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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식 추모비
정규식(1920 - 1950)은 경북 영천(永川) 사람이다. 1941년 8월 일본 대판(大阪)에 소재한 대판공학교(大阪工學校)에 재학하면서 대판시 북구(北區)의 신문배달원 민춘기(閔春基)를 만나 민족해방을 위해 헌신할 것을 맹세하고 민족의식을 함양하기 위한 방편으로 『한국근대정치사』,『삼민주의(三民主義)』등 민족운동 관련서적을 탐독하면서 중국혁명의 대부 손문(孫文)의 삼민주의(三民主義)에 착안한 민족운동을 전개하여 한국의 삼천만 민중을 자각·분기시키려는 노력을 하였다. 또한 1942년 8월 동 신문점에 최문전(崔文典)이 고용되자 그를 동지로 가담시키고 9월 앵궁공원에서 회합하여 "한국 민족을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중략) 한국 청년층의 의식 선봉분자를 결집하여 독립혁명의 중핵 모체가 될 비밀결사를 조직해서 내외에서 조국 독립에 정진하고 있는 동지, 그 중에서도 만주지방을 본거지로 활동하고 있는 독립군과 연락하고 일본이 대동아전쟁으로 국력을 소모하고 있는 호기를 놓치지 말고, 한국 민중으로 하여금 독립혁명투쟁에 궐기시켜 일거에 목적을 완수해야 한다"는 근본 방침을 결정하였다. 이러한 방침에 따라 동지 획득과 동포에 대한 지도 계몽을 당면 목표로 설정한 그는 대판지역 한인 학생들을 중심으로 세계 정세와 한국통치문제를 설파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와 함께 1942년 8월 대구사범학교에 재학 중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붙잡혔던 서산옥제(西山玉濟)와 연락하고 9월 상순 동인과 대판에서 회합하여 비밀리에 독립혁명의 중핵 모체인 비밀결사를 조직하려다 발각되어 10월 20일 일경에 붙잡혔다. 1943년 대판지방재판소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44년 12월 10일 형기가 종료되어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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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남의진 추모비
본 비는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된 직후인 1906년 3월에 정환직, 정용기 부자에 의해 조직된 산남의진에 가담하여 영천, 영일, 청송 등을 비롯한 경상도 일대를 중심으로 강력한 대일 무장투쟁을 전개한 애국지사들을 추모하는 사적이다. 본 비에 기록된 산남의진 의병으로는 박한종, 조상환, 최치환, 전응팔, 강봉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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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환직 묘
정환직(1843 - 1907)은 대한제국기 의금부 금부도사, 중추원의관 등을 역임한 의병장이다. 1888년(고종 25) 의금부의 금부도사를 지냈으며, 1894년 삼남참오령(三南參伍領)에 임명되어 동학군을 진압하였다. 그 해 겨울 다시 토포사(討捕使)에 임명되어 고종의 밀지를 받고 황해도 지방의 동학군을 진압하였다. 그 공으로 태의원시종관(太醫院侍從官)이 되었다. 1899년 삼남검찰 겸 토포사(三南檢察兼討捕使)로 삼남 일대의 민정을 두루 살펴보았다. 1900년 도찰사에 임명되어 농민들의 원성이 높은 경주부윤을 파면하다 오히려 봉세관(俸稅官)에 의해 구금되었다. 석방된 뒤 관직에 뜻이 없어 사직할 것을 청하였으나 다시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에 제수되었다. 1905년 일제의 강권에 의해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고종이 정환직에게 밀지를 보내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할 것을 권하였다. 그 뒤 관직을 사직하고 아들 정용기(鄭鏞基)로 하여금, 고향에 내려가 의병을 모집하게 한 뒤 서울로 진격하여 황제를 구하고 국권을 회복하도록 하였다. 정용기가 청송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붙잡혀 석방된 뒤 의병활동이 부진하므로 이를 독려하고자 1907년 9월 19일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 해 10월 7일 정용기가 입암에서 영천수비대소속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가 총탄에 맞아 순절하자, 정순기(鄭純基)·이세기(李世紀)·우재룡(禹在龍) 등의 추대를 받아 삼남의병부대 의병장에 올랐다. 그 뒤 군세가 크게 떨치기 시작하자 여세를 몰아 동쪽으로 포항 등지, 서쪽으로 신령 등지, 북쪽으로 청송 등지를 공격하여 일본군 수비대에게 많은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전투 중 사상 당하는 의병이 속출하자 전의가 크게 떨어져, 이에 의병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다시 전열을 정비하고 각지에 소모군을 파견, 의병을 모집하였다. 이와 함께 무기와 탄약·군량 등을 준비하며, 국민들의 반일투쟁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전념하였다. 이때 병이 들어 신병을 치료하다 일본군 수비대에게 잡혔다. 일본군이 회유하고자 하였으나 끝까지 반일의 뜻을 굽히지 않다 총살형을 당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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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기 묘
정용기(1862 - 1907)는 한말 경상북도 영천 출신의 의병장으로, 아버지 정환직과 함께 산남의진을 결성하였다. 정용기는 국채 보상 운동을 위한 ‘단연회통문(斷煙會通文)’ 및 ‘의연금권고가(義捐金勸告歌)’와 정계의 부패를 비난하는 6개 조항을 들어 투서하였다. 그 외에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의 부정 행위를 탄핵한 ‘통곡조한국민(痛哭弔韓國民)’이란 글월 및 순절한 민영환(閔泳煥)을 추도하는 ‘혈죽가(血竹歌)’를 발표하고 격렬한 가두 연설을 전개해 대중의 각성과 단결을 환기시키기도 하였다. 이렇게 민중 계몽에 힘쓰던 중 고종황제의 밀명을 받은 부친 정환직(鄭煥直)과 영남에서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심하고, 고향인 영천으로 내려가 이한구(李韓久)·손영각(孫永珏)·정순기(鄭純基) 등과 힘을 합쳐 통유문과 권고문을 작성하여 각지에 배포하고 의병을 모집하여 ‘산남의진(山南義陣)’이라 이름하고 제1대 대장에 추대되었다. 정용기는 경주 우각리를 경유할 때 경주진위대의 간계로 체포되어 대구로 압송되었다가 아버지의 주선으로 석방된 후 1907년 4월 재차 거의하여 영덕의 신태호(申泰浩) 의병부대와 연락을 취하면서 영천·영일·청송 등지에서 일본군을 여러 차례 전투를 하였다. 1907년 8월 산남의진 본진 100여 명과 함께 죽장의 매현으로 들어가 9월 초 강릉으로 북상을 준비하던 중 1907년 9월 1일 입암에서 일본군 영천수비대의 역습을 받아 격렬히 싸우다가 이한구(李韓久)·손영각(孫永珏)·권규섭(權奎燮) 등과 함께 전사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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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기 사적비
산남의진 정대장 충효동 사적비는 산남의진을 결성한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출생지인 검단리를 충효동이라 이름짓고 그 사적을 기록한 비이다. 정씨 부자의 숭고한 사적을 기록하여 후세에 본보기로 삼고자 1988년 5월 10일에 본 비를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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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환직, 정용기 산남의진비
정환직(1843 - 1907)은 대한제국기 의금부 금부도사, 중추원의관 등을 역임한 의병장이다. 1888년(고종 25) 의금부의 금부도사를 지냈으며, 1894년 삼남참오령(三南參伍領)에 임명되어 동학군을 진압하였다. 그 해 겨울 다시 토포사(討捕使)에 임명되어 고종의 밀지를 받고 황해도 지방의 동학군을 진압하였다. 그 공으로 태의원시종관(太醫院侍從官)이 되었다. 1899년 삼남검찰 겸 토포사(三南檢察兼討捕使)로 삼남 일대의 민정을 두루 살펴보았다. 1900년 도찰사에 임명되어 농민들의 원성이 높은 경주부윤을 파면하다 오히려 봉세관(俸稅官)에 의해 구금되었다. 석방된 뒤 관직에 뜻이 없어 사직할 것을 청하였으나 다시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에 제수되었다. 1905년 일제의 강권에 의해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고종이 정환직에게 밀지를 보내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할 것을 권하였다. 그 뒤 관직을 사직하고 아들 정용기(鄭鏞基)로 하여금, 고향에 내려가 의병을 모집하게 한 뒤 서울로 진격하여 황제를 구하고 국권을 회복하도록 하였다. 정용기가 청송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붙잡혀 석방된 뒤 의병활동이 부진하므로 이를 독려하고자 1907년 9월 19일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 해 10월 7일 정용기가 입암에서 영천수비대소속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가 총탄에 맞아 순절하자, 정순기(鄭純基)·이세기(李世紀)·우재룡(禹在龍) 등의 추대를 받아 삼남의병부대 의병장에 올랐다. 그 뒤 군세가 크게 떨치기 시작하자 여세를 몰아 동쪽으로 포항 등지, 서쪽으로 신령 등지, 북쪽으로 청송 등지를 공격하여 일본군 수비대에게 많은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전투 중 사상 당하는 의병이 속출하자 전의가 크게 떨어져, 이에 의병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다시 전열을 정비하고 각지에 소모군을 파견, 의병을 모집하였다. 이와 함께 무기와 탄약·군량 등을 준비하며, 국민들의 반일투쟁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전념하였다. 이 때 병이 들어 신병을 치료하다 일본군 수비대에게 잡혔다. 일본군이 회유하고자 하였으나 끝까지 반일의 뜻을 굽히지 않다 총살형을 당해 순국하였다. 정용기(1862 - 1907)는 한말 경상북도 영천 출신의 의병장으로, 아버지 정환직과 함께 산남의진을 결성하였다. 정용기는 국채 보상 운동을 위한 ‘단연회통문(斷煙會通文)’ 및 ‘의연금권고가(義捐金勸告歌)’와 정계의 부패를 비난하는 6개 조항을 들어 투서하였다. 그 외에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의 부정 행위를 탄핵한 ‘통곡조한국민(痛哭弔韓國民)’이란 글월 및 순절한 민영환(閔泳煥)을 추도하는 ‘혈죽가(血竹歌)’를 발표하고 격렬한 가두 연설을 전개해 대중의 각성과 단결을 환기시키기도 하였다. 이렇게 민중 계몽에 힘쓰던 중 고종황제의 밀명을 받은 부친 정환직(鄭煥直)과 영남에서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심하고, 고향인 영천으로 내려가 이한구(李韓久)·손영각(孫永珏)·정순기(鄭純基) 등과 힘을 합쳐 통유문과 권고문을 작성하여 각지에 배포하고 의병을 모집하여 ‘산남의진(山南義陣)’이라 이름하고 제1대 대장에 추대되었다. 정용기는 경주 우각리를 경유할 때 경주진위대의 간계로 체포되어 대구로 압송되었다가 아버지의 주선으로 석방된 후 1907년 4월 재차 거의하여 영덕의 신태호(申泰浩) 의병부대와 연락을 취하면서 영천·영일·청송 등지에서 일본군을 여러 차례 전투를 하였다. 1907년 8월 산남의진 본진 100여 명과 함께 죽장의 매현으로 들어가 9월 초 강릉으로 북상을 준비하던 중 1907년 9월 1일 입암에서 일본군 영천수비대의 역습을 받아 격렬히 싸우다가 이한구(李韓久)·손영각(孫永珏)·권규섭(權奎燮) 등과 함께 전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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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만 집
조재만(1906 - 1990)은 경북 영천(永川) 사람으로, 이명은 조충환(曺忠煥) 또는 조용찬(曺瑢燦)이다. 1925년 9월 대구에서 조직된 비밀결사 암살단(暗殺團) 단원으로 활동하였다. 암살단은 1925년 9월 경, 장진홍(張鎭弘)·이원록(李源祿)·이원기(李源祺)·이원유(李源裕) 등에 의해 조직되었으며, 일제의 주요시설 파괴를 목적으로 하였다. 조재만은 암살단에 가입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활동하는 한편, 1927년 10월 경 장진홍과 함께 경북도청(慶北道廳)·경북경찰부(慶北警察部)·조선은행 대구지점(朝鮮銀行大邱支店)·식산은행 대구지점(殖産銀行大邱支店) 등지를 폭파시키고자 계획하였다. 1927년 10월 18일 오전 9시 경, 장진홍은 미리 준비한 폭탄 4개를 목표 지점에 1개씩 배달시켰으며, 이날 오전 11시 50분 경 폭탄이 폭발하여 은행원과 일경 등 5명이 중경상을 입는가 하면 유리창 70여 매가 완전히 부숴졌다. 일경은 이 사건에 대한 신문게재를 금지시키는 한편 비밀리에 조사를 진행시켰는데, 이때 조재만은 폭탄을 투척한 것과 연루되어 붙잡혔다. 그는 이 일로 소위 폭발물 취체규칙 및 치안유지법으로 2년 여의 옥고를 치렀다. 그 후 1931년에는 이원록과 함께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 북경(北京)으로 망명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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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만 추모비
조재만(1906 - 1990)은 경북 영천(永川) 사람으로, 이명은 조충환(曺忠煥) 또는 조용찬(曺瑢燦)이다. 1925년 9월 대구에서 조직된 비밀결사 암살단(暗殺團) 단원으로 활동하였다. 암살단은 1925년 9월 경, 장진홍(張鎭弘)·이원록(李源祿)·이원기(李源祺)·이원유(李源裕) 등에 의해 조직되었으며, 일제의 주요시설 파괴를 목적으로 하였다. 조재만은 암살단에 가입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활동하는 한편, 1927년 10월 경 장진홍과 함께 경북도청(慶北道廳)·경북경찰부(慶北警察部)·조선은행 대구지점(朝鮮銀行大邱支店)·식산은행 대구지점(殖産銀行大邱支店) 등지를 폭파시키고자 계획하였다. 1927년 10월 18일 오전 9시 경, 장진홍은 미리 준비한 폭탄 4개를 목표 지점에 1개씩 배달시켰으며, 이날 오전 11시 50분 경 폭탄이 폭발하여 은행원과 일경 등 5명이 중경상을 입는가 하면 유리창 70여 매가 완전히 부숴졌다. 일경은 이 사건에 대한 신문게재를 금지시키는 한편 비밀리에 조사를 진행시켰는데, 이때 조재만은 폭탄을 투척한 것과 연루되어 붙잡혔다. 그는 이 일로 소위 폭발물 취체규칙 및 치안유지법으로 2년 여의 옥고를 치렀다. 그 후 1931년에는 이원록과 함께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 북경(北京)으로 망명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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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만 묘
조재만(1906 - 1990)은 경북 영천(永川) 사람으로, 이명은 조충환(曺忠煥) 또는 조용찬(曺瑢燦)이다. 1925년 9월 대구에서 조직된 비밀결사 암살단(暗殺團) 단원으로 활동하였다. 암살단은 1925년 9월 경, 장진홍(張鎭弘)·이원록(李源祿)·이원기(李源祺)·이원유(李源裕) 등에 의해 조직되었으며, 일제의 주요시설 파괴를 목적으로 하였다. 조재만은 암살단에 가입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활동하는 한편, 1927년 10월 경 장진홍과 함께 경북도청(慶北道廳)·경북경찰부(慶北警察部)·조선은행 대구지점(朝鮮銀行大邱支店)·식산은행 대구지점(殖産銀行大邱支店) 등지를 폭파시키고자 계획하였다. 1927년 10월 18일 오전 9시 경, 장진홍은 미리 준비한 폭탄 4개를 목표 지점에 1개씩 배달시켰으며, 이날 오전 11시 50분 경 폭탄이 폭발하여 은행원과 일경 등 5명이 중경상을 입는가 하면 유리창 70여 매가 완전히 부숴졌다. 일경은 이 사건에 대한 신문게재를 금지시키는 한편 비밀리에 조사를 진행시켰는데, 이때 조재만은 폭탄을 투척한 것과 연루되어 붙잡혔다. 그는 이 일로 소위 폭발물 취체규칙 및 치안유지법으로 2년 여의 옥고를 치렀다. 그 후 1931년에는 이원록과 함께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 북경(北京)으로 망명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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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학학원
백학학원은 1921년 영천군 화남면 안천리에 설립된 신교육기관이다. 이 학원의 설립을 이끈 인물은 면우 곽종석과 회당 장석영의 제자인 조병건이다. 창녕조씨 문중과 지역민들이 힘을 보탰다. 백학학원은 초등 과정이었는데 초등 졸업생들을 중등과정에 보내기 위한 예비교육 과정으로 보습과를 병설로 두기도 했다. 이육사·조재만·이원대·이진영 등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민족 교육 기관이다. 백학학원은 설립 이후 한때 200여 명의 학생을 수용할 정도로 면민이 일치단결하여 경영하였으나 1924년경부터 경영이 점전 어려워지게 되었다. 1924년 3월부터 영천 지역에서 활동하던 사상단체 시온촌의 동인들이 이곳에 들어가서 농사를 경영하면서 백학학원을 맡아 경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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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교 추모비
이범교(1888 - 1951)는 경북 영천(永川) 사람이다. 대구에서 동산병원(東山病院)을 개업하여 의료업에 종사하다가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대구에서 시위에 참가하고 일경의 지명수배를 피하여 상해(上海)로 망명하였다. 1919년 4월에 임시정부에서 국내외를 연결시키며 통제하기 위하여 설립한 교통부(交通部)의 교통위원(交通委員)으로 피선되었다. 교통부에서는 정보의 수집 및 검토, 교환, 연락과 기밀문서의 교환 등 통신업무에 치중하는 한편, 독립운동 자금의 수집 업무도 겸하고 있었다. 또한 그 주요 임무로서는 독립운동에 헌신할 의식있는 인물을 발굴하여 양성, 교육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중대한 임무를 띠고 그는 1919년 7월에 임시정부 경북 특파원으로 임명되어 항일선전 및 군자금 조달, 임시정부 연락 임무 등의 사명을 띠고 입국하여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11월에는 국내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체포 위기를 여러 번 모면한 뒤 만주(滿洲), 봉천(奉天)으로 가서 국내 출입 안내역과 연락책으로 활동하였으며, 또한 12월에는 노령(露領) 니코리스크시에 배영학교(培英學校)와 병원을 설립하고 학생들에게 민족의식과 독립계몽사상을 교육시켰다. 또한 1921년에는 흑하사변(黑河事變)으로 이만시를 탈출한 이범석(李範奭)이 약 6개월간 배영학교(培英學校)에서 훈련부장으로 재직하면서 2세 교육에 전념하고, 독립운동을 보다 합리적으로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강구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적을 인정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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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영 집
이진영(1907 - 1951)은 경북 영천(永川) 사람이다. 송병철(宋炳喆)의 권유를 받고 조선의열단에 입단하였으며,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낙양분교(洛陽分校)에 특별히 설치된 한국 군관훈련반에서 정치훈련과 전술 및 내무·교양관계의 학과를 훈련받았다. 낙양분교(洛陽分校) 한국군관훈련반은 1년도 못되어 해체의 위기를 맞게 되었으나 그는 낙양분교를 제3기로 졸업하고 남경(南京)으로 가서 의열단(義烈團) 지하운동에 가담하였다. 1938년 6월에는 중앙군 특별반을 졸업하고 한구(漢口)에 와서 선전공작원으로서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상을 폭로하였다. 1938년 봄에 김약산(金若山)을 중심으로 하는 조선민족혁명당이 무한(武漢)에서 조선청년전위동맹·조선민족해방동맹·조선혁명자연맹 등 좌익계통의 정당과 합작하여 이른바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하였으며, 그 후로 간행물 등을 펴내어 대일 선전공작을 전개하는 한편 중국군사위원회 정치부와 교섭하여, 같은 해 10월에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를 창설하였다. 이때 그는 통신처(通訊處) 의창주임(宜昌主任)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1942년 4월 조선의용대가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됨에 따라 그는 광복군 총사령부 경리과에 소속되어 복무하였다. 1943년부터 광복시까지 그는 광복군 부령(副領)으로 총사령부 참모처 3과에 배속되어 복무하였다. 광복 후 국군에 입대하였으며, 6·25전쟁 중 화순지구에서 전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