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검색
TOTAL. 561건
-
우용택 숭모비
우용택(1868 - 1940)은 경상북도 의성(義城)군 안계(安溪)면 교촌(校村)리에서 태어났다. 일본이 1904년 2월 러 일전쟁을 도발하여 일본군을 우리나라에 불법 상륙시키고 「제일차 한 일의정서」를 강제 체결하여 내정간섭을 하며 한국독립에 대한 침략을 시작하자, 동지 강원형(姜遠馨) 등과 함께 일본군의 불법침략을 규탄하는 공함(公函)을 각국 공사관에 발송하였다. 또한 일제가 친일단체인 일진회(一進會)를 조직하여 매국행위에 내세우자 일진회를 규탄하다가 1905년 5월 일제 헌병대에 구속되었다. 1905년에 석방된 후에도 정부 내의 친일대신들과 일제에 대한 굴복정책을 탄핵하는 상소를 수차 올리고 정부의 각성을 촉구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 후에는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와 대한협회(大韓協會)에 가입하여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김경성 기념비
김경성(1879 - 1943)은 경북 의성(義城) 사람이다. 1919년 3월 경북 김천군(金泉郡) 개영면(開寧面)에서 3·1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였고, 같은 해 10월경 군자금 1,000원을 개인 재산의 처분으로 마련하는 한편 동삼성(東三省)에 이동녕·이시영 등이 설립한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에 입학하기를 희망하는 청년 3명을 모집하여 동삼성(東三省) 안동현(安東縣)으로 가서 조강제(趙强濟)에게 인계하였다고 한다. 1920년 2월 다시 경주지방에서 군자금 및 신흥무관학교 학생모집을 위하여 활약하다가 붙잡혀 1921년 4월 14일 대구지방법원 경주지청에서 소위 공갈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
안평 항일독립운동기념비
1919년 3월, 조국 광복과 주권 회복을 위한 기독교인들의 열망이 모여 일제로부터 조국의 독립을 위한 만세 운동이 시작되었다. 태극기를 앞세워 도리원 장터까지 진입한 700여명의 안평인들은 왜군의 무차별 총탄에 목숨을 잃고 부상을 당했다. 불의에 대항한 선열의 고귀한 희생정신과 민족의 얼을 먼 훗날까지 이어 받기 위해서 1996년 4월에 본 비를 건립하였다.
-
이양준 순국비
이양준(1890 - 1920)은 경상북도 의성(義城) 사람이다. 1919년 3월 17일 안평면 대사동(安平面大司洞)과 3월 19일 봉양면 도리원(鳳陽面桃李院)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3월 3일 평양신학교(平壤神學校)에 입학하기 위하여 평양에 갔다가, 서울·평양 등지에서 전개되고 있는 독립만세운동을 목격하고 귀향한 김원휘(金原輝)와 3월 8일의 대구(大邱) 학생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한 후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한 계성학교(大邱啓聖學校) 학생인 박상동(朴尙東)의 귀향과 동시에 추진되었다. 그는 당시 대사동 교회 집사로서 3월 15일 교회에서 일요일 낮 예배를 마친 뒤, 이종출(李鍾出)·김옥돈(金玉頓)·이북술(李北述)등과 교회에 남아서 독립만세운동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던 중, 당일에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오후 7시 1백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3월 16일 오후 8시에는 1백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기도동(箕道洞)을 거쳐 창길동(倉吉洞)까지 시위행진한 후 자진 해산하였으며, 이튿날에도 오후 8시경, 1백 50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대사동 우리곡(尤利谷) 부락에 모여 독립만세를 외친 뒤, 창길동을 거쳐 화령동(花寧洞)까지 만세시위를 전개하고 자진 해산하였다. 3월 18일에는 이북술·김유식(金有式)·김도식(金道式)·이만준(李萬俊) 등 3백여명의 시우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동리 끝까지 시위행진하였고, 이튿날 낮에는 4백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안평주재소로 몰려가 만세시위를 전개한 후 인근의 봉양면 도리원 장터로 행진하였다. 이미 그는 전날 안평면민들에게 도시락을 지참하고, 도옥동 하단(都玉洞河端)에 모이라는 비밀연락을 미리 취했기 때문에 그가 도리원 장터로 시우행진할 때의 시위군중은 수천명으로 늘어났다. 한편 이러한 정보를 입수한 의성경찰서에서는 인근 비안(比安)주재소에 응원 출동 중이던 군경을 도리주재소에 급파하여, 도리원장이 열릴 무렵 이를 폐쇄하고, 삼엄한 경계를 취하고 있었다. 이같은 일제의 조치에 격분한 시위군중은 몽둥이와 돌을 가지고, 도리주재소로 몰려가 그곳을 포위하고, 투석으로 건물을 파괴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사태의 위급함을 느낀 일본 군경의 야만적인 발포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는데, 그도 이때 가슴에 총상을 입은 채 체포되었으며, 이해 9월 2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소요 혐의로 징역 3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상처의 악화로 가출옥하였으나, 곧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
항일독립운동기념탑
항일독립운동기념탑은 의성에서의 3.1만세운동을 기념하는 사적이다. 1919년 기미에 서울에서부터 3.1만세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의성의 선열들 또한 3월 12일 비안보통학교 학생들의 독립만세 시위를 시작으로 하여 오랜 시일 동안 일제에게 항거하여 자주 독립을 분며이 요구하였다. 그 후에도 혹은 국내에서, 혹은 국외에서 비밀조직을 결성하여 조국광복을 위한 투쟁을 계속하였다. 위와 같은 선열들의 애국정신과 보국의식을 널리 알리고 기억하고자 본 탑이 건립되었다.
-
병신창의기적비
병신창의기적비는 구한말 일본의 국권 침탈기도에 항거하기 위해 1896년 2월부터 4월까지 의성 점곡 지역에서 일어난 의병활동을 기록한 기념비다.의성 지역의 의병 항쟁은 의성군 점곡면에서 가장 먼저 전개되었다. 의병 부대를 보면, 의병장에 김상종, 초모장에 김수욱, 중군에 권대직, 선봉장에 김수빙, 관향장에 김수협 등이었다. 이들은 점곡면의 유생들로 1895년에 을미사변을 계기로 궐기하였다. 하지만 일본군에 밀려 황산에 진지를 구축하였고, 여기에서 의병진은 1896년 3월 29일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일본군의 화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김수담, 김수협 등 수많은 전사자를 내고 패하고 말았다.의성군 사곡면 오상리 출신의 이필곤은 1896년 2월 일본의 침략에 분개해 향내 청장년에게 통문을 돌려 창의를 주창하였다. 그 뒤 의병 진영을 갖추고 춘산면의 사미와 옥산의 황산에서 적과 전투를 승리를 이끄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일본의 강압을 못 이긴 조선 왕실은 파병의 조칙을 내리게 되자 비통함을 품은 채로 정부의 명령에 따라 의병을 해산하고 말았다.
-
박시목 기념비
박시목(1894 - 1944)은 경북 의성(義城) 사람이다.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고, 1920년 상해(上海)로 망명한 뒤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에 참여하여 의정원(議政院) 의원에 선출되고 감찰원으로 국내에 파견되어 경북지역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여 상해로 돌아왔다. 그후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1927년 신간회(新幹會) 동경지회(東京支會)의 조직결성에 참여하였으며 1928년 2월 동회의 임시대회에서 대의원에 선출되어 민족정신 고취 내용의 격문 등을 살포하며 활동하였다. 그후 1930년 대구 근교 팔공산(八公山)에서 광선 경영을 위장하여 박영덕·이상훈·심재윤·노석호·김 인 등 애국지사를 규합하였으며, 청년동지들을 연안(延安)으로 밀파하여 독립군(獨立軍)에 가담시키기도 하였다. 그리고 1943년에는 종교계와 협의하여 거액의 군자금을 모집하여 국내의 무력항쟁 및 중국의 광복군(光復軍)과 합세하여 대일 선전포고(對日宣戰布告) 등을 계획하던 중 아들 희규를 포함한 10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북경(北京)에서 일경에 붙잡혀 혹독한 고문 끝에 아들과 함께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
의성의병기념관
1895년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단발령을 공포하자, 유림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의병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의성향교도 1896년 3월 17일(음 2.4) 향회를 열어 창의를 결의하고, 의성군 점곡면 서변리 사촌마을의 김상종(1848~1908)을 의병장으로 천거하였다. 김상종은 중군장 권대직.선봉장 김수담.우익장 이희정.소모장 김수욱.관향장 김수협 등으로 진용을 편성하고 3월 25일 의병장에 취임하였다. 의성의진은 창의한 지 8일 만에 치른 구성산(구봉산)전투에서 20여 명의 적을 사살하는 큰 전과를 올렸고, 이후 벌어진 황산전투.감은리전투.신운천변전투(비봉산전투)에서도 승전과 패전을 거듭하며 분전하였다. 김상종 의병장의 의성의진이 활약했던 전기의병(1894~1896)은 이후 중기의병(1904~1907).후기의병(1907~1910)으로 이어져 항일독립운동의 불씨가 되었다. 의성군은 창의부터 해산까지 62일 동안 결사적으로 항전한 의성의진의 의병투쟁을 널리 알리고, 의롭게 싸우다 순국한 의병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2016년 11월, 이곳 사촌마을에 의성의병기념관을 건립하였다.
-
박연백 집
박연백(1869 - 1909)의 본은 밀양으로 박광호(朴光鎬)의 장남이며 경북 의성(義城) 출신이다. 평소부터 일제의 침략과 국사가 그릇됨을 한탄해 오던 중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거의(擧義)하여 적을 토벌할 것을 결심한 뒤 격문을 작성하여 사방으로 보내니 각 지역에서 의병이 모여들어 공산(孔山)에서 기병(起兵) 하였다. 1906년 7월 1일 일본군과 교전하여 죽창이나 나무막대기 등으로 신무기에 대항하여 적 십 수명을 도륙한 뒤 기세를 올려 의성·의흥(義興)·영천(永川)·청송(靑松) 등지로 전전하면서 야간기습과 화공혈전을 단행하여 일본군을 토벌하였다. 1907년 10월 영천의병장 정관녀(鄭寬汝)와 합세하여 경주 죽지면(竹枝面) 입암리(立岩里)에서 치열한 교전을 벌였는데 정관녀가 도중에 전사하였다. 적군이 사방에서 공격하니 악전고투 끝에 포위망을 뚫고 후퇴하였으나 의병의 희생이 컸다. 그 해 11월 25일 부하 100여 명을 이끌고 의성군사무소, 일경 분견소를 습격하였고 12월 23일에는 청송군 소정리(所井里)에서 적군과 교전하였으며 또한 25일에 의성군에서 일본 수비대와 접전하는 등 맹렬히 활동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대거 증강으로 인해 더 이상의 항쟁이 곤란함을 인지하고 의병진을 해산하였으며, 1909년 11월 20일에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박연백 망제지단
박연백(1869 - 1909)의 본은 밀양으로 박광호(朴光鎬)의 장남이며 경북 의성(義城) 출신이다. 평소부터 일제의 침략과 국사가 그릇됨을 한탄해 오던 중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거의(擧義)하여 적을 토벌할 것을 결심한 뒤 격문을 작성하여 사방으로 보내니 각 지역에서 의병이 모여들어 공산(孔山)에서 기병(起兵) 하였다. 1906년 7월 1일 일본군과 교전하여 죽창이나 나무막대기 등으로 신무기에 대항하여 적 십 수명을 도륙한 뒤 기세를 올려 의성·의흥(義興)·영천(永川)·청송(靑松) 등지로 전전하면서 야간기습과 화공혈전을 단행하여 일본군을 토벌하였다. 1907년 10월 영천의병장 정관녀(鄭寬汝)와 합세하여 경주 죽지면(竹枝面) 입암리(立岩里)에서 치열한 교전을 벌였는데 정관녀가 도중에 전사하였다. 적군이 사방에서 공격하니 악전고투 끝에 포위망을 뚫고 후퇴하였으나 의병의 희생이 컸다. 그 해 11월 25일 부하 100여 명을 이끌고 의성군사무소, 일경 분견소를 습격하였고 12월 23일에는 청송군 소정리(所井里)에서 적군과 교전하였으며 또한 25일에 의성군에서 일본 수비대와 접전하는 등 맹렬히 활동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대거 증강으로 인해 더 이상의 항쟁이 곤란함을 인지하고 의병진을 해산하였으며, 1909년 11월 20일에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최한룡 기적비
최한룡(1849 - 1917)은 경북 청도 출신으로 1907년 4월부터 국권회복을 부르짖는 격문을 발표하였고, 1907년 7월에는 부하 70명을 거느린 의병장으로 청도·영천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최한룡은 1905년 을사늑약에 분개하여 국권회복을 모색하던 중 1906년 산남의진(山南義陣)에 참전하였다. 1906년 4월 산남의진의 대장 정용기(鄭鏞基)가 신광면 우각동(牛角洞)에서 경주진위대에 체포당한 뒤 자수하였으나 일본군의 악형으로 하반신 불구가 되었다. 최한룡은 1907년 4월부터 1908년 1월 사이에 일본의 침략을 비판하고 국권회복을 부르짖는 다섯 차례의 격문(檄文)을 발표하였다. 즉 <天下에 告示하는 文>(1907. 4), <國債償還件>(1907. 5), <斷髮令件>(1907. 7), <埃及近代史를 읽고 大韓國의 危急함을 歎함>(1908. 1), <國體로서 賊國을 討伐할 件>(1908. 1) 등을 통해서 국민들의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 그리고 1907년 7월경 부하 70여 명으로 창의, 의병장으로 청도·영천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최한룡은 1908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대구경찰서에서 심문을 받았으며, 1909년 이후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해 해인사(海印寺) 등지에서 은거하였다. 최한룡은 합천 해인사와 경남 밀양(密陽)에 거주하는 사위 박재하(朴在夏)의 집에서 신병을 치료하며 요양을 하다가 1917년 10월 26일 사망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이정희 묘전비
이정희(1881 - 1955)는 경북 청도(淸道) 사람이다. 그는 1915년 음력 1월 15일 박상진(朴尙鎭)·서상일(徐相日)·이시영(李始榮)·박영모(朴永模)·홍주일(洪宙一) 등과 함께 경북 대구(大邱) 안일암(安逸庵)에서 시회(詩會)를 가장하여 비밀결사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을 결성하였다. 동단은 대구를 중심으로 주로 경상우도((慶尙右道) 지역의 중산층 이상의 혁신유림들이 참여하여 사립교육기관과 곡물상의 상업조직을 통하여 독립군을 지원한 구국경제활동단체였다. 조선국권회복단은 1915년 7월 15일에 풍기(豊基)의 광복단(光復團)과 조직을 합쳐 독립군 양성과 군자금 모집, 그리고 무기구입을 목적으로 한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로 발전하였다. 그는 대한광복회의 고문으로 활동하다가 1918년 1월 대구의 광복회 조직이 노출되어 일경에 붙잡혔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동년 10월에 석방되었다. 그는 1920년에 고향인 청도군 매전면(梅田面) 온막동(溫幕洞)에 온명학원(溫明學院)을 설립하고 후진양성에 주력하는 한편 민족의식 고취에 노력하였다. 또한 1921년에 경성북도 초대 평의원(評議員)으로 당선된 후 임시정부(臨時政府) 후원단체인 의용단(義勇團)을 조직하여 군자금 모집활동을 펴다가 1922년 일경에 붙잡혀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계속하여 항일운동과 민족의식 고취에 노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