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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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률 추모비
김상률(미상 - 1923)은 1919년 4월 15일 한말 의병장 출신인 박장호(朴長浩)·조맹선(趙孟善) 등이 중심이 되어 유하현 삼원보 서구 대화사에서 결성한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의 일원으로 활동하였으며 김승렬(金承烈)이라고도 불린다. 동지 5명과 함께 친일기관인 보민회(保民會)를 습격하는 등 친일파 제거에 진력하던 김상률은 1920년 9월 24일 동지 4인과 함께 평북 의주군 사산동 소나무 숲에서 일본 경찰과 충돌하였으며, 이어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이동순(李東順)의 밀고로 일경과 교전하였다. 1921년 3월 중순에는 압록강 유초도에 있으면서 교통국장 백승서(白承瑞)와 함께 안동현 일본영사관과 은행을 습격하고자 협의하던 중 일경 42명의 공격을 받아 반격하다가 밀선을 타고 탈출하였다. 1923년 2월 전덕원(全德元) 계열의 의용군이 의군부(義軍府)를 결성하자 김상률은 이에 가담하여 활동하였으며, 1923년 8월경 유격대장 이경일(李京日)의 지휘 하에 동지 50명과 함께 평북 의주군 청성진 주재소를 습격하다가 피체되어 단식 투쟁을 하다가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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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헌 추모비
손병헌(1870 - 1946)은 경북 영천(永川) 사람이다. 중국으로 망명하여 1921년 10월경 봉천성 환인현(桓仁縣) 지방에 중국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와 관련된 한교공회(韓僑公會)를 재건하여 총회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1922년 8월 환인현 남구(南區) 마권자(馬圈子)에서 무장독립군인 통군부(統軍府) 등 8개 단체대표가 모여 통의부(統義府)를 조직하자 이에 가입하여 윤세용(尹世茸)·이장녕(李章寧) 등과 함께 참모부 참모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그후 1926년부터는 간도 용정(龍井)에서 대성(大成)중학교의 교사로 민족교육을 실시하며 후진양성에 힘썼다고 한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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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표 추모비
이형표(1858 - 1924)는 경북 영천(永川) 사람이다. 정용기(鄭鏞基) 의진에 가담하여 경북 영천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는 대한제국 정부를 강박하여 「을사륵약(乙巳勒約)」을 체결하여 외교권을 박탈하고 주권을 제약하였다. 이에 분격하여 우리 민족은 전국 각지에서 대규모의 의병운동을 일으켜 무너져가는 국권을 회복코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이형표는 반일 의병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할 목적을 가지고 1906년 3월 정용기 의병장이 각 고을 포수(砲手) 및 민병들로 산남창의진(山南倡義陣)을 구성할 때 경북 영천군 담당자로 활동하였다. 을사륵약 이듬해인 1906년 영남에서 의병을 일으켜 북상할 것을 결심한 정용기(鄭鏞基) 의병장은 영천으로 내려가 통유문과 격려문을 각계 각층에 보내어 함께 의병에 참가하기를 권고하고 총 궐기를 촉구하였다. 또한 정용기 의병장은 각 지역별로 인원을 배치하여 의거 진행 계획에 대한 연락을 맡게 하였다. 당시 정용기 의병장 휘하에서 이를 담당하던 사람은 이형표 외에 이수인(李壽寅)·정치석(鄭致錫)·이두규(李斗圭)·정진영(鄭鎭英) 등이 있었다. 이들은 각지의 동지들과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는 한편 사재를 털어 무기와 군량·군복 등을 의병 진중에 헌납하는 등의 지원활동을 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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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필 기공비
이규필(1879 - 1915)의 자는 주범, 호는 관천이며, 영천 출신의 의병이다. 이규필(李圭弼)은 정환직(鄭煥直)과 그의 아들 정용기(鄭鏞基)가 주축이 된 영천 지역의 의병 조직인 산남의진(山南義陣)의 군사 소모단계에서부터 참여하여 각 지역을 연락하며 편성에 힘썼고, 창의 당시에는 연습장에 선임되었다. 1907년 산남의진을 재결성할 때에는 흥해·청하 등지에 파견되어 군사를 모집하는 한편, 본진의 우영장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정용기 대장이 1907년 9월 입암 전투에서 전사한 후 그의 아버지 정환직이 새로이 의진을 구성하자, 이규필은 좌영장에 임명되어 영천·영일·청송·영덕 등지에서 여러 차례 일군경과의 전투를 치러 혁혁한 공을 세웠다. 정환직 대장이 순절한 후 최세윤(崔世允)이 또 다시 의진을 재구성하자 우포장을 맡아 활약하였고, 최세윤이 체포된 후에도 이세기(李世紀)와 함께 끝까지 대일 항전을 계속하다가 국권 회복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울화병으로 사망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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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필 공적비
김동필(1860 - 1944)은 경상북도 영천군(永川郡) 신령(新寧面) 신덕동(新德洞)에서 태어났다. 1904년 2월 일제가 러일전쟁을 도발하고 일본군을 한국에 상륙시켜 내정을 간섭하고 「제일차한일의정서」를 강제 체결하여 침략정책을 강화하자 1905년 1월에 동지들과 함께 대한십삼도유약소(大韓十三道儒約所)를 설치하고 일제의 침략정책을 규탄하는 상소운동을 전개했으며, 각국 공사관에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는 공한을 보내었다. 또한 1905년 11월에는 매국단체 일진회(一進會)를 규탄하는 운동을 벌였다.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자, 을사조약의 파기와 을사5적의 처형을 요구하는 상소를 십삼도유약소의 동지들과 함께 연명으로 올리어 을사조약에 대한 반대투쟁을 전개하였다. 1907년 나인영(羅寅永) 오기호(吳基鎬) 등과 함께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하고 이완용 등 을사5적을 처단하려다가 발각되어 1907년 7월에 10년의 유배형을 당하였다. 1909년 이상설(李相卨)이 제2회 만국평화회에 파견하는 국내대표로 김동필과 김진구(金鎭九)를 선정하여 극비리에 이들에게 여비를 보내어 상해로 나오도록 촉구했으나 일제의 연금으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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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지역 3.1운동 발원지 표석
영천지역의 3.1운동은 18세의 구위준이 1919년 3월 15일 10시경 신녕면 화성동 소재 신녕공립보통학교 1학년 교실 밖 게시판에 많은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대한독립'이라는 글자를 써붙임으로써 시작되었다.그날의 일을 계기로 시작된 영천지역 3.1운동의 정신과 선조들의 얼을 널리 기리고자 2019년 3월에 영천시가 본 표석을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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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규섭 추모비
권규섭(1883 - 1907)은 한말 경상북도 영천 출신의 의병이다. 권규섭은 1906년 3월 영천과 신녕에서 활동하던 정환직(鄭煥直)과 그의 아들 정용기(鄭鏞基)에 의해 조직된 의병부대인 산남의진(山南義陣)에 참가하였다. 그 후 1907년 4월 산남의진이 재차 거의할 시 좌영장으로 임명되어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면서 영천·영일·청송 등지에서 일본군과의 여러 전투에 참전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다. 1907년 8월 정용기 대장을 비롯한 산남의진 본진 100여명과 함께 죽장의 매현으로 들어간 권규섭은, 9월 초 강릉으로 북상을 준비하던 중 일본군이 청송에서 죽장으로 이동한다는 정보를 접하고 기습 공격하여 적을 섬멸할 작전을 세웠다. 그러나 이세기(李世紀) 부장이 일본군 취사반 인원을 주력부대로 오판하여 성급히 공격을 감행하다가 매복해 있던 일본군 영천 수비대의 역습을 받자 그는 정용기(鄭鏞基) 대장이 이끄는 본부대와 매복해 있던 부대들과 합류하여 입암으로 나아가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그는 대장 정용기(鄭鏞基), 중군장 이한구(李韓久), 참모장 손영각(孫永珏) 등과 함께 전사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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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흥 추모비
정원흥(1912 - 1944)은 경상북도 영천(永川) 사람이다. 1932년 11월 일본으로 건너가 4년간 대판(大阪) 기옥현(埼玉縣) 등지에서 고학하면서 항일독립운동을 펴기 위해 동지규합에 노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36년 귀국하였다. 1941년 1월 일경의 감시를 피하여 다시 중국으로 건너간 그는 1944년까지 3년간 북경(北京)·천진(天津) 등지에서 동지들과 연계하여 항일독립운동을 폈다고 한다. 1944년 3월 초순 임시정부 계통의 공작원으로부터 임시정부의 밀명을 받고 귀국하여 영천지방의 유지인 정도영(鄭島榮)과 협의, 후방교란과 일제의 무력을 분산시킬 목적으로 대구의 동촌(東村) 비행장을 폭파할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계획이 노출되어 1944년 3월 27일 일경에 붙잡혔다. 그는 일본 헌병대로 이송되어 8개월에 걸쳐 가혹한 고문을 받았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자백을 거부하여 동지들의 희생을 막고 결국 일경의 고문으로 빈사상태가 되어 병보석되었으나 출옥한 후 7일만인 1944년 12월 15일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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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낙헌 사적비
김낙헌(1902 - 1965)은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영천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김낙헌(金洛憲)은 1919년 4월 26일 지금의 영천시 임고면 양평리에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하고 천으로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큰 기를 만들어서 4월 27일 영천시 창구동 장터 부근에서 독립 만세를 고창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었다. 5월 1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언도받고 공소하였으나, 6월 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6년에는 융희황제가 붕어하자 국복을 입지 않은 사람에게 규탄하는 글을 보냈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수개월간 구금되었고, 1938년에는 「대한복수가」를 작사하여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등 지역민에게 독립 계몽 사상 교육 활동을 전개하였다.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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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차 의병진 결성지(거동사)
거동사는 산남의진의 제3대 대장이었던 최세윤의 제4차 의병진 결성지이다. 최세윤(1867 - 1916)은 본관이 흥해이며, 호는 농고(農皐)이다. 최세한(崔世翰)으로 불리기도 했다. 1896년 안동의진의 아장(亞將)으로 활동하였다. 그 뒤 정환직이 아들 정용기에 이어 산남의진의 2대 대장에 취임하자, 여기에 참여하여 흥해지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이어 제2대 대장 정환직이 순국하자, 최세윤은 제3대 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최세윤은 1908년 2월 산남의진의 본대가 머물고 있는 보현산 거동사(巨洞寺)에 도착하였다. 그 후 한 달 정도 지나 대장으로 취임하였다. 최세윤은 대장에 오르자 산남의진이 목표로 삼고 있던 관동지방으로의 북상계획을 중단하였다. 그리고 경상도 일대에서 지구전을 펼칠 계획으로 부장들을 각 지역으로 나누어 배치하였다. 지역별 책임자를 선정하고 본부를 남동대산(南東大山)으로 옮긴 최세윤은 경주·울산·흥해·포항 지역은 본부에서 직접 담당하도록 하였다. 산남의진은 곳곳에서 유격전으로 일본군에 항전하여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항전을 이어가던 최세윤은 1908년 7월, 장기(長鬐) 용동(龍洞)에서 붙잡히고 말았다. 1916년 8월 9일 옥중에서 단식·순국하였다. 최세윤은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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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 묘
이석(1881 - 1909)은 대한제국기 산남의진에 입진하여 초장과 좌령장으로 활약한 의병이다. 자는 사옥(士玉)이고 경상북도 청송 출신이다. 1896년 을미의병이 각처에서 전개되자 의병부대에 입진하였으나 의병부대 해산조치에 따라 산으로 들어갔다. 그 뒤 1906년 을사의병의 일환으로 영천을 중심으로 산남의진(山南義陣)이 구성되자 의병장 정용기(鄭鏞基)의 휘하에서 초장(哨長)과 좌령장(左領將)으로 활약하였다. 1907년 남석문(南錫文)·정순기(鄭純基) 등과 청송·영덕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하던 중 남석문이 붙잡혀 처형당하자 중도에서 귀대하였다. 이때 의병장 정용기가 전사하고 정환직(鄭煥直)이 의병장으로 추대되자 중군(中軍)에 임명되었다. 얼마 후 정환직이 청하에서 패전하여 처형당하자 의병장으로 추대되었으나 사양하였다. 한편, 당시 산남의진은 의병장이 공석인 채 이미 구심력을 잃고 소규모의 유격부대로 재편되어갔다. 이에 소수의 부하만을 인솔하고 장기와 청하 등지를 진격, 일본군과 교전하였으며 이어서 울산으로 진군하던 중 일본군의 복병에게 크게 패하였다. 그 뒤 휘하의 의병을 해산하고 귀향하여 삼유산(三踰山) 아래 도평촌(道坪村)에 은거하던 중 1909년 7월에 붙잡혔다. 3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하던 중 탈옥하였으나 다시 붙잡혀 처형당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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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로 기념비
이학로(1867 - 1933)는 경상북도 영천(永川) 출신으로, 대한제국기 경상남도 산청, 함안 일대에서 활동한 의병장이다. 1907년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이 체결되고 이때 조·일 양국간에 교환된 비밀각서에 의하여 8월 1일을 기해 한국군이 해산되자 거의하여 산청군 덕산(德山)의 의병장 박동의(朴東儀) 의병부대의 부장(副將)이 되어 경상도 전역에 걸쳐서 의병운동을 하였다. 1908년 8월 18일 그의 향도관(響導官)인 서병희(徐炳熙)와 함께 의병 18명을 거느리고 산청군 두량곡(斗量谷)에서 일군수비대와 교전하여 적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는 전과를 올렸다. 1909년에는 산청군 덕산에서 서병희와 함께 부하 11명을 거느리고 함안군 산외면 방목동(山外面 放牧洞)에 사는 일본인 집을 습격하여 소각하였다. 그후 그의 부하로 활약하였던 서병희는 독립하여 스스로 의진을 이끄는 의병장이 되어 경상도 일원에서 계속 활약하다가 1909년 10월 11일 구마산주재소 일경에게 체포되어 순국하였다. 이학로는 1910년 이후까지 지리산(智異山), 가야산(伽倻山) 등에서 계속 항전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하나 그 기록은 찾을 수가 없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