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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호 항일독립운동기념비
이주호(1921 - 2018)는 경북 영일(迎日) 사람이다. 대구사범학교 재학중인 1940년 11월 30일에 동교의 비밀결사 문예부(文藝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문예부는 민족문화존중과 항일의식의 고양을 목적한 결사로서, 부원의 비밀엄수 및 매주 토요일 작품감상, 비판 등의 운동방침을 정하고 1940년 11월말부터 1941년 3월까지 약 9회의 모임을 가졌다. 그런데 부원중에 상급생(8회)이 졸업을 하게됨으로써 그 뒤를 이어 그와 유흥수(柳興洙) 등이 중심이 되어 동지를 규합하고 조직을 확대하였다. 그리하여 1941년 2월 15일에 그는 유흥수·권쾌복(權快福) 등 15명과 함께 당시 대구시 대봉정(大鳳町) 소재 그의 하숙집에(유흥수와 동일 하숙) 모여 항일결사 다혁당(茶革黨)을 조직하였다. 즉 다혁당은 위의 문예부 및 동교의 다른 비밀결사인 연구회(硏究會)의 항일정신을 계승하여 조직을 확대 개편한 것이다. 그리고 동 결사는 조직을 교내에 국한하지 않고 대외적으로 조직을 확대하여 타교생 및 일반 사회인까지 포섭대상으로 하였다. 따라서 결사의 명칭도 당(黨)이라 했으며, 조직으로는 당수·부당수 아래 총무·학술·문예·연구·경기부 등 각 부서를 두었는데 이때 그는 연구부원의 일을 맡았다. 한편 다혁당은 비밀엄수 및 절대복종, 주2회 회합과 하급생지도 등을 당규약으로 정하고, 1941년 3월부터 동년 5월까지 세차례 모임을 가져 당의 활동상황과 조직확대에 관하여 협의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민족차별교육에 반대하여 동교내 연습과 학생(주로 일본인)과 심상과 학생(대부분 조선인)에 대한 차별대우를 철폐시키는 방안도 토의하였다. 그런데 1941년 7월, 대구사범학교 윤독회의 간행물인 〈반딧불〉이 일경의 손에 들어가게 됨에 따라 대구사범학교 비밀결사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도 일경에 붙잡혔으며, 그후 2년여 동안 미결상태로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1943년 11월에 대전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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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주동 추모비
엄주동(1897 - 1974)은 경북 영일(迎日, 현. 포항) 사람이다. 경성고보 교원양성소 재학시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를 조직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1915년 3월 서울에서 이우용(李雨用)·최규익(崔奎翼) 등과 함께 일본인들에게 피탈당하고 있는 각종 산업을 한국인 자신이 부흥시켜 나갈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조선산직장려계(朝鮮産織奬勵契)를 조직하고 이진석(李鎭石) 등과 함께 서기로서 활동하였다. 이들은 학생들에게 한국혼을 심어주는 정신적 교육으로 국권회복을 기약하고, 일제의 경제적인 침탈에서 벗어나기 위한 각종 사업을 계획하던 중 1917년 3월 5일 소위 보안법 위반혐의로 체포되었다. 한편 이 일이 있기 전에 그는 대종교에 입교하였으며 1916년 도사교(都司敎) 나 철(羅喆)이 구월산(九月山)으로 봉심(奉審)의 길을 떠나 순국할 때 김두봉(金枓奉)·나주영(羅柱永) 등 5인과 함께 수행하였다. 교주 나 철(羅喆)이 순국한 후에는 만주로 망명, 서 일(徐一) 휘하에서 연락책으로 활동하고, 1920년 청산리(靑山里) 독립전쟁에도 참여하였다고 한다. 1921년 8월에는 상해(上海)로 가 신규식(申圭植) 휘하에서 활동하다가, 예관( 觀)이 순국한 후에는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1922년에는 간도 용정(龍井)에서 군자금 조달을 위한 미곡상을 경영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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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헌문 추모비
장헌문(1870 - 1929)은 경상북도 영일군 지행면 죽정리 출신이다. 1896년 을미 의병이 일어나자 영일군에서 의병에 참가하였으며 1905년 을사의병이 일어나자 이듬해 5월 김재홍, 김복선 등과 거의를 결의하고 300여명의 의병을 모아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장헌문 의병진은 영일을 중심으로 경주, 죽장, 흥해, 청하 등지에서 항전하였으며, 정환직(鄭煥直)과 신돌석(申乭石) 의진과 더불어 호각의 세를 이루었다. 1909년 일경에 체포되어 동년 10월 7일 대구 재판소에서 10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18년 12월에 출옥하였다. 1926년 1월 25일 옥고의 여독으로 세상을 떠나니 향년 56세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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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수 유적비
김인수(1898 - 1939)는 경북 영일(迎日) 사람이다. 1918년 10월 5일 제주도(濟州道) 남제주군(南濟州郡) 좌면(左面) 법정사(法井寺)에서 일어난 항일 무력시위에 참가하였다. 법정사의 스님인 김연일(金連日) 등은 1918년 9월 19일, 신도 30명에 대하여, "왜노(倭奴)가 우리 조선을 병탄(倂呑)하였을 뿐 아니라, 병합(倂合) 후에 관리는 물론 상인 등에 이르기까지 우리동포를 학대하고 있다. 불원(不遠) 불무황제(佛務皇帝)가 출현하여 국권을 회복하게 될 것이나 우선 제일로 제주도에 사는 일본인 관리를 죽이고 상인(商人)들을 도외(島外)로 구축하여야 한다"고 말하며 거의를 촉구하였다. 마침내 10월 5일, 신도 33명을 소집하여 김연일은 스스로 불무황제로 칭하고 박주석을 도대장(都大將)으로 임명한 후, 김인수 등에게 각각 반수(班首)의 책임을 맡겼다. 그리고 김연일은 도대장 이하 군직을 명하여 대오(隊伍)를 편성하고 각면 이장에게 격문을 배포해 주민들을 동원하도록 하였다. 이때 모인 항일봉기군은 400여 명이나 되었다. 김연일·김인수 등의 주도자들은 봉기군을 지휘하여 전선을 절단하고 서귀포(西歸浦) 호근리(好近里)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이 사실을 보고 받은 일경들이 미리 서귀포에서 무장한 채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어 더이상 진격하지 못하자, 김연일은 박주석에게 그곳에서 일경과 대치하도록 하고, 그와 김인수는 봉기군 일부를 데리고 중문주재소(中門駐在所)를 습격하였다. 주재소장 길원(吉原)은 갑작스럽게 닥친 봉기군을 방어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순식간에 주재소를 파괴·소각하고 일경 3명을 포박하였으며, 13명의 구금자를 석방하는 등 활동하였다. 그는 이 일로 붙잡혀, 1919년 2월 4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소위 소요 및 보안법으로 징역 3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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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제 공덕비
김인제(1881 - 1962)는 1881년 10월 기계면 봉계리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사서심경(四書三經)에 능했다. 장년이 된 김인제는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읽고 일제에 착취당해 희망조차 잃은 마을을 살리기 위해 34살 때인 1914년부터 2년간 전국을 돌아다니며 선진지의 민풍과 산업을 견학했다. 마을로 돌아온 김인제는 주민들로부터 존경받는 김성진을 찾아가 마을을 부흥시킬 것을 의논한 뒤 마을에 성행하던 음주·도박 등 나쁜 풍습을 교정하기 위해 교풍회(矯風會)를 조직해 농업개량과 근검절약을 하는 등 마을 개혁에 앞장섰다. 처음에는 어려움을 겪었으나 점점 근검절약의 풍토가 마을에 조성되기 시작했다. 마을 주민들과 상의를 통해 당시 마을의 주산품인 면을 공동판매하고 공동저축을 하는 등 마을 발전에 이바지했다. 또한 업적 중 선구적 백미는 역시 교육이었다. 기언략에 "강육강식의 세계에 맞서 나갈 무기는 단연코 교육이라고' 주장하며 일찍이 서당을 열어 유가문화의 바탕인 한학을 지도하는 한편 문맹퇴치의 일환책으로 개설한 야학운영에도 정신적 후원자가 되어 몽매한 인성을 개도하여 윤상을 체득케하고 삶의 의욕과 질을 높여 드디어 약소민족의 설움을 딛고 궁극적 목표인 자력갱생의 활로를 터득케하였다. 또, 김성진과 함께 주민에게 단책형 묘대, 정조식, 녹비재배, 나락의 건조조제 자급, 비료제조 등을 실시하게 했다. 이로써 각종 농산물의 생산액이 종전에 비해 크게 증가한 것은 물론이고 품질도 매우 향상됐다. 해마다 장족의 발전을 거듭한 결과 근면·자조·협동하는 마을로 되살아났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조선총독부는 전국 보통학교 교과서에 마을 성공사례를 실어 학생들에게 근면·자조·협동정신을 배우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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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흡 창의비
이종흡(1861 - 1919)은 경북 영일(迎日) 사람이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 공포를 계기로 항일의병이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봉기하게 되자, 안동(安東)의 김도화(金道和)·이준구(李俊久) 등과 함께 거의(擧義)하였다. 1896년 5월 기계(杞溪)에서 김하락(金河洛) 의진에 합류하여 이준구 등과 함께 참모(參謀)에 임명되어 안동·경주 등지에서 활동하였으며 기계 방면의 소모장(召募將)을 맡아 청하(淸河) 등지에서 의병을 소모하고 군정(軍政)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6월 영덕(盈德) 전투에서 김하락이 전사 군국하고 선유사(宣諭使)의 권유로 의진이 해산된 뒤에는 향리로 돌아와 후진 양성에 진력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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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응원 추모비
윤응원(1874 - 1911)은 경북 영일(迎日) 사람이다. 1907년 11월경 박덕삼(朴德三)이 이끄는 의병부대에 들어가 그 휘하에서 활동하였다. 경기도 가평(加平)·강원도 춘천(春川)·양구(楊口) 등지에서 활동하던 중 같은 해 12월 6일 춘천군 추곡(楸谷)에서 일군과 교전을 벌여 패한 뒤에는 일시 해산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윤태훈(尹泰勳) 의병부대에 참가하여 1908년 2월 20일경까지 강원도 홍천(洪川) 일대에서 항전을 벌이다 붙잡혔다. 1908년 9월 19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소위 내란죄로 유형(流刑) 7년을 선고받고 유배생활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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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호 집
이상호(1876 - 1949)는 대한제국기 산남의진에 입진하여 주방전투에 참전한 의병이다. 경상북도 영일 출신.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고종의 시종관으로 있던 정환직(鄭煥直)이 아들 정용기(鄭鏞基)에게 고향인 영천으로 내려가 의병을 일으켜 산남의진(山南義陣)을 조직하게 하자, 이상호는 김석정(金石井)·이경구(李景久)와 예안·안동지방의 책임을 맡았다. 1907년 입암전투(立巖戰鬪)에서 정용기가 전사하자, 의병을 인솔하여 정환직과 합세하여 청송(靑松)·진보(眞寶)·청하(淸河)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전과를 올리고, 소총 80정, 군량미 200석을 조달하기도 하였다. 주방전투(周房戰鬪)에서의 부상으로 은신, 치료중 체포당하였으나 탈옥, 관동지방에서 은거하였다.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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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호 묘
이상호(1876 - 1949)는 대한제국기 산남의진에 입진하여 주방전투에 참전한 의병이다. 경상북도 영일 출신.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고종의 시종관으로 있던 정환직(鄭煥直)이 아들 정용기(鄭鏞基)에게 고향인 영천으로 내려가 의병을 일으켜 산남의진(山南義陣)을 조직하게 하자, 이상호는 김석정(金石井)·이경구(李景久)와 예안·안동지방의 책임을 맡았다. 1907년 입암전투(立巖戰鬪)에서 정용기가 전사하자, 의병을 인솔하여 정환직과 합세하여 청송(靑松)·진보(眞寶)·청하(淸河)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전과를 올리고, 소총 80정, 군량미 200석을 조달하기도 하였다. 주방전투(周房戰鬪)에서의 부상으로 은신, 치료중 체포당하였으나 탈옥, 관동지방에서 은거하였다.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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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3.1의거 기념관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3월 22일 청하장날 윤영복·오용간 등의 사전 준비로 장터에 수백명이 모여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에서 김윤선(金允先, 1865~1932), 김종만(金鍾滿, 1887~1967), 김진봉(金鎭奉, 1898~1959), 안덕환(安德煥, 1866~1924), 안도용(安道用, 1893~1921), 안상종(安常鍾, 1893~1925), 윤영복(尹永福, 1896~1943), 안천종(安千鍾, 1870~1940), 안화종(安和鍾, 1888~1965), 오용간(吳用干, 1869~1941), 이명만(李命滿, 1900~1986), 이영섭(李泳燮, 1898~1960), 이준석(李俊石, 1896~1955), 정재선(鄭在先, 1898~1971) 등이 피체되어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포항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2001년 11월 1일 이 기념관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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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호 집
이준석 지사의 부친이자 이 교수의 증조부인 이익호 선생은 일찍이 구한말 상경해 배재학당에서 수학 후 민영환 대감 휘하에서 궁내부 주사로 공직생활을 했다. 하지만 을사늑약 부당함을 호소하며 1905년 민 대감이 자결하자 그도 고향 송라면으로 낙향해 대전리교회·유계리교회·청하교회를 세웠고, 청하향교 장의와 청하면장도 역임하며 계몽활동을 펼쳐나갔다. 3·1운동이 일어나기 1년 전 이익호가 호열자(콜레라)로 추정되는 병으로 45세 이른 나이에 세상을 등지자, 그 뜻은 장남 이준석과 3남 이준업에게 계승된다. 이준석(1896 - 1955)은 경상북도 영일(迎日) 사람이다. 1919년 3월 22일의 청하면 덕성리(淸河面德城里)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은 윤영복(尹永福)·오용간(吳用干)·윤영만(尹永滿) 등에 의해 독립만세운동이 계획되었는데, 그들은 덕성리 장날인 3월 22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대형 태극기 1개, 소형 태극기 20여개를 만들고 시위군중을 동원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윤영복으로부터 이같은 거사 계획을 전해들은 그는, 3월 22일 오후 1시경, 윤영복·오용간·윤도치(尹道致)·안천종(安千鍾)·안상종(安尙鍾)·이준업(李俊業)·이영섭(李泳燮)·안덕환(安德煥)·김만수(金萬守)·김유곤(金有坤)·정백용(鄭伯用) 등과 함께 장터에 모여 독립만세를 외친 후, 덕성리 일대를 시위행진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때 긴급 출동한 일본경찰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이해 4월 28일 대구(大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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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3.1의거 기념비
1919년 3월1일 서울 종로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된 후 전국으로 만세운동이 확산됐다. 당시 포항시 북구 송라면 대전리 일대에서도 만세운동이 전개됐다. 윤영복을 비롯한 14명이 주동자로 일본 경찰에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1986년 이들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고 후세에 이를 알리고자 기념비가 세워졌다. 국가보훈처는 2003년 2월에 유품을 보존·전시하는 기념관과 함께 현충시설로 지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