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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3.1독립의거 기념비
보경사 입구의 비석은 경북에서 3·1만세운동을 선도한 포항지역에 기념물이 없음을 애석하게 여긴 3·1동지회와 지역의 뜻있는 인사들이 모은 성금으로 지난 1970년 3월 22일 건립하였다. 비문에는 포항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 출신 의사를 포함하여 35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3·1동지회는 3·1만세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출옥한 26명의 의사들이 송라면 조사리 교회에 모여 3·1운동과 항일투쟁의 결속을 다지는 취지로 1920년 4월 20일에 결성한 비밀단체다. 1929년 일제의 끊임없는 감시와 탄압으로 해산하였다가 광복 후 다시 결성하면서 청하·송라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 동지들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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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술 구 묘
이재술(1901 - 1968)은 경북 영일(迎日) 사람이다. 1920년말 만주 길림성 무송현(撫松縣)에서 항일무장단체인 흥업단(興業團)의 단장 김호(金虎)와 외교부장 김성규(金星奎)의 밀명을 받고 군자금 20만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국내에 파견된 흥업단원 이만준(李萬俊)을 만나, 독립운동에 참여하기로 결심하고 1922년 2월 손기성(孫基聖)·권충락(權忠洛)·김연환(金璉煥)·최명해(崔明海) 등과 같이 이에 가입하였다. 그는 경북일대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중 1922년 6월 김창우(金昌佑)와 함께 체포되었으며, 대구지방법원에서 실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 표창)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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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술 집
이재술(1901 - 1968)은 경북 영일(迎日) 사람이다. 1920년말 만주 길림성 무송현(撫松縣)에서 항일무장단체인 흥업단(興業團)의 단장 김호(金虎)와 외교부장 김성규(金星奎)의 밀명을 받고 군자금 20만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국내에 파견된 흥업단원 이만준(李萬俊)을 만나, 독립운동에 참여하기로 결심하고 1922년 2월 손기성(孫基聖)·권충락(權忠洛)·김연환(金璉煥)·최명해(崔明海) 등과 같이 이에 가입하였다. 그는 경북일대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중 1922년 6월 김창우(金昌佑)와 함께 체포되었으며, 대구지방법원에서 실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 표창)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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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시형 집
최시형(1827~1898)은 조선 말 동학의 제2대 교주로서 일찍이 고아가 되어 조지소에서 일하다가 1861년 동학에 입교하여, 1863년 최제우의 후임으로 제2대 교주가 되었다. 동학이 탄압받던 시기에 관헌의 눈을 피해 포교에 힘썼고 동경대전(東經大全), 용담유사(龍潭遺詞) 등의 동학 경전을 발간했다. 동학의 육임제(六任制) 조직 확립 및 전국에 육임소를 설치하는 한편 1893년 이후 교조 신원 운동에 전력했는데, 당시 교조 신원, 부패관리의 처단,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기치 아래 추진되던 시위운동에 일체의 폭력사용을 금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1894년 전봉준이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키자 이에 호응했고, 동학군의 재기포(再起包) 때 북접접주들에게 총궐기를 명령, 10여 만의 병력을 인솔하여 남접군에 합세했다. 동학농민군이 관군·일본군의 혼성군에게 연패하자 영동, 청주로 피신했다가 1898년 원주에서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6월 2일 사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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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회수 사적비
구회수(!880 - 1950)는 경북 영일 출신으로 산남의진(山南義陣)에 참여하여 군사를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전국 각처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산남의진은 1906년 3월 경북 영천(永川)에서 정용기(鄭鏞基)가 조직한 의병 진영이다. 고종황제의 밀지를 받은 시종관 정환직(鄭煥直)은 아들 용기에게 의병을 일으키도록 명하였다. 정용기는 고향인 영천에서 이한구(李韓久)·손영각(孫永珏) 등을 규합하여 창의하였다. 의진에는 대장 정용기, 중군장 이한구, 참모장 손영각, 소모장 정순기(鄭純基), 도총장 이종곤(李鍾崑), 선봉장 홍구섭(洪龜燮), 후군장 서종락(徐鍾洛), 좌영장 이경구(李景久), 우영장 김태언(金太彦), 연습장 이규필(李圭弼), 도포장 백남신(白南信) 등이 포진하였다. 구회수는 영덕(盈德)·영해(寧海) 방면에서 의병 모집의 책임을 맡았다. 그는 참모장 손영각의 사위로, 1907년 9월 재편성된 제2대 대장 정환직 진용의 도총장 구한서(具漢書)의 종질(從姪)이었다. 구회수는 보현산(普賢山)과 동대산(東大山)의 중간 영일군 죽장(竹長)에 거주하면서 산남의진의 군사 모집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영천·영일·청송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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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제안, 양한기 집
양제안(1860 - 1929)은 대한제국기 정용기의 산남 의진에서 상주, 선산지방의 책임자로 활약한 의병장.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남원(南原). 호는 벽도(碧濤). 경상북도 영일 출신이다. 1876년(고종 13) 병인양요 때 격문을 만들어 척양척왜를 주장하였다. 1894년 충청북도 진천에 의병총본영을 설치하고 의병을 모집, 훈련시켜, 1895년 이기찬(李起燦)의병진의 중대장으로 허위(許蔿) 등과 청산·보은·괴산·청주·음성 등지에서 관군과 여러 차례 교전하였다. 1905년 대구에서 국권회복을 위한 국채보상운동을 벌였다. 1906년 정용기(鄭鏞基)를 중심으로 영남지방에서 산남의진(山南義陣)이 결성될 때 상주·선산지방의 책임자가 되었다. 산남의진의 봉기 후 주로 진후(陣後)에서 활약하였다. 1968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양한기(1880 - 1946)는 충북 보은(報恩) 사람이다. 친부(親父) 양제안(梁濟安)으로부터 손자병서(孫子兵書) 및 병법의 교습을 받고 1894년 4∼12월 진천(鎭川)에서 궁시(弓矢)·총탄제조 등에 종사하였으며 1895년 3월부터 1909년 1월까지 경북 영일군(迎日郡) 죽북면(竹北面)을 중심으로 군자금을 모집하여 양총(洋銃) 등 전쟁용 무기구입을 위해 활동하였다. 그는 1901년 4월부터 1944년 3월까지 경북 영일군 죽북면 두마리(斗麻里)에서 청소년들에게 조국자주독립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사립학교를 설립하였으며 친부 양제안과 동생 양한위(梁漢緯)의 독립운동자금을 제공하기 위해 재산을 매각하여 후원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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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한기 묘
양한기(1880 - 1946)는 충북 보은(報恩) 사람이다. 친부(親父) 양제안(梁濟安)으로부터 손자병서(孫子兵書) 및 병법의 교습을 받고 1894년 4∼12월 진천(鎭川)에서 궁시(弓矢)·총탄제조 등에 종사하였으며 1895년 3월부터 1909년 1월까지 경북 영일군(迎日郡) 죽북면(竹北面)을 중심으로 군자금을 모집하여 양총(洋銃) 등 전쟁용 무기구입을 위해 활동하였다. 그는 1901년 4월부터 1944년 3월까지 경북 영일군 죽북면 두마리(斗麻里)에서 청소년들에게 조국자주독립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사립학교를 설립하였으며 친부 양제안과 동생 양한위(梁漢緯)의 독립운동자금을 제공하기 위해 재산을 매각하여 후원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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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근 집
강대근(1891 - 1957)은 경북 영일(迎日) 사람이다. 1907년 정용기(鄭鏞基)가 이끄는 산남의진(山南義陣)에 참가하여 청하(淸河)·흥해(興海)·의성(義城)·청송(靑松) 등지에서 항일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이듬해 영일군(迎日郡) 죽장면(竹長面) 입암(立岩) 전투에서 패해 전상(戰傷)을 입고 피신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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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남의진 항일순국 무명3의사총
산남의진 제2대 정환직 대장은 이곳에서 체포되어 대구형무소로 끌려가던 중 영천 조양각 맞은편에서 총살당하여 순국했다. 정 대장이 체포될 당시 함께 있었던 의병 세 사람도 일제의 도륙으로 희생되었다. 왜군들이 완전히 떠난 후 3일 만에 마을주민들이 심하게 훼손된 주검을 수습하여 3기의 무덤을 만들어 두었으나 광복이 되어도 돌보는 사람이 없었다. 마을 청년들이 가시덤불에 방치되다시피 한 무덤을 보살피기 시작했는데, 1995년 도로 확장공사로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이에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면서 3인 합장묘를 만들고 작은 비석도 세우고 벌초를 하는 등 관리를 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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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근 묘
강대근(1891 - 1957)은 경북 영일(迎日) 사람이다. 1907년 정용기(鄭鏞基)가 이끄는 산남의진(山南義陣)에 참가하여 청하(淸河)·흥해(興海)·의성(義城)·청송(靑松) 등지에서 항일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이듬해 영일군(迎日郡) 죽장면(竹長面) 입암(立岩) 전투에서 패해 전상(戰傷)을 입고 피신하고 말았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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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남의진 발상기념비, 충의단
산남의진 전투지는 구한말 산남의진 김용기(1대) 김환직(2대) 최세윤(3대) 의병대장을 비롯한 포항· 영천지역 의병들이 죽장면 입암리 일원에서 치열한 항일 의병 전투를 벌였던 곳이다. 죽장면 입암서원 하천변 일대는 지난 1907년 8월 산남의진 의병들과 일본군 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여져 김용기 의병대장과 이한구·손영각 중군장 등 수많은 의병들이 숨진 곳이다. 산남의진(山南義陣)이란 구한말인 1906년부터 1910년까지 경북 영일, 영천, 청송, 경주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한 항일 의병부대를 말한다. 정용기(鄭鏞基, 1862~1907)은 1906년 3월 부친 정환직(鄭煥直, 1843~1907)의 권유를 받고 산남의진을 일으켰다. 결성 직후 신돌석 의병을 돕기 위해 영해로 진군하던 중 정용기가 체포되면서 해산하였다. 1906년 9월 석방된 정용기는 이듬해인 1907년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같은 해 8월 관동지역으로 북상하던 중 일본군이 포항 입암으로 들어왔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마침 인근에 주둔하고 있던 산남의진은 일본군을 기습 공경하였으나 오히려 집중공격을 받아 패하였다. 이 전투에서 정용기를 비롯하여 이한구.손영각 등 많은 의병들이 전사하였다.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들은 정환직은 흩어진 의병들을 수습하여 1907년 9월 다시 산남의진을 일으켜 대구.영천을 중심으로 항일투쟁을 지속하였다. 이에 산남의진발상기념비건립위원회(위원장 조성문, 총무 이석범)와 권태한 죽장중고등학교장 등 지역민들이 지난 1985년 입암리 하천 변에 ‘산남의진발상기념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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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남의병 전투지
포항시 북구 죽장면 입암리 산 25는 1907년 9월 산남의진이 일본군을 맞아 전투를 치른 곳이다. 산남의진(山南義陣)은 1906년 3월부터 1910년경까지 경상북도 영천, 청송, 영일 일대를 중심으로 정용기(鄭鏞基), 정환직(鄭煥直), 최세윤(崔世允) 의병장이 이끌던 의병부대였다. 의진은 처음부터 관동(關東)을 향한 북상을 목표로 정하고 활동하다 1907년 9월 입암전투(立岩戰鬪)에서 크게 패하였다. 이후 의진은 경상도의 여러 지역에서 격렬하게 항쟁하다 1910년 청송군 안덕면에서 벌어진 고와실전투(高臥室戰鬪)를 끝으로 해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