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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 집(이석고택)
이석(1910 - 1978)의 이명은 이이석이며, 1927년 11월 경성제1고등보통학교(京城第一高等普通學校)에 재학 중 ‘식민지교육 타파’를 주장하며 동맹휴학(同盟休學)을 주도하였다. 1929년 11월에는 서울에서 정종근(鄭鍾根)·권유근(權遺根) 등과 함께 학생단체를 조직하여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이 무렵 그는 광주학생운동으로 학생들이 대대적으로 체포되자, ‘검속된 조선 학생을 탈환하고 식민지 교육에 반대하라’는 격문을 제작 배포하였다. 이를 통해 일제 식민교육의 부당성을 꾸짖으며 한편으로 광주학생운동의 전국화를 도모한 것이다. 그러나 격문 배포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1930년 12월 2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 2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석방 후 이석은 고향인 경북 칠곡군(漆谷郡)에서 일본 제국주의를 부정하고 조국의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2년 2월 그는 최소복(崔小福)·정칠성(鄭七星) 등과 함께 적색농민조합건설준비협의회(赤色農民組合建設準備協議會)를 비밀리에 조직하여 활동을 전개했으나, 다시 일경에 체포되었다. 1938년 2월경 체포되어 4년간 취조를 받고 1942년 2월 23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을 선고받고 또다시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7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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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택 순국기념비
이수택(1891 - 1927)은 경북 칠곡(漆谷) 사람이다.1913년 경북 풍기(豊基)에서 채기중(蔡基中)·유창순(庾昌淳)·유장렬(柳璋烈)·한훈(韓焄) 등과 더불어 광복단(光復團)을 결성하여 군자금 모금과 친일파 처단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 직후 박중화(朴重華) 등과 함께 도만(渡滿)하여 그해 11월 만주 길림에서 김원봉(金元鳳)·곽재기(郭在驥)·이종암(李鍾岩) 등과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였으나, 겨울에 모친의 병환소식을 듣고 귀국하였다. 1920년 3월 곽재기·이성우(李成宇) 등과 더불어 밀양(密陽)과 진영(進永)의 주요기관을 폭파하려고 폭탄과 권총을 밀반입하려다가 발각되자, 피신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1920년 12월 이종암·구영필(具榮泌)·김상윤(金相潤) 등과 더불어 밀양경찰서를 폭파할 계획을 모의하고, 27일 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여 순사부장(巡査部長)에 상처를 입혀 죽게하였다. 이 사건 직후 피신한 그는 부산에서 일경에 붙잡혔으나 벙어리 행세로 7일만에 석방되었다. 그후 계속 활동을 하던 중 이종암·김상윤·서상락(徐相洛) 등과 군자금을 모금하려다 1924년 1월 25일 일경에 붙잡혀 동년 5월 13일 소위 폭발물취체벌칙과 제령 제7호 위반으로 2년 6월형의 징역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가혹한 고문의 여독(餘毒) 끝에 1927년 6월 6일 37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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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수호기념비
독립수호기념비는 '천지와 같이 이 나라에 살 것이로다. 그 끝까지 이 나라 독립을 수호하리.'라는 문구를 통해 영원히 국가의 독립을 쟁취하고 자주권을 지킬 것을 당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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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수 기념비
지하수(1892 - 1938)는 경북 칠곡(漆谷) 사람이다. 그는 1919년 4월 9일 오후 9시경 경북 칠곡군 약목면(若木面) 평복동(平福洞)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평소 항일의식이 투철하던 그는 서울에서의 3·1운동이 지방으로 확산되면서 인근의 인동(仁同)이나 성주(星州) 등지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심하고 동지를 규합한 뒤 만세시위의 준비를 추진하였다. 그는 4월 9일 마을의 20대 청년들을 모아 만세시위를 벌일 것을 결의하고, 12명의 청년들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그는 이 일로 일경에 붙잡혀 1919년 12월 13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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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행국, 정행돈 추모공원
정행국(1896 - 1921)은 경북 칠곡(漆谷) 사람이다. 1914년 8월 서울에서 숭실전문학교(崇實專門學校) 학생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펴려다가 일경에 발각되어 추적을 받게 되자 만주로 건너가 길림(吉林)·장춘(長春) 등지에서 항일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고 한다. 1919년 5월에 귀국한 그는 고향에서 왜관청년회(倭館靑年會)를 조직하고 회장에 선임되어 동회의 활동을 주도하였으며 동창학원(同昌學院)을 설립하여 청소년들에게 항일민족의식을 고취하는데 힘썼다. 1921년 10월 왜관청년회 주최로 <나의 조국은 죽지 않는다>는 제목의 시국강연을 하던 중 일경에 붙잡혀 잔혹한 고문을 당한 끝에 1921년 11월 병보석되었으나 다음날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정행돈(1912 - 2003)은 경북 칠곡(漆谷) 사람이다. 대구고등보통학교 재학중인 1931년 11월에 동교의 친일 교유(敎諭)에 대한 배척투쟁을 벌이다가 강제로 퇴교당했다. 그후 1932년에는 고향인 왜관(倭舘)에서 이창기(李暢基), 이두석(李斗錫)과 함께 청년동지회(靑年同志會)를 조직하여 농촌계몽 및 한글강습 등의 항일활동을 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이러한 활동이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그는 1938년 붙잡혔으며, 1939년 10월 25일 대구지방검찰청으로 이송되어 1941년 3월 7일 대구지방법원 예심에서 면소(免訴)되어 석방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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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행돈 기념관
정행돈(1912 - 2003)은 경북 칠곡(漆谷) 사람이다. 대구고등보통학교 재학중인 1931년 11월에 동교의 친일 교유(敎諭)에 대한 배척투쟁을 벌이다가 강제로 퇴교당했다. 그후 1932년에는 고향인 왜관(倭舘)에서 이창기(李暢基)·이두석(李斗錫)과 함께 청년동지회(靑年同志會)를 조직하여 농촌계몽 및 한글강습 등의 항일활동을 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이러한 활동이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그는 1938년 붙잡혔으며, 1939년 10월 25일 대구지방검찰청으로 이송되어 1941년 3월 7일 대구지방법원 예심에서 면소(免訴)되어 석방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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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창학원 표지석
동창학원은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에 교육을 받지 못하는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설립한 교육기관이다. 1922년 4월 7일 왜관청년회가 교육을 받지 못하는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설립한 학교로, 개원하자마자 원생이 크게 늘어 한 달여 만에 170여 명에 이르렀다. 일제강점기 칠곡군 유일의 사학 기관이었으며 채충식 등 청년회 활동가들이 교사로 되어 학생들을 지도하였다. 이수목(李壽穆), 박희중(朴喜重), 이상호(李相祜) 등 3명이 자진하여 각자 1백 원의 유지비를 부담하여 운영자가 되기로 한 후 이수목이 중도 탈락하고 후임으로 이강진(李綱鎭)이 참여하여 세 사람이 1년간 350원의 유지비를 내기로 하였다. 그러나 세 사람이 부담액을 내어 놓지 않아 강사의 월급도 지불하지 못하게 되자 학생 수도 점차 줄어들게 되자 급기야 폐교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후 경상북도에서 지방비와 향교 재산 수입의 일부를 지원받아 학원 운영비로 사용하였는데, 그 금액은 1년에 약 300원에 달했다. 또 왜관곡물상조합의 보조까지 받아 학원이 운영되었다. 그러나 1929년의 큰 가뭄으로 인해 군청과 향교에서는 지원을 거부하였고, 지방 재산가들은 학원에 관심이 없음으로 인해 학원 운영에 큰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 때 지방유지 등이 기금을 모았는데, 그 금액이 2백 47원이었다. 이렇게 하여 학교 운영의 위기를 넘겼으나 일시적인 것이었다. 그에 따라 1932년 6월 20일에는 무기 휴교를 단행하였고, 운영 필요 경비를 마련하지 못한다면 폐교해야 될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왜관곡물상조합에서 곡물 매매를 하면서 마련한 수수료로 학원 운영 경비를 다시 충당되면서 폐교의 위기는 넘기게 되었으나 학원의 원활한 운영에는 부족하였다. 그로 인해 학원 시설과 학생 수는 점차 줄어들었고, 해마다 존폐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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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관학생사건 기념비
왜관학생사건은 1939년 7월, 경부선 복선화 공사에 동원된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이 민족 차별에 반발, 일본인 교사에게 저항한 일을 이른다. 당시 일제는 대구사범학교 전교생을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10일 동안 근로보국대(勤勞報國隊)라는 이름으로 노동력을 착취했다. 이때 작업 중 일본인 학생이 조선인 학생에게 시비를 걸어오다가 오히려 두들겨 맞고 말았는데, 이를 두고 일본인 교사들이 조선인 학생의 행동만 문제를 삼았다. 이에 학생들이 교사에게 보복하려다 실패하고 말았고, 이 사건을 계기로 7명이 퇴학하고 11명이 정학을 당했다. 본 사건을 기억하고자 1984년 11월 5일에 대구사범 심상과 7기생이 본 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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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행돈 흉상
정행돈(1912 - 2003)은 경북 칠곡(漆谷) 사람이다. 대구고등보통학교 재학중인 1931년 11월에 동교의 친일 교유(敎諭)에 대한 배척투쟁을 벌이다가 강제로 퇴교당했다. 그후 1932년에는 고향인 왜관(倭舘)에서 이창기(李暢基)·이두석(李斗錫)과 함께 청년동지회(靑年同志會)를 조직하여 농촌계몽 및 한글강습 등의 항일활동을 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이러한 활동이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그는 1938년 붙잡혔으며, 1939년 10월 25일 대구지방검찰청으로 이송되어 1941년 3월 7일 대구지방법원 예심에서 면소(免訴)되어 석방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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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형 집
강원형(1862 - 1914)은 경상북도 칠곡(漆谷)군 지천(枝川)면 신동(新洞)리에서 태어났다. 1895년 일본의 명성황후 시해만행이 자행되자 이를 규탄하는 구국상소를 올렸다. 1904년 2월 일본이 러 일전쟁을 도발하고 일본군을 한국에 상륙시켜 「제1차 한일의정서」를 강제 체결해서 내정을 간섭하며 침략정책을 강화하자, 1905년 1월 대한십삼도유약소(大韓十三道儒約所)를 설치하고 그 수좌(首座)가 되어 일본공사관에 항의공함을 보내어 일본의 침략정책과 내정간섭을 규탄하고 반성을 촉구했으며, 일본이 계속 내정간섭을 자행할 때에는 결사적으로 이에 맞서 싸울 결의를 전달하였다. 1905년 3월 일본 헌병대가 전참판 최익현(崔益鉉), 전판서 김학진(金鶴鎭), 비서승 허 위(許蔿) 등 3인을 일제 침략정책을 규탄하는 격문을 돌렸다 하여 구속하자, 강원형은 일본군 사령부에 항의공함을 보내어 일본의 불법을 힐문하고 3인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또한 대한13도유약소의 대표로서 각국 공사관에 공함을 보내어 일본의 교활한 침략정책을 규탄하고 3인의 구속에 대한 공개담판을 요구하였다. 강원형 등의 이러한 운동으로 3인은 석방되었으나 강원형은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45일간 구속되었다. 1905년 5월에 석방된 후에도 일본의 배신과 침략정책을 규탄하는 항의공함을 일본 공사관에 여러 차례 발송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곧 13도 유생 연명소(聯名疏)에 소수(疏首)가 되어 상소를 올리고 「을사조약」의 파기와 을사5적의 처단을 요구하고, 일본 공사의 횡포무례를 엄징할 것을 요구했으며, 같은 뜻을 시민들과 세계에 성명하여 시민들의 국권회복에의 궐기를 호소하였다. 이로 인하여 1905년 11월 28일에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4개월간 투옥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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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형 재실(혜사정)
강원형(1862 - 1914)은 경상북도 칠곡(漆谷)군 지천(枝川)면 신동(新洞)리에서 태어났다. 1895년 일본의 명성황후 시해만행이 자행되자 이를 규탄하는 구국상소를 올렸다. 1904년 2월 일본이 러 일전쟁을 도발하고 일본군을 한국에 상륙시켜 「제1차 한일의정서」를 강제 체결해서 내정을 간섭하며 침략정책을 강화하자, 1905년 1월 대한십삼도유약소(大韓十三道儒約所)를 설치하고 그 수좌(首座)가 되어 일본공사관에 항의공함을 보내어 일본의 침략정책과 내정간섭을 규탄하고 반성을 촉구했으며, 일본이 계속 내정간섭을 자행할 때에는 결사적으로 이에 맞서 싸울 결의를 전달하였다. 1905년 3월 일본 헌병대가 전참판 최익현(崔益鉉), 전판서 김학진(金鶴鎭), 비서승 허 위(許蔿) 등 3인을 일제 침략정책을 규탄하는 격문을 돌렸다 하여 구속하자, 강원형은 일본군 사령부에 항의공함을 보내어 일본의 불법을 힐문하고 3인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또한 대한13도유약소의 대표로서 각국 공사관에 공함을 보내어 일본의 교활한 침략정책을 규탄하고 3인의 구속에 대한 공개담판을 요구하였다. 강원형 등의 이러한 운동으로 3인은 석방되었으나 강원형은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45일간 구속되었다. 1905년 5월에 석방된 후에도 일본의 배신과 침략정책을 규탄하는 항의공함을 일본 공사관에 여러 차례 발송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곧 13도 유생 연명소(聯名疏)에 소수(疏首)가 되어 상소를 올리고 「을사조약」의 파기와 을사5적의 처단을 요구하고, 일본 공사의 횡포무례를 엄징할 것을 요구했으며, 같은 뜻을 시민들과 세계에 성명하여 시민들의 국권회복에의 궐기를 호소하였다. 이로 인하여 1905년 11월 28일에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4개월간 투옥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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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준 흉상
최준(1884 - 1970)은 경북 경주(慶州) 사람이다. 그는 경주 지방의 대지주(大地主)로서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과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에 관계하면서 거액의 자금을 제공함으로써 독립운동단체의 활동을 지원하였다. 특히 대한광복회 총사령인 박상진(朴尙鎭)과는 사촌 처남의 관계로 자신의 재력을 바탕으로 대한광복회의 재무(財務)를 맡기도 했다. 그리하여 대한광복회가 발각될 때, 이에 연루되어 붙잡히기도 했던 그는 3·1독립운동 이후 상해(上海)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역시 거액의 자금을 송달하였다. 그가 송달한 자금의 액수가 얼마만큼 이었는지 구체적으로 밝힐 수는 없으나 안희제(安熙濟)와 함께 경영하던 백산무역주식회사(白山貿易株式會社)가 1백여만원의 부채를 지고 파산될 만큼 거액이었다고 한다. 한편 그는 1921년 9월 태평양회의(太平洋會議)에 보내기로 한 청원서에 경주대표로 서명하기도 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