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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화 기적비
박재화(1890 - 1928)경북 의성(義城) 사람이다. 1922년 경 중국 길림성(吉林省) 소재 독립군단체 흥업단(興業團) 단원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흥업단은 1920년에 조직되어 항일무장독립투쟁을 목표로, 동삼성(東三省) 일대를 무대로 청년들에게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1921년 말 군자금 마련을 위해 흥업단장 김호(金虎)는 이만준(李萬俊) 등 4명을 국내에 파견하였다. 그들은 경상도 일대를 근거지로 하여, 이 지역의 자산가(資産家)들을 대상으로 자금모집을 위한 무장활동을 전개하였다. 박재화는 이들의 뜻에 적극 찬동하고 행동을 같이하기로 하고, 권충락(卷忠洛)·홍종락(洪鐘洛)·김종만(金鐘萬) 등과 함께 경북 청도(淸道)·영천(永川)·달성(達城) 등지에서 친일자산가의 집에 침입하여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1922년 1월 경, 군자금 모집을 활동 중 홍종락·이재술(李再述) 등이 군위(軍威)에서 일경에 붙잡히고 일경의 포위망이 점차 좁아지자, 그는 의성군 금성면(金星面) 학미동(鶴尾洞)에 은둔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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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학 기념비
이태학(1890 - 1962)은 경북 의성(義城) 사람이다. 의성군 운산면(雲山面)에 있는 교회 목사로서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하여 가는 도중, 3월 초순 서울에서 일어난 3·1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한 후 대구에 돌아와서 3월 7일 대구 남산정(南山町)의 예수교 성경학교 강습생에게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도록 자각심을 고취하였으며 3월 8일 대구고등보통학교 학생 200여명이 일경의 경계망을 뚫고 장터로 모여들자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장터를 누비고 시위하다가 일군 헌병의 야만적인 발포로 시위가 중지되고 붙잡혔다. 이해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공소하였으나, 5월 3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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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중수 기념비
권중수(1896 - 1980)는 경북 의성(義城) 사람이다. 1915년에 결성된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 회원으로 활약하였다. 대한광복회는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과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이 통합·결성한 1910년대의 대표적 국내 혁명단체로서, 전국적인 조직과 더불어 만주의 독립군 기지와도 연결되어 있었으며 비밀·폭동·암살·명령을 행동강령으로 삼았다. 그는 대한광복회의 결성 초기부터 참여하여 군자금 모집활동을 폈다. 1918년에 대한광복회가 발각될 때 일제의 검거망을 피했던 그는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동년 3월 8일 대구(大邱)에서 만세시위에 앞장서다가 일경에 붙잡혀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형을 선고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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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화 묘
박재화(1890 - 1928)는 경북 의성(義城) 사람이다. 1922년 경 중국 길림성(吉林省) 소재 독립군단체 흥업단(興業團) 단원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흥업단은 1920년에 조직되어 항일무장독립투쟁을 목표로, 동삼성(東三省) 일대를 무대로 청년들에게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1921년 말 군자금 마련을 위해 흥업단장 김호(金虎)는 이만준(李萬俊) 등 4명을 국내에 파견하였다. 그들은 경상도 일대를 근거지로 하여, 이 지역의 자산가(資産家)들을 대상으로 자금모집을 위한 무장활동을 전개하였다. 박재화는 이들의 뜻에 적극 찬동하고 행동을 같이하기로 하고, 권충락(卷忠洛)·홍종락(洪鐘洛)·김종만(金鐘萬) 등과 함께 경북 청도(淸道)·영천(永川)·달성(達城) 등지에서 친일자산가의 집에 침입하여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1922년 1월 경, 군자금 모집을 활동 중 홍종락·이재술(李再述) 등이 군위(軍威)에서 일경에 붙잡히고 일경의 포위망이 점차 좁아지자, 그는 의성군 금성면(金星面) 학미동(鶴尾洞)에 은둔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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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두 효자비, 효자각
권상두(1870 - 1936)는 경북 의성(義城) 사람이다. 1919년 3월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독립을 호소하기 위하여 김창숙(金昌淑) 등이 유림(儒林)대표가 되어 작성한 독립청원서에 유림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는 등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세칭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이라고 불리는 이 거사는 김복한(金福漢)을 중심으로 한 호서유림과 곽종석(郭鍾錫)을 중심으로 한 영남유림 137명이 참여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유림의 항일운동이었다. 파리장서의 요지는 일제가 자행한 명성황후·광무황제(光武皇帝)의 시해와 한국 주권의 찬탈과정을 폭로하면서 한국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들 유림은 김창숙(金昌淑)을 파리로 파견하고자 상해로 보냈으나, 직접 가지는 못하고 이 문서를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대표로 파리에 파견된 김규식(金奎植)에게 송달했으며, 국내의 각 향교에도 우송되었다. 그런데 이 일은 경상북도 상주의 만세운동과 관련하여 1919년 4월 12일 서명자의 한 사람이었던 송회근(宋晦根)이 붙잡히면서 발각되었고, 이로써 권상두도 일경에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일제는 이들 유림이 한국인의 존경을 받는 인물들이었으므로 민족적 감정이 더욱 번질 것을 우려한 나머지 크게 부각시키지 않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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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출 묘
이종출(1890 - 1966)은 경북 의성(義城) 사람이다. 1919년 3월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독립을 호소하기 위하여 김창숙(金昌淑) 등이 유림(儒林)대표가 되어 작성한 독립청원서에 유림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는 등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세칭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이라고 불리는 이 거사는 김복한(金福漢)을 중심으로 한 호서유림과 곽종석(郭鍾錫)을 중심으로 한 영남유림 137명이 참여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유림의 항일운동이었다. 파리장서의 요지는 일제가 자행한 명성황후·광무황제(光武皇帝)의 시해와 한국 주권의 찬탈과정을 폭로하면서 한국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들 유림은 김창숙(金昌淑)을 파리로 파견하고자 상해로 보냈으나, 직접 가지는 못하고 이 문서를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대표로 파리에 파견된 김규식(金奎植)에게 송달했으며, 국내의 각 향교에도 우송되었다. 그런데 이 일은 경상북도 상주의 만세운동과 관련하여 1919년 4월 12일 서명자의 한 사람이었던 송회근(宋晦根)이 붙잡히면서 발각되었고, 이로써 권상두도 일경에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일제는 이들 유림이 한국인의 존경을 받는 인물들이었으므로 민족적 감정이 더욱 번질 것을 우려한 나머지 크게 부각시키지 않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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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두수 공적비
신두수(1927 - 1986)는 경북 의성(義城) 사람이다. 경주중학교(慶州中學校)에 재학 중이던 1944년 4월 안동농림학교 학생들이 조직한 비밀결사 명성회(明星會)에 가입하였다. 명성회는 일제의 식민정책을 개탄하고 이정선(李貞善)·권태염(權泰琰)·정현모(鄭賢模)와 함께 정세를 틈타 무장 봉기하여 독립을 쟁취하자는 지하결사이다. 신두수는 명성회의 기관지 '새벽'지를 일문(日文)과 국문(國文)으로 간행하여 대구사범학교(大邱師範學校)·경주중학교·안동농림학교(安東農林學校) 등의 학생들에게 배포하여 항일사상을 고취하였다. 그는 '새벽'지의 논설주필로 일본제국주의가 연합군에 의하여 곧 패망한다는 논조를 펼쳐 항일정신을 고취하였다. 명성회는 1944년 11월 조선회복연구단(朝鮮恢復硏究團)과 연합하여 1945년 2월 17일 무장봉기를 결행할 계획을 세우고 자금조달과 동지규합에 진력하였다. 신두수는 중경의 임시정부 주석 김구의 지령에 따라 밀파한 이회술(李會述)과 안동농림학교 학생 손성한(孫聖漢) 등과 학병징용을 거부하고 돌격대를 조직하여 후방교란 작전으로 일본군 무기고 기습작전 등을 계획하던 중에 3월 초 대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신두수는 소위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으로 구속되어 5개월간의 옥고를 치르다가 해방을 맞이하여 8월 16일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출옥하였다. 해방후 의성의 봉양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후진양성에 힘썼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1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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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투사기념비
3·1독립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3월 12일 비안면 쌍계리에서 김원휘·박영화·박영신 등의 주도로 태극기 200여개를 준비하여 주민 200여명과 함께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하였다. 이 시위로 등이 김명출(金明出, 1893~1987), 박세길(朴世吉, 1876~1946), 박영달(朴永達, 1887~1962), 박영신(朴永新, 1891~1942), 박영화(朴永和, 1859~1923), 박인욱(朴寅郁, 1896~1934), 배달근(裵達根, 1865~1944), 배도근(裵道根, 1866~1923), 배용도(裵容度, 1895~1971), 배용석(裵容奭, 1890~1938), 배중엽(裵重曄, 1882~1934), 이일만(李一萬, 1903~1954), 최점문(崔占文, 1874~1938) 등이 피체되어 옥고를 치르거나 태형을 맞았다. 밀양박씨 유족회가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69년 3월 2일 이 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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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만세운동 경상북도 시발지 기념탑
일제의 수탈과 핍박이 날로 잔혹해지던 1919년 3월, 서울에서 시작된 독립만세운동은 전국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 의성 3.1운동은 3월 12일 비안공립보통학교(比安公立普通學校) 학생들의 의거로 시작되었는데, 안평·봉양·점곡·신평·가음·춘산면 등지로 확산되면서 4월초까지 계속해서 전개되었다. 3월 12일 의거를 주도했던 학생들은 일본 경찰과 교사들에 의해 강제해산되었고, 주도했던 학생은 붙잡혔다. 보통학교 학생의거의 영향으로 3월 13일과 16일에 비안면 동부동에서 김석근(金石根)·임재호(林在虎) 등의 주동으로 100여 명의 군중이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고, 3월 15·17·18·19일의 독립만세까지 이어졌다. 한편, 봉양면 도리원에서는 이양준(李良俊)이 3월 19일 도리원장날을 기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고, 군중의 수는 수천 명이었다. 점곡면에서는 16·18·19·20일에 걸쳐 격렬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고, 의성읍에서는 3월 18일에, 신평면 덕봉동에서는 25일에 각각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본 탑이 위치한 곳이 경상북도에서 최초로 기미 3.1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된 곳이고, 이를 알리고 독립운동가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본 탑이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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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홍 기념비
박석홍(1896 - 1985)은 경북 의성(義城) 사람이다. 1920년 중국의 흑룡강성(黑龍江省) 아성현(阿城縣)에서 강화인(姜化仁)·박삼근(朴三根) 등과 함께 북만조선인청년총동맹(北滿朝鮮人靑年總同盟)을 조직한 뒤 선전부장이 되어 잡지 〈농군〉(農軍)을 발간하면서 목단강(牧丹江) 일대의 재만 동포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그 후 1924년 흑룡강성 산시(山市)에서 신민부(新民府) 기관지 〈신민보〉(新民報)의 논설위원으로 배일사상 확산을 위한 선전활동에 진력하였고, 1925년 아성(阿城)에서 김 훈(金勳) 등과 함께 잡지 〈혈청년〉(血靑年)을 발간하여 혁명적 국권회복 방략의 당위성과 그 투쟁방법을 선전하였으며, 1927년 이백파(李白波)와 함께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을 조직하여 중앙선전부장으로 활동하면서 서울의 일본인 집단살해 계획을 추진하였다고 한다. 1927년 1월 중국 중동선(中東線) 해림(海林)에서 단두단(斷頭團)의 명의로 경북 영일군(迎日郡) 신광면(神光面)의 이동빈(李東彬)에게 독립운동 자금 1만 5천 원의 기부를 요구하는 편지를 띄워 놓고 비밀리에 입국하려다 일경에 붙잡혀 동년 9월 27일 청진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무정부주의 노선으로 만주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하려 하였으나 동지들의 사산(四散)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귀향한 뒤 일경의 끊임없는 감시를 받으면서 20여 회의 예비검속까지 당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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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필곤 순국기념비
이필곤(1864 - 1909)은 경상북도 의성(義城) 출신이다.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 당한 것에 울분을 금치 못하고 1896년 2월 의성지방의 의병장 김상종(金象鍾) 의진에 입대하여 부장(副長)으로 활약하다가 김상종의 뒤를 이어 의병장이 되었다. 의성군 춘산면(春山面)·왕산면(王山面) 등지에서 왜적과 대적하여 접전하였으나 칙명에 따라 의병을 해산하였다. 1907년 7월에 의병장으로 활약하던 것이 왜적에게 트집잡혀 일본수비대에 체포되어 안동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동년 8월에 총살당하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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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희원 공적비
우희원(1901 - 1978)은 1919년 3월 11일 경북 의성군(義城郡) 비안면(比安面) 비안장터에서 만세시위를 추진하고 12일 비안공립학교 뒷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우희원은 비안공립학교 학생으로 1919년 3월 9일 경 같은 학교에 재학 중인 박만녕(朴萬寧)의 권유를 받아 11일 비안장날 시장에서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하였다. 11일 오전 학생 150명을 집합시켜 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고 오후 장터에 모였으나 일경의 삼엄한 경비로 만세운동을 전개하지 못했다. 다시 12일 오전 전교생을 모아 뒷산에 오른 후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로 인해 우희원은 체포되어 1919년 4월 28일 대구지방법원, 1919년 5월 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