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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동석 집
배동석(1889-1924)은 1906년 대구계성중학교(大邱啓聖中學校) 재학중, 배일혐의로 체포되어 3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이후 목포(木浦)에서 교직생활을 하다가 다시 배일혐의로 체포되었으며, 그후 만주(滿洲)로 망명하여 김좌진(金佐鎭)과 함께 활동하였다. 1918년 귀국하여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여 다니던 중, 이갑성의 자택에서 음악회를 빙자하여 김원벽(金元璧)·김형기(金炯璣)·윤자영(尹滋瑛)·김문진(金文珍)·한위건(韓偉健) 등 학생 대표들과 만나 해외의 독립만세운동의 상황을 논의하였다. 3월 1일에는 종로(鐘路), 3월 5일에는 남대문역(南大門驛) 앞에서 수백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체포되었으며,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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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유기미독립의거 표지석
1919년 3월 1일에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의거가 전국으로 퍼져나갈 때 고종의 인산에 참여하기 위해 상경했다가 독립선언서를 옷깃에 숨겨 고향으로 돌아온 김종훤은 4월 11일 김승태, 이강석, 최현호 등 동지와 회합을 갖고 4월 12일에 군중을 동원하여 무계리시장에서 거사하기로 결의하였다. 무계리시장에 모인 3천여 명의 군중이 김승태 등의 선창에 따라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였다. 충돌과정에서 김선오, 손명조, 김용이 세 분은 일본군의 흉탄에 현장에서 순국하셨고, 군중은 해산되고 주동 인물은 검거되어 투옥되었다. 장유기미독립의거 표지석은 경남 김해에 있으며, 김해지역에서 가장 크고 격렬하게 일어난 이 독립의거를 기념하고 선열들의 고귀한 넋과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1967년 세워진 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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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태 기적비
1919년 4월 12일, 장유면 무계리(長有面茂溪里)의 독립만세운동은 광무황제(光武皇帝)의 국장(國葬)에 참여하기 위하여 상경하였다가, 그곳에서 전개된 독립선언식과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고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한 김종훤(金鍾 )을 중심으로 계획되었다. 김승태(1878-1940)의 이명은 김시여(金時汝)이다. 4월 11일 김종훤·조순규(趙順奎)·이강석(李康奭)·최현호(崔鉉浩) 등과 만나 이튿날 무계리 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각자 자기 동리사람들의 동원과 태극기의 제작을 책임, 분담하였다. 4월 12일, 김승태는 선두에 서서 3천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들고 무계리 장터로 행진하였다. 일경은 무력행사를 통해 해산시키려 하였지만, 시위군중은 이에 굴하지 않고 헌병주재소를 습격하였으며, 무차별 사격으로 김선오(金善五) 등 3명이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그 후 일제의 검속으로 체포되었으며,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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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훤 독립운동기적비
김종훤(1893-1948)은 고종의 국장(國葬)에 참여하기 위하여 상경하였다가 그곳에서 전개된 독립선언식과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고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하여, 4월 11일 김승태(金升泰)·조순규(趙順奎)·이강석(李康奭)·최현호(崔鉉浩) 등과 만나 이튿날 무계리 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4월 12일 동리사람 50여 명을 동원한 김승태가 태극기를 들고 선두에 서서 무계리 장터로 들어온 것을 시작으로, 시위군중이 모여들었는데 그 숫자는 3천여명이나 되었다. 김종훤은 선두에 서서 시위행진을 시작하였는데, 일경이 무력을 행사하자 헌병주재소를 습격하였고, 3명이 현장에서 순국하자, 시위대열은 일시 후퇴하였다. 이후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는데, 고문의 후유증으로 평생을 고통 속에서 지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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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치문 기적비(화정공원)
배치문(1890-1942)의 이명은 배홍길(裵洪吉)이다. 1919년 3·1독립운동 당시 목포 시장터에서 독립만세시위를 하던 중 붙잡혀,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3년 5월 상해의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 참석한 후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였으며, 다시 붙잡혀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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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독립의거 기적비(김해시민체육공원)
기미독립의거 기적비는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에 의해서 수탈 당하고 억압 당하였던 1919년, 김해지역에서 민족을 지키고 민중의 생존을 실현하고자 했던 선조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이다. 서울에서의 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되고 약 한 달 후인 3월 말부터 4월 중순까지 김해의 곳곳에서 민중들과 지사들이 온 몸을 내던져 일으킨 독립만세 시위운동과 선조들의 의거를 기록으로 새겨 만대에 길이 전하기 위함이다.김해에서도 3월 하순부터 4월 중순까지 봉기하여 격렬한 항거가 있었으며, 김해군 내의 의거를 열거하는 내용을 담고있는 비인데, 김해면민의거는 배동석이 서울의거에 학생대표의 일원으로 참가하여 독립선언서를 감추고 귀향하였다. 3월 30일, 성내 중앙거리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였고, 군내의거의 효시로서 각면지역으로 번져갔다. 2차 의거는 허종식과 허병이 주동으로 4월 2일 하오 주모자를 선두로 독립만세를 외치니 300여 군중이 호응하여 격렬히 시위하였다. 진영면민의거는 청년유지 김연태와 김우현이 주동하여 동지4인을 규합, 모의하고 3월 31일 하오 진영장터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격문을 뿌리면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니 수백군중이 호응시위하였다. 2차 의거는 안기호, 김종만이 주동하여 4월 5일 하오 진영장터에서 태극기를 세우고 독립만세를 외치니 2000여 군중이 가세하였다. 장유면민의거는 김종훤이 3월 1일 고종인산에 참지하고는 서울의거에 참가하여 독립선언문을 감추고 귀향하였는데, 4월 12일 정오 무계리 대청천변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대열은 무계장터로 행진하니 놀란일헌은 무차별발사하여 동지 3인이 순사하였다. 오지면 의거는 이진석이 김연복으로부터 독립선언문을 입수하고 양왕석과 동지를 규합하여 4월 10일 하오 오호장날 태극기를 세우고 선언문을 배부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항거시위하였다. 가락면에서는 문위동의 주동으로 4월 13일 정오경 봉림리 음지바위아래 모여 독립만세를 연호하며 시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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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백 묘
이용백(1902-1985)은 1923년 지도공립보통학교(智島公立普通學校) 동급생 황하일(黃河一)과 함께 5월 1일에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결의한 후 태극기 400여 매를 제작하여 동교생 270여 명의 선두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읍내 일경주재소까지 시위행진을 하다 일경에 붙잡혔고,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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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성두 기념비
배성두(1840-1922)는 김해에서 약방을 하였는데, 1893년 9월 8일 부산으로 가서 미국 북장로교 베어드 선교사(William M.Baird 1862~1931)를 만나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 복음을 전시하며 어려운 이웃을 돕고 섬기는데 앞장섰으며, 1907년 김해 합성학교를 세워 많은 인재를 육성하였다. 배성두의 아들 배동석(1891~1924)은 1919년 당시 세브란스의전(연세대학교 의과대학) 학생으로서 3.1만세운동의 학생대표로 활동하였으며, 김해와 함안 칠원지역의 3.1운동을 일으킨 주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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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재 조형물
이윤재(1888-1943)의 호는 환산(桓山), 한뫼이다. 1913년부터 마산의 창신학교(昌信學校) · 의신여학교(義信女學校)에서 교편을 잡다가 3 · 1운동에 관련되어 평양 감옥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다.1927년 조선어사전 편찬위원이 되었고, 민족정신의 보전 · 계승을 위한 잡지 『한빛』을 편집, 발행하였으며, 1929년 조선어연구회 ·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의 집행위원, 1930년 한글맞춤법통일안의 제정위원이 되어 국어통일운동의 중진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932년에는 조선어학회의 기관지 『한글』의 편집 및 발행 책임을 맡았으며, 1934년에는 진단학회(震檀學會)의 창립에 참여하였다.1937년 수양동우회사건(修養同友會事件)에 관련되어 서대문 감옥에서 약 1년반 옥고를 치렀다.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동지들과 함께 홍원경찰서에 붙잡혀 함흥형무소에서 복역 중 옥사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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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재 구 묘
이윤재(1888-1943)의 호는 환산(桓山), 한뫼이며, 1913년부터 마산의 창신학교(昌信學校) · 의신여학교(義信女學校)에서 교편을 잡다가 3 · 1운동에 관련되어 평양 감옥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1927년 조선어사전 편찬위원이 되었고, 민족정신의 보전 · 계승을 위한 잡지 『한빛』을 편집, 발행하였으며, 1929년 조선어연구회 ·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의 집행위원, 1930년 한글맞춤법통일안의 제정위원이 되어 국어통일운동의 중진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932년에는 조선어학회의 기관지 『한글』의 편집 및 발행 책임을 맡았으며, 1934년에는 진단학회(震檀學會)의 창립에 참여하였다.1937년 수양동우회사건(修養同友會事件)에 관련되어 서대문 감옥에서 약 1년반 옥고를 치렀다.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동지들과 함께 홍원경찰서에 붙잡혀 함흥형무소에서 복역 중 옥사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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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오 추모비
김선오(1865-1919)는 고종의 국장(國葬)에 참여하기 위하여 상경하였다가 그곳에서 전개된 독립선언식과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고,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한 김종훤을 중심으로 계획되었다.김종훤은 4월 11일 김승태(金升泰)·조순규(趙順奎)·이강석(李康奭)·최현호(崔鉉浩) 등과 만나 이튿날 무계리 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4월 12일 김승태가 선두에 서서 시위행진을 시작하였는데, 일경이 무력을 행사하자, 시위군중은 헌병주재소를 습격하였다. 이에 일경은 무차별 사격을 하였으며, 김선오는 적의 흉탄에 맞아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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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3.1운동 기념탑
김해 3.1운동 기념탑은 경남 김해에 있으며, 1919.4.12 무계리 시장에서 3천여 군중이 독립을 외치며 일본 헌병대를 습격, 파괴하다가 총검에 3명이 순국했던 이 독립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1966년 5월에 건립한 탑이다. 무계리 시장에서 벌어진 독립운동은 고종의 국장(國葬)에 참여하기 위하여 상경하였다가 그곳에서 전개된 독립선언식과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고,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한 김종훤을 중심으로 계획되었다. 김종훤은 4월 11일 김승태(金升泰)·조순규(趙順奎)·이강석(李康奭)·최현호(崔鉉浩) 등과 만나 이튿날 무계리 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4월 12일 김승태가 선두에 서서 시위행진을 시작하였는데, 일경이 무력을 행사하자, 시위군중은 헌병주재소를 습격하였다. 이에 무차별 사격을 하였으며, 김선오를 포함한 3명은 적의 흉탄에 맞아 현장에서 순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