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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덕 묘
장윤덕(1898 - 1975)의 본관은 안동이며, 장재안(張載安)의 장남으로 경북 예천군(醴泉郡) 출신이다. 어려서 한학(漢學)을 배워 예천군 수서기(首書記)를 지냈다. 1905년 12월에 을사조약이 늑결되어 국권을 상실할 위기에 이르자 이에 비분강개하여 국민들에게 항일구국사상을 고취시키고 친일반역행위를 엄단하겠다는 경고로써 민중들의 각성을 촉구하였다. 이 후 1907년 4월에 분연히 일어나 일제의 침략 원흉인 이등박문(伊藤博文)를 비롯한 매국적신들을 살해코자 서울로 올라왔으나 배신자의 밀고로 실패하고 피신하여 고향으로 내려가서 재차 거의할 기회를 엿보았다. 그러던 중 의병대장 이강년(李康秊)이 영춘(永春)에서 의병을 일으키니 장윤덕도 7월에 격문을 각지에 발송하고 300여 명의 의병을 규합하여 의병진을 편성, 이강년대장 휘하에 합진하고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주로 풍기(豊基), 봉화(奉化), 문경(聞慶), 용궁(龍宮), 예천 등지에서 활동하였으며 7월 9일에는 일본경찰대와 교전하여 일보조원(日補助員) 3명과 한인 순검 2명을 사살하였다. 그해 8월 27일 의병 300여 명을 인솔하고 풍기 일경분파소를 습격하여 1명을 사살하고 31일에는 봉화분파소를 습격하여 건물을 불태웠다. 그 후 9월 3일 문경읍을 습격, 일본인 2명을 사살하고 일인의 가옥을 소각시켰으며, 10일에는 이강년, 민긍호(閔肯鎬) 등의 의진과 합세하여 1,00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문경면 갈평리(葛坪里)에서 일경 영곡경시(永谷警視)와 삼원소위(三原少尉)가 인솔한 경찰대 및 수비대와 격전하여 적 3명과 한인순검 2명을 사살하고 적을 격퇴시켰다. 9월 12일, 예천읍을 습격하고 이어 16일 3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대구수비대를 격파하고자 상주읍(尙州邑)을 습격, 일경의 자위단(自衛團)과 교전하였다. 이 전투 중 대구수비대에서 전중(田中)대위가 1개 중대를 인솔하고 출동하여 격전이 벌어졌으나 중과부적으로 의병진은 무너지고 장윤덕은 총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체포된 후 이송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해도 굴하지 않고 스스로 혀를 끊고 함구하며 항거하다가 1907년 9월 16일 상주군 함창면(咸昌面) 구향리(舊鄕里)뒷산에서 총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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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흠 기념비
김순흠(1840 - 1908)은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풍산면(豊山面) 수리(水里)에서 태어났다. 1895년 10월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 만행이 자행되자 이강년(李康秊)과 상의하여 항일투쟁을 하다가 이듬해에 해산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침탈하자, 을사조약에 대한 반대운동을 전개하여 일제의 침략행위와 을사5적의 매국행위를 규탄하는 「토오적문(討五賊文)」을 지어 전국의 유림들에게 배포하였다. 또한 을사조약 반대와 국권회복을 위한 의병운동이 일어나자 군자금 조달을 위하여 진력하였다. 1908년에 일본인 재무서가 세금을 거두어 가서 일본군에 납부함에 의분을 금치 못하여 단식을 시작해서 1908년 9월 28일 순절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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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군 생매장 터 표지석
본 표지석이 놓인 곳은 동학농민군 열 한 사람이 생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당시 예천 동학농민혁명군은 서로 싸우지 말고 하나로 뭉쳐 왜를 무찌르자고 호소하였으나 보수 집강소 쪽은 오히려 갑오년 음력 8월 9일 농민군 열 한 사람을 붙잡아 이 부근에 생매장하는 것으로 응답하였다. 이 사건은 예천 동학농민혁명 전투의 도화선이 되었고, 마침내 동학농민군은 8월 28일에 북과 징을 치며 예천읍성 공격을 감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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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홍 사적비
이규홍(1877 - 1928)은 경북 예천(醴泉) 사람이다. 이강년(李康秊) 의진과 차성충(車晟忠) 의진에 군자금을 제공하는 등 의병활동을 하였다. 이규홍은 1895년 일제가 국모를 시해하는 천인공로할 만행을 저지른 변보(變報)를 전해듣 비분강개하였는데, 이어서 일제와 친일정권에 의해 을미개혁(乙未改革)으로 단발령까지 강행되자 원수를 갚고자 하였다. 그런데 1896년 1월 이강년이 의병진을 일으켜 활동하자 암암리에 내통하여 동지의 의(義)를 맺고, 일제를 구축하는 계획에 적극 가담하여 의병모집 활동에 큰 공을 세웠다. 또한 이강년 의병진이 친일적 행위를 한 안동관찰사 김석중(金奭中)을 잡는데 큰 도움을 주었으며 때때로 사람을 의병진에 보내어 계책을 논의하였다. 그 후 그는 1905년 안동의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서울의 심연(心淵) 김현준(金顯峻), 거창의 은표(隱豹) 차성충, 영춘의 백우(白愚) 김상태(金尙泰) 등과 혈맹으로 뭉쳐 의병활동을 모의하였다. 특히 그해 11월 「을사륵약(乙巳勒約)」이 강요되자 그는 우리 민족에게 국망의 위기임을 절감하고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려고, 그해 11월 김심연·차성충이 김천(金泉)에서 의병활동을 모의하였을 때 큰 아들 이지선(李芝璇)을 보내 도왔다. 그 후 이지선을 이강년 의병진에 보내 활동하게 하였다. 그러던 중 1907년 7월 「정미7조약(丁未7條約)」에 따라 군대가 해산됨에 따라 전국적으로 다시 의병이 일어나자, 이규홍은 1907년 김현준·차성춘 등과 의병의 계책을 모의하고, 그해 8월에는 금룡사(金龍寺)에 유진하는 이강년을 방문하여 의병활동의 방향을 논의하였다. 그리고 1908년 이상룡이 사람을 보내어 군자금을 요청하자 아들 지선과 사위 이세형(李世衡)을 통해 거창의 차은표에게 전달하였다. 그리고 차은표로 하여금 가조산(加祚山)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병기를 구입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차은표 등은 1909년 의병 수백 명을 규합하여 순흥(順興)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들은 차은표를 대장으로 김상태를 중군장으로 삼아 풍기·순흥·영주 등지에서 여러 차례 일본군을 공격하여 전과를 올렸으나, 1909년 5월 차은표가 순국하면서 의병진은 해산되고 말았다.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에도 만주로 망명한 이상룡은 1913년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그이 아들 이문극(李文極)을 이규홍에게 파견하였다. 이에 그는 이문극을 만나 국외와 국내 민족운동 세력의 연합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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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우 기념비
장진우(1866 - 1945)는 경북 예천(醴泉) 사람이다. 이강년(李康秊) 의진의 좌종사(坐從事)로 경북 예천·문경 일대에서 활약하였으며, 경술국치 이후에도 「격문(格文)」과 「효유문(曉諭文)」을 작성하여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 일제의 강요와 위협 아래 1905년 11월 「을사륵약(乙巳勒約)」이 체결되어 우리의 자주적 외교권이 침탈되더니, 이듬해 통감부(統監府)가 설치되어 통치권을 장악함에 따라 우리 나라는 식민지나 다름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안재극은 이 시기가 우리 민족에게 국망의 위기임을 절감하고 국권회복운동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으나 여의치 않았다. 그러던 중 1907년 7월 광무황제의 강제퇴위와 「정미7조약(丁未7條約)」에 따른 군대해산으로 해산군인들이 대거 의병대열에 참여함으로써 전국적인 국민전쟁으로 발전되고 있을 무렵 그는 이강년 의진에 참여하여 좌종사로 활동하였다. 이강년 의병장은 을미의병을 전개하였다가 1907년 7월 「정미7조약」에 격분하여 다시 봉기하여 항일 무장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강년 의병부대는 주로 태백산맥을 동서남북으로 오르내리고 넘나들며 정미의병에서 가장 뛰어난 활약상을 보였다. 특히 이강년 의병장은 대담한 유도작전으로 적에게 결정적 타격을 주는 전과를 올렸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 후 1908년 6월 청풍 까치재에서 이강년 의병장이 적들에게 붙잡혔어도, 그의 부장들은 의병활동을 지속하였다. 안재극도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에 맞서 의병투쟁을 전개하였으나, 결국 1910년 8월 주권이 완전히 상실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 국권회복 의지에 불타는 그는 일제의 주권 강탈의 부당성을 성토하고, "8도의 동포에게 고하여 삼군(三軍)을 규합해 일제를 타도하자"는 「격문」과 「효유문」을 작성하였다. 또한 그는 의병을 재규합하여 항전하려는 의도에서, 동지인 이지원(李芝元 ; 李芝璇), 이승재(李承宰), 한양이(韓良履), 윤태휴(尹泰休) 등과 지속적으로 연락을 취하여 일제를 몰아내고 나라의 독립을 쟁취하자는 격문을 작성하여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 한편 그는 이강년 의병장이 일제에 의해 순국하자, 그의 장자 이승재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병을 얻어 객지에서 사망한 소식을 듣고, 여러 동지들에게 알려 재물을 마련하여 고향으로 보내는 등 운동자의 가족을 돌보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또한 이강년 의병장을 추모하여 1919년 『운강이공전(雲崗李公傳)』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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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 용궁 독립운동기념비
본 비는 일제강점기 일본 제국의 치하에서 조국 광복을 위해 몸바친 순국선열들의 뜻을 길이 전하고자 건립되었다. 장진우, 장진성, 김철상, 한양이, 이봉래의 항일독립투쟁과 정진완, 김칠종, 이구성의 3.1만세운동, 권혁무의 광복군 활동 사적에 대해서 기록이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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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대, 박주학 집(미산고택)
미산고택(味山故宅)은 함양박씨인 독처재(獨處齋) 박세주(朴世柱, 1612~1727)가 1650년(효종 1) 금당골에서 대저(큰맛질) 마을로 옮기면서 지은 것을, 그의 5세손인 미산(味山) 박득녕(朴得寧)이 1825년(순조 25)에 원형대로 이곳으로 옮겨서 지었다는 가옥이다. 박주대(1836 - 1912)는 1896년 1월 전기의병이 경북 전역으로 확산될 때, 동년 2월 16일(음 1. 4) 경북 예천에서 창의한 예천의진(醴泉義陣) 창의장(倡義將)으로 추대되었으나 신병(身病)으로 사직한 후 동생 박주학(朴周學)을 대신 보내 의병진의 부장(副將) 직을 맡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창의통유문(倡義通諭文)을 지어 유림에 발송하는 한편, 각처 의병진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박주대의 ≪나암수록(羅巖隨錄)≫은 1867년에서 1910년까지 시국 정황에 따른 중요한 사건과 관련된 자료들을 실어 사료적 가치가 크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박주학(1843 - 1901)은 구한말의 일기인『저상일월(渚上日月)』의 저자인 박주대(朴周大)의 아우이다. 1896년 음력 1월 예천의병이 편성될 때 박주대가 대장으로 천거되었으나 신병(身病)으로 사직하여 박주학이 부장(副將)직을 맡게 되었으며, 대장이 된 박주상(朴周庠)은 선생의 집안 족형(族兄)이었다. 그 뒤 2월 제천의병의 일파인 서상렬 의병을 비롯하여 안동(安東)·예안(禮安)·풍기(豊基)·봉화(奉化)·제천의병 등의 연합의진이 상주 태봉(胎峰)에서 격전을 벌일 때에도 참여하였다. 안동 천전(川前)의 백하(白下) 김대락(金大洛)은 선생의 외조카이며,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은 선생의 조카사위이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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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대 묘
박주대(1836 - 1912)는 1896년 1월 전기의병이 경북 전역으로 확산될 때, 동년 2월 16일(음 1. 4) 경북 예천에서 창의한 예천의진(醴泉義陣) 창의장(倡義將)으로 추대되었으나 신병(身病)으로 사직한 후 동생 박주학(朴周學)을 대신 보내 의병진의 부장(副將) 직을 맡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창의통유문(倡義通諭文)을 지어 유림에 발송하는 한편, 각처 의병진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박주대의 ≪나암수록(羅巖隨錄)≫은 1867년에서 1910년까지 시국 정황에 따른 중요한 사건과 관련된 자료들을 실어 사료적 가치가 크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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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필 기념비
박봉필(1908 - 1945)은 경상북도 예천 출신이다. 1931년 3월 남북 만주 각지에 흩어져 있는 한인 농민의 운동단체인 동성한교농민회(東省韓僑農民會)가 조직될 때 준비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34년 만주에서 김시현(金始顯)이 조직한 의열단(義烈團)에 입단하여 활동하였으며, 1941년 항일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쟁하다가 붙잡혔다. 1942년 만주의 신경고등법원(新京高等法院)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고 장춘형무소(長春刑務所)에 복역 중 일본 관동군(關東軍)에 의하여 총살당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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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식 집
김형식(1885 - 1972)은 경북 예천(醴泉) 사람이다. 그는 1919년 4월 2일 경북 예천군 용문면(龍門面) 상금곡동(上金谷洞)에서 수백 명의 군중을 주도하며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곳의 만세운동은 권석인(權錫寅)이 광무황제(光武皇帝) 인산(因山)에 참례차 상경했다가 서울의 3·1운동을 직접 목격하고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오면서 구체화되었다. 이에 평소 항일의식이 투철하던 김형식은 권석인·권석호(權錫虎)·권석효(權錫孝)·변용구(邊用九) 등과 함께 예천읍 장날인 3월 12일에 거사하기로 약정하고 독립선언서를 등사하는 등 준비를 진행하였다. 그런데 일경의 삼엄한 경계망으로 인하여 거사를 다음 장날인 3월 17일로 미루었으나, 이 때도 역시 일경의 철통같은 감시로 인하여 사전 탐지되어 중지하고 말았다. 이렇듯 거사가 지연됨에 따라, 김형식 등은 어떠한 일경의 탄압과 경계에도 불구하고 거사를 단행하기로 뜻을 굳히고 4월 2일 오후 10시에 만세시위를 단행하였다. 김형식은 수백여 명의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횃불을 앞세우고 면사무소와 동리 각처에서 시위를 전개하던 중 일경에 붙잡히고 말았다. 그는 이 일로 1919년 4월 15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으로부터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월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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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상 집
박주상(1831 - 1908)은 경상북도 예천(醴泉) 출신으로 초기 의병운동을 전개한 의병장이다. 1895년 을미년에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발발하고 이어서 단발령이 단행되는 등 일제의 내정간섭이 날로 노골화 되어가고 국운은 갈수록 쇠하여 갔다. 이에 박주상은 예천에서 동지들과 더불어 거의하여 의병을 모군하였다. 곧 동지들에 의하여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초기 의병활동에서 김하락(金河洛)·권세연(權世淵)·이강년(李康秊) 등과 연계하여 적군을 격멸시키는 등 의병장으로 크게 활약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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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항 묘
전기항(1827 - 1900)은 경상북도 예천 사람이다. 경상도 예천의 금당실에서 활약한 동학농민군이 1894년 8월 28일 화지 농민군과 함께 읍내를 공격하나 민보군의 반격으로 실패하고, 민보군은 금당실 일대의 동학농민군 근거지를 불태우는 등 혹심한 보복에 나섰다. 이때 동학 수괴로 알려진 모량도감(募糧都監) 전도야지 전기항을 추적했으나 잡지 못했다. 전기항은 가족과 함께 오랫동안 피신생활을 하여 금당실로 돌아갈 수 없었고, 손자 일호 대에 다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