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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진 묘
김동진(1867 - 1952)은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1912년 임병찬 등이 조직한 비밀결사 대한독립의군부가 독립군자금의 모집과 국내외 연락 활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연루·체포되어 20여 일 동안 구류 상태에서 취조를 받았다. 1919년 3월 곽종석(郭鍾錫)[1846~1919]·장석영(張錫英)[1851~1929]·김창숙 등이 추진한 유림단의 독립청원운동인 파리장서운동에 참여하여 독립청원서, 일명 파리장서에 서명하였다. 1919년 4월 이후 독립청원운동이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서명자들이 체포될 때 서명 사실이 드러났다. 이 사건에 연루되어 40여 일간 투옥된 상태에서 가혹한 고문을 받기도 했다. 1925년 김창숙이 내몽고 지역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기로 계획하고 자금 20만 원을 모집하기 위해 비밀리에 입국하였다. 이에 김동진은 아들을 군자금 모집에 참여시키는 등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 1926년 4월 2일 김화식(金華植)[1902~1950] 등이 체포되면서 관련자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되었다. 이른바 ‘제2차 유림단의거’였다. 제2차 유림단의거로 1926년 5월 중순까지 관련자 600여 명이 체포되어 40~50명이 기소될 때 함께 체포되었다. 1927년 1월 2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대정8년 제령 제7호 위반 및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대구감옥에 구금되었다가 약 1개월 만에 출옥하였다. 1952년 12월 22일 지금의 영주시 부석면 상석리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김동진의 문집으로 12권 7책의 『정산집(貞山集)』이 전한다. 김동진은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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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진 강학당(도강서당)
도강서당(道岡書堂)은 구한말 독립운동가이며, 이 지역의 대표적인 유학자인 김동진이 후진 양성을 위해 1900년경에 건립한 사당이다. 김동진(1867 - 1952)은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1912년 임병찬 등이 조직한 비밀결사 대한독립의군부가 독립군자금의 모집과 국내외 연락 활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연루·체포되어 20여 일 동안 구류 상태에서 취조를 받았다. 1919년 3월 곽종석(郭鍾錫)[1846~1919]·장석영(張錫英)[1851~1929]·김창숙 등이 추진한 유림단의 독립청원운동인 파리장서운동에 참여하여 독립청원서, 일명 파리장서에 서명하였다. 1919년 4월 이후 독립청원운동이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서명자들이 체포될 때 서명 사실이 드러났다. 이 사건에 연루되어 40여 일간 투옥된 상태에서 가혹한 고문을 받기도 했다. 1925년 김창숙이 내몽고 지역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기로 계획하고 자금 20만 원을 모집하기 위해 비밀리에 입국하였다. 이에 김동진은 아들을 군자금 모집에 참여시키는 등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 1926년 4월 2일 김화식(金華植)[1902~1950] 등이 체포되면서 관련자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되었다. 이른바 ‘제2차 유림단의거’였다. 제2차 유림단의거로 1926년 5월 중순까지 관련자 600여 명이 체포되어 40~50명이 기소될 때 함께 체포되었다. 1927년 1월 2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대정8년 제령 제7호 위반 및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대구감옥에 구금되었다가 약 1개월 만에 출옥하였다. 1952년 12월 22일 지금의 영주시 부석면 상석리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김동진의 문집으로 12권 7책의 『정산집(貞山集)』이 전한다. 김동진은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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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봉환 추모비
최봉환(1895 - 1937)은 영주에서 만주 장백현 14도구로 이주하였다. 1918년경 14도구에서 포목상을 운영하며 대한광복단에 군자금은 물론 포목 상점의 취급 품목인 의류 등을 제공하였다. 대한광복단은 1915년 7월 15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결성된 단체로 국권을 회복하고 독립 달성을 목적으로 조직된 무장독립운동 단체였다. 본부 총사령 박상진(朴尙鎭)[1884~1921의 지휘 아래 만주에는 이석대(李奭大)가 부사령으로 임명되었으며, 이석대가 순국한 뒤에는 김좌진(金佐鎭)[1889~1929]이 파견되었다. 12월에는 우재룡(禹在龍)[1884~1955]이 길림(吉林)에서 주진수(朱鎭洙)[1878~1936] 등과 만주 본부의 성격을 갖는 길림광복회를 결성하고 활동하였다. 경상북도 영주 지역의 잡화상 대동상점(大同商店)이 대한광복단의 거점이자 자금 창구의 역할을 하였듯이, 최봉환의 포목상도 만주 장백현과 관련된 대한광복단원의 비밀 모임 장소와 단원들의 활동 자금을 지원하는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활동을 하던 중 1923년 8월 일본군의 습격을 받아 전투 끝에 체포되었다. 최봉환은 국내로 호송되어 1924년 12월 9일 함흥지방법원 북청지청에서 1919년 제령 7호 「공갈·가택침입·방화미수·총포화약류취체령 시행규칙 위반」 혐의로 징역 10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최봉환은 출옥 후 옥고 후유증으로 고초를 겪다가 1937년 7월 6일 4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최봉환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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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학생운동기념비
해당 비석은 1906년 사립흥주소학교로 설립된 이후 1944년 9월부터 45년 4월에 걸쳐 초등학교 학생들에 의해 항일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이 비석은 이를 기리기 위한 목적으로 건립된 것이다. 일본 식민지 통치 말기에 일본인 교장은 학생들을 교육이 아닌 전쟁 물자 생산 및 수집을 위한 노역에 동원했고, 이를 강제하기 위해 폭력을 행사하였다. 이에 분개한 이석한 등 6학년 학생들은 '일본인 교장과 교사는 일본으로 돌아가라'고 외치며 동맹 휴학으로 일본 식민지 통치에 맞섰다. 일본인 교사들은 온갖 협박과 회유를 하였지만, 학생들은 이에 굽히지 않았다. 한편 1945년 4월에는 4학년이던 김낙순이 일본인 교장에 맞서 일본제국주의 교육의 그릇됨을 낱낱이 비판하여 그들의 잘못을 참회토록 하였다. 이에 개교 100주년이 되는 2006년 이를 기리기 위하여 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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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교영 수학터(삼수당)
이교영(1873 - 1911)은 대한제국기 경상북도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한 의병장이다. 1907년에 광무황제(고종)가 강제 퇴위되고 ‘정미7조약’ 체결, 군대 해산 등 일제의 침략이 심화되어 가는 것을 목도하고 1908년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의병장으로 활동하였다. 1905년 ‘을사5조약’, 1907년 ‘정미7조약’ 체결 등 일제의 각종 침략조약에 반대하였고, 일제 침략자들을 이 땅에서 축출해야 한다고 호소하였다. 경상북도 일대를 중심무대로 활동하였는데 1909년 3월부터 1909년 10월까지 순흥군(順興郡) 소천리, 풍기군(豊基郡) 외면 신항리, 고교리 등지에서 일본 수비대, 헌병 순사대와 교전하였다. 이교영은 친일 한인에 대한 응징활동에도 주력하였다. 예천군 미울리의 일진회원 홍갈산(洪葛山)을 총살로 처단하고, 안동군 하암탑리에서도 성명 미상의 한인 밀정을 처단하였다. 군자금 모금활동도 활발히 전개하여 안동, 영천일대로부터 군자금을 거둬들였다. 그러나 이교영은 일본군과의 교전, 친일 한인처단, 장기 항쟁을 위한 군자금 모금 등 다각적인 의병활동을 전개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었고, 1910년 일제 고등법원에서 교수형 판결을 받아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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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구 순절비
이현구(1862 - 1940)는 어린 시절 큰형 이선구(李善求)(1856 - 1922)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1895년 8월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이어, 1895년 11월 단발령이 공포되자 전국 각지에서 이른바 을미의병이 일어났다. 이 무렵 안동 일대에서도 의병 봉기를 촉구하는 통문이 돌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예안통문이 돌면서, 1896년 1월 선성의진이 결성되었는데, 대장은 이만도(李晩燾)[1842~1910], 부장은 이중린(李中麟)[1838~1917], 선봉장은 이인화(李仁和)[1858~1929]가 맡았다. 이때 이현구도 서기를 맡은 이선구와 함께 적극적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현구는 1899년 풍기군 봉현면 이전리(泥田里)[지금의 영주시 봉현면 유전리]로 거주지를 옮겼으며, 한동안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다. 1910년 9월 이만도가 단식 끝에 순절하자,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후 폐양립(蔽陽笠)을 쓰고 죄인을 자처하며 은둔생활을 하였다. 1934년 영주군 안정면 생현리로 이주한 후, 안상봉(安相鳳)·황영래(黃永來)[1897~1922]·김동진(金東鎭)[1867~1952]·황영조(黃永祖) 등 영주 지역 유생들과 도의(道義)로 교유하였다. 1940년 일제의 창씨개명에 항거하여 단식·순국하였다. 이현구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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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흠 묘
김순흠(1840 - 1908)의 자는 치화, 호는 죽포이며, 개항기 을미사변 후 이강년 의진에서 활동한 의병이다. 일찍부터 문명이 인근에 널리 알려져, 1894년 당시 경상감사 조병호(趙秉鎬)가 여러 차례 벼슬을 하도록 권유하였으나 거절했다. 1895년의 명성황후시해사건 이후 각지에서 의병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참여하여 허위(許蔿)·이강년(李康秊) 등의 의병장들과 행동을 같이하기도 하였으나, 의병 해산의 조칙이 내리자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에만 열중하며 10여 년을 보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5적의 매국행위를 규탄하는 「토오적문(討五賊文)」을 지어 전국 유림에 살포하였다. 1910년 일제의 국권침탈 소식을 듣자 비분하여 경학원(經學院)의 강사를 거절하고, “일제의 치하에서 자란 곡식은 먹을 수 없다.”며 단식을 감행,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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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위령비
순국위령비는 영주시 영주2동 438에 위치한 구성공원에 위치하고 있다. 구성공원 내에는 순국위령비 외에도 문화재 자료 제334호로 지정된 반구정을 비롯하여 가학루, 춘수당도 함께 만나볼 수 있다. 나라의 평화와 자유를 위해 고장을 지키시다가 훌륭한 자취를 남기고 돌아가신 분들을 기리기 위해 순국위령비를 세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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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기 집
김승기(1924 - 2017)은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김승기는 대구 대륜중학교 재학 중 교사 이규동(李揆東)과 선배들의 영향으로 항일민족의식을 키웠다. 이에 대륜중학교 4학년 때부터 고향인 영주에서 야학운동을 전개하였다. 졸업 후인 1944년 10월에는 일제가 「국가총동원법」을 구실로 한국의 인적·물적 자원을 강제 동원하고, 또 젊을 청년들을 징병하자, 이를 거부하는 투쟁을 전개하였다. 김승기는 고향 친구 김동태(金東泰)와 함께 징병에 응하지 않기로 맹세하고, 한학자 권상일(權相日)을 비롯한 권춘섭(權春燮)·김혁기(金赫基) 등의 도움을 받아 봉화군 태백산 기슭에 은신처 겸 투쟁 근거지를 마련하였다. 그런 가운데 1944년 10월 20일 자로 일제의 전쟁동원정책에 따라 징병 영장이 발급되자, 동시에 징병 영장을 받은 김두진(金斗鎭)·최갑룡(崔甲龍)·김복경(金福慶)·김혁기 등 청년들과 함께 태백산 거점으로 향했다. 태백산 거점에서 피신해있으면서 동지를 규합하고 자금을 마련하는 데 주력하던 중 1945년 7월 8일 고향으로 잠입했다가 일제 관헌에 의해 검거되었다. 이 사건은 일명 ‘태백산 거점 5인조 사건’이라고도 불렸다. 김승기는 1945년 8월 7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일제 사법 당국에 의해 징역 1년 6개월을 언도받고, 안동형무소와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1945년 8.15 해방과 함께 출옥하였다. 김승기는 1986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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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낙영 집
1920년 8월 9일 영주군 영주면 가흥리에서 「영흥노동야학회」 가 설립되었으며, 영주군 풍기면 금계동에서는 주민들이 주축이 되어 1923년 11월 18일 「금계노동야학」 을 설립하였다. 영주군 이산면에 있던 영주청년동맹 이산지부는 1928년 8월 8일 「신암야학」 을 설립하여 인근 농민들 40여 명이 교육했으며, 김낙영(金洛榮)·김익영(金益榮) 등과 함께 교사로 활동하였다. 우금촌두암고택(友琴村斗巖古宅)은 김낙영(金洛榮)이 살던 곳으로, 김낙영은 1930년 6월 6일 치안유지법위반 대정8년 제령 제7호 위반으로 대구지검에서 징역 10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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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명 기념비
김재명(1885 - 1977)의 이명은 김재명이며, 영주 출신의 의병이다. 김재명은 경북 북부 지역에서 활동하던 의병장 최성천(崔聖天)[?~1910]·한명만(韓明萬)·김상태(金相泰) 등의 지휘 아래 안동·영주·예천 등지를 무대로 의병활동을 전개하며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10년 음력 5월 10일 무렵 의병 십여 명과 함께 총칼로 무장하고 안동군 서후면 이송천동에 사는 김(金) 아무개의 집에 들어가 돈 300냥을 징수하였다. 김재명은 한명만 등과 함께 안동군 남후면 중고동에서 안동재무서 고용인 권영주(權寧周)[당시 29세]에게 의병에 가입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완강히 거부하자 살해하였다. 이어서 1910년 7월 18일에는 최성천 등과 함께 무장한 채, 안동군 임내현면 천전리의 사립 협동학교에 들어가 의병에 협조하지 않는 교감 김기수(金基壽), 교사 안상덕(安商德), 서기 이종화(李鍾華) 등을 살해하고 출동한 일본군과 교전을 벌였다. 김재명은 그날 밤 동료 십여 명과 함께 같은 동리에 거주하는 권용규(權容圭)의 집에 들어가 군자금을 요청하였으나, 가진 것이 없어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하던 중 1910년 12월 지금의 영주시 평은면에서 일본군에 체포되었으며, 12월 23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김재명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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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호, 송재호 집
송영호(1903 - 1968)의 자는 보경, 호는 창주이며,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1925년 3월(음) 북경(北京)에서 김창숙(金昌淑)·김화식(金華植)·이봉로(李鳳魯) 등이 장기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내몽고(內蒙古)지방을 개간하여 그 이익금으로 무관 학교를 설립하고자 계획하였다. 또한 독립군은 둔전제(屯田制)로 양성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계획을 실천하기 위한 군자금 마련을 위해 김창숙·김화식 등이 만두 장사로 변장하여 1925년 8월 국내로 들어와, 충청·경상도 지역의 유림과 부호를 대상으로 20만원을 모금하고자 하였다. 1926년 4월에는 상해로 탈출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고 경북 영주에 있는 본인 집에서 일경에게 붙잡혔으며, 1927년 3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송재호(1906 - 1974)는 1925년 6월 무관학교 설립자금 모집을 위해 북경에서 입국한 제2유림단(儒林團)의 핵심인 형 송영호(宋永祜)와 함께 활동하면서 본인 소유의 논 1,300여 평을 매각한 대금 600원을, 형을 통해 김창숙(金昌淑)에게 군자금으로 송금하였다. 1926년 2월 일경이 형 송영호로 오인하여 붙잡혔으며 심한 고문을 받다가 자살을 기도하였으나 생명은 건졌다. 그후 부인 유임이(柳任伊)도 비명횡사케 되어 더욱 항일의식이 고양되었다. 1927년 9월 영주군의 신간회(新幹會) 영주지회 회원 및 영주청년동맹(榮州靑年同盟) 집행위원으로 항일의 선봉에서 활동하였으며 1930년 3월 7일 일경에 붙잡혔으나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1931년 국내활동이 불가능해지자 중국 동삼성(東三省)으로 탈출, 독립운동의 방안을 모색하던 중 봉천성(奉天省) 안동(安東)에서 일경에 붙잡혀 2개월의 구류처분을 받은바 있으며 서울 팔판동(八判洞) 등지로 이주하며 항일운동을 계속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