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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관암(이상태 선생 독립운동 장소)
1943년 1월 27일 독립 운동가 하전 이상태가 독립운동 장소로 해관암을 창건하였다. 1948년 4월경 설석우 스님을 모시고 법당, 요사체를 작은 규로모 중창건하여 남해지역 불교불사에 큰 서원을 세웠다. 또한 인재양성 교육 육성사업 경남해양과학고(남해수고)에도 큰 기여를 하였다.그 후 47년이 지난 1989년 7월 현 주지 지성스님의 원력으로 현 도량의 가탑으로 재 중창건되어 창건조부님의 뜻을 이어 불교불사에 전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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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태 기공비
이상태(1891-1955)는 경상남도 남해 사람이다. 1920년 2월 16일, 서울에서 김광제, 문탁, 김영만, 이종만 등과 더불어 조선노동대회(朝鮮勞動大會)를 조직하였다. 조선노동대회는 노동자의 상부상조와 인격 및 지적향상을 도모할 것을 목적으로 한 계몽적 노동단체였다. 초대 회장은 김광제였으나 그가 사망하자 동년 8월 임원진을 개편하였는데 회장에 문탁, 부회장에 정태용, 총무에 윤철중, 서무에 송우익, 영업에 김호연 등이었고 이상태는 재무를 담당하였다. 동회는 전국적으로 지부를 설치하고 지방의 기존 노동단체의 규합에 힘써, 한때 회원이 8천여 명에 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후 내부 갈등과 재정난으로 활동이 위축되던 중, 이상태는 1924년 4월에 통일적이고 전국적인 노동단체인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에 합류하였다. 한편 그는 김종명, 김인섭과 함께 1919년 8월에 조직된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이들은 일제의 탄압이 심하여 국내 각지의 독립운동이 점차 약화되어감을 개탄하고 이를 다시 중흥할 목적으로 1921년 11월 15일 경기도 인천의 인해여관(仁海旅館)에서 한흥회(韓興會)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이후 국내에서 독립전쟁이 일어날 때 폭탄, 권총 등의 무기가 필요할 것을 예상하고 이의 사용 방법을 미리 습득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중국으로 가서 무기 사용법을 익히기로 하고 1921년 12월 16일 인천에서 출발하여 중국 상해(上海) 방면으로 향하던 중 경의선(京義線) 차련관(車輦館)에서 일경에 붙잡혔다. 이상태는 1922년 6월 17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소위 제령 7호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23년 7월 25일 가출옥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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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호 비
윤병호(1889-1974)는 경상남도 남해의 독립운동가이다. 1909년에 안희제, 남형우, 서상일, 이원식, 김동삼, 이시열, 박중화, 배천택 등 8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한 신민회(新民會) 계열의 비밀 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창립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3 1운동 직후에는 부산에서 안희제가 설립한 백산상회(白山商會, 뒤에 백산무역주식회사(白山貿易株式會社)로 개편)의 지배인 겸 취체역(取締役, 주식회사의 이사)이 되어 실질적으로 이 회사를 관리하였다. 이 회사는 단순한 무역회사가 아니라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고 국내와의 연락을 담당하는 연락 기관이었다. 1919년 11월에는 애국청년들을 민족간부로 양성하기 위하여 안희제와 함께 기미육영회(己未育英會)를 조직하여 다수의 애국청년들을 인재로 양성하고 외국으로 유학을 보내기까지 했다. 그 결과, 기미육영회의 장학생 중에서 다수의 독립운동가가 배출되었다. 1929년 10월 조선어연구회(朝鮮語硏究會, 조선어학회의 전신)가 조선어사전 편찬회(朝鮮語辭典編纂會)를 조직하자 이에 가입하여 적극적으로 사전 편찬사업에 참가했다. 그러나 결국, 1942년 10월에 일제가 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어 말살 정책을 대대적으로 강행하고 한글학자와 한글운동가들을 투옥하기 위하여 만들어 낸 조선어학회 사건(朝鮮語學會事件)으로 구속되어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와 함흥경찰서에서 잔혹한 고문과 악형을 받고, 1943년 9월 18일 기소유예로 석방되었으나 실질적으로 2년의 옥고를 겪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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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호 묘
윤병호(1889-1974)는 경상남도 남해의 독립운동가이다. 1909년에 안희제, 남형우, 서상일, 이원식, 김동삼, 이시열, 박중화, 배천택 등 8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한 신민회(新民會) 계열의 비밀 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창립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3 1운동 직후에는 부산에서 안희제가 설립한 백산상회(白山商會, 뒤에 백산무역주식회사(白山貿易株式會社)로 개편)의 지배인 겸 취체역(取締役, 주식회사의 이사)이 되어 실질적으로 이 회사를 관리하였다. 이 회사는 단순한 무역회사가 아니라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고 국내와의 연락을 담당하는 연락 기관이었다.1919년 11월에는 애국청년들을 민족간부로 양성하기 위하여 안희제와 함께 기미육영회(己未育英會)를 조직하여 다수의 애국청년들을 인재로 양성하고 외국으로 유학을 보내기까지 했다. 그 결과, 기미육영회의 장학생 중에서 다수의 독립운동가가 배출되었다.1929년 10월 조선어연구회(朝鮮語硏究會, 조선어학회의 전신)가 조선어사전 편찬회(朝鮮語辭典編纂會)를 조직하자 이에 가입하여 적극적으로 사전 편찬사업에 참가했다. 그러나 결국, 1942년 10월에 일제가 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어 말살 정책을 대대적으로 강행하고 한글학자와 한글운동가들을 투옥하기 위하여 만들어 낸 조선어학회 사건(朝鮮語學會事件)으로 구속되어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와 함흥경찰서에서 잔혹한 고문과 악형을 받고, 1943년 9월 18일 기소유예로 석방되었으나 실질적으로 2년의 옥고를 겪었다.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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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임춘 묘
정임춘(1890-1956)은 경상남도 남해 사람으로, 1919년 4월 남해읍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4월 4일, 정순조, 정학순, 정몽호 등 시위대를 이끌고 장꾼으로 가장하여 남해읍 장터로 나아갔다. 오후 2시경 군중 수백 명과 함께 약속된 신호에 따라 가슴에 숨겨 온 태극기를 꺼내 들고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쳤다. 시위군중은 군청, 우체국, 학교, 주재소에 들어가 관리들을 끌어내어 독립만세를 외치게 하고, 경찰 간부의 모자와 대검을 빼앗아 내동댕이쳤다.주재소의 경찰들이 어쩔 줄 몰라 하자, 고현면(古縣面) 면장 김치관은 경찰 경비 전화를 이용하여 사천(泗川)경찰서에 응원 요청을 하였다. 시위군중은 이 사실을 모르고 날이 저물어서 자진 해산하려 하다가, 김치관의 이러한 소행을 알고는 고현면 이어리(伊於里)에 있는 김치관의 집을 파괴한 후, 해산하였다. 그러나 그 후 정임춘은 일제의 검속으로 체포되었으며, 그해 8월 10일 부산(釜山)지방법원 진주(晋州)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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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3.1운동 발상 기념탑
본 비는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의 영향을 받아 4월 2일 남해에서 최초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기념하는 사적이다. 이예모가 선도하고 정갑린, 정상기, 하준천 등이 격려하여 하준호, 정순조, 정홍조 등 많은 설천면민들이 남양, 금음, 문항 노상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불렀다. 4월 4일에는 남해읍 장터로 가서 김희조, 박경수, 강한문, 정용교, 하상근, 원복상(원복생), 장학순 등과 합세하여 태극기를 들고 천여 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른 뒤, 군청 경찰관주재소 외 각 기관을 점거하고 자주독립을 외혔다. 이로 인해 일제의 통치는 빛을 잃었고 고을에서는 연달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 중 23명은 일경에 붙잡혀 가서 1년 내지 3년간의 모진 옥고를 치렀고 마침내 장학순은 순국하고 말았다. 위와 같은 인물과 더불어 수많은 이름 없는 위인들의 충절과 공로를 기리고자 1985년 12월 23일 본 비가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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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찬숙 묘
유찬숙(1891-1927)은 경상남도 남해 사람으로, 1919년 4월 3일과 4일에 걸쳐 남해읍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설천면(雪川面) 문의리(文義里)에 사는 이예모가 4월 2일 하동(河東)에서 독립선언서를 구해 가지고 귀향하여, 정순조, 정학순, 정몽호, 윤주순 등과 만나면서부터 계획되었다. 그들은 4월 3일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인근 동리에 이 계획을 알리었다. 이때 유찬숙도 이 계획에 적극 찬성하여 4월 3일 오후 3시경, 많은 시위군중과 함께 남양리(南陽里) 노상에서 모여, 태극기를 선두로 독립만세를 외치며 남해읍을 향하여 시위행진 하였다. 시위대열이 고현면(古縣面)에 이르렀을 때, 면장 김치관이 많은 시위군중의 위세에 놀라, 이 사실을 경찰주재소에 밀고하였다. 날이 어두워지고 김치관이 밀고한 사실을 알게 된 시위군중은 명일의 남해읍 장날을 이용하여, 다시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약속하고 일단 해산하였다. 4월 4일 아침 일찍 유찬숙은 장꾼으로 가장하여 남해읍 장터로 나아갔다. 장꾼이 1천여 명으로 늘어난 오후 3시경, 전날의 만세시위에 참여했던 시위군중은 약속된 신호에 따라 가슴에 숨겨 온 태극기를 꺼내 들고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쳤다. 시위군중은 군청, 우체국, 학교, 주재소에 뛰어들어 관리들을 끌어내어 독립만세를 외치게 하고, 경찰 간부의 모자와 대검을 빼앗아 내동댕이쳤다. 주재소의 경찰들이 어쩔 줄 몰라 하자, 김치관은 다시 경찰 경비 전화를 이용하여 사천(泗川)경찰서에 응원 요청을 하였다. 유찬숙은 이 사실도 모르고 날이 저물어 자진 해산하려 하다가, 김치관의 이러한 소행을 알고는 고현면 이어리(伊於里)에 있는 김치관의 집을 습격하여 파괴한 후 해산하였다. 그러나 그 후 일제의 검속으로 체포되었으며, 이해 9월 23일 대구(大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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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봉근, 한봉인 집
한봉근(1894-1927)은 경남 밀양 사람이다. 일찍이 만주(滿洲)로 망명하여 길림성(吉林省) 호림(虎林)에서 1919년 11월에 조국의 독립투쟁을 목적으로 조직된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였다.그는 1920년 매국노들과 일제의 중요기관 파괴를 목적으로 의열단원인 김원봉, 신철휴 등과 상의하여 폭탄, 권총, 탄약 등을 입수하고자 노력하였다. 이에 따라 동지인 이종암 등이 상해에서 폭탄 제조법을 익히고, 곽재기, 이성우 등은 각종 무기와 폭약을 구하는 데 성공하였다. 또한 그는 입수된 무기를 국내로 반입하여 장차의 거사에 대비하도록 했다.1923년 12월, 국내의 적 관청과 친일 앞잡이들을 처단하기 위해 유석현, 남영보, 이현준 등과 함께 필요한 폭탄과 무기를 서울로 반입하려 했으나 일경에게 발각되어 거사를 실행치 못하였다. 또한 1926년에는 김창숙 등 국내의 유림(儒林)이 모금한 3,000원으로 권총과 실탄을 구입하여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를 폭파하고자 하였다. 이 계획에는 김구도 관련되었고, 그 실행은 그를 비롯해 유우근, 이승춘 그리고 나석주 등과 함께 추진되었는데 최종적으로 나석주가 단독으로 입국하여 투척하게 되었다. 한봉근은 이후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27년 2월 11일 세상을 떠났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한봉인(1898-1968)은 경남 밀양 사람으로, 한봉근의 남동생이다. 그 또한 일찍이 만주로 망명하여 1919년 11월 길림성(吉林省) 호림(虎林)에서 의열단(義烈團)에 참여함으로써 무력투쟁을 통한 조국 독립을 결의하였다.1920년 12월, 국내에 입국하여 군자금 모집을 위해 활발히 활동하면서 동지인 김원석(김상윤) 등과 밀양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에 관여하였다. 1925년에는 의열단의 군자금 모집의 밀양 지역 담당으로 활약하면서, 동지 이종암과 함께 모종의 거사를 위해 반입하려던 무기와 폭탄과 관련하여 일경에게 붙잡혔다. 1926년 12월, 징역 8개월 형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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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홍표 묘
전홍표(1869-1929)는 경상남도 밀양 사람이다. 한말(대한제국의 마지막 시기)부터 밀양의 동화학교(東化學校), 개창학교(開昌學校), 밀흥야학교(密興夜學校) 등 다수의 사립학교 설립에 기부금을 내고 교육 계몽운동에 종사하였다. 일제 강제 병합 이후인 1910년대에도 동화중학교 교장으로서 1914년 3월 강제 폐교될 때까지 학생들에게 국권 회복과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교육을 펼쳤다. 그 덕분에 동화중학교에서는 의열단(義烈團) 단장 김원봉을 비롯하여 윤세주, 김상윤, 한봉근, 최수봉 등 다수의 항일 독립운동가가 배출될 수 있었다.1921년 7월 13일 밤, 밀양군 밀양면(密陽面) 청년회관에서 한인수, 하경용 등 수십 명과 모여, 같은 날 사형집행을 당한 동화학교 제자 최수봉을 위한 부의금 모집을 발의하였다. 이후 한인수 외 3명이 모집위원이 되어 부의금을 모집하여 유족들에게 전달하였다. 또한 밀양청년회(密陽靑年會) 회원 30여 명과 함께 최수봉의 유해를 인수받아 밀양청년회 주최로 ‘사체환영회(死體歡迎會)’를 개최하고 최수봉의 고향인 상남면(上南面) 마산리(馬山里)에 안치하고 장사를 지낼 수 있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활동으로 인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21년 10월 13일 부산지방법원(釜山地方法院)에서 벌금 100원에 처해졌다. 이에 불복하여 공소를 제기했는데, 1922년 1월 21일 대구복심법원(大丘覆審法院)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이른바 ‘1920년 부령(府令) 제160호 및 기부금모집단속규칙(寄附金募集取締規則) 위반’으로 징역 10개월(미결구류 90일 형기산입)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다시 상고를 제기하였으나, 같은 해 3월 9일 고등법원(高等法院)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18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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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의열사숭모비
경상남도 밀양에 위치한 독립의열사숭모비이다.본 비는 밀양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숭고한 애국정신과 독립운동의 공로를 기념하고 기리고자 설립되었다. 이전에는 영남루에 있던 것을 이전하여 현재 밀양독립운동기념관 근처 도보 1분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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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종 묘
박소종(1897-1973)은 1919년 3월 13일 밀양 장날에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주도하였다. 밀양 장날의 만세운동은 윤세주, 윤치형 등이 고종 인산(因山)에 참례하였다가, 서울의 만세운동을 목격하고 돌아와 이 사실을 동화학교(同和學校) 교장 전홍표에게 전하면서 추진되었다. 전홍표는 밀양지역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데 힘을 쏟았으므로 많은 청년들이 그를 따랐다. 그리하여 3월 12일 밤, 박소종은 윤세주, 윤보은, 정동찬, 김소지, 박만수 등과 모여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의논하고 윤세주 집을 거점으로 준비에 착수하였다. 이들은 3월 13일 밀양 읍내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독립선언서를 밀양면사무소와 부북면(府北面)사무소 등지에서 등사판을 몰래 가져와 위북산(偉北山)에서 밤을 새워 수백 매를 인쇄하는 한편, 수백 개의 태극기도 제작하였다. 거사 당일 오후 1시 30분경, 박소종 등은 윤세주의 독립선언서 낭독에 이어 미리 준비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군중들에게 배포하면서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때 장터에는 수천의 군중이 운집하여 함께 만세를 부르면서 시위행진을 벌였다. 밀양거리는 온통 만세군중의 시위로 수라장이 되었고, 부산에서 출동한 일본헌벙과 수비대는 주모자 체포에 무자비한 행동을 가하였다. 그러던 중에도 다음날인 3월 14일에는 밀양공립보통학교 학생 160여 명이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며 거리로 뛰쳐나와 행진하니 거리의 주민들도 이에 호응하였다. 결국 군경의 탄압으로 시위대열은 해산되고 박소종 등의 주모자는 일본 헌병에 의해 붙잡혔다. 박소종은 결국 이 일로 1919년 4월 14일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 형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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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종 집
박소종(1897-1973)은 1919년 3월 13일 밀양 장날에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주도하였다. 밀양 장날의 만세운동은 윤세주, 윤치형 등이 고종 인산(因山)에 참례하였다가, 서울의 만세운동을 목격하고 돌아와 이 사실을 동화학교(同和學校) 교장 전홍표에게 전하면서 추진되었다. 전홍표는 밀양지역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데 힘을 쏟았으므로 많은 청년들이 그를 따랐다. 그리하여 3월 12일 밤, 박소종은 윤세주, 윤보은, 정동찬, 김소지, 박만수 등과 모여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의논하고 윤세주 집을 거점으로 준비에 착수하였다. 이들은 3월 13일 밀양 읍내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독립선언서를 밀양면사무소와 부북면(府北面)사무소 등지에서 등사판을 몰래 가져와 위북산(偉北山)에서 밤을 새워 수백 매를 인쇄하는 한편, 수백 개의 태극기도 제작하였다. 거사 당일 오후 1시 30분경, 박소종 등은 윤세주의 독립선언서 낭독에 이어 미리 준비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군중들에게 배포하면서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때 장터에는 수천의 군중이 운집하여 함께 만세를 부르면서 시위행진을 벌였다. 밀양거리는 온통 만세군중의 시위로 수라장이 되었고, 부산에서 출동한 일본헌벙과 수비대는 주모자 체포에 무자비한 행동을 가하였다. 그러던 중에도 다음날인 3월 14일에는 밀양공립보통학교 학생 160여 명이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며 거리로 뛰쳐나와 행진하니 거리의 주민들도 이에 호응하였다. 결국 군경의 탄압으로 시위대열은 해산되고 박소종 등의 주모자는 일본 헌병에 의해 붙잡혔다. 박소종은 결국 이 일로 1919년 4월 14일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 형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