거사 일로 정하고, 독립선언서를 밀양면사무소와 부북면사무소 등지에서 등사판을 몰래 가져와 위북산(偉北山)에서 밤을 새워 수백 매를 인쇄하는 한편 수백 개의 태극기도 제작하였다. 거사 당일 오후 1시 30분에 이장수 등 중심인물들은 윤세주의 독립선언서 낭독에 이어 밀 준비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배포하면서 독립 만세를 고창하였다. 이때 장터에는 수천의 군중이 운집하여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그는 시위대의 선봉에 서서 만세 시위를 전개하다가 부산으로부터 출동한 일본 헌병에 의해 피체되었다. 그는 이 일로 1919년 4월 14일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 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항일의지를 굽히지 않고 독립운동의 방도를 모색하던 중 1920년 10월 고인덕, 최수봉 등과 함께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한 뒤 1920년 12월 최수봉이 추진하던 밀양경찰서 폭파 의거를 지원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