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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 3·1의거 기념탑
영양군 청기리의 마을 소개와 3.1운동의 역사, 마을 사람들의 독립 운동과 출신 유공자들을 소개하고 기리기 위하여 세워진 기념탑이다. 2002년 8월 15일 광복절 보훈처, 경상북도와 영양군의 후원으로 만들어졌다. 영양 출신의 오윤승·오석준 등은 고종황제가 갑자기 붕어했다는 소식을 들려오자, 시해당했다고 판단하고 고종의 인산일인 3월 3일에 망곡례를 올렸다. 3·1독립운동이 지방으로 전파되어 가던 중인 3월 17일에는 예안에서, 18일에는 안동 · 영해 · 영덕 등지에서 만세시위운동이 번져갔다. 3월 21일에는 영양 인근의 임동장터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오석준과 오윤승, 유동수, 이원오 등은 영양장날을 기하여 만세시위를 일으킬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24일 저녁 7시쯤 오석준과 오윤승이 주민을 동원하니 삽시간에 400여 명의 주민들이 동원되자 청기면 면사무소 뜰안에서 만세 함성을 터져나왔다. 시위대는 가가호호를 돌면서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할 것을 권유하였다. 3월 25일 영양장날에 시위할 것을 기리면서 해산하였다. 이날의 시위로 167명이 일경에 검거되었다. 세워진 탑의 형상은 우리 민족이 일본의 강점기 동안 억눌린 민족혼을 일깨우고 자주 독립을 위하여 분연히 일어선 독립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표현하였다. 힘차고 강렬한 의지를 불끈 쥔 주먹으로 만족의 기상을 표현하였으며 만백성이 힘을 모아 독립을 쟁취하고자 함을 남.녀.노.소를 상징하는 세개의 주먹으로 표현하였다. 손과 손을 맞잡아 한 몸 한 뜻이라는 의미를 조형적으로 표현하여 서로 파고드는 듯한 손의 표현을 하였으며 줄기찬 기상을 직선적인 선과 면을 이용하여 나타냄과 동시에 역동적이고 힘찬 기상을 표현 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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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석준 묘
오석준(1876 - 1951)은 1919년 3월 25일의 영양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3월 21일 안동군 임동면 편항(安東郡臨東面鞭巷)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주동했던 유동수(柳東洙)·이강욱(李康郁)·홍명성(洪明聖) 등이 이곳으로 와서 입암면 대천동(立岩面大泉洞) 이원오(李元五)의 집에 모여 비밀회합을 갖고, 3울 25일의 영양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기로 결의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곳 일본군 헌병분견소에서는 3월 25일의 독립만세시위 계획을 미리 알고 이날 아침부터 읍내로 들어오는 4개의 입구에 군경을 배치시키고 삼엄한 경비를 하였다. 이날 낮 12시 30분경, 각지로부터 6백여명의 시위군중이 10∼20명씩 무리를 지어 영양읍내로 들어왔다. 이에 일본 군경은 읍외의 2,5km 지점에서 일일이 신체 검색을 하여 되돌려 보내려고 하였으나, 대부분의 군중은 이를 뿌리치고 읍내로 들어와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이날 그도 일본 군경의 만류를 뿌리치고 읍내로 들어와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자 일제는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한 시위군중 중 167명을 금융조합 창고에 가두고 개별적으로 조사한 후 모두 방면하였는데, 오직 그만은 주동자로 검거되어, 이해 5월 19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0년에 대통령표창을,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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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석준 기념관
오석준(1876 - 1951)은 1919년 3월 25일의 영양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3월 21일 안동군 임동면 편항(安東郡臨東面鞭巷)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주동했던 유동수(柳東洙)·이강욱(李康郁)·홍명성(洪明聖) 등이 이곳으로 와서 입암면 대천동(立岩面大泉洞) 이원오(李元五)의 집에 모여 비밀회합을 갖고, 3울 25일의 영양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기로 결의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곳 일본군 헌병분견소에서는 3월 25일의 독립만세시위 계획을 미리 알고 이날 아침부터 읍내로 들어오는 4개의 입구에 군경을 배치시키고 삼엄한 경비를 하였다. 이날 낮 12시 30분경, 각지로부터 6백여명의 시위군중이 10∼20명씩 무리를 지어 영양읍내로 들어왔다. 이에 일본 군경은 읍외의 2,5km 지점에서 일일이 신체 검색을 하여 되돌려 보내려고 하였으나, 대부분의 군중은 이를 뿌리치고 읍내로 들어와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이날 그도 일본 군경의 만류를 뿌리치고 읍내로 들어와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자 일제는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한 시위군중 중 167명을 금융조합 창고에 가두고 개별적으로 조사한 후 모두 방면하였는데, 오직 그만은 주동자로 검거되어, 이해 5월 19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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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상도 추모비
송상도(1871 - 1947)의 자는 성소, 호는 기려자, 미헌, 연파이며, 일제강점기 『기려수필(騎驢隨筆)』을 편찬한 유학자이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워 권상익(權相翊) 등 향내 제유(諸儒)와 교유하였으며, 당세의 명유인 곽종석(郭鍾錫)·전우(田愚) 등을 역방하면서 견문을 넓혔다. 송상도는 경학(經學)보다 사학(史學)에 힘을 쏟아 중국 역대의 사적(史籍)을 섭렵하였을 뿐 아니라 일찍이 조선왕조사의 편찬에 뜻을 두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명나라가 망한 뒤 기려도사(騎驢道士)가 명말(明末) 충신의 사적을 수집하였던 예에 따라, 우리 나라 애국지사의 사적을 편찬할 결심을 하였다. 전국 방방곡곡을 수십년간 돌아다니며 애국자의 유가족 또는 친지를 역방하면서 사적을 기록하는 한편, 사건 당시의 신문과 기타 자료를 수집하여 『기려수필(騎驢隨筆)』을 편찬하였다. 이렇듯 현지답사를 통하여 채록된 『기려수필(騎驢隨筆)』은 당시 항일투쟁의 실상을 알려주는 귀중한 문헌이다. 1986년 건국표창,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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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서 기적비
박인서(1886 - 1957)는 1919년 3월 21일 경북 영주군(榮州郡) 읍내 장날에 일어난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평소 일제 식민지통치의 부당성에 대하여 항일의식이 투철하였던 그는 광무황제(光武皇帝) 인산(因山)에 참례하기 위해 상경했다가 서울에서 3·1운동의 광경을 직접 보고 돌아와 친분이 두터운 오하근(吳夏根)과 함께 만세운동을 계획해 나갔다. 봉화군(奉化郡) 상운면(祥雲面) 내림리(內林里)에 살던 그가 영주 읍내에서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한 것은 지리적으로 영주 읍내가 가까웠던 것도 있지만, 영주 읍내의 장이 컸으므로 만세시위를 크게 일으킬 수 있다는 뜻에서 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3월 21일 영주 읍내 장날을 이용하여 거사하기로 뜻을 모으고, 활동구역을 분담하여 봉화군 일대는 박인서가 맡기로 하고 영주군 일대는 오하근이 맡아 동지 포섭과 만세운동에 필요한 준비를 진행시켰다. 그는 권태중(權泰中)으로 하여금 태극기 15매를 제작케 하는 한편 봉화군 일대의 인사들에게 만세시위 계획을 알림으로써 다수의 동지를 포섭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거사 당일인 3월 21일 오전 11시를 기해 박인서와 오하근 등은 장터로 나아가 미리 준비해 간 태극기를 배포하면서 독립만세를 선창하였고, 이에 따라 수백 명의 군중들이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이에 일본군 헌병은 총검으로 탄압하면서 시위대를 해산하려고 했으나, 박인서 등은 굴하지 않고 시위대를 독려하면서 만세시위를 계속 강행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히고 말았다. 그는 이 일로 인하여 1919년 3월 25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아 공소하였으나 4월 16일 대구복심법원과 5월 8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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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달연 집
금달연(琴達淵, 1874-1914)은 경상북도 순흥 출신이며, 본관은 봉화이다. 1905년 을사늑약이 있자 영주에서 김낙임(金樂任)과 함께 의병을 조직하고,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1907년에는 이강년 의병부대의 중군장 김상태(金相泰)와 연합하여 순흥에 있는 일본 헌병분견소를 습격하는 등 일본군과 접전을 벌였다. 1907년 음력 9월에 이르러 금달연은 이강년 의병부대에 합류하였다. 영주·순흥·풍기·봉화·단양 등지에서 다른 지역 의병들과 연합하여 일본군 헌병분경소와 수비대를 공격하였다. 1908년에는 이강년의 종사부에서 활약하였다. 그런데 음력 9월 19일 이강년(李康秊)이 붙잡히자 김상태와 함께 의병을 수습하고 선봉장이 되어, 영주·단양 일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며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09년 7월 일본군에게 붙잡혀 종신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다 1914년 10월 21일 끝내 순국하였다.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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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승 사당(백산서원)
서재승(1876 - 1915)은 자는 성서, 호는 죽림이며, 대한제국기 을사조약 체결 후 탁지부 주사를 사직하고 군량모집 등의 활동을 전개한 의병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의분을 참지 못하여 탁지부 주사의 직을 사임하고 의병활동에 투신하여 군량모집 등에 활약하였다. 그 뒤 1909년 스스로 의병을 일으켜 수 년간에 걸쳐 항일전을 계속하다가 전세가 불리하여 영주군에 피신하였다. 1915년 친일첩자의 밀고로 붙잡혀 서울로 압송해가던 중 고문을 심하게 받다가, 그 해 7월 기주(基州: 지금의 풍기)에서 총살당하였다.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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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승 묘
서재승(1876 - 1915)은 자는 성서, 호는 죽림이며, 대한제국기 을사조약 체결 후 탁지부 주사를 사직하고 군량모집 등의 활동을 전개한 의병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의분을 참지 못하여 탁지부 주사의 직을 사임하고 의병활동에 투신하여 군량모집 등에 활약하였다. 그 뒤 1909년 스스로 의병을 일으켜 수 년간에 걸쳐 항일전을 계속하다가 전세가 불리하여 영주군에 피신하였다. 1915년 친일첩자의 밀고로 붙잡혀 서울로 압송해가던 중 고문을 심하게 받다가, 그 해 7월 기주(基州: 지금의 풍기)에서 총살당하였다.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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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규 집(조지훈 처가)
이 가옥은 독립운동가 양선 김성규(1904~1946)의 가옥이 있던 자리에 복원해 놓은 것이다. 김성규는 무섬마을의 문운고택에서 김휘걸의 차남으로 태어나 장남인 김호규와는 각별한 우애를 나누며 같은 울타리 안에 집 두채를 지어 함께 살았는데, 큰 홍수로 인해 김성규 가옥이 유실됨에 따라 이곳으로 이사하여 살았다. 그러나 이 가옥마저 잦은 수해와 퐁화를 겪으면서 폐옥이 되어 빈 터로 남아있던 중, 1999년 무섬마을이 경북북부 유교문화사업 대상지역으로 지정되어 김성규 옛 가옥이 다시 복원되었다. 김성규는 일찍이 한학을 수학한 후 서울 중동중학교 본관에서 신학문을 배운 선비로서 일제 강점기에 김화진등 마을 유지들과 함께 무섬마을에 아도서숙을 설립하여 문맹퇴치와 농촌계몽에 힘쓰는 한편 신간회 영주지회 집행위원, 총무간사와 영주 청년동맹 집행위원장을 맡아 지역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28년 8월 일경에 체포되어 금고 8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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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진 집(해우당)
김화진(1904 - 1946)은 1922년 3월 영주공립보통학교 4학년을 수료하였으며, 1924년 5월 일본 도쿄[東京]로 건너가 고무공장에서 노동자 생활을 하였다. 1928년 2월 귀향하여 농업에 종사하기 시작했는데, 귀향 다음 날 영주청년동맹과 신간회 영주지회에 가입하였다. 1927년 11월 24일 조선청년총동맹의 부군청년동맹 결성 방침에 따라 영주청년회와 풍기청년회가 합쳐져 영주청년동맹이 결성되었고, 김화진도 여기에 참여하였다. 1929년 김화진은 영주청년동맹 집행위원 김계등(金季登)[1907~?]과 함께 순흥청년회 해체 활동을 전개하였다. 영주청년동맹 창립 이후 순흥 등 각 면에 지부를 설치하였는데, 해산되어야 할 순흥청년회가 해산하지 않고 영주청년동맹의 활동 방침과 다른 성향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그런 가운데 김화진은 김계등과 순흥청년회 총무 차병섭(車秉燮)을 만나 해산을 압박하였다. 이로 인해 1930년 9월 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죄로 징역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언도받았다. 김화진은 1929년 1월 15일 개최된 신간회 영주지회 정기대회에서 대표회원으로 선임되었다. 1929년 7월 30일 열린 신간회 영주지회 임시대회에서는 집행위원 겸 대표회원으로 선정되었다. 1929년 영주 지역에서 한해(旱害)가 발생하자, 구제연설회가 결성되었는데, 이때 김화진은 서대(西隊)에 편성되어 영주군 풍기면와 순흥면을 맡았다. 1929년 6월 신간회 영주지회가 영주 읍내에서 과자 행상을 통해 운영비를 마련할 때, 평은면과 문수면을 대상으로 한 제3대에 편성되었다. 1929년 3월 풍기농우동맹이 해산되고 영주농민조합이 결성될 때 김화진은 검사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영주농민조합은 금계와 이산에 지부를 설치하고, 단일 농민조직 체계를 갖추어 나가면서 2,352명의 조합원을 확보하였다. 김화진은 1931년 9월 김봉호(金鳳鎬)[1884~1950]·김계등·박병성(朴炳星)[1904~?]·정규찬 등과 함께 농민운동과 반제동맹을 전개하기 위한 비밀결사를 조직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1932년 4월 영주공산주의자협의회를 조직에 참여하였으며, 김화진은 김계등·김준상(金俊相)[1910~?]과 함께 혁명적농민조합 조직을 맡았다. 영주공산주의자협의회가 조직하려는 혁명적농민조합의 목적은 노동자·농민에 의한 독재 정부 수립에 있었다. 그런 가운데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키자, 영주공산주의자협의회는 이를 일본 제국주의 몰락의 시작으로 확신하면서, ‘출병 반대’, ‘제국주의 전쟁 반대’, ‘소비에트 러시아 사수’, ‘중국혁명 지지’ 등을 강조해 나갔다. 1932년 7월경 영주공산주의자협의회의 활동을 예의주시하던 경상북도경찰부 고등과 형사와 영주경찰서 및 봉화경찰서 경찰에 의해 김화진 등 100여 명이 검거되었다. 1933년 12월 2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을 언도받고,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었다.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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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서숙
아도서숙은 일제 강점기에 무섬마을 주민들이 계몽 활동과 항일 운동을 벌인 근거지였다. ‘아도’는 아세아 조선의 섬인 수도리를 뜻하며 ‘서숙’은 서당을 의미한다. 1928년 10월, 이 지역 항일운동 지도자인 김화진 선생의 주도로 무섬마을 청년들이 대중의 모임 장소인 공회당을 세우고 모임·배움·단결을 기치로 아도서숙을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아도서숙은 당시 사회 분위기가 봉건적·억압적이었지만 파격적으로 열린 교육을 실시하였다. 신분 계급과 남녀노소에 관계없이 배울 수 있었고, 학급 편성은 오전·오후·야간반을 두어 학생들이 가능한 시간에 와서 배우고 자유롭게 토론하도록 하였다. 주로 민족 교육과 문맹 퇴치 및 신문명 교육, 농사 기술 교육 등을 실시했으며, 새끼를 꼬거나 멍석을 만들면서도 수업에 참여해 배울 수 있도록 하였다. 또 학생들의 단결심 고양과 체력 향상을 위해 강변 백사장에서 축구 같은 운동도 자주 즐기도록 했다. 농사일이 바쁘지 않은 겨울철에는 제한 없이 학생을 수용하였다. 아도서숙은 9명의 운영위원회를 두고 이 같은 교육 체제를 유지했다. 운영위원이었던 김화진, 김종진, 김성규, 김종규, 김계진, 김명진, 김광진, 김희규, 박찬하 등은 모두 영주 지역 사회운동의 핵심 인물들이기도 했다. 이들은 줄기차게 항일운동을 전개했으며, 수시로 체포되어 구류·투옥과 고문을 당하였다. 또한 광주학생운동에 호응하는 격문 의거가 있을 때에는 무섬마을의 부녀자들이 아도서숙의 호롱불 밑에서 밤을 새워 태극기를 만들기도 했다. 1931년 9월에는 일경 1개 소대가 몰려와 무섬마을 청년 18명을 체포하여 굴비처럼 한 오랏줄에 엮어 외나무다리를 건너 압송하기도 했다. 온갖 탄압에도 무섬마을 주민들이 굴복하지 않자 일제는 1933년 7월, 아도서숙에 불을 질러 5년 만에 강제로 폐쇄하였다. 아도서숙은 이 지역 항일운동의 특징적 역사를 잘 말해 주는 뜻깊은 장소이다. 현재 건물은 원래 자리에 고증을 거쳐 복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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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준 묘
김용준(1873 - 1932)은 1919년 4월 9일 영주군 풍기면 성내동의 풍기장터에서 열린 풍기면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였다. 풍기면 만세시위운동은 안용호(安容鎬)[1884~1942]·최성원(崔盛源)[1894~1926]·남영진(南永鎭)[1894~1920]이 계획하고 주도하였다. 이들은 일제의 식민통치에 불만이 커지고 있을 때 전국 각지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자신들도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뜻을 모았다. 장소는 인근에서 가장 사람이 많이 모이는 풍기장터로 정하였으며, 1919년 4월 9일 장날 거사하기로 약속하였다. 김용준은 이들의 계획을 미리 알고 1919년 4월 9일 오후 3시 30분경 안용호 등이 주도하는 만세시위운동에 나가 참여하였다. 김용준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크게 외쳤다. 이때 순찰 중이던 풍기주재소 일본 헌병들이 달려와 안용호·최성원·남영진 3인을 주동자로 붙잡아 주재소로 끌고 갔다. 김용준은 이 모습을 보고 시위 군중 50여 명을 선도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주재소 입구 동남쪽으로 행진해 갔다. 주재소 앞에 이르러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치자 안용호 등을 붙잡아 간 일본군 헌병과 수비병들이 다시 달려 나왔다. 이때 김용준은 같은 마을의 황정흠(黃鼎欽)[1889~1955]·황정흠(黃政欽)[1881~1949]·남상필(南相弼)[1891~1972]·이화백(李和伯)[1884~1968]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김용준은 1919년 4월 19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태 90도를 받고 풀려났다. 1995년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다.