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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악정
남약정은 1623(인조 1년) 애국지사 오하근의 선조인 남악 오여벌(吳汝橃)이 건축하였다. 남악정에 있는 경암기(敬菴記)를 이만도가 지었다고 알려져있다. 이만도(1842 - 1910)의 자는 관필, 호는 향산이며, 조선 후기 사간원정언, 교리, 중학교수 등을 역임한 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이다. 1866년(고종 3) 정시에 장원급제하여 성균관전적에 임명되었다가 병조좌랑에 제수되었다. 이어 사간원정언에 임명되고, 홍문관부수찬으로서 남학교수(南學敎授)를 겸하였다. 또한 대신(문신)으로서 선전관을 겸하기도 하였다. 이후 부교리·장령·지평·우통례(右通禮)·병조정랑·충청장시도사(忠淸掌試都事)·교리·응교·사간·집의·중학교수(中學敎授) 등을 역임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명성이 높았다. 또한 시강(侍講) 및 빈대(賓對) 때에 이만도가 상주하는 말을 고종이 모두 기꺼이 받아들였다고 한다. 1876년 일본대사 구로다[黑田淸隆]가 와서 강화도조약을 체결할 때 최익현(崔益鉉)이 반대 상소를 올리자,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한목소리로 공격을 하였다. 그 때 집의로서 탄핵문의 문구가 사리에 맞지 않다고 없앴다가 대사헌의 미움을 받아 집의직을 삭탈당하였다. 그 뒤 다시 복직되고, 사성·응교·장악정(掌樂正) 등을 역임하였다. 그 해 가을 양산군수에 제수되어 굶주리는 백성을 보살피고 탐관오리를 소탕하는 데 공을 세웠다. 1878년 다시 집의에 임명되어 홍문관·사헌부·사간원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1882년 통정대부에 올라 곧 공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사임하였다. 세상이 어수선해지자 벼슬길을 단념, 동부승지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 뒤 백동(柏洞)에 작은 서재를 지어 놓고 경서를 연구하며 날을 보내다가,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예안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1905년 강제로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을사오적의 매국죄를 통렬하게 공박하는 소를 올렸다. 1907년 순종이 즉위한 뒤 가선대부에, 1910년 자헌대부에 승자되었다. 그 해 8월 일제에 의해 한국이 병탄되자 유서를 지어 남긴 뒤 단식 24일 만에 순국하였다. 이만도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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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하근 구 묘
오하근(1897 - 1971)의 호는 농고이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오하근은 농촌에서 농사를 지으며 한학을 익혔다. 23세가 되던 해에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파리강화회의가 열린다는 것과 전국 각지에서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주변 사람들로부터 전해 들었다. 그러던 중 평소 친분이 두터운 지금의 영주시 이산면 내림리에 사는 박인서(朴仁緖)와 박인서의 친구 권태중(權泰中)을 만나 1919년 3월 21일 영주면 장날 만세시위운동을 일으키기로 의견을 모았다. 오하근은 박인서·권태중과 함께 사전 준비를 하면서 자신은 영주군, 박인서는 봉화군 일대에서 군중을 규합하기로 했으며, 한편으로는 권태중에게 태극기 15매를 제작하게 하였다. 3월 21일 오하근은 박인서와 같이 태극기를 숨기고 시장으로 나갔다. 오하근은 어물시장, 박인서는 약간 떨어진 쌀시장에서 준비한 태극기를 장꾼들에게 나누어 주며 만세시위를 펼칠 준비를 하였다. 오하근은 박인서와 함께 오후 5시 무렵 어물시장과 쌀시장을 중심으로 태극기를 휘두르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오하근은 군중들이 모여들자 이들의 선두에 서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에 나섰다. 그러자 순찰 중이던 일본군 헌병들이 달려와 오하근은 박인서와 함께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1919년 3월 25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다. 오하근은 이에 불복하고 공소하였으나, 4월 1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심형 확정으로 징역 1년 6월의 옥고를 치렀다. 오하근은 1980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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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하근 기념비
오하근(1897 - 1971)의 호는 농고이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오하근은 농촌에서 농사를 지으며 한학을 익혔다. 23세가 되던 해에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파리강화회의가 열린다는 것과 전국 각지에서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주변 사람들로부터 전해 들었다. 그러던 중 평소 친분이 두터운 지금의 영주시 이산면 내림리에 사는 박인서(朴仁緖)와 박인서의 친구 권태중(權泰中)을 만나 1919년 3월 21일 영주면 장날 만세시위운동을 일으키기로 의견을 모았다. 오하근은 박인서·권태중과 함께 사전 준비를 하면서 자신은 영주군, 박인서는 봉화군 일대에서 군중을 규합하기로 했으며, 한편으로는 권태중에게 태극기 15매를 제작하게 하였다. 3월 21일 오하근은 박인서와 같이 태극기를 숨기고 시장으로 나갔다. 오하근은 어물시장, 박인서는 약간 떨어진 쌀시장에서 준비한 태극기를 장꾼들에게 나누어 주며 만세시위를 펼칠 준비를 하였다. 오하근은 박인서와 함께 오후 5시 무렵 어물시장과 쌀시장을 중심으로 태극기를 휘두르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오하근은 군중들이 모여들자 이들의 선두에 서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에 나섰다. 그러자 순찰 중이던 일본군 헌병들이 달려와 오하근은 박인서와 함께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1919년 3월 25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다. 오하근은 이에 불복하고 공소하였으나, 4월 1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심형 확정으로 징역 1년 6월의 옥고를 치렀다. 오하근은 1980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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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택진 묘
강택진(1892 - 1926)의 호는 하연이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강택진은 개성 출신으로 서울에서 살다 『정감록(鄭鑑錄)』에 따라 영주 풍기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풍기 지역은 『정감록』에서 말하는 ‘십승지’ 중 하나였기에 이주해 온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3·1운동 직전 중국 동북지역으로 건너가 1919년 3월 지린[吉林]에서 결성된 길림군정사(吉林軍政司) 재무부원으로 독립운동 자금모집에 힘을 쏟았다. 국내 활동을 위해 동년 6·7월경 귀국한 그는 10월 서울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 연통제(聯通制) 기관으로 조선13도총간부를 조직하고 교섭부장을 맡았다. 이때 그는 경북 일대를 무대로 독립운동자금 수백원을 모집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송부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다가 1920년 말 연통제 조직이 파괴되는 상황에서 체포되어 1921년 6월 징역 2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농민운동과 같은 대중운동에 관심을 쏟으며 1923년 1월 풍기소작인조합(豊基小作人組合)과 동년 9월 전조선노농대회준비위원회(全朝鮮勞農大會準備委員會)의 발기에 참여했다. 또한 식민지 사회의 모순을 절감하고 고려공산청년동맹(高麗共産靑年同盟)에 참여하여 청년운동을 전개하였고, 1923년 10월 조선노농대회준비회(朝鮮勞農大會準備會)를 결성하여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4년 4월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이 결성되자 중앙위원·상무집행위원으로 선임되어 농민운동 지도자로 활동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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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광복단 기념비
대한광복단은 1913년 경상북도 풍기(豊基)에서 조직되어 천안 출신의 인물이 가담한 독립 운동 단체이다. 광복단은 단원을 포섭하여 조직을 확장하고, “오등(吾等)은 대한 독립과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죽음으로써 결의하고 구적(仇敵) 일본을 완전 구축하기로 천지신명께 서(誓)함”이라는 선언문을 발표하는 한편, 국내외에서 무장 활동을 전개하였다. 광복단의 활동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충청남도 아산군 도고면장(道高面長)인 친일파 박용하(朴容夏)와 경상도 관찰사이자 악질 친일 부호인 장승원(張承遠)의 암살 사건이었다. 투쟁 방법으로는 부호의 의연금과 일본인의 불법 징수 세금을 압수하여 전 단원이 무장하고, 사관 학교를 설치하여 무관의 양성 및 연락 기관을 설치하여 군사상 집회 및 왕래 장소로 사용하며, 일본인 고등관 및 변절자의 처벌과 무력전 개시 등을 하였다.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삼남 지방의 부호를 대상으로 부호들에게 군자금 모집 취지서를 발송하고 친일파 처단 활동을 했다. 영남 지방에서는 박상진과 채기중이, 기호 지방은 김한종과 장두환이, 관동 지방은 김동호(金東鎬)가 담당하여 군자금 모금 활동을 벌였다. 대한 광복단(大韓光復團)은 이후 대구의 우재룡(禹在龍), 박상진(朴尙鎭), 권영만(權寧萬), 양제안(梁濟安), 김경태(金敬泰), 김한종(金漢鍾), 엄정섭(嚴正燮) 등이 합류하여 광복회(光復會)로 개칭하였다. 다시 1916년에 노백린(盧伯麟), 김좌진(金佐鎭), 신현대(申鉉大), 윤홍중(尹洪重), 신두현(申斗鉉) 등이 가담하여 광복단이 되었다. 특히 경상북도의 인물들이 힘쓴 바로는, 1917년에 혁명의 전초작업으로 친일부호를 처단하는 작업에 착수하여 임세규는 칠곡, 김한종은 아산, 이병호는 보성, 한훈은 별교에서 성과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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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영주기적비
대한광복단기념공원은 대한광복단[풍기광복단]의 정신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는데, 독립운동영주기적비는 해당 공원 안에 있으며, 1994년 대한광복단 결성을 기념하고자 세운 비이다. 풍기광복단의 참가자의 성향은 강순필이 이강년(李康秊) 의진, 유창순·한훈이 민종식(閔宗植) 의진에서 활동하고, 유장렬이 후기의병기에 전북에서 의병으로 활동했던 점에서 볼 수 있듯이 의병운동 참가자들이 주도한 조직이었다. 학력은 대체로 유학(儒學)을 배웠거나 무학(無學)인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기질적, 학문적 성격은 풍기광복단이 1915년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回復團) 일부 인사와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로 확대 발전할 때 조선국권회복단의 구성원들이 신학(新學)을 학습하고 일정한 경제력을 지녔던 점과 대비가 된다. 한편 풍기광복단이 결성된 이후에는 채기중을 매개로 하여 점차 단원이 보강되었다. 이는 세력 확장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주요 인물은 양제안(梁濟安) 부자·황상규(黃相奎)·김대지(金大池)·이각(李覺) 등이었다. 양제안 부자는 풍기 및 만주 일대에서 조직을 정비하며 본 단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황상규 등은 청년지식인집단으로 신학(新學)을 이수하였으며 어느 정도 경제력을 갖춘 인물들이었다. 과거 일합사(一合社)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한 경험도 있었다. 따라서 이들의 영입으로 인적구성과 활동반경은 한층 확대될 수 있었다. 이후 풍기광복단은 1915년 박상진(朴尙鎭)이 이끄는 조선국권회복단 일부 인사와 영남에서 분산적으로 활동하던 항일세력을 규합하여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로 확대 발전하였다. 풍기광복단의 조직과 활동은 끝까지 비밀이 유지되어 일제강점기 전 기간을 통해 철저히 은폐되었고, 1918년 대한광복회 조직이 발각되었을 때에도 풍기광복단의 결성사실은 노출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해방 후에 생존단원인 한훈(韓焄)에 의해 비로소 그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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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탑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산법리에 있는 대한광복단(풍기광복단)의 항일독립운동을 기리기 위해 세운 탑으로, 대한광복단은 경술국치 이후 전국 최초로 조직된 무장항일 비밀결사이다. 서기1913년 채기중(蔡基中)선생을 중심으로 의사(義士)들이 모여 이곳 풍기에서 결성한 대한광복단은 국권회복을 피로써 하늘게 맹세한 조직적인 민족항쟁결사(結社)이다. 1915년 대구 박상진(朴尙鎭)의사의 단체(국권회복단)와 통합하였다. 대한광복단은 경상북도 풍기 서부 한림촌의 채기중을 중심(정만교,김병연,양재안,유장열,유창순,한훈, 강병수 등)으로 유림, 의병, 대종교 출신, 애국청년 등 8개 지역 19명이 조직한 무장비밀결사대로서 일제하에서 최초로 결성된 전국규모의 무장 항일 투쟁 조직이다. 1915년 대구의 박상진을 중심으로 한 ‘조선국권회복단’과 통합하여‘대한광복회(총사령관 박상진)’로 개칭하였다. 1916년 노백린, 김좌진 등 애국투사들이 합류하였고 1917년 기호, 호남, 관동, 관서지방의 애국지사들이 모여 거국적인 독립운동단체로 자리 매김하였다. 그들은 주로 대구, 광주, 아산, 인천, 해주, 옹천, 충북 등지에서 주로 군자금 조달과 친일파를 암살하였다. 광복단의 활동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1917년말의 전(前) 경상도관찰사이며 친일부호인 장승원(張承遠)과 1918년 초 충청남도 아산군 도고면장(道高面長)인 친일파 박용하(朴容夏)의 처단사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직이 드러나지 않았으나 회원인 이종국(李鍾國)이 1918년 1월 천안경찰서에 밀고함으로써 총사령(總司令) 박상진을 비롯한 37명이 체포되었다. 일경의 체포를 피한 한훈 등의 회원은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3·1운동 뒤에는 김상옥·한훈·김동순(金東淳) 등 20여 명이 암살단을 국조직하여 총독을 암살하려다 거사 직전에 발각되어 힌훈, 김동순 등이 체포되어 수포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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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기중 일대기비
채기중 선생 일대기 비석은 대한광복단기념공원에 위치해 있다. 기존에 있던 대한광복단 약사비가 새롭게 바뀌면서, 비밀결사조직인 대한광복단 초대 단장인 채기중 선생의 일대기를 대한광복단 약사비 뒷면에 새긴 것이다. 채기중(1873 - 1921)의 자는 극오, 호는 소몽이며, 영주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채기중은 1913년 풍기군에서 대한광복단[풍기광복단]이라는 비밀결사 조직 결성을 주도하였다. 대한광복단은 독립군 양성을 위해 국내에서 군자금을 모집하고,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 간의 유기적 결합을 추구하였다. 이를 위해 상업망과 명망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는데, 대동상점(大東商店)이 대표적 사례이다. 대한광복단은 독립운동자금 모집과 만주지방과의 연계를 주요 활동 범위로 하였다. 채기중은 강병수(姜炳洙)와 함께 자금 탈취를 계획하여 강원도 영월에서 일본인이 경영하는 중석광에 광부로 위장 잠입하여 활동하였다. 또한, 지주와 부호를 대상으로 독립운동자금 모집을 추진하였다. 채기중이 이끄는 대한광복단은 1915년 대구의 달성공원에서 박상진(朴尙鎭)[1884~1921] 그룹과 통합해 대한광복회를 조직하였으며, 채기중은 경상도지부장을 맡았다. 대한광복회는 독립을 위해 중국 만주에 군사사관학교를 세우기로 계획했다. 이를 통해 독립군을 양성하고 무력 기반이 마련되면, 일제와 전쟁을 벌여 독립을 쟁취할 계획이었다. 이에 채기중은 전라도 출신 이병호(李秉昊)[1888~1955]와 충청도 예산 출신 김한종(金漢鍾)[1883~1921]을 회원으로 가입시켰다. 그리고 경상북도의 자산가 상황 조사에 착수하였다. 조사에는 자산가의 주소, 이름, 재산액 등을 항목으로 넣었다. 1915년 음력 7월 무렵 자산가 상황 조사를 박상진에게 전달하고, 박상진은 다시 우재룡(禹在龍)[1884~1955]에게 전달하였다. 우재룡은 조사서를 기초로 해서 국내 자산가들에게 포고문을 발송하였다. 채기중은 1917년 8월 자신의 집과 경성부 인사동 어재하(魚在夏)의 집에서 박상진·김한종·장두한·김동호(金東鎬)[1919~1982] 등과 함께 대한광복회 명의의 포고문을 작성하였다. 대한광복회는 군자금 모금에 참여하지 않는 부호들을 친일적 부호로 규정하고, 직접 처단할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때 채기중은 경상북도를 맡았다. 그리고 그 대상으로 칠곡의 대부호 장승원(張承遠)을 처단하기로 하였고, 결국 1917년 음력 9월 28일에 사망하였다. 채기중은 장승원 암살 뒤에도 독립운동자금 모집을 계속해 나갔다. 채기중은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기 위해 전남 목포에 숨어들었다가 체포되었다. 1918년 10월 1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강도살인 제령위반 혐의로 사형이 언도되었다. 1919년 9월 22일 경성복심법원을 거쳐, 1920년 3월 1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기각 판결을 받았다. 1921년 8월 12일 사형이 집행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채기중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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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상도 집
송상도(1871 - 1947)의 자는 성소, 호는 기려자, 미헌, 연파이며, 일제강점기 『기려수필(騎驢隨筆)』을 편찬한 유학자이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워 권상익(權相翊) 등 향내 제유(諸儒)와 교유하였으며, 당세의 명유인 곽종석(郭鍾錫)·전우(田愚) 등을 역방하면서 견문을 넓혔다. 송상도는 경학(經學)보다 사학(史學)에 힘을 쏟아 중국 역대의 사적(史籍)을 섭렵하였을 뿐 아니라 일찍이 조선왕조사의 편찬에 뜻을 두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명나라가 망한 뒤 기려도사(騎驢道士)가 명말(明末) 충신의 사적을 수집하였던 예에 따라, 우리 나라 애국지사의 사적을 편찬할 결심을 하였다. 전국 방방곡곡을 수십년간 돌아다니며 애국자의 유가족 또는 친지를 역방하면서 사적을 기록하는 한편, 사건 당시의 신문과 기타 자료를 수집하여 『기려수필(騎驢隨筆)』을 편찬하였다. 이렇듯 현지답사를 통하여 채록된 『기려수필(騎驢隨筆)』은 당시 항일투쟁의 실상을 알려주는 귀중한 문헌이다. 송상도는 1986년 건국표창, 1990년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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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봉서 묘
구봉서(1883 - 1927)는 일제의 국권 침탈에 대항하여 조국의 회복에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의병 투쟁에 가담하여 영천 지역을 중심으로 군자금 모금을 주도한 의병이다. 그는 1908년 5월경 흥해군 북안면 간곡동[현 영천시 임고면 사리]에서 홍덕화로부터 20냥을, 3일 뒤에는 다시 18냥의 군자금을 모금하고 이어 같은 달 17일에는 화승총으로 무장한 뒤 경산군 서면 오류동[현 영천시 고경면 오류리]에서 30냥을 모금하였으며, 영천군 고촌면 초일동[현 영천시 고경면 초일리] 동장으로부터도 30냥을 모금하는 등 주로 영천 지역에서 의병 군자금 모금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었다. 1909년 1월 2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강도죄로 징역 15년형을 언도받고 공소하였으나, 3월 13일 대구공소원에서 기각되어 복역하던 중인 1912년 1월 18일 징역 5년형으로 변경되어 옥고를 치렀다. 구봉서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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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용 추모비
김기용(1883 - 1938)은 경북 영천(永川) 사람이다. 1927년 조선은행 대구지점(朝鮮銀行大邱支店)에 폭탄을 투척한 장진홍(張鎭弘)과 회합하여 1928년 결사대원이 된 후 영천경찰서와 고향의 친일부호인 이인석(李仁錫)의 집에 폭탄을 투척하기로 계획하고 장진홍으로부터 폭탄 2개를 전달받아 폭탄투척을 위한 예행연습을 하며 기회를 노리던 중 일경에 붙잡혔다. 1930년 4월 24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살인예비죄로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1930년 장진홍이 옥중에서 변사(變死)하자 그 진상을 추궁하기 위하여 형무소장과의 면담을 요청하다가 간수가 폭언을 하자 분개하여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감옥을 파괴하다가 가중형 6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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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길, 이영환 추모비
김영길(1924 - 1962)은 경북 영천(永川) 사람이다. 1942년 박기수(朴基秀) 등 6인과 함께 항일비밀결사를 조직하고 1943년 4월에는 영천신사(永川神社)를 불태우고 대구(大邱)신사에 방화하였으나 실패하였으며, 동년 5월에는 대구 주둔 일본군 80연대 내에 세균을 투입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또 동년 밤중에 대구 시내 관공서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시내 곳곳에 일군 패전전황을 알리는 유인물을 살포하여 항일민족의식을 고취하였으며 일본군 24부대 병기고를 폭파하였다고 한다. 1944년에는 군자금 모집 중에 발각되어 징역 4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이영환(1924 - 1964)은 경북 영천(永川) 사람이다. 일제가 1937년 중일전쟁과 1941년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후 식량과 자원을 강제 수탈하는 한편 징용·징병등 각종 명목으로 한국인을 침략전쟁의 일선으로 끌어가자, 그는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결심하고 영천신사(永川神社)에 방화(放火)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할 계획을 세우고 이를 준비하던 중 밀고로 말미암아 동년 12월 4일 일경에 붙잡혔다고 한다. 그는 이일로 인하여 1945년 5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해방을 맞아 출옥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