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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구 묘
이한구(1870 - 1907)는 대한제국기 신성전투, 자양전투, 영일 입암리전투 등에 참전한 의병장이다.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한유(韓有). 영일(迎日)출신. 이언적(李彦廸)의 후손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을사오적의 주살을 외치며 의병장 정용기(鄭鏞基)와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이듬해 4월 동대산(東大山)에서 거의하여 산남의진(山南義陣)을 결성하고 중군장(中軍將)이 되어 정순기(鄭純基)·손영각(孫永珏) 등과 모든 일을 계획, 지도하였다. 이한구의 의병부대는 주왕산·약곡(藥谷)·청하(淸河) 등 각지의 전투에서 선봉으로 크게 활약하였다. 그 뒤 재봉기를 도모한 이한구는 1907년 9월 정용기와 함께 재기하여 청송의 신성(薪城)전투에서 일본군 3명을 사살하고 이어 자양(紫陽)전투에서 일본군 분견소장을 생포, 적군 3명을 사살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11일 강원도로 북상 도중 영일 입암리(立巖里)전투에서 정용기·손영각·권규섭(權奎燮) 등과 함께 전사, 순국하였다.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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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에서 가장 먼저 3.1운동이 일어난 곳 표지석(포항교회)
경북지역 최초 3.1운동이 일어난 곳은 당시 포항교회(구, 제일교회)와 여전장터 일원이며, 1919년 3.1운동 당시 교회 건물은 현재 포항소망교회로 자리하고 있다. 포항 3.1운동은 1919년 3월 11일, 경북에서 가장 먼저 일어났다. 서울에서 시작된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3월 8일, 대구에서 벌어진 시위에 포항대표로 최경성, 송문수가 참여하였다. 최경성은 현장에서 검거되지만 송문수는 독립선언서를 갖고 포항으로 돌아와 이기준, 이봉학, 장운환과 의논하여 장날인 11일을 거사일로 잡고 벽보와 선전문을 만들었으나 밀정의 신고로 일본 관헌에게 검거되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스스로 몰려나와 11일 1차 시위를 벌였으며, 일제 경찰의 총칼에도 굴하지 않고 12일에는 더욱 많은 사람들이 포항만세운동에 동참하면서 독립의지를 불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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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하장터 3.1만세의거기념비
윤영복은 청하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결심하고 오용간, 윤영만 등과 접촉하여 거사일을 청하장날인 3월 12일(음력 2월 11일)로 잡았다. 이어 동지를 규합하고 태극기를 만드는 등 치밀하게 준비를 했다. 3월 12일, 청하장터에 모인 동지들이 선창하고 군중들이 호응하면서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청하장터를 진동하였다. 그러자 일경과 헌병들이 달려와 총검으로 위협하여 군중을 해산하고, 주동 인물들을 검거하였다. 당시 청하장터 만세운동에 앞장섰다가 피검된 23인의 애국지사는 다음과 같다. 김만수, 김유곤, 김유선, 김종만, 김진봉, 김진순, 안덕화, 안도용, 안상종, 안천종, 안화종, 오용간, 윤도치, 윤영만, 윤영복, 이명만(태하), 이상호, 이영섭, 이준석(태원), 이준업(태정), 정백용, 정상득(성욱), 정재신(가나다 순). 피검된 애국지사 중 윤도치는 옥중에서 순국하셨고, 무죄석방된 윤영만을 제외한 나머지는 6월~1년 6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아 옥살이를 했으며, 출옥해서도 국외로 망명하거나 3.1동지회 등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지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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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호 집
이상호(1881 - 1954)는 경북 영일(迎日) 사람이다. 1919년 3월 22일 영일군 청하면(淸河面) 덕성리(德城里)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계획을 주도한 윤영복(尹永福)·오용간(吳用干)과 함께 덕성리 장터에서 수백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이를 탄압하는 일경에 붙잡혔다. 그후 4월 2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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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호 묘
이상호(1881 - 1954)는 경북 영일(迎日) 사람이다. 1919년 3월 22일 영일군 청하면(淸河面) 덕성리(德城里)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계획을 주도한 윤영복(尹永福)·오용간(吳用干)과 함께 덕성리 장터에서 수백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이를 탄압하는 일경에 붙잡혔다. 그후 4월 2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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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목 집
조성목(1868 - 1937)은 경북 영일(迎日) 사람이다. 1906년 3월 정용기(鄭鏞基)가 경북 영천(永川)에서 산남의진(山南義陣)을 조직할 때 그 휘하에 들어가 활동하였다. 그러나 1907년 7월 입암(立岩)전투에서 일군에 패하여 의병장 정용기를 비롯해 중군장·참모장·좌영장 등 의진의 핵심들이 일시에 전사해 의진이 해체되자 은둔하였다. 그 뒤 1927년 산남의진에 참가한 거의제공(擧義諸公)의 충절을 기리고자 참동계(參同 )를 만들고 서문(序文)을 작성, 배포하다가 붙잡혔으나 기소 중지로 풀려났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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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목 묘
조성목(1868 - 1937)은 경북 영일(迎日) 사람이다. 1906년 3월 정용기(鄭鏞基)가 경북 영천(永川)에서 산남의진(山南義陣)을 조직할 때 그 휘하에 들어가 활동하였다. 그러나 1907년 7월 입암(立岩)전투에서 일군에 패하여 의병장 정용기를 비롯해 중군장·참모장·좌영장 등 의진의 핵심들이 일시에 전사해 의진이 해체되자 은둔하였다. 그 뒤 1927년 산남의진에 참가한 거의제공(擧義諸公)의 충절을 기리고자 참동계(參同 )를 만들고 서문(序文)을 작성, 배포하다가 붙잡혔으나 기소 중지로 풀려났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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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병 항왜혈전 기념비
이 기념비는 산남의병의 숭고하고 청사에 길이 남을 항일독립정신을 기리고 그분들의 명예선양과 후세들에게 올바른 국가관과 애국심을 고취시키고자 1967년 포항시 북구 흥해읍 성내리 39-8(영일민속박물관내)에 건립되었다. 산남의진은 정용기 초대 대장과 제2대 정환직 대장이 의병을 이끌다 순국하자 제3대 최세윤 대장이 의진을 수습하여 일본군과 항쟁을 계속하였으며 최세윤 대장 역시 일본군에 피체되어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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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무조 도해비
박무조(1859 - 1917)는 경북 군위(軍威) 사람이며, 이명은 박능일이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자 통한을 품고 살다가 호적령(戶籍令)이 강제(强制)되자 취적(就籍)을 거부하고 1914∼1917년에 이르기까지 가족들을 이끌고 예안(禮安)·풍기(豊基)등지를 전전하다가 마침내 1917년 7월 20일 영일군(迎日郡) 우목리(牛目里) 앞바다에서 "원수를 섬기고 사는 것은 바다에 빠져 죽는 이만 못하다. 조선일민(朝鮮逸民) 박능일(朴能一)"이라는 유서를 남기고 투신순사(投身殉死)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