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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모 기념비
정훈모(1888 - 1939)는 경북 예천(醴泉) 사람이다. 1914년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만주로 망명하였으며, 1919년에는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가입, 이상룡(李相龍)독판의 참모로서 활약하였으며, 이후 계속해서 무장항일 운동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1938년 노령 아르하라(ARKHARA)로부터 삼강성(三江省) 가목사시(佳木斯市)로 귀환하던 중 일만(日滿)혼성군과 교전하다가 부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고문으로 생명이 위독하여 병보석 되었으나 가목사시 삼남여관(三南旅舘, 主人 : 權孟錫)에서 영면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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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화 비
정진화(1873 - 1945)는 경북 예천(醴泉) 사람이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국권회복을 도모하던 중 1913년에 채기중(蔡基中)·유창순(庾昌淳)·유장렬(柳璋烈)·한 훈(韓焄)·강순필(姜順必) 등과 함께 풍기에서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을 결성하였다. 주로 의병적(義兵的) 성향의 인물이 참여했던 동단은 독립군 양성을 위한 무기구입과 군자금 모집에 실천방략을 두고 독립운동을 폈다. 그후 풍기광복단이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과 통합하여 1915년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를 결성할 때, 이에 참여·활동했다. 이를 위해 비밀·폭동·암살·명령의 4대 행동지침을 정하고, 각처에 곡물상을 설립하여 혁명기지로 삼는 한편, 혁명계획은 군자금 조달, 독립군 및 혁명군의 기지건설, 의협 투쟁으로서의 총독처단 계획과 친일부호 처단 등으로 추진되었다 그리하여 우선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했는데, 그는 자신의 집에서 채기중(蔡基中)·정세여(鄭世汝)·윤창하(尹昌夏) 등과 함께 친일부호에게 보낼 군자금 모집의 〈경고문〉을 초안·작성한 후 수십통을 인쇄하여 발송하였다. 그러던 중 1918년초 동회의 조직이 발각됨으로써 일경에 붙잡혀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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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희 묘
김창희(1906 - 1946)는 1927년 3월 대성학원(大成學院) 제3학년을 수학하고, 농업에 종사하면서 신사상을 받아들이고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8년 3월 10일, 경북 봉화청년동맹(奉化靑年同盟) 제1회 정기대회에서 문화교양부장을 맡았으며 5월 10일 봉화청년동맹 제1회 확대집행위원회에서 사임 위원에 대한 보선에서 조직연락부장을 맡게 되었다. 1929년 2월 18일 제1회 정기대회에서 위원에 선임되었다. 1928년 12월 29일 신간회(新幹會) 봉화지회 제3회 정기대회에서 상무간사(常務幹事)에 선임되었고 1930년 9월경 신간회 봉화지회의 대표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32년 2월경 황윤경(黃潤慶)·김차을(金次乙) 등과 함께 비밀결사를 조직할 것을 협의하고, 3월에 황윤경의 제안으로 비밀결사로 적색농민조합(赤色農民組合)을 조직하여, 황윤경·김차을과 함께 집행위원이 되고, 황윤경을 책임자로 선출했다. 이후 그의 집에서 여러 차례 모임을 갖고, 황윤경이 작성한 ‘뉴스’를 배포 토의하고, 농민의 의식 함양을 위해 노력하였다. 5월 하순, 황윤경·권우섭(權宇燮)·권차응(權次應) 등과 함께 유곡리(酉谷里) 제궁곡(濟宮谷)에 모여 황윤경의 제의로 일본제국주의를 타파하고 신사회의 실현을 목적으로 봉화군 내에 운동의 지도기관인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농민부·반제부·청년부·연락부 등의 4개 부서를 두고, 권우섭을 책임비서로 하는 한편, 김창희는 농민부 책임자로서 농민조합의 지도, 권우섭을 반제부 책임자로서 반제동맹의 조직 및 지도, 권차응을 청년부 책임자로서 공산청년회 조직 및 지도, 황윤경을 연락부 책임자로서 인근 영주의 좌익단체와의 연락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청년부에는 별도의 반제동맹을 조직하기로 결정하였다. 7월 19일, ‘영주봉화공산협의회 사건’으로 불리는 영주·봉화 적색농민조합(赤色農民組合)이 드러나면서 관련 인사 약 80여 명이 일경에 체포되었고, 김창희를 비롯하여 황윤경·김동필·권차응(권상창)·권우섭 등 12명이 10개월 동안 예심 판사의 취조를 받았다. 1933년 4월 1일에 예심이 종결되어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대구지방법원 공판에 회부되었다. 1933년 12월 22일 징역 2년 6월을 받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1935년 3월 26일 출감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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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봉 묘
김재봉(1891 - 1944)은 경북 안동의 유생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 한학을 수학한 그는 1908년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敎)를 졸업하고 1913년에는 경성공업전습소 염직과를 다녔다.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였으며, 1919∼1920년 무렵 비밀공산주의 단체에 가입하였다. 이 무렵 그는 안상길(安相吉) 등과 함께 임시정부 자금모집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러던 중 1921년 1월 조선독립단(朝鮮獨立團)의 문서를 전달하다가 체포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대회에 여운형(呂運亨)·김규식(金奎植) 등과 함께 조선노동대회 대표자 자격으로 참가하였다. 이후 1923년 5월 꼬르뷰로(高麗局:조선공산당 중앙총국) 국내 파견원으로 선임되어 입국한 그는 신철(辛鐵)과 상해파(上海派)의 이봉수(李鳳洙), 조선노동연맹회(朝鮮勞動聯盟會)의 윤덕병(尹德炳)·신백우(申伯雨), 북성회(北星會)의 김약수(金若水), 무산자동맹회(無産者同盟會)의 원우관(元友觀) 등과 함께 꼬르뷰로 국내부를 조직하고 책임비서가 되었다. 그리고 1923년 7월에는 사회주의 사상단체인 신사상연구회(新思想硏究會)를 조직하여 각 지방을 돌며 사회주의 사상에 대한 강연을 통해 일반 대중에게 계급의식과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한편, 조직확대를 위해 각 지역의 기존 단체들과의 연대를 모색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1924년 4월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의 결성을 주도하였다. 1925년 4월에는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을 창당하고 책임비서가 되었다. 그가 지도하던 ‘제1차 조선공산당’은 조동호(趙東祜)와 조봉암(曺奉岩)을 코민테른에 파견하고, 조선노동총동맹을 분리시키는 등의 대내외적인 활동을 하다가 동년 11월 ‘신의주사건’으로 그 조직이 일경에 발각되고 말았다. 김재봉은 12월에 검거되어 1928년 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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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호준 묘
박호준(1920 -2007)은 경북 예천(醴泉) 사람이다. 대구사범학교 재학중인 1940년 11월 30일에 비밀결사 문예부(文藝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문예부는 민족문화존중과 항일의식의 고양을 목적한 결사로서, 부원의 비밀엄수 및 매주 토요일 작품감상, 비판 등의 운동방침을 정하고 그리하여 1940년 11월말부터 1941년 3월 9일까지 약 9회의 모임을 가졌다. 그런데 부원중 상급생(8회)이 졸업을 하게 됨으로써 그 뒤를 이어 그와 이주호(李柱鎬)·유흥수(柳興洙) 등이 중심이 되어 동지를 규합하고 조직을 확대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유흥수·권쾌복(權快福) 등 15명과 함께 당시 대구시 대봉정(大鳳町) 소재 유흥수의 하숙집에 모여 항일결사 다혁당(茶革黨)을 결성하였다. 즉, 다혁당은 위의 문예부 및 동교의 다른 비밀결사인 연구회(硏究會)의 항일정신을 계승하여 조직을 확대 개편한 것이다. 그리고 동 결사는 조직을 교내에 국한하지 않고 대외적으로 조직을 확대하여 타교생 및 일반 사회인까지 포섭대상으로 하였다. 따라서 결사의 명칭도 당(黨)이라 했으며, 조직으로는 당수, 부당수 아래 총무·학술·문예·연구·경기부 등 각 부서를 두었는데 이때 그는 경기부원의 일을 맡았다. 한편 다혁당은 비밀엄수 및 당원의 절대복종, 주2회 회합과 하급생지도 등을 당규약으로 정하고, 1941년 3월부터 동년 5월까지 세차례 모임을 갖고 당의 활동상황과 조직확대에 관하여 협의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민족차별교육에 반대하여 동교내 연습과 학생(주로 일본인)과 심상과 학생(대부분 조선인)에 대한 차별대우를 철폐시키는 방안도 토의하였다. 그런데 1941년 7월, 대구사범학교 윤독회의 간행물인 〈반딧불〉이 일경의 손에 들어가게 됨에 따라 대구사범학교 비밀결사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도 일경에 붙잡혔으며, 그후 2년여 동안 미결상태로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1943년 11월에 대전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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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만영 집
황만영(1875 - 1939)은 경북 울진(蔚珍) 사람이다. 1905년 을사조약의 강제 늑결 후 각처에서 의병이 봉기할 때, 향리에 주둔하고 있던 성익현(成益鉉) 의진(義陣)에 군자금 8백 냥을 지원하면서 의병활동을 격려하였다. 그 후 1907년 신민회(新民會)가 창건되자 회원으로 가입하여 향리인 사동(沙銅)에 대흥학교(大興學校)를 설립하고 인재 양성에 힘을 쏟았다. 1912년 만주로 망명한 그는 이시영(李始榮) 등과 함께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 설립된 신흥학교(新興學校)의 재정을 담당하였으며, 1913년에는 노령(露領) 지역으로 건너가 그곳의 독립운동자들과 교류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3·1운동이 일어나자 연해주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에 참가하였던 그는 1919년 9월 주진수(朱鎭洙) 등과 함께 만주로 파견되어 순회 강연을 개최하면서 항일의식을 고취하였다. 한편 그는 1925년 정의부(正義府) 독판(督辦) 이상룡(李相龍)이 상해(上海) 임시정부의 국무령에 취임하기 위해 길림(吉林)에서 상해로 갈 때, 동행하여 임시정부에 참가하기도 했다. 1925년 8월에는 군자금 모집을 위해 국내에 들어와 1927년 신간회(新幹會)가 성립되자 신간회 울산지회(蔚山支會) 회장에 선임되어 민족협동전선운동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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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천수 추모비
안천수(1913 - 1963)은 경북 울진(蔚珍) 사람이며, 이명은 안용관이다. 그는 1934년 12월 27일 울진군 서거면(書居面) 윤경복(尹敬福)의 이발소에서 황명칠(黃明七)·안태열(安泰烈)·안병극(安炳極) 등과 모임을 갖고 국내 정세를 논의하였다. 이들은 이 자리에서 일본인은 일시동인(一視同仁) 운운하면서도 제도적으로 민족차별을 하고 있으며 일제는 결국 한국인을 아사(餓死)시킬 것이라는데 인식을 같이하고 조국독립운동을 위한 항일결사를 조직하기로 뜻을 모았다. 그리하여 이들은 조직결성을 위한 준비를 진행하던 중 일경에 붙잡히고 말았다. 그는 1935년 9월 13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소위 불경죄 및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으나 동년 10월 1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항소기각으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에는 울진군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의 사찰과장(査察課長)으로 활동하다가 1947년 신병으로 사직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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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두 기념비
김병두(1897 - 1985)는 경북 울진(蔚珍) 사람이다. 1916년 9월에 서울 배재학당(培材學堂)에서 수학(修學)하였으며, 1919년 3월 1일에 배재학당(培材學堂) 학생들의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그 후 그는 동년 12월에 상해(上海) 임시정부(臨時政府)로 망명할 것을 계획하고 만주(滿洲)로 건너간 뒤 그곳에서 김영찬(金永燦)을 만나서 〈독립신문(獨立新聞)〉등 다수의 문서를 교부받았다. 그리하여 고향에 돌아와 교회를 통하여 이 문서들을 배부하며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한편 군자금 모집활동을 펴던 중 일경에 붙잡혔다. 1921년 3월 31일 대구지방법원(大邱地方法院) 울진지청(蔚珍支廳)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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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3흥부만세탑
본 사적은 건립추진위원회가 울진 흥부장터 3·1독립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1995년 8월 15일에 건립한 것이다. 1919년 4월 13일 오후 1시 울진군 북면 흥부장터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은 전병항, 남병표 등이 이끌었다. 이들은 시장 중턱인 칠보산 언덕에 올라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여기에 장꾼들이 합세하여 참여자가 500여 명에 이르자 무장한 일본 헌병들은 총을 쏘며 이들을 강제로 해산시켰다. 만세운동을 주도한 전병항과 남병표는 현장에서 붙잡히고 말았다. 이날 밤 다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김경선 노인이 마을로 돌아온 청년들을 꾸짖자 김일수 등이 칠보산에 올라가 다시 만세운동을 펼친 것이다. 이들 가운데 11명이 징역 7개월에서 4개월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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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부장터 기미만세기념비
본 탑은 1919년 4월 13일에 일어난 만세운동을 기념하는 사적이다. 흥부장날을 기하여 오후 1시 울진군 북면 흥부장터에서 전병항, 남병표 등의 주도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들은 시장 중턱인 칠보산 언덕에 올라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여기에 장꾼들이 합세하여 참여자가 500여 명에 이르자 무장한 일본 헌병들은 총을 쏘며 이들을 강제로 해산시켰다. 만세운동을 주도한 전병항과 남병표는 현장에서 붙잡히고 말았다. 이날 밤 다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김경선 노인이 마을로 돌아온 청년들을 꾸짖자 김일수 등이 칠보산에 올라가 다시 만세운동을 펼친 것이다. 이들 가운데 11명이 징역 7월에서 4월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위와 같은 독립지사들의 뜻을 널리 전하고자 광복 50주년을 맞아 1995년 8월 15일에 칠보산 현장에 탑과 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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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규 묘
김현규(미상 - 1906)는 경남 김해(金海) 사람이다. 1906년 9월경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경북 울진군(蔚珍郡)에서 의진을 일으켜 울진 불영사(佛影寺)에 진을 치고 머무르면서 일군을 격파하기 위한 준비를 진행하던 중에 불의의 습격을 받아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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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목익, 이화익 기념비(금천리)
이목익(1868 - 1949)은 경상북도 울진 사람이다. 1920년 울진군(蔚珍郡) 온정면(溫井面) 소태리(蘇台里)에서 일제(日帝)의 생산품을 배척하자는 문서를 소태 주재소(駐在所) 앞과 온천장(溫泉場) 숙소 및 선미리(仙味里), 온천리(溫泉里) 2곳과 평해면(平海面) 평해시장(平海市場)에 각 1매씩 붙였다. 또한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와 식산은행(殖産銀行), 금융조합(金融組合)과 왜인고리대금업자(倭人高利貸金業者)의 착취로 한국인의 파산이 날로 늘어나자 같은 해 10월 22일에 일본물품배척포고문(日本物品排斥布告文)을 각 요소에 게재하고 조국의 토산물(土産物) 애용을 호소하던 중 일경에 붙잡혔다. 이로 인해 그는 1920년 12월 21일 대구지방법원 울진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금고(禁錮)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화익(1871 - 1933)은 경북 울진(蔚珍) 사람이다. 그는 1919년 4월 13일 경북 울진군 부흥(復興)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경북의 인근지역들은 3월 중순부터 만세운동을 일으켰던데 비해, 울진은 지리적으로 태백산맥 동편에 위치하여 교통이 불편한 관계로 만세운동의 소식을 늦게 접하였다. 평소 항일의식이 투철하였던 이화익은 뒤늦게 만세운동 소식을 접하고 4월 초부터 울진에서의 만세운동을 계획해 갔다. 그는 김광수(金光壽)·남병모(南炳貌) 등과 4월 13일 부흥 장날을 기해 거사하기로 결의하고 동지를 포섭하는 한편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그리하여 거사 당일에 이화익은 부흥 장터에 운집한 수백여 명의 군중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때 시위행렬의 선두에 서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던 그는 마침 출장중인 울진군수 강성희(姜星熙)가 시위를 해산하려 하자, 오히려 군수에게 한국인으로써 최소한의 민족적 양심을 지킬 것을 주장하여, 군수로 하여금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게 하는 등 만세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시위 도중 그는 출동한 일본 헌병에 의해 붙잡혀 1919년 4월 17일 대구지방법원 울진지청에서 소위 공무집행 방해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